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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일기 해제
우 인 수1)*경북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1. 청대 권상일의 가계와 생애
청대일기淸臺日記는 조선 후기 숙종·영조 연간에 활동한 영남 퇴계학파의 대표적인 문신 학자인 권상일權相一의 일기이다.
24세부터 81세까지 58년간에 걸쳐 쓴 것이다. 청대淸臺는 그의 거주지 근처를 흐르는 금천錦川의 경승지인 농청대弄淸臺에서 따온 것이다. 이 일기에는 경향에서의 관직 생활과 고향 상주에서의 일상생활이 비교적 잘 드러나 있어 조선 후기 정치사와 생활사를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권상일(1679∼1759)은 경상도 상주尙州의 근암리近嵒里(지금의 문경시 산북면山北面 서중리書中里)에서 출생하였는데, 아버지는 안동 권씨 심深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 달의達意의 딸이다. 자는 태중台仲, 호는 청대淸臺,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그의 6대조인 인재忍齋 권대기權大器(1523~1587)와 5대조 송소松巢 권우權宇(1552~1590)는 대대로 안동에 살면서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전수받아 학행으로 이름이 높아 세상의 존중을 받았다. 특히 권우는 왕자(후일의 광해군)의 사부로 활약한 바 있었는데, 훗날 안동의 이계정사伊溪精舍에 배향되었다. 이처럼 그의 집안은 학문을 한 명문으로서 영남 도학의 정통 학맥을 이었다.1)
고조부 금곡琴谷 권익린權益隣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1616년(광해군 8) 34세에 생원이 되었다. 그 후 안동에서 예천 지금곡知琴谷으로 이주하였는데, 그의 호도 거주하던 지명에서 따온 듯하다. 증조부 권구權坵는 예천에서 다시 상주 근암리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그는 1651년(효종 2) 41세에 생원이 되었고, 후일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조부 권이칭權以儞과 부친 권심權深은 과거에 합격하지는 못하였고, 후일 각각 이조 참판과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삼대가 증직된 것은 권상일의 직품에 따른 것이었다.
그의 가계를 간략하게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2)
1) 금장태, 「청대전집 해제」, 청대전집 상, 여강출판사, 1989, 1쪽.
2) 본 가계도는 安東權氏副正公派世譜(1978), 安東權氏大同譜(1982),
청대일기, 문과방목 등을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도] 권상일의 가계도
大器
生員, 居安東, 退溪門人
配 眞城/ 李氏/綾城具氏 曲江裵氏
宇
進士, 師傅, 退溪門人
配 全州柳氏
益民益丁益臣益隣益謙
生員,
旅軒門人,
移居醴泉
配 順興安氏
坵垤埯增
生員, 移居尙州
配 慶州李氏
以儞
以任以起
配 慶州李氏
深潚澣游湛
配 慶州李氏
相一相元相說相如相虁相龍 相五相楫
文, 參判 配
宣城金氏/驪興
李氏/眞城李氏
文,
掌令
煜熻烋 ◯系燧檾炫熅燮
配 豊山柳氏
◯系復仁女女女
配 全州李氏/
昌寧成氏(朴泰慶) (金中柱) (李正冑)
권상일은 따로 스승을 두지 않고 가정에서 조부로부터 학업을 닦았다. 가학을 통해 이황을 계승하는 영남학파의 학풍을 이은 것이다. 과거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아 여러 차례의 응시 끝에 32세이던 1710년(숙종 36)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일기에는 그의 치열했던 과거 응시 일정과 심경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권상일은 급제한 해에 승문원承文院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관직 생활의 첫발을 내딛었다. 출사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인 1712년(숙종 38) 34세 때는 한 해 동안 어머니, 부인, 조모 세명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어야 하였다. 삼년상을 치르고 난 후인 1715년(숙종 41) 37세에 저작著作, 1718년(숙종 44) 40세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1719년(숙종 45) 41세에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 등을 역임하였다. 1720년(숙종 46) 42세에 예조
좌랑을 지냈고, 1722년(경종 2) 44세에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중앙의 관직을 두루 거친 셈이었지만 핵심적인 요직은 아니라는 점에서 노·소론 집권기에 고단하던 남인 출신 관료의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시기는 학문 연마에 힘썼던 기간이었다. 그는 특히 과거에 합격한 후부터 많은 독서를 하였으며, 이황의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와 퇴계집退溪集 및 심경心經을 읽으면서 본격적으로 성리학과 이황의 이론을 연구하였다. 38세 때는 그보다 15년 선배인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1664~1732)와 격물치지론格物致知論 및 이발기발理發氣發의 문제에 관해 토론하는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 하였으며, 「이기변理氣辨」이라는 논문도 썼다. 44세를 전후하여 이만부·오상원吳尙遠과 더불어 계구戒懼·동정動靜·혈구絜矩 등 성리학의 기본 문제들에 관하여 토론하였고, 45세 때는 안동 일대를 둘러보고 밀암密菴 이재李栽(1657~1730)와 더불어 강론하였다. 46세 때는 오상원과 성리대전性理大全을 강론하고, 송인명宋寅明(1689~1746)과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을 강론하는 등 학문 연구에 정열을 기울였다.3)
1726년(영조 2) 48세에 병조 정랑에 제수되었으며, 1727년(영조 3) 49세에는 만경 현령萬頃縣令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외직을 맡게 되었다. 마침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여서 적극적으로 구호 활동을 폈을 뿐 아니라 유생들의 학문 성취에도 남다른 열성을 보였다. 이에 전라도 관찰사로부터 정기 평가에서 “독서하며 백성을 다스리니, 다스리는 법도가 이루어지고 학문은 진보되었다.”라는 찬사를 받았다.4) 이듬해에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신속하게 사태를 파악하여 감영監營에 보고한 뒤, 한 고을 수령으로서의 대비 태세를 적절하게 잘 취하여 난의 진압에 공을 세웠다.
