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 안에 졸업 작품을 내야합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강대운이라는 화가의 대학시절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100호 캔버스 하나 위에 4년간 그림을 그렸다는 거죠. 결과적으로 이 화가의 스타일은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서정적이면서도 이지적으로 형성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먼저, 그림은 기초가 있어야한다거나, 절대적인 평가기준이 있다는 선입관부터 버리시죠. 미술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전업주부들도 요즘은 아카데미나 화우회 활동 등을 통해 익힌 솜씨로 전시를 하죠.
미술대학은 기량을 가르치거나 화가를 키운다기보다는 미술사의 문맥을 익히고, 미학적 감수성을 형성하는 곳입니다. 학교에서 물론 잘 배워야겠지요. 그러나 진정한 작가는 학교에서 배운 것을 모두 잊었을 때 탄생한다고 합니다.
졸업 전 출품규격의 화면-캔버스거나 화선지거나, 합판 등 뭐든 준비합니다. 아무 것이나 그립니다. 정물을 그리거나, 사생을 하거나 꿈을 그리거나, 다른 그림을 베껴도 좋습니다. 못 그려서 비뚤어지더라도 좋습니다. 그대로 출품하셔도 졸업은 될 것입니다만 (미술대학은 공모전이 아닙니다)...불안하다면 그 위에 아래에 권해드리는 방법으로 삼개월간 그림을 그리면 되겠습니다.

먼저 세계미술사-유럽미술가 중에서 작고 작가를 다루는 것이 어떠할까요? 우리에게 친숙한 한국미술과 한국미술가를 선택하는 것이 쉬울 것 같지만 오히려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료와 견해, 비전의 부족, 둘째가 명분과 개념화 절대불리입니다.
한국미술에 대한 평가는 매우 비극적입니다. 다행히 생존 미술가에게 미술이 생활의 방편이 되거나 수퍼스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지는 않습니다 마는 몇몇에 불과합니다. 이들은 물론이고 작고 작가에 대한 자료와 평가는 작품과 작품론과 작가론을 체계화 하기에는 미흡한 상황이죠.
미술에 대한 인식의 부족, 출판의 저작권 기피, 방송의 시청률의식에 따른 투자와 시간의 박탈은 미술관계자들을 좌절케 하기에 충분합니다마는 그보다 심각한 것은 세계미술과의 연계 혹은 독립적인 견해나 장르로서 독립할 수 있는 자생력의 결여입니다.

상대적으로 세계미술사의 작고 작가는 많은 자료, 객관적인 평가, 본류에 편입될 수 있는 연구의 가능성 등 잠재력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객관적인 본류에 비교되는 지류와 그 속에 휩쓸려 가는 모두의 비극이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연구의 방향은 쉽게 파악이 될 것입니다. 첫 번째로 세계 미술사의 10개 경향을 선택하시죠. 르네상스-바로크-신고전-사실주의-인상주의-후기인상주의 정도 선에서 머무시거나 표현주의, 입체주의 정도까지 가보시거나... 아예 추상표현주의나 앙포르멜까지 포함하시거나 ... 그전에 멈추는 것이 비교적 안전할 겁니다. 행위나 개념미술로 가면 짧은 시간에 다루기에 골치 아플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열 작가의 열 작품을 선택하여 한 작품씩 하나의 화면 위에 겹쳐 '베껴' 나갑니다. 이를테면 대본으로 정물화를 그렸다고 합시다. 그 위에 모나리자를 베낍니다. 아래 그림을 조금씩은 살려가면서 모나리자를 그려진 그림 위에 그려도 좋구요. 모나리자에 쓰인 스푸마토-안개처럼 뿌옇게 음영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정물화의 음영을 만들어줍니다. 마른 다음에 손가락으로 안료를 비벼 옆에 색깔과 번지게 해줄 수도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렘브란트-루벤스-다비드-꾸르베-마네-고갱 등으로 펼쳐나가고.. 자신이 있으면 피카소나 칸딘스키 등까지 손대는 것도 좋겠습니다. 그림을 바꿀 때는 앞에 그려진 그림을 무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수묵화라면 묵겸오채라 먹의 중후함이 쌓이고 유화는 질감이 탄탄할수록 깊이가 생기는 그림이니까, 먼저 그린 그림은 질감이라 생각하시죠.
