稷川書院重建記 직천서원중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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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명성이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는 것과 만물이 흥하거나 사라지는 것은 진실로 운수가 있다, 정중하게 생각을 해 보면 수암 정선생께서는 자태와 품성이 아름답고 뜻은 오히려 바르며 절개는 확실하게 지켜 몸소 실천을 하셨으니 독실하도다, 또 장여헌 선생을 의지하여 유학자의 길을 걸었는데 어찌 가히 헤아릴수 있으랴, 시골에 숨어 살아도 여러 차례 왕의 부름을 받았지만 나아가지 아니하였지만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 사랑의 정성은 늘 글을 읊는 그 사이에서 찾을 수 있다, 또 세상도 과연 잊어버리지 아니하였으므로 장선생께서는 장래를 기대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주자,정자의 문하생인 직향(直鄕) 정부(定夫)와 다를 바 없었다, 불행스럽게도 고치지 못할 병을 만나 하늘도 수명을 연장시키지 못하였으니 어찌 천고의 아픔이 아니겠는가,
돌아가신 뒤 몇 世가 못되어 공을 아는 이들이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여 영원히 살아지지 않도록 하려고 입암서원에 배향을 하다가 사태의 변고로 인하여 직천으로 옮겨 봉안을 하였다,
불행스럽게도 또 나라에서 서원철폐령을 내려 금지 시키니 남아있는 옛터는 황무지가 되어 잡초가 무성하여 졌고 후손들의 마음은 슬픔과 울분에 쌓이게 되었다, 지금부터 사십여년전 기묘 1939년에 우황으로 옮겨 서원을 고쳐 이룩하였다,그르나 세상의 파란만장과 가문의 상전벽해(桑田碧海)로 종잡을 수 없는 빠른 변화를 따라 그리움이 깃든 정성을 펼치지 못하였다,
이즈막엔 또 지각의 변동으로 경주 북쪽 안강 대동에 있는 괘라산(掛羅山) 신좌의 동산으로 체백(體魄)을 옮겨 장례를 지냈다, 또 묘 밑에 얼마 안되는 곳에 서원을 짓고 직천서원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주염계(周廉溪)가 살던 도주(道州)에는 염계라는 이름을 달았고 연화봉 아래의 주부자(朱夫子)는 무안으로 옮겨 숭안서당에 자양 이라는 현판을 달았는데 이런 뜻을 모방한 것이다,
아아! 세상이 이러쿵 저러쿵 변화하는 까닭에 유학자들은 잠깐 나타났다가 곧이어 사라지기를 몇 번인지 알지 못한다, 체백은 옮기고 서원을 함께 이 땅에 건축하는 것은 혹시 공께서는 하늘에 계시고 영혼은 땅에 계시니 틈이 나서 그런것은 아니리라, 유도는 무너졌으나 빛은 발하고 있으서 산천에는 채색이 짙어지고 본손들은 쌓인 울분을 펼쳤다, 그 위치는 앞은 양지이고 뒤는 그늘이며 산수의 경치는 아름다우니 진실로 책을 읽고 학문을 힘쓰는 장소로 적합하다고, 하겠다,
남쪽을 바라보면 朴.昔.金.삼성이 전수된 옛 서울이고 서쪽은 우뚝한데 백세 존앙의 옥산서원의 살아있는 물, 네모진 연못이니 가히 근원의 모퉁이에는 저절로 산이 높은 칠보인 줄 알리라, 호연(瑚璉)의 장소는 없으리라, 보인(輔仁)으로써 양정재라는 집을 지으니 선생께서 평소에 공부하실 때 친구에게 정을 길러 仁을 도우라고 하던 뜻이다, 문은 비덕(備德)이다, 여헌 선생의 묘비 가운데 행전비덕(行全備德)이란 뜻에서 선택하였다, 이제 낙성의 날을 겸하여 욕의(縟儀)의 의식을 거행하지만 지난 날의 현회(顯晦)나 흥폐는 알지 못한다, 이것은 오늘날 유학자의 품성을 자아내는 시초이리라, 이 집에 올라 선생의 학문을 강론하는 자는 본손이다, 능히 망추의 계율을 생각하고 사림은 능히 부도(扶道)의 책임을 져야하며 선생의 학문으로 하여금 후세에 영원히 전하게 한다면 어찌 유학자들의 행복이 아닐까? 그것을 각각 힘쓸지니라, 찾아와서 중건기를 청한 사람은 후손인 文洛. 載鉉.淵興이다,
무오년 1978년 섣달 하순 여강 李錫晋은 삼가 記한다,
주
1.현회 = 세상 사람에게 알려짐과 알려지지 아니함,
2.권여 = 사물의 시작, 시초, 싹틈,따위,
3.남월 = 음력 섣달,
4.상전벽해 = 뽕나무 밭이 변해 푸른 바다가 됨, 즉 세상의 모든 일이 변천이 더하고 심함을 비유하는 말,
5.체백 = 죽은지 오래된송장 또는 땅속에 묻은 송장,
6.염계 = 북송의 학자 주돈이(周敦이)의 이름,
7.도주 = 도현 지금의 호남성에 있음,
* 직천서원 신도비문은 소헌아재 희영님이 지어서 비가 세워져 있다,
직천서원은 안강 대동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