1731년(영조 7) 53세에 영암 군수靈巖郡守에 이어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제수되었다. 두 차례 사퇴하는 상소를 올려 명분을 바로잡고, 수령을 간택하며, 학교를 개수할 것을 간언하고, 과거의 폐단과 당파의 재앙을 논하며,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기를 청하는 등 현실 문제를 절실하게 진언하였다. 사직을 청하여도 허락을 받지 못하자 장령의 직책을 맡았고, 경연에 참석하게 되었으나 두 달이 못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여러 차례 거듭 장령에 제수되었으나 현실의 폐단을 간언하는 상소를 올리고 사직할뿐 부임하지 않았다.
1732년(영조 8) 54세 때는 이황을 모신 도산서원陶山書院의 원장이 되었으며, 이때 퇴계언행록退溪言行錄의 범례를 서원 유생들과 논의하였다. 이 당시 도산서원에서는 서원이 소재한 예안현禮安縣 인사로서 원장을 구성하던 데서 벗어나 주변 군현의 유명 인사를 원장으로 모셔서 서원의 안정과 발전을 도모하려던 때였는데, 상주의 권상일이 그러한 역할을 할 적임자로 지목을 받은 것이다.5) 1733년(영조 9) 55세에는 양산 군수梁山郡守·군자감 정軍資監正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이해에 퇴계언행록을 교열하여 간행하였다. 1734년(영조 10) 56세에는 사헌부 장령으로 있으면서 백성들의 조세 부담을 덜어주기를 청하고, 아울러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근절시킬 것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린 바 있다.
1735년(영조 11) 57세에 울산 부사蔚山府使가 되어 다시 외직으로 나아갔다. 관내의 구강서원鷗江書院에 기숙사인 동재東齋가 없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여 자신의 녹봉을 덜어내어 동재를 지어 주고 때때로 학생들과 강학하기도 하였다. 또 관내 지역에 퇴계집이 없는 것을 알고는 퇴계집에 자신의 발문을 붙여 구강서원에 비치해두고 학생들에게 읽기를 권장하였다. 울산 최초의 사찬읍지인 학성지鶴城誌의 편찬에도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독려하였을 뿐 아니라 초본이 완성된 뒤에는 감수를 하고 서문을 작성하기도 하였다.6) 1738년(영조 14) 60세가 되자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1739년(영조 15) 61세에는 고향과 가까운 영주의 부석사浮石寺를 유람하고,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참배하기도 하였다. 1740년(영조 16) 62세에는 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공담료供淡寮라는 작은 집을 지은 바 있던 고향 집 근처 농청대에 세칸 규모의 아담한 존도서와尊道書窩를 짓고 산수를 즐기면서 학문에 전념하는 장소로 삼았다.
1741년(영조 17) 63세에 세자시강원 필선世子侍講院弼善에 임명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이후 수차례에 걸쳐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65세 때는 도산서원을 방문하고 퇴계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기도 하였다. 1745년(영조 21) 67세에 봉상시 정奉常寺正, 1746년(영조 22) 68세에 사헌부 헌납司憲府獻納·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거쳐, 1747년(영조 23) 69세에 당상관에 올라 동부승지·형조 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동부승지로 재임할 때 조선의 유현들의 학문과 언행에 대해 묻는 영조에게 문묘文廟에 배향된 오현五賢에 대해 아는바를 소상히 답하였다. 즉 김굉필金宏弼과 정여창鄭汝昌의 경우는 사화士禍를 당하여서 문적文籍이 별로 남아 있지 않고, 조광조趙光祖와 이언적李彦迪의 경우는 이황이 쓴 행장에 그들의 행적이 소상히 잘 남아 있으며, 오직 이황이 많은 문적을 남겨 집대성한 공적이 크다고 밝혔다. 이어 그의 교화를 받은 많은 문도들이 국가의 부름에 응하여 나아가서는 사업을 크게 떨쳤고, 향촌에 은거하여서는 학문 연구와 후학의 양성에 힘을 기울여 선조 연간의 중흥을 이룰 수 있었다고 강조하였다. 이황의 학통을 이어받은 영남 남인의 정치·사회적 역할과 공적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 외에도 마음을 다스리는 법이나 독서하는 법 등 군주의 덕성 함양에 도움이 되는 많은 진언을 하였다. 1748년(영조 24) 70세에 좌부승지로 일단 치사致仕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함창의 임호서원臨湖書院과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에서 소학小學을 강론하였다. 이 무렵 그는 원숙한 학문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당대 대표적 학자들인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 1763) 및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1711~1781)과 더불어 몇 년 동안에 걸친 왕복 서한을 통해 태극론太極論과 이기론理氣論 등 성리설의 핵심 문제에 관해 토론하였던 중요한 시기였다.
