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을 추동한 교회들과 설립자들
독립운동을 추동한 교회들
이름이 파악된 92개 교회들 대부분이 북간도의 독립운동의 진원지로서 독립운동을 추동하였다. 교회는 구국신앙과 구국교육론으로 무장되었으며 교육 활동과 사회참여 곧 간민자치활동으로 1900년대 초반 20여 년 간의 독립운동을 견인하였다.
1928년 조사표에 의하면 캐나다장로회에 속한 조선인 목사(교회)가 운영하는 학교가 44개였으며, 1926년 조사표에 의하면 캐나다장로회 선교부가 운영하는 학교는 19개였다. 이는 거의 모든 교회 산하에 근대식 학교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47)
용정시교회는 영신학교, 양무정자교회는 제3소학교, 와룡동교회는 창동학교, 명동교회는 명동학교, 호천포교회는 청호학교, 만진기교회는 대흥학교, 대황구교회는 북일학교, 계림촌교회는 진명학교, 구세동교회는 숭신학교, 동불사교회는 광신학교, 장은평교회는 보진학교, 적안평교회는 정동교회(慈洞 소재)는 정동학교 걸만동교회는 화성학교, 간장암교회는 흥동학교, 신풍교회는 신풍학교, 구호동교회는 신흥학교, 소회막동교회는 길성학교, 신흥동교회는 신흥학교, 광동동교회는 광동학교, 장흥동교회는 진동학교, 노두구교회는 혜성학교, 장동교회는 창동(彰東)학교, 남평동교회는 덕성학교, 소영자교회는 길동기독학당 (광성학교), 구사평교회는 구사평학교, 송전동교회는 송동학교, 남양동교회는 덕성학교, 남별리교회는 남별리사숙, 동구교회에 영생학교, 연통라자교회는 광동학교, 소홍기하교회는 양성제학교, 남구교회는 정민학교, 낙타하자교회는 공진학교, 석상하자는 기독동명학교, 합명당교회는 보진학교를 세워서 독립운동의 골간이 되는 인재를 양성하였다.48) 이들 학교 중에서 <3.13> 용정만세 시위를 강력하게 추진하며 〈독립운동의사부〉를 강박한 학생들은 정동교회의 정동학교, 와룡동교회의 창동학교, 국자가교회(소영자교회)의 광성학교 그리고 명동교회의 명동학교의 학생들이었으며 4개 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해서 〈국민회군〉의 근간이 되는 〈충렬대〉와 〈청년맹호단〉이 조직되었다. 장암동의 영신학교(흥동학교) 또한 교사들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기독교동지청년회〉를 조직하여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교회의 독립운동의 또 다른 한축은 조선이주민들의 권익과 협동을 추구하는 간민자치운동으로 나타났다.〈간민교육회〉는 1909년에 조선인 간민들의 민족교육과 자치, 생활향상을 표방하며 북간도 전체를 아우르는 자치단체로서 초대회장 이동춘을 비롯하여 용정시교회의 박무림과 구춘선, 용정중앙교회의 정재면, 명동교회의 박찬익이 설립에 앞장섰다. 1910년의 주요성원들 또한 용정시교회, 용정정중앙교회, 명동교회에 속한 인사들이 많았다.
간민교육회 뒤를 이어서 북간도 조선인 자치를 표방하며 1913년 4월에 창립대회를 가진 〈간민회〉주요성원 또한 캐나다장로회 지교회 명동교회, 용정시교회, 용정중양교회, 와룡동교회, 합명당교회 지도자들이었다. 화룡현분회의 지도자들 또한 그 지역 안에 있는 장로회교회 소속인사들이 태반이었고 연길현분회도 비슷하였다.
