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상] 아차산 해맞이 광장 / 권수진
아차산성길 따라
만삭의 하늘이 산통을 겪는 동안
수많은 인파는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하네
하늘로 치솟는 거대한 불덩이를 향해
저마다 소원을 빌면
녹음이 짙은 나무는 붉게 물들고
정상에서 부는 바람이
새로운 난생 신화를 받아 쓰네
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장엄한 광경을 두고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볼수록
가슴 벅찬 감동이 차오르네
무수한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산고를 끝낸 눈 부신 햇살
영롱하게 반짝이는 밝은 미래가
파도처럼 밀려오네
더는 오를 수 없는 산 정상에서
어둡고 힘겨웠던 지난날 바람에 날리며
새로운 꿈에 부푼 사람들이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네
[은상] 아차산 / 전문구
봉우리에 피어난 넓은 소리
굳은 지식과 합하여 들리는
깊은 속을 허무는 역사
주먹과 통곡의 바위에 각인된 사랑은
풀어 감춘 범굴사梵窟寺의 어울림
두 개의 접점이 맞닿아
심상의 비등점을 찾는다
극한 밀리리터의 차이에
갈라지는 흐름은
쌀바위 가슴 막에 꽂혀
성벽이 녹아내린다
백악지장百樂之丈 거문고의 기상을
휘감아 도는 광나루 속의 연주
끊는 애간장으로 녹아든 기상에
옷고름 역어 지켜온 산
남행으로 한없이 끌려들어
꿈을 이어주는 한 마리의
학이 날개를 편 펄럭임에
진동은 감긴 산에도 울림이 든다.
[동상] 아차산의 서사 / 성백광
품속 깊은 암릉 위에 아로새겨진
고요한 예인의 필치와 같은 전설이
바람결에 깃든 묵언으로 남아
잊힌 이들의 눈물과 웃음이 사무치고
저녁노을의 비취색 슬픔이 내려앉으면
그대는 거대한 어머니의 품이 되어
성곽의 흔적마저 따스하게 감싸 안고
백제와 고구려의 숨겨진 속삭임을
별처럼 빛나는 밤에 풀어놓는다
흐르는 강물은 굳건한 가슴에 입 맞추고
수천 번의 계절을 불러내어
잎새마다 시간의 파문을 새기며
새벽의 옅은 안개 속에 영원의 향기를 남긴다
아차산, 너의 푸르른 나래 아래
고요한 역사의 깊은 강이 흘러
누런 잎새 흩날릴 때마다
황혼에 물드는 오래된 절벽과 바위는
옛 왕국의 무게를 간직한 채
시간을 꿰뚫어 보는 신비의 눈으로 빛난다
장대한 시간의 발끝이 닿은 길목에
강산을 주름잡던 왕들은
불사의 신화와 꿈을 지녔으리라
돌 틈에 스며든 숨결, 묵직한 바람의 곡선 속에
잊힌 용맹의 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면
붉은 태양 아래 역사의 수레바퀴는
낡은 시간의 피로를 빚어내듯 무겁지만
그토록 오랜 시절 별빛이 스며든
밤하늘은 무수한 이야기를 품었으리라
고요한 강물이 적신 돌길
바위의 주름살에 수천 년의 속삭임을 담아
오늘도 다가온다, 저물지 않는 찬란한 아침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 너머로 계속될 이야기가
[동상] 징글맞을 배암을 목도리마냥 두르고 / 김회권
징글맞을 배암을 목도리마냥 두르고 연습했다는
이 나라 명궁(名弓)들의 소문이 세상 파다하게 떠돈 날
인력소를 공친 나는
검푸른 빛 감도는 아차산성에 올라
나뭇잎처럼 앉은 두루미를 본다
멀리 가까이 처연히 우뚝 서서
내 한 번도 겨냥 못한
과녁, 그 허연 낮달을 향해
긴 목 젖혀 날갯죽지에서 검은 화살
휘익 뽑아 든다
고구려 온달 장군이 장렬히 싸웠다는 아차산
높은 성벽 위 진을 치고
적진을 향해 무수히 화살 쏘아댈 때
골짝 파고드는 함성과 거친 신음
꿈틀대던 아리수 용솟음치며 콸콸 흘렀으리라
숨어 피던 진달래 화들짝 놀랬으리라
내 예전 뒤틀리고 성난 마음에 시위하며
무방 쏘아댔던 빗나간 화살
목젖 벌릴 때마다 뜻도 의향도 없이 날아가