상주읍지인 상산지商山誌를 완성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1749년(영조 25) 71세 때 요직인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제수되었던 것은 당시 탕평책蕩平策을 추진하던 김상로金尙魯 등이 영남인에게도 이조의 관직을 주도록 청한 때문이었으나 병을 핑계로 나가지는 않았다. 이어 사간원 대사간·홍문관 부제학·사헌부 대사헌 등 삼사三司의 최고 관직에 잇달아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조정에서 권상일을 중앙의 요직에 계속 임명한 것은 그가 영남 남인 중에 영향력이 큰 대표적인 존재라는 것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조재호趙載浩(1702~1762)는 영남 지역의 풍속과 인물에 대한 영조의 하문을 접하고 다음과 같은 요지로 답한 바 있었다. 즉 영남 지역의 선비들이 퇴계 이황의 유법遺法을 지켜 분수를 편안히 지키면서 곤궁함을 당연한 것으로 알아서 잘 견디고 있는 가운데, 많은 문인들을 거느리고 있는 어진 명망가로는 단연 권상일을 꼽을 수 있다고 하였던 것이다.
3) 금장태, 위의 책, 「청대전집 해제」, 1~2쪽.
4) 청대전집 상, 「청대연보」 영조 3년 49세조
5) 우인수, 「조선후기 도산서원 원장의 구성과 그 특징」, 퇴계학과 유교문화 53, 2013.
6) 우인수, 「1749년(영조 25) 울산읍지 학성지의 편찬과 그 의미」,
한국사연구 117, 2002.
1754년(영조 30) 76세에는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임명되었다. 1756년(영조 32)에 영조는 특별히 의복과 음식물을 보내어 78세의 그를 위로하기도 하였다. 마침내 1758년(영조 34) 80세에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라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영예를 입었다.
1759년(영조 35) 81세로 세상을 떠나자 유림 400여 명이 모여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영조는 예조 좌랑을 예관으로 보내어 제사를 지내는 한편 불천위不遷位로서 집안 사당에 모실 것을 명하였다. 1772년(영조 48) 영조는 문득 권상일이 생각난 듯 그의 아들과 손자를 찾아서 특별히 서용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였다. 정조는 영조가 남인인 권상일을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한 사실을 인재 등용의 미담 사례로 인용하곤 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년) 상주 고향의 유림들이 농청대 주변 바위면 여기저기에 권상일이 살아 생전에 명명하였던 이름들을 새겨 그를 추모하였다. 존도와尊道窩, 농청대弄淸臺, 태고암太古巖, 불마애不磨崖 등 12자이다. 지금도 이 글자들은 바위에 남아 있어 그날을 추억케 한다. 1783년(정조 7) 후인들이 향약소鄕約所인 죽림정사竹林精舍에 권상일의 위판을 모셨다가 3년 뒤 고향 상주의 근암서원近嵒書院으로 옮겼다. 근암서원에는 홍언충洪彦忠·이덕형李德馨·김홍민金弘敏·홍여하洪汝河 등 네 사람을 향사하고 있었는데, 이때 권상일이 이구李榘·이만부와 함께 배향된 것이다. 그 뒤 고종 때 서원이 철거당하자, 그 자리에 위판을 묻었다. 1790년(정조 14) 우의정이던 채제공蔡濟恭(1720~1799)이 시장諡狀을 올렸으며, 희정僖靖의 시호가 내려졌다.7)
권상일은 학문을 일찍 깨우쳐 20세에 옛 선현의 독서와 수신하는 법을 모아 「학지록學知錄」을 저술한 바 있었다. 학문은 가학을 통하여 이황을 이었다고 자부하였다. 특히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의 경우는 이황의 초기설을 고수하였는데, 리理와 기氣를 완전히 다른 둘로 분리하여 리는 주재적主宰的이고, 기는 보조적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관직에 나간 이후에는 영조의 각별한 관심으로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한 번 나아가면 세 번 물러서는 이황의 산림학자와 같은 대응 자세를 본받았다. 그리하여 실제로 관직에 종사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으며, 평생의 상당 기간을 초야에서 독서하면서 후진을 양성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학문과 덕행으로 영남에서 추앙을 받는 석학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저술로는 초학지남初學指南·관서근사록집해觀書近思錄集解·소대비고昭代備考·가범家範·역대사초상목歷代史抄常目 등이 있고, 문집으로 청대집이 전한다.