이 과정에서 서툰 솜씨도 보이고, 틀린데도 있겠지요. 헤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개의치 마시고... 신나게 환칠도 하시고... 손바닥으로 눌러 붙이기도 하고... 그렇게 두어 달 보내시면 그럴듯한 그림이 되어갈 것입니다.
반면,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거나, 흰색을 많이 써서 뿌옇게 되었거나... 도저히 그림 같지 않다고 느끼시면 '파괴'하세요. 화면을 칼로 찢었다가 꼬매던지, 그게 과격하다고 느끼시면 진한 물감-군청이나 여러 물감을 비빈 회색 등으로 닥치는 대로 칠합니다.
유화라면, 약간 마른 다음 2개월 이상 그렸던 기억과 질감을 토대로 테레핀이나 아세톤 등을 묻힌 솜 혹은 걸레로 '살리고 싶은 부분'을 닦아내고, 그 중에 그래도 '더 살리고 싶은' 부분에는 손가락을 코리아나 화장품 선전하는 어느 배우의 제스튜어처럼 하얀 물감을 손가락에 찍어 발라줄 수도 있습니다.
이 정도 이야기를 드리고 보니까 질문자의 용기와 정직함이 감탄스럽습니다. 예술가들의 뱃속에는 '똥뱃장'이 가득한 경우가, 스스로 자문하고 자책하는 경우보다 더 많습니다. 지금의 자세라면 언제나 겸손하고, 자신을 채근하고, 겸허하게 작업에 임할 수 있을 것이니까, 오히려 선무당보다 좋은 입지라고 해도 좋습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오늘 캔버스를 준비하시고, 먼저 점 하나를 찍으세요. 캔버스가 겁나면... 호러 박쿠이-공간공포가 미술의 동기였다는 가설을 생각하시죠. 사람들은 흰 화면을 두려워하여 뭐라도 칠해야한다고 생각한다는 거죠. 점을 찍기도 두려우면 물감 묻은 천이나 붓을 던지셔도 좋겠네요. 처음 찍는 점은 바둑돌처럼, 무한의 공간을 자기화하는 작은 요새가 됩니다. 점은 선을 이끌고, 선은 면을 이끌고... 색과 형체와 질감과 양감을 부르고... 그 뒤는 그냥 그림이 나가는 대로 손만 빌려주면 되거든요.
그래도 불안하시면 다음 말을 생각해보세요. '열심히 해봐, 잘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어떤 화가는 선생이 날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약이 올라 화가가 되었다더군요.
보여 드리는 그림은 몽드리안의 나무 연작입니다. 몽드리안은 파리의 센강이 보이는 전망좋은 아틀리에에서 두터운 커튼을 드리우고서 마르고 닳도록 붓질을 해서 작품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럼, 선택은 당신의 몫입니다.
도판은 현대서양미술사에서 빌렸습니다
2016년 補遺
그간 미술전공이면서 미술평론가로서 활동해왔습니다. 그러다가 미술사상가로 직함을 바꿨습니다. 미술을 전공하는 것이 화가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미술평론이라는 평가나 해설보다는 미술현상의 심층에 있는 원형정신을 추구하는 것이 현재 내일의 방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그러니까 1980년대 평론활동부터 쉬었던 작품활동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간 틈틈이, 쉬임없이 갈고 닦았던 필력과 아이디어와 사상을 가다듬어 작품으로 응축시키려 합니다.
다이소...아시죠? 사각철망을 보는 순간 아하...하고 불이 반짝 켜졌습니다. 서른개를 앞뒤로 한지를 누덕누덕바르고 그간 그렸던 고행상을 붙였습니다. 두께를 만들고 필요하면 입체화하고 찢고...다시 물감을 덧붙이고...
떠오르는 단상을 모아 미술론을 쓰려합니다. 빔 프로젝트로 작품과 관계되지만 설명이 아닌 이미지들을 비스듬히 천정에 투사합니다. 제작과정과 제작이론을 비디오로 만들어 상영할 수도 있습니다.
고행상..이라 그랬죠? 하나의 철사로 한 사람의 고행자를 만들어 수십개를 벽면과 떨어져 달아매거나 설치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하나의 프로젝트는 많이 생각하고 많은 가능성을 검증하여 하나의 단일한 목소리로 환원하는 것이 하나의 전시의 미학, 공학입니다.
졸업전이라고 그러셨죠...지금 이야기를 내 졸업작품이라 생각하고 대입해보시면...작품이 스스로 길을 보여주고 이끌고...만들어나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