뉘 시린 가슴에 상처 되고 눈물이 되고
더러 내 심장에도 꽂혀
아파 아파라 했던
세 치도 아니 될 붉은 혀
그 혀 무장 섬뜩하니 오금 저리나
밤낮 무고와 교란을 꿈꾸며
쓰으윽, 쓰으윽
입술 닳도록 허옇게 혀를 간다
차라리 아차산 숲속에 날아든 새들마냥
진종일 입 벌려 노래할 수 있다면
아니, 아예 말은 못 해도
인정의 빛깔로 피고 지는
무명의 들꽃이었으면
오늘도 예사로 무시로 솟구치는
입속의 붉은 혀
그 혀 무서워 차마 입 여닫을 수 없다
당장 차돌 하나 집어
더는 두고 볼 수 없게 최후의 일격 가해야겠다
[동상] 아차산 한 소절 / 이생문
길목마다 부려놓은 가파른 숨소리에
할 말 많은 옛날이 길안내를 서두른다
전설은 속삭이며 거친 숨을 달래고
여러 색깔의 웃음소리 숲을 곱게 물들인다
아직 온전히 놓을 수 없는
산성 곳곳 허물어진 백제의 꿈
적의 발자국소리를 까치발로 듣고 있는데
보루를 지키는 고구려의 기상은 깃발보다 펄럭이고
쌓아올린 성벽마다 피와 땀에 바랜 흔적 누렇다
아슬아슬한 암벽에서 가부좌 틀고 정진하는 범굴사
풍경이 읊는 법문 소리에 산새들의 마음 경건하고
미소로 답하는 부처
오른손으로 바람을 젖히며 왼손에 든 자비를 내민다
뼈와 살을 깎아내는 석탑의 묵언 수행
수천 년 미래로 나아가는 불성을 키운다
온달의 맹세 품에 안은
평강의 가슴 아직 고구려정에 뜨거운데
신라를 넘지 못한 화살의 가쁜 숨소리 애통하다
한강이 띄운 여명 바라보며
손가락 발가락 장단으로 어깨춤 그윽한 소나무
왕숙천 중량천이 마주보며
함께하자 손짓한다
정상에 올라 구름을 젖히면
하늘에 비친 내 마음도 푸르고
소음에 지친 고요가 촉촉이 스미는 곳
세상 번뇌 서둘러 숲속에 털어내는 사람들
[심사평]
시를 창작함에 있어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독자와의 소통이다. 그러나 해가 거듭 할수록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시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생각은 금할 수가 없다. 시의 구조와 전개가 모두 잘 되었다 하더라도, 결국 그 모든 이야기가 자기 자신만의 이야기로 귀결되고 독자들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면 좋은 시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올해의 아차상 문학상은, 아쉽게도 대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았다. 수많은 응모작 중에 권수진은 표현의 형상화 면에서 의미호응 관계가 매끄럽고, 리듬감 있는 언어로 은유적 아우라를 만들어 눈에 띄었다. 시퀀스의 자연스러운 언술, 그리고 그 문맥이 끌고 가는 힘이 화자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이게 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어 금상으로 결정하였다.
전문구는 소재와 관념을 유연하게 넘나드는 언어 구사가 돋보인다. 그러나 여러 시적 언술들이 하나의 유의미한 질문으로 완성되거나 어떤 유기적 의미망으로 입체화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소통과 감동 면에서 약간 멀어져 은상으로 결정하였다.
그 외에 성백광, 김회권, 이생문이 동상에 선정되었다. 이들은 치열한 시적 사유가 잘 드러나 있고, 역사의 숨결을 감각적으로 끌어올려 실감있게 그려냈지만, 전체적으로 묘사에 치중한다는 느낌을 받아 동상으로 결정하였다.
수상한 시인들 모두 축하드리며, 오늘 수상에 들지 못한 많은 분들도 꾸준히 노력하여 큰 시인이 되라고 아낌없는 격려의 말을 전한다.
- 심사위원 : 평론가 박호영 , 문학박사 김영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