2. 청대일기의 체제와 구성
청대일기는 권상일이 매일매일 책력冊曆 위에 간략하게 기록했던 일기이다. 그의 사후에 후손 중의 누군가가 정리하면서 ‘보록寶錄’·‘일록日錄’·‘일기록日記錄’·‘청대선생일록淸臺先生日錄’ 등으로 명명한 것으로 추정된다. 1989년 여강출판사에서 청대전집淸臺全集을 영인하여 간행하게 됨을 계기로 그동안 종적을 알지 못하던 일기 가운데 15책을 새로 발굴하여 수록하게 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 이 일기를 일괄하여 ‘청대선생일록’으로 명명하였다. 그 후 2003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 일기를 정자正字로 바꾸어 활자화하여 한국사료총서 제47집으로 간행하면서 ‘청대일기’라는 이름으로 개칭하였다.8) 이번의 국역본의 이름도 ‘청대일기’9)라고 하였다. 청대일기는 현재 15책이 전하고 있으며, 이 일기 15책은 권상일이 24세이던 1702년부터 시작하여 81세로 세상을 떠나는 1759년까지 58년간의 시기를 담고 있다. 연보에 의하면 권상일은 20세이던 1698년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1759년 사망하기 열흘 전까지 일기를 썼는데, 모두 30여권에 달하였다고 한다.10) 그렇다면 무려 62년간에 걸쳐 일기를 쓴 셈이 된다. 다만 62년간의 기간 모두가 온전하게 전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 4년간의 일기가 전하지 않고 있으며, 중간에도 누락된 해가 더러 있다. 한 해 동안의 일기가 완전히 누락된 해는 1698~1701년, 1705년, 1714~1718년, 1726년, 1728년, 1730년, 1735년, 1740~1744년으로 모두 19년분에 달한다. 따라서 전하고 있는 일기는 43년분인 셈이다. 물론 남아 있는 43년분 가운데도 달이 통째로 빠져 있는 경우도 있고, 간혹 심하게 훼손되어 판독이 불가능하게 된 부분도 있다. 연도 상으로 보면 62년분 중에서 43년분이 남아 있으니, 대략 3분의 2정도가 남아 있는 셈이다. 그리고 분량 상으로 보면 30여 권에 달하던 것이 현재 15책이 남아 있으니, 대략 절반 정도가 남아 있는 셈이다.
7) 청대전집 상, 「청대연보」 정조 7년, 14년조
8) 전경목, 「조선후기 지방유생들의 修學과 과거 응시」, 사학연구 88, 2007, 268쪽.
9) 2014년 현재 청대 종손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일기는 12책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영인본 중 1708년(1~12월)·1709년(1~12월)·1729년(6월)·1731년(8월, 10~12월)·1732년(1~윤5월)·1733년(10~12월)·1734년(9월)·1736년(1~12월)·1737년(1~5월, 8월)·1738년(10월, 12월)은 없어졌고, 1747년(10~12월)·1748년(1~2월)·발(跋)은 추가 발견되었다. 이 일기는 국사편찬위원회 영인본과 종가 소장본 중 추가된 부분을 모두 번역하였다.
10) 청대전집 상, 「청대연보」 숙종 24년 20세조
청대일기 15책의 수록 기간은 다음 표와 같다.
[표 1] 청대일기의 수록 기간
순서 기 간
1책 임오(1702) 1월 ∼ 갑신(1704) 12월
2책 병술(1706) 1월 ∼ 정해(1707) 12월
3책 무자(1708) 1월 ∼ 경인(1710) 6월
4책 경인(1710) 6월 ∼ 계사(1713) 9월
5책 기해(1719) 1월 ∼ 신축(1721) 9월
6책 임인(1722) 12월 ∼ 을사(1725) 8월
7책 정미(1727) 1월 ∼ 정미(1727) 8월
8책 신해(1731) 8월 ∼ 갑인(1734) 9월
9책 병진(1736) 1월 ∼ 정사(1737) 8월
10책 무오(1738) 10월 ∼ 기미(1739) 12월
11책 을축(1745) 1월 ∼ 병인(1746) 12월
12책 정묘(1747) 1월 ∼ 경오(1750) 12월
13책 신미(1751) 윤5월 ∼ 갑술(1754) 12월
14책 을해(1755) 1월 ∼ 무인(1758) 12월. 1729년 6월 첨가
15책 기묘(1759) 1월 ∼ 기묘(1759) 7월 중심으로-」, 사학연구 88, 2007
이 일기 속에는 권상일 자신에 대한 다양한 내용이 들어 있으며, 가족과 친인척 그리고 주변 동료들의 일상도 상당히 포함되어 있다. 먼저 권상일의 관료 생활과 관련한 기록 중 초입사初入仕 이후 예조 정랑 및 울산 부사로 있을 때의 기록은 특히 자세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초입사 때의 면신례免新禮 과정을 비롯하여 예조에서 근무할 때 숙종의 병환 내용을 묘사한 것, 그리고 울산 부사로 근무할 때 지방관으로서의 업무 기록은 주목할 만하다. 이외에 지방 출신의 관리들이 한성漢城에서 거주할 때의 생활 기록은 재경동향在京同鄕들 간의 유대 활동, 경조사慶弔事 참여 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러나 일기라는 자료의 특성상 관직 생활 보다는 입사하기 전 혹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머물 때의 일상생활 기록이 더 현실감이 있고 흥미로운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여기에는 조선 후기 양반의 혼인 생활, 가족 관계, 인간 관계 등이 잘 드러나 있다.11) 아래에서는 몇 가지 주제별로 일기의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이 일기의 자료적 가치를 드러내고자 한다.
