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기독교 예술사 고대 기독교 예술 속 십자가 상징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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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09.08. 02:56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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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기독교 예술사
고대 기독교 예술 속 십자가 상징의 흔적
문학적인 측면에서 십자가가 언급되는 것과는 별도로 시각적으로 십자가의 다양한 상징들이 만들어지는 것이 언제부터인가를 질문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히(X)와 이오타(I)의 합성문자는 이미 3세기 후반경에 로마의 지하묘지에 존재했음을 말했다. 또한 히(X)와 로(P)의 크리스토그램은 4세기 초반의 콘스탄티누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반면 십자가는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초반에 교회 예전을 위해서 사용되지만, 이 시기에 십자가가 회화적으로 재현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남아 있는 십자가 상징은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후계자들이 발행한 로마 제국의 주화에서 최초로 확인된다.
매든(Madden)은 317~323년경 콘스탄티누스 2세가 발행한 주화에 대해서 설명을 남겨 놓았다. 주화 앞면에는 ‘CONSTANTINUS IUN(ior) N(oster) C(aesar)’라는 문구와 함께 콘스탄티누스 2세의 흉상(胸像)이 그려져 있고, 뒷면에는 ‘VICTORIAE’ 문구 아래에 화관이 있는데 그 화관 속에는 받침돌 위에 십자가 표시가 주조되어 있다. 십자가 모양은 사방의 길이가 같은 +형태로 되어 있다.1) 도판 7-5는 5세기 초반 갈라 플라키디아가 발행한 금화의 뒷면이다. 화관 속에 받침돌이 있고 그 위에 네 끝 부분이 보다 넓은 십자가가 놓여 있다. 콘스탄티누스 2세가 발행한 주화의 모습이 어떤지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7-5. 화관 속의 십자가
갈라 플라키디아의 금화 뒷면 1.48g, 5세기 초반, 파리 국립도서관 주화실
콘스탄티누스가 312~323년에 발행한 것으로 논쟁을 불러일으킨 주화가 있다.2) 이 주화의 앞면에는 ‘IMP(erator) CONSTANTINUS P(erpetuus) F(elix) AVG(ustus)’라는 문구와 함께 콘스탄티누스 1세의 흉상이 제시되어 있다. 주화의 앞면에는 특별히 새로운 것이 없다. 주화의 뒷면이 보다 큰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교적인 동기와 기독교적 상징이 함께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화 뒷면에는 ‘SOLI INVICTI COMITI’라는 표현이 둘레에 표시되어 있다. 왼쪽에는 네 개의 끝부분이 보다 넓은 형태의 십자가가 있고 오른쪽에는 여덟 개의 광선으로 빛나는 별이 표현되었다.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여섯 개의 광선이나 여덟 개의 광선으로 빛나는 별을 표현한 주화는 많이 있다. 사방의 끝이 보다 넓은 십자가는, 비록 후대의 것이지만 도판 7-5에서 예시한 바를 참조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문제는 ‘동료인 무적의 태양에게(SOLI INVICTI COMITI)’라는 표현과 십자가가 주화의 뒷면에서 동시에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무적의 태양(Sol Invictus)은 3세기에 본격적으로 숭배되었고 로마 제국의 통치자들은 무적의 태양신을 제신(諸神)들의 상위에 놓곤 했다. 태양신과 십자가를 주화에서 함께 표현한 것을 놓고 콘스탄티누스가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11~12세기의 로마 역사가인 조나라스(Zonaras)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헬리오폴리스라는 도시에서 태양신의 상(像)을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다음 머리 부분을 자신의 머리로 바꾸었고 위의 주화에 써 놓은 문구와 유사하게 ‘SOLI INVICTO AETERNO AVG(영원한 아우구스투스인 무적의 태양에게)’라는 표현을 제시해 놓았다고 한다. 조나라스의 보도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는 이를 통해 태양신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어떤 주화에는 태양신이 콘스탄티누스에게 왕관(王冠)을 씌워 주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는 콘스탄티누스 스스로가 왕관을 직접 쓰는 이미지도 있다.
