일토장정90-2 (2024. 4. 13) 연천군
9.9km (서해 : 845.6km, 남해 : 817.7km, 동해 677.1km 누리 322.5km 합계 : 2,662.9km)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와초리 - 상리 - 현가리 - 군남면 옥계리)
연천에서 잠을 자고 바로 다시 배고픈 다리로 돌아와 장정을 시작한다.
차탄천을 따라 와초리로 들어선다.
와초리는 군 생활 중 본부가 있던 곳이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다.
대광리 신병교육대에서 6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7명의 동기가
더플백을 메고 이곳으로 왔다.
일반 보병과는 다른 특수부대라고 했다.
자대에 와서 처음 했던 일은 대민 지원을 나가 모를 심는 거였다.
지금 걷고 있는 와초리 일대의 논은 거의 다 모를 심어봤다.
3년을 모를 심었더니 제대할 무렵에는 손톱이 세모로 닳아 질 정도로 많이 심었다.
그곳을 지금 지나간다.
와초리 마을 뒤편 차탄천은 여름이면 반바지 차림으로 나와 목욕을 하던 곳이다.
또 차량 검열이 있기 전 이곳에 와서 세차를 했었다.
물론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그곳을 지금 지나간다.
차탄천 넘어 지금은 도로가 개설된 부분은 훈련을 위한 표적판이 돌아가던 곳이다.
짚 차위에 표적판을 올려놓고 운전병은 좌우로 천천히 달리고
표적판을 돌리는 사람은 방향이 바뀔 때마다 표적판을 180도 돌려주던 곳이다.
밤나무가 많아서 가끔 밤을 주워 먹기도 했고
비릿한 밤꽃 향기가 퍼질 때는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추적훈련을 어렵게 해서
엄청나게 뺑뺑이를 돌기도 했다.
그곳을 지금 지나간다.
신망리역이 있는 신망리에 도착했다.
신망리도 행정구역상 신망리는 없고 이곳은 연천읍 상리이다.
철길을 따라가니 신망리역이 있다.
휴가를 갈 때면 이곳에서 기차를 타고 성북역까지 갔었다.
기차가 들어오면 “띵강띵강” 하는 소리와 함께 차단기가 내려가고
잠시 마을 전체가 기차역을 변하는 그런 곳이었다.
아마도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작은 역이 아닌가 싶다.
아직도 집으로 가는 설렘이 이곳에 남아 있어 가슴이 아련해진다.
그곳을 지금 지나간다.
신망리역사 뒤로 평화누리길은 이어진다. 이제 현가리다.
토우 미사일은 1년에 한 번 큰 행사를 치른다.
가을이 되면 인근 사단에 있는 다른 토우부대와 경연대회를 한다.
1년 내내 그 행사를 위해 모든 훈련 일정이 짜여진다.
그 경연대회의 꽃은 당연히 마지막에 있는 미사일 사격이다.
졸병은 미사일 사격을 꿈도 못 꾸고 고참이 되어서도
자체 경쟁을 통해 최우수 사수를 가려 딱 한 사람만 경연대회에 나간다.
나는 최우수 사수가 되지는 못했지만,
마지막 경쟁까지는 가서 미사일을 3기나 사격해 보았다.
3km 전방에 있는 폐전차와 이동표적 그리고 야간사격을 했었다.
명중률은 정말 대단하다.
하지만 나는 1기를 놓쳐 최우수 사수는 되지 못했다.
물론 장비 결함으로 판명되어서 다행이긴 했지만
지금도 그 순간의 당혹감은 잊히지 않는다.
그곳이 바로 이 현가리다.
장정은 현가리와 옥계리의 경계인 산등성이를 지나간다.
지금은 너무 편안하고 아늑한 산길이다.
산 밑에는 벚꽃이 만발하다.
만발한 벚꽃 위를 지금 지나간다.
벚꽃잎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산을 내려와 옥계리 마을에 도착했다.
옥계리 마을을 지나 평화누리길 어울림 센터에 도착하여
길고 길었던 평화누리길 12코스와 내 군 생활의 추억을 끝낸다.
이틀 동안의 장정은 평화누리길 12코스 통일이음길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내 인생 가장 힘들고 괴로웠던 고난의 행군길이었다.
난 아직도 가끔은 다시 군 입대를 해야 한다는 꿈을 꾸다가 벌떡 일어난다.
이 꿈은 나만 꾸는 것은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군대를 다녀온 남자라면 모두 꾼다고 한다.
그만큼 힘들었고 괴로웠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가끔 만나는 입대 동기 친구들은 지금 만나도
몇 시간을 군대 이야기만 한다. 즐거웠던 이야기는 거의 없다.
시퍼렇게 젊었던 그날들의 힘든 이야기를
이제는 웃으면서 할 수 있다.
“단결 하면된다”
첫댓글 군 시절 내가 걸었을 그 길이 도대체 어디가 어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