첫째, 과거科擧와 관련한 기사가 풍부하게 담겨 있다. 수학한 후 과거에 응시하던 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당시 사류들이 어떻게 공부하고 어떠한 절차를 거쳐 과거에 응시하였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다.12) 권상일은 일찍이 가숙家塾에서 그의 조부로부터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배웠다. 15세에 조부가 사망한 후에는 집에서 혼자 경전과 역사서 등을 반복하여 읽는 등 독서에 깊이 빠져 침식을 잊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이후에는 종종 주위의 서원이나 향교에서 실시하는 강회講會에 참석하여 자신의 학문을 연마하고 수학의 정도를 가늠하기도 하였다.또 과거 공부를 위해 연령이나 수학 정도가 비슷한 동료나 선후배들끼리 사찰이나 서원 등지에서 거접居接하며 공부하였다. 동료나 친지 등과 함께 산사나 서원 및 향교 등지에서 짧은 기간 동안 거접하는 것은 조선 후기 지방 유생들의 일반적인 수학 형태였다.
백일장白日場을 비롯하여 향시鄕試와 회시會試 및 전시殿試와 관련하여 상당히 많은 기사가 일기에 구체적으로 쓰여 있다. 먼저 백일장은 유생들이 모여 그동안 쌓은 실력을 겨루는 일종의 경시대회인데, 과거 시험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권상일도 수차에 걸쳐 백일장에 참여하면서 보고 듣고 겪었던 일들을 상세히 기록해 두었다. 권상일은 정기적 또는 부정기적으로 실시되는 각종 과거 시험에도 열심히 응시하였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음에도 권상일은 아버지, 계부季父와 함께 거의 매번 과거에 응시했기 때문에 집안 살림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시험을 치르는 고을에서 마땅한 숙소를 정하기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어서 숙소 구하느라 고생한 기록도 여러 차례 나오고 있다. 시험장에 가까운 좋은 숙소를 얻기 위해서는 해당 고을에 일찍 도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과거 응시 횟수는 총 8차례인데, 여정旅程 기간을 보면 향시의 경우는 대체로 10일에서 15일 정도가 소요되었고, 한성에서 치르는 회시의 경우는 적어도 20일 이상이 소요되었다.13) 권상일은 합격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가졌고, 이 욕망은 멈추지 않고 자신으로부터 자손·가문·지역·정치적 계보에까지 자연스럽게 전이되었다. 결국 과거는 하나의 굴레가 되어 지식인들의 삶 전반을 관통하고 있었던 셈이다. 특히 원거리 과행科行에서 오는 경제적인 압박과 신체적 고통 그리고 서울과의 먼 거리로 인한 시험 정보 수집의 지연은 그를 더욱 속박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14)
과거 시험과 관련한 기록 중에 가장 극적인 장면은 권상일의 아버지 권심權深이 경상우도慶尙右道의 시험장소인 의령宜寧으로 갔다가 상피제相避制에 걸려 시험을 치르지도 못하고 돌아온 사연이다.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으로 시작되고 있다. 새벽에 길을 나서 짙은 안개를 뚫고 걸어서 상산商山 벼랑길을 넘어 현풍玄風 읍내에서 아침을 먹었다. 한낮에 창녕昌寧에 이르러 간신히 모산촌牟山村에 숙소를 얻었는데, 읍내에서 5리이다. 듣건대, 자인 현감慈仁縣監 종조부께서 우도右道의 시관이 되어 가친께서는 상피相避 때문에 틀림없이 시험을 보실수 없을 것이라고 하니, 통탄스럽고 고민되는 마음 이루 말할수 없다.15)
11) 신명호·이순구, 「淸臺日記 解題」, 청대일기(한국사료총서 제47집), 국사편찬위원회, 2003.
12) 수학과 과거에 대한 내용은 다음의 논고를 참고하였다. 전경목, 「조선후기 지방유생들의 수학과 과거 응시 -권상일의 청대일기를 중심으로-」, 사학연구 88, 2007.
13) 최은주, 「조선후기 영남선비들의 여행과 공간감성 : 18세기 영남선비 청대 권상일의 사례를 중심으로」, 동양한문학연구 31, 2010,386쪽.
이때 권상일은 아버지를 피해 경상좌도慶尙左道의 시험 장소인 창녕昌寧으로 시험 치러 갔었는데, 그곳에 도착하여 의령 쪽의 시관試官이 자신의 외종조부外從祖父인 자인 현감 이적의李適意로 갑자기 바뀌었다는 사실을 전해 듣게 되었다. 이에 이러한 사실을 알리는 편지를 외종조부에게 다급하게 보내어 다른 가능한 조처를 취하도록 하려 하였으나, 편지는 제 시간에 도달하지 못하고 말았다. 권심은 영문도 모른 채 의령에 도착하고서야 시관이 자신의 처삼촌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시험장에 입장하지도 못한 채 허탕치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둘째, 관직 생활과 관련한 많은 내용들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 권상일은 문과에 급제한 후 출사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남인이라는 배경, 학문과 교육을 추구하려는 개인적인 성향으로 인해 관직 생활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비록 길지 않은 관직 생활이었지만 경관京官과 외관外官을 두루 거치면서 당상관堂上官에 까지 이르렀고 기로소에 든 인물이기 때문에 비교적 풍부한 관직 생활과 관련한 내용들이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16)
14) 최은주, 「일기를 통해 본 조선시대 영남지방 지식인과 과거시험의 형
상화」, 대동한문학 38, 2013, 232쪽.