종합하면 콘스탄티누스는 태양신을 자신과 동일시하기도 했지만, 자신을 태양신의 동료로 표현하기도 했다. 콘스탄티누스가 진정으로 기독교인이었는가 아닌가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지만, 필자는 콘스탄티누스의 종교성에 대한 기독교식의 흑백논리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교 시대와 기독교 시대를 연결하는 중간적 시기를 스스로 열고 살아갔던 인물이다. 이교를 여전히 인정하기는 했지만 전통종교에 대한 입장은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의 계승자들, 특히 콘스탄티우스 2세의 경우는 이교 세력을 의지하여 왕위를 찬탈한 마그넨티우스(Magnentius) 때문에 더더욱 이교에 대해서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인으로서 교회를 건축하고 성직자와 교회에 대한 특혜를 베푸는 등 기독교 신의 은혜에 보답했지만 이런 방식의 신앙은 이교적 관습의 잔재였을 뿐이다. 과연 콘스탄티누스의 내면과 양심이 기독교화되는 데에까지 이르렀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보다 면밀한 조사가 필요할 것이다. 필자는 태양신의 문구와 십자가가 동시에 표현된 문제의 주화에서, 이교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서막과 함께 기독교 시대의 서막을 열었던 모순된 흐름의 매개자로서 콘스탄티누스 시대가 안고 있던 시대적 고민을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317~323년 사이에 리키니우스 1세가 AQ S, 즉 아퀼레이아(Aquileia Secunda)에서 발행한 주화 중에 십자가가 표시된 것이 있다. 십자가의 가로축은 짧고 세로축은 보다 긴 일명 ‘라틴 십자가’ 형태이며 세로축의 밑 부분에 ‘VOT XX’라는 문구가 있다.3) ‘VOT(is) XX’은 20년을 더 통치하기를 기원한다는 기원의 표현이다.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역사가인 에우세비오스가 보도한 것처럼 리키니우스(Licinius)가 기독교에 대해서 극도의 반감을 갖고 있었다는 진술과는 달리, 이 주화는 리키니우스의 친기독교적인 측면을 암시해 준다.
콘스탄티누스 1세와 2세가 아퀼레이아에서 발행한 것 중 3종의 주화에는 T 자의 꼭대기 부분이 동그란 형태의, 일명 앵커 십자가 형상이 새겨져 있다.4) 십자가는 두 명의 병사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데, 두 명의 병사들이 묘사되는 유형은 크리스푸스(Crispus)가 처형되던 326년 이후에만 나타난다. 아울러 콘스탄스(Constans)가 카이사르가 되어 아퀼레이아 지역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333년이지만 콘스탄스에 대한 암시가 주화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이 유형의 주화들은 333년 이전에 발행된 것으로 보인다. 종합하면 앵커 십자가가 들어 있는 3종의 주화는 모두 326~333년 사이에 발행된 것으로 보인다.
7-6.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금화
4.38g, 364-375년, 파리 국립도서관 주화실
도판 7-6은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안티오키아에서 발행한 주화이다. 발렌티니아누스는 오른손에 십자가 모양의 군기를 들고 있다. 왼손에는 승리의 신이 놓여 있는데 승리의 신은 구(球) 위에서 발렌티니아누스에게 월계관을 씌워 준다. 십자가 군기 옆에는 로(P)에 가로획을 그은 합성문자가 있는데 4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몇몇 사본에서 이런 합성문자가 발견된다.5) 콘스탄티누스는 335년경 안티오키아에서 이 유형의 합성문자가 들어간 주화를 발행했고 리옹과 아를르에서도 같은 유형의 합성문자가 들어간 주화를 발행한 바 있다.6) 도판 7-7은 테오도시우스 2세가 5세기 초반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발행한 금화이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보좌에 앉아 있는데 십자가가 놓여 있는 구(球)를 오른손에 들고 있고 왼손에는 기다란 모양의 들고 다니는 십자가를 쥐고 있다. 보좌 뒤에는 황제권을 상징하는 왕의 홀이 있으며 그 옆에는 별이 빛난다.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시대 이후로는 일반적으로 금화나 은화에 승리의 신이 십자가가 놓여 있는 구(球)를 들고 있는 장면이 주조되었다.7) 매든(Madden)은 312~337년까지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후계자들이 발행했던 주화에 나타난 다양한 십자가 상징들을 망라해서 정리해 놓았다.