용정의 〈3.13〉만세시위는 장로회 인사들이 1919년 1월 25일에 국자가 소영자에서 소집된 〈기독교전도대회총회〉로부터 시발되었다. 그들은 러시아 연해주의 한인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운동을 주동적으로 이끌어갈 지역 대표 30 여명의 대표를 선출하였고 2차 모임에서 김약연, 정재면, 리중집을 연해주로, 강봉우를 조선 국내로 파견하여 공동투쟁을 도모하기로 하였다. 그 후 구춘선, 김영학, 고평을 비롯한 독립운동가 33인이 2월 18일과 20일에 걸쳐서 국자가 하장리 박동원의 집과 국자가 적암평 리동식의 집에서 회의를 열고 독립운동의 형식과 방법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그들은 모임에서 3가지 사항을 결의하였다. 첫째, 연변 내 각 교회와 모든 단체는 단결, 협력하여 독립운동에 힘을 다할 것, 둘째, 연변 내 모든 단체는 연해주에서 “독립선언서”의 공포와 동시에 독립시위운동을 전개할 것, 셋째, “독립선언서”가 발표되면 연변지구의 각 단체는 룡정에 모여 독립시위를 전개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49)이밖에도 독립운동의사부를 설립하기로 결정함과 동시에 시위행진 시 일제군경과 무리적인 충돌이 있을 경우를 대비하여 광복단을 조직하고 연변지구를 연길, 룡정, 자동, 팔도구, 평강 등 5개 구역으로 나누고 각 지역의 적임자를 임명하였다. 연길에는 김영학, 리홍준, 박동원, 리성근, 룡정촌에는 김정이, 자동에는 백유정이, 팔도구에는 류례균이 평강에는 고동환이 각각 임명되었다.50) 그 후 조선의 〈3.1〉운동의 소식을 전해들은 그들은 3월 8일에 비밀회의를 열고 3월 13일에 룡정촌에서 〈조선독립축하회〉라는 명목으로 군중집회를 열기로 하였다. 그리고 회장에 장로회 목사 김영학, 부회장에 배형식을 선출하였으며 연변의 각계각층의 인사들에게 독립만세시위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3만 명이 모이는 〈3.13〉 용정만세시위가 일어났다.
〈3.13〉만세시위와 같은 날에 연길현 이도구와 화룡현 양무정자에서도 만세시위가 있었는데 이 두 개의 만세시위에 이도구교회, 장은평교회, 양무정자교회, 화용현교회들이 참여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열창하였다. 〈3.20〉훈춘만세시위에는 황병길과 로종환, 리명순, 라정화, 량하구 등이 연통라자교회와 광동학교, 남별리교회와 남별리사숙, 대황구교회와 북일학교, 동구교회의 동구학교, 전선촌교회의 전선촌학교 그리고 훈춘성내교회가 함께 주도한 시위로 3천여 명이 모였고 두만강대안의 각지 기독교신도들의 대표도 참가하였다.51)
〈3.13〉용정만세시위 후에 만들어진 재외 조선인 최대의 독립운동단체인 〈간도국민회〉토대는 처음부터 캐나다장로회 지회였다. 대부분의 주요 성원들이 회장인 구춘선과 부회장인 강구우를 비롯하며 장로회 교회 소속 인사들이었다.52) 중앙총회는 합명당교회가 있는 하마탕에 본부를 두었으며 후에는 의란구 구룡평으로 옮겼는데 의란구에는 의란골남교회와 의란골북교회가 있었다. 그러나 국민회의 활동, 토의, 연락 장소는 일본 영사관이 간섭할 수 없었던 치외법권 지역인 영국조계의 캐나다제창병원 지하실 안에 두었다. 본부 아래 5개의 지방총회가 있었는데 중부지방총회는 국자가서구, 동부총회는 연결현 화련리, 남부총회는 화룡현 명동, 서부총회는 숭례향 명월구, 연길현 합수평 리대방자에 두었으며 1920년 8월 통계에 의하면 촌지회가 총 100여 개에 있었다.53) 당시 국민회 회원이 8,000명이며 지회가 100여 개에 이르렀다는 것은 당시 캐나다장로회 교인 수와 지회 숫자와 맞아 떨어진다. 또한 국민회 본부가 정부나 할 수 있는 〈군적등기회〉를 반포하고 징집령을 내리고 군자금을 많이 모금할 수 있었던 것은 캐나다장로회 지회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훈춘현의 독립운동의 역사를 찬란하게 수놓는 〈훈춘한민회〉의 배경도 캐나다장로회 교회이다. 〈한민회〉의 전신은 〈기독교교우회〉이며 황병길과 오병묵이 교우들의 신앙교류와 복음전파, 학교 건립과 구국교육, 독립운동 및 계몽활동과 미신타파에 목적을 두고 10년 가까이 훈춘성내교회, 하다문교회, 전선촌교회, 신풍교회, 대황구교회, 차대인구교회 등의 지도자들과 함께 운동을 이끌었다.
8부로 계속됨
북간도독립운동을 추동한 교회 설립자들
용정시교회의 창립자인 구춘선은 길동전도대, 간민교육회, 간민회의 주요성원 이었으며〈3.13〉 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의사부의 회장이었으며 3월 26일에는 국자가에서 2천명이 모이는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용정 시위 후에 만들어진 조선독립기성총회와 간도국민회의 회장직을 맡았다. 그는 국민회의 회장으로서 〈국민회군〉을 창설하였으며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승전의 토대를 닦았다. 그는 하마탕교회 조사였으며 하마탕에 보진학교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