15) 청대일기, 제2책, 1707년(숙종 33) 8월 22일
권상일은 1710년(숙종 36) 10월에 승문원에 분관되었다. 당시 영남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들어갔다는 자부심도 있었지만 면신례에 대한 염려 때문에 상경이 늦어졌다. 1711년 4월에야 한성에 도착한 후 면신례를 거쳤는데, 밤에 귀신 복장을 하고 선배들의 집을 돌면서 자신의 명함을 돌리는 회자回刺와 허참許參의 과정을 혹독하게 겪었다. 권지부정자의 업무는 크게 회공回公과 제술製述로 나눌 수 있었다. 회공은 외교문서를 가지고 여러 관료의 집에 들러서 회람시키는 일이었고, 제술은 외교문서를 짓는 일이었다. 특히 회공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말을 타고 여러 관료들을 찾아다녀야 했기 때문에 권상일에게는 상당히 곤혹스런 일이었다.
울산 부사로 재직 시의 일도 비교적 소상하게 일기에서 찾을 수 있다. 울산은 지역적인 특성상 군사적인 요충지에 해당되는 곳이었지만 퇴계 학통을 이어받아 학문에 큰 뜻을 두었던 권상일은 교육의 문제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구강서원鷗江書院의 기숙사를 건립하였고, 유생들을 모아 직접 강의하기도 하였다. 또한 읍지인 학성지鶴城誌 편찬에도 힘을 보태었다. 일본에서 파견한 각종 사신의 접대를 위한 접위관接慰官으로 차출되어 동래를 오간 사실들도 일기에 기록되어 있어 지방관 업무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부세 행정을 비롯한 수령의 일상적인 근무 모습을 파악하는 데도 도움이 되는 내용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일기의 한 토막을 차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병영兵營에 가서 신임 사또를 뵙고, 양문루驤門樓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길로 우후虞候를 만나 보았다. 돌아오는 길에 구강서원鷗江書院의 새 재사齋舍를 잠시 살펴보고, 다시 사창司倉에 가서 환곡還穀을 나누어 주었다.17)
어영청御營廳·금위영禁衛營의 보미保米를 포장하여 실어 보내는 일로 남문루南門樓에 앉아 있는데, 선창船倉과는 지척의 거리였다. 이 남문루는 이상국李相國이 정미년에 지은 것으로,벽에는 율시와 도사都事 김응경金應慶의 서序가 걸려 있다. 이사익李士益이 돌아갔는데, 농번기여서 오래 머무르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마음이 몹시 서운하다. 진사 박망구朴望久가 들렀는데, 언양彦陽 김모의 회방연回榜宴을 보러 가는 길이다. 감영의 장교將校가 목수 20여 명을 거느리고 바람에 쓰러진 봉산封山의 소나무를 베고 와서 산 아래에 머물러 있다. 수영水營의 장교도 왔다. 앞들이 대부분 모내기를 하여 아주 기쁘다.18)
울산을 대표하는 수령으로서 관내의 다른 관료들과의 만남,관내 학교 시설의 점검, 백성들의 구휼 현장 점검, 서울로 실어 보내는 세곡의 운송 작업 감독, 사역 감독차 나온 감영과 수영장교의 근무 상황 파악 등 수령의 바쁜 하루 일과가 잘 드러나 있다. 공무 수행 중 막간을 이용하여 문루에 걸려 있는 한시 감상, 이런 저런 일로 방문하는 울산 지역 사족들과의 만남 등도 수령의 일상을 생생하게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앞 들판에 모내기가 잘 되어서 아주 기쁘다는 표현에서 백성들의 한 해 농사를 챙기는 따뜻한 마음이 잘 드러나 보인다.
셋째, 생활 의례와 관련한 내용이 많이 들어 있다. 그 중에서도 혼례에 대한 내용은 18세기 영남 사족의 혼례에 대한 실상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권상일의 집안과 인근 가문들은 지역과 가문을 고려한 통혼권을 폐쇄적으로 유지하였으며, 동성이본同姓異本 간의 혼인이 보편적인 현상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19) 그의 가계는 지역적으로 영천·선산·안동의 범위 내에서 오랜 친분이 있는 집안들과 중첩적인 혼례를 행하였다. 또한 권상일의 4촌 범위 내에서도 진성 이씨·의성 김씨·풍산 류씨·평산 신씨·경주 이씨 등과의 중첩된 혼인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권상일은 아들 욱煜의 배필로 하회河回 류성화柳聖和의 딸을 오래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두 사람의 혼례는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
풍산豊山에서 심부름꾼이 편지를 가지고 왔다.……이씨 어른의 편지를 받아 보니, 하회 류성화가 일전에 와서 통혼을 청한 일의 사정을 나에게 설명하고, 확실하게 정하여 내년 봄에 지내고자 한다고 하였다. 이 혼사는 피차간에 마음을 둔지는 이미 오래나 아이가 아직 장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미루어 온 것이다. 이번 겨울에는 국상 때문에 거행할 수 없으나, 내년 봄이면 열여섯 살이 되는 데다 위로 노친이 계시고, 또 예에 열여섯이면 혼인할 수 있다는 말이 있기 때문에 정하고자 허락할 뜻을 보였다.20)
16) 권상일의 관직생활과 관련한 내용은 다음의 논고를 참고하였다. 노혜경, 「18세기 한 영남 남인의 관직생활 -권상일의 청대일기를 중심으로-」, 사학연구 88, 2007
17) 청대일기, 제9책, 1736년(영조 12) 4월 26일
18) 청대일기, 제9책, 1736년(영조 12) 4월 28일.