여기에서 일일이 모든 상징을 소개할 수는 없지만, 이미 이 시기에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합성문자의 형태는 물론 다양한 십자가 형태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갈라 플라키디아의 금화에서 보는 것처럼 보석으로 장식된 십자가는 출현하지 않지만 콘스탄티누스 시대 이후의 대부분의 십자가 형태는 이미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출현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도판 7-8]. 십자가 상징만 보아도 콘스탄티누스의 통치 시기는 기독교 시대의 서막을 연 시대였다는 것을 익히 알 수 있다.
7-7. 테오도시우스 2세의 금화
408-450년, 콘스탄티노플, 파리 국립도서관 주화실
7-8. 갈라 플라키디아의 금화
4.36g, 콘스탄티노플, 파리 국립도서관 주화실
확실히 4세기는 십자가의 시대였다. 콘스탄티누스가 환상 중에 보았고 군기로 만들었던 ‘정치적인’ 혹은 ‘군사적인’ 승리의 십자가 외에도 예루살렘의 감람산 위에 십자가가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다. 예루살렘의 키릴리오스(315년경~387년)는 예루살렘에 나타났던 십자가에 대해서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써 보냈다.
“거룩한 유월절 날인 오월의 제7일 중 약 삼 시경에 빛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십자가가 거룩한 골고다 위의 하늘에 나타나서 거룩한 감람산 꼭대기에까지 펼쳐졌습니다. 이것은 단지 한두 사람이 아니라 놀랍게도 도시 전체가 보았습니다. 이는 금방 사라지는 영상이 아니었습니다. 몇 시간 동안이나 우리는 땅 위에서 그것을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 빛이 눈부셔서 햇빛을 가릴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오! 황제이시여! 선지자와 복음서에 적힌 그리스도의 거룩한 말씀에 합당하게 이 기적은 지금 이루어졌고 언젠가 보다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구원자는 복된 사도들에게 다가올 것을 알려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하늘에 인자의 표적이 나타날 것이다.’”8)
키릴리오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보았던 십자가는 2세기 기독교 문학에서 자주 그려진 것처럼 움직이는 십자가가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거대한 십자가였다. 예루살렘의 키릴리오스는 이 십자가의 환상을 그리스도 재림의 전조로 이해한다. 이런 영광의 십자가는 역사적인 예수와 연결된 것이 아니라 역사와 우주의 완성자로 마지막 때에 오시는 종말론적 그리스도와 연결된다. 라벤나의 클라세에 있는 산 아폴리나레 교회의 종말론적이며 우주적인 십자가는 변모산의 역사적 예수의 변형을 주제로 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이런 메시아적 대망에까지 그 의미가 닿아 있다[도판 1-23, 1-24, 1-25]. 마찬가지로 갈라 플라키디아의 기념묘실의 천장 모자이크화도 종말론적인 대망을 표현해 주고 있다[도판 5-2].
1-23. 예수의 변모
산 아폴리나레 교회, 540-560년, 라벤나의 클라세
1-24. 예수의 변모(도판 1-23의 세부)
산 아폴리나레 교회, 540-560년, 라벤나의 클라세
1-25. 십자가에 새겨진 예수의 얼굴(도판 1-24의 세부)
산 아폴리나레 교회, 540-560년, 라벤나의 클라세
5-2. 우주의 중심에 있는 십자가
5세기 초반, 갈라 플라키디아의 기념당, 라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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