19) 권상일 집안의 혼례에 대한 내용은 다음의 논고를 참고하였다. 김소은, 「18세기 영남 사족의 일상과 생활의례 -청대일기에 나타난 혼례를 중심으로-」, 사학연구 88, 2007
대체로 주자가례에 입각한 의례의 진행이 미덕으로 여겨졌으나, 관례冠禮의 경우는 거의 모두가 정혼定婚과 택일擇日을 마친 후 혼례의 준비 과정의 한 단계로 여겨졌으며, 나이와 계절에 구애받지 않고 편의에 따라 거행되고 있었다. 이는 복잡한 관례의 절차와 소용되는 의관 등을 마련하는 것이 큰 경제적 부담이었기 때문인데, 권상일의 경우도 관례를 주관할 빈賓을 초치하는 일에 어려움을 토로한 바 있었다. 관례 의미의 약화는 18세기 영남 지역의 일반적인 경향과도 일치하는 부분이었다.
권상일 집안에서는 혼례 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반드시 신행하여 시댁으로 돌아가는 원칙이 지켜졌다. 초례醮禮를 마친 신랑은 신행新行할 때까지 처가에 여러 차례 재행再行을 하였다.신행 기간과 자녀의 출산은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대부분 차녀를 출산한 후에 조리를 마치고 시댁으로 돌아갔다. 또한 출산은 친정의 혼례·제례 등과 함께 친정에 근행覲行하는 중요한 이유였다. 근행은 신행으로 인한 상실감을 보상하는 조처였는데,권상일의 집안에서도 자부·손부·여손들의 친정 근행이 엄격하게 금지되지는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넷째, 주변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와 편지에 대한 기사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21) 일기에 수록된 편지 기사를 기준으로 내용을 분류하면 역병疫病으로부터 무탈한지를 묻는 안부, 상사喪事에 대한 위문이 주를 이루었다. 특히 18세기 전반기에는 전국적으로 역병이 창궐한 시기였으므로 편지 기사의 상당 부분이 바로 역병에 대한 안부를 묻고 확인하는 것이었다. 권상일의 어머니와 아내·장인·처남·장모 등이 역병으로 사망하거나 그로 인해 자주 주거지를 옮겨 다녔기 때문에 이러한 역병으로부터 안전한지의 여부가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다. 또한 역병으로 인해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자연스럽게 상사에 대한 위문이 잦게 되었다.
20) 청대일기, 제6책, 1724년(영조 즉위) 9월 13일
21) 권상일의 편지와 관련한 내용은 다음의 논고를 참고하였다. 김효경,「청대일기를 통해서 본 18세기 사족의 편지 왕래」, 사학연구 88,2007.
일기에 나오는 편지에 대한 기사는 문집에 수록된 편지와는 수록 내용이 달랐다. 문집에 수록된 편지는 문집의 편찬 의도에 의해 다소 윤색된 부분이 있는데 비해, 일기에 나오는 편지 기사는 온전한 당시의 실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편지 본문이 수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편지와 관련한 애틋한 내용이 일기에 기록되어 있어 그의 인간적인 면모도 느낄 수도 있다. 다음은 첫 번째 부인인 김씨와 생전에 주고받은 편지를 수습하여 한 축軸으로 만들어 놓고 늘 펼쳐보면서 아내를 기린다는 일기 내용이다.
죽은 아내의 편지를 수습하여 한 축軸을 만들어서 때때로 생각날 때 펼쳐 보는데, 마치 마주대하는 듯하여 비통한 가운데 조금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그렇지만 이 뒤로 어찌 다시 이와 같은 편지를 얻을 수 있겠는가. 생각할수록 목이 멘다. 장인과 장모의 편지도 수습하여 아내의 편지 위에 함께 첨부하였다.22)
권상일이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들은 주로 가족·친인척·친구나 지인·관리 등이었다. 가족 중에는 주로 부친·손부·손녀와 주고받았고, 의외로 아들과는 편지를 주고받은 것이 거의 없다. 친인척으로는 장모·처남·자식의 사돈·숙부·종질 등이며, 친구나 지인은 문집에 수록된 인물과 거의 일치할 만큼 많았다. 특히 황익재와 이익은 평생에 걸쳐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았다. 관리로는 상주를 비롯해서 인근 고을 지방관, 무신 관료와 교유하였다.
직접 방문하여 서로 담소를 나누며 정을 쌓거나 학문적으로 교유하기도 하였지만, 편지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끊임없이 인간적인 상호 관계를 돈독하게 다짐은 물론, 지속적인 정보 소통을 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였음을 확인케 해 준다.
다섯째, 권상일의 일기에서는 18세기 시장의 발달과 한 지식인의 시장에 대한 관찰과 접근, 그리고 동전의 유통으로 인한 개인의 화폐경제생활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23) 권상일은 인근의 여러 장시 중 거주지인 근암리 인근의 산양장과 주로 접촉했다. 그는 농업 중심의 자립적 가계 경영을 강조하면서 상업에는 다소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나, 현실에서는 주변 시장의 동향에 대한 관심과 관찰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곡물,어물 등이 시장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시기와 상인의 동향, 그리고 계절에 따른 곡물 가격의 변동 등을 관찰했다. 특히 날씨와 수확량에 따른 곡물 가격 변동에 민감하게 반응했는데, 곡물 가격은 동전 1냥을 기준으로 일관되게 기록하였으며 계절에 따른 가격 편차를 주목했다. 이는 토지에 기반한 그의 경제 처지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한 청대일기의 한 대목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시세가 꽤나 헐해졌다고 한다. 엽전 100문文에 쌀은 두 말 닷 되, 콩은 너 말, 겉곡은 닷 말 남짓이라고 한다. 이는 비가 내린 덕분이다. 금년의 흉작은 을병년乙丙年보다 더 심하지만 을해년(1695)과 병자년(1696)은 물가가 한 꿰미의 엽전에 쌀 한 말이 차지 않았으나 올해는 그렇지 않다. 이는 관곡官穀을 도처에서 많이 판매한 까닭으로, 사곡私穀은 전혀 없다고 한다.24)
22) 청대일기, 제2책, 1706년(숙종 32) 4월 26일
23) 권상일의 경제생활과 관련한 서술은 다음의 논고에 의거하였다. 정수환, 「18세기 권상일의 시장접촉과 화폐경제생활 -권상일의 淸臺日記를 중심으로-」, 사학연구 104, 2011
현물을 선물로 주고받은 기록도 자주 나온다. 그는 절선節扇과 간지簡紙 등을 주로 선물 받았으나 70세 이상부터는 곡물·어물 등의 음식물에 대한 선물 비중이 증대했다. 원거리에 대한 선물과 부조는 동전을 이용했다. 이는 현물뿐만 아니라 화폐를 통한 부조와 선물로의 전환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권상일은 약·생선·토지·말 등을 매매하였으며, 이 경우 결재 수단으로 동전을 이용했다. 관판棺板·노비奴婢·전답田畓과 같은 고가의 매매는 인적 관계에 기초한 정보 공유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상대적으로 장시를 통해서는 소액 거래가 이루어지는 이원적인 매매모습을 보였다. 개인 사이의 채권과 채무 관계와 서원과 동회와 같은 단체의 운영도 동전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당시 시장의 발달과 활발한 동전 유통이라는 변화된 경제 환경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 외 청대일기에는 권상일이 세 번에 걸쳐 부인을 잃은 상황이 서술되어 있다. 첫 번째 부인과 두 번째 부인의 경우는 병으로 인해서였고, 세 번째 부인의 경우는 일기의 누락으로 인해 명확하지 않다. 이후 그는 정식 부인을 얻지는 않고 소실小室을 얻어 생활한 정황이 드러나 있다. 병과 의약 관련 기록도 많이 나온다. 또한 이 일기에는 그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지 않은 시도 상당히 많이 포함되어 있어 그의 평생 시작詩作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25)
24) 청대일기, 제5책, 1721년(경종 1) 5월 15일
4. 청대일기의 자료적 가치
청대일기에는 다른 책에서는 보기 힘든 내용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 그것도 장기간에 걸쳐 일관된 시각을 견지하는 상태에서 작성된 당대 최고 지식인의 일기라는 점에서 그 가치는 매우 크다고 하겠다. 다만 한문으로 되어 있어 접근이 용이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한글 번역본의 출간으로 인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일기를 활용할 수 있게 된 만큼 일기의 가치도 더욱 높아질 것이다.
앞 장에서 논급한 일기에 대한 내용 소개는 사실 극히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이 묻혀 있다. 마치 깊숙한 땅속의 광맥을 캐듯이 기술과 시간을 들여 노력한다면 마침내 노다지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읽는 사람이 어떤 목적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접근하느냐에 따라 청대일기는 유익하고 흥미로운 사실들을 무궁무진하게 전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청대일기를 단독으로 연구해도 훌륭한 성과를 기대할 수 있지만, 연구 목적에 따라 다른 자료와 적절하게 결합시킬 때도 새로운 성과를 도출할 수 있다. 연구 주제에 따라 연대기나 문집류와 결합시킨 접근도 가능하겠고, 다른 사람이 남긴 일기류와 비교 검토를 통한 접근도 가능하다. 특히 다른 사람이 남긴 일기와 비교하면서 당시 생활상을 검증하는 작업은 청대일기의 자료적 가치와 활용도를 극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시기적인 선후 관계와 지역적인 원근 관계 등의 요소를 충분히 감안하면서 일기의 내용을 교차 점검하는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청대일기가 학계 각 분야 전문 연구자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되어 그 진가가 더욱 드러나게 될 것을 확신한다. 아울러 한글로 국역이 되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학술적인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널리 이용될수 있기를 기대한다.
25) 최은주, 「18세기 어느 울산부사를 통해 본 지방관 글쓰기의 실제 -청대 권상일의 울산부사 시절을 중심으로-」, 영남학 16, 2009,169~170쪽.
첫댓글 귀한 청대선생의 일대기를 자세히 알려주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