舞
고임순
춤꾼도 아닌데 풍악이 울리면 내 몸은 저절로 움직여진다. 흥겨운 리듬일 때는 경쾌하게 뛰고 싶고 조용한 리듬일 때는 유연한 몸놀림을 하고 싶어진다.
어릴 때부터 노래와 춤을 좋아한 나는 곧잘 집안식구들 앞에서 재롱을 부렸다. 그것이 특기가 되어서인지 초등학교에서 여고시절까지 줄곧 학예회 때마다 무대를 누비며 무용을 했다. 방학 때는 특별활동으로 개인지도를 받고 서울무대에까지 진출하기도 해서 한때는 무용가로의 꿈을 꾸어본 적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뒤돌아보면 동적인 무용보다 정적인 글쓰기와 붓글씨 쓰기로 세월을 불사르고 말았다. 이따금 먹을 갈아 춤 무(舞)자를 쓰면서 춤에의 향수를 달래본다. 5체 중에 특히 초서체의 무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춤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히고 만다. 붓에 먹물을 듬뿍 찍어 일필휘지로 15획을 유연하게 맥락을 잇는 붓놀림으로 풀어쓰다가 마지막 획은 위에서 아래로 힘차게 내려긋는다. 묵선의 강약과 갈필(渴筆)로 춤의 리듬이 살아난 무(舞)자는 마치도 한쪽 까치발로 서 있는 발레리나를 연상하게 한다.
나는 그동안 흙을 상징하는 갈색 종이에 여러 각도로 연구한 무(舞)자를 창작해 보았다. 중국 송나라 황정견(黃庭堅)의 필의를 담은 작품을 골라 개인전 때마다 출품했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서예술의 근본인 한문은 바로 상형문자여서 모든 사람의 가슴에 그 뜻이 그대로 전달됨을 알았다. 또 한글궁체의 '춤'자도 흘림체로 쓰면 흡사 춤추는 모습 같아 그 자형에서 꿈틀거리는 율동미를 느낀다.
춤은 육체를 소재로 해서 감정과 의지를 나타내는 일종의 조형예술로 육체의 꽃이라고나 할까. 손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으로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춤사위는 활짝 흐드러진 꽃이 나비를 부르듯 환상적이다. '백조의 호수'나 '호두까기인형'의 무용수들은 청초한 백합꽃들이다. 원삼 족두리에 버선발로 우리의 전통 춤을 추는 모습은 탐스런 모란꽃송이다. 그 꽃의 의미는 아름다움 이전에 살아 있음의 생동감이고 정열적 율동미를 말함이라. 그 속에는 항상 일관된 동경이 있어 이것이 춤의 꿈일 것이다.
춤은 원시인들이 하늘에 바치는 가장 진실한 동작으로 땅에서 발을 떼면서 하늘을 향해 기원하는 몸짓이었다. 그때의 춤은 농경 수렵사회의 전통을 이어서 단순한 오락이 아닌 풍작을 비는 종교적 의식이면서 씨족사회 이래의 전통을 잇는 축제로 발전해 간 것이다. 우리 나라 춤의 시초는 고구려의 동맹(東盟),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 등의 제천의식에서 그 맥을 찾을 수 있다.
자라면서 내가 더 춤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0대 무렵 어느 날의 광경 때문이었다. 산후 몸조리로 매일 산밑에 있는 한증막으로 찜질을 하러 가신 어머니를 나는 미역국과 우유가 든 주전자를 들고 찾아갔었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은 어머니는 미역국을 훌훌 마시고는 다시 거적을 쓰고 굴 속으로 들어가셨다. 폭삭 익어버린 생솔가지 냄새가 진동하는 어두운 공간에서 저렇게 땀을 흘려야 병이 낫는다니 신기하기만 하고 모두가 원시인들처럼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주 흥미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한증막에서 나온 어떤 할머니가 빨갛게 익은 몸에 수건을 두른 채 더덩실 춤을 추는 게 아닌가. 수건 밑으로 드러난 구릿빛 두 다리를 구부리고 펼 때마다 늘어진 젖무덤이 흔들거렸다. 그런데도 아랑곳없이 신명나게 춤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자 "얼씨구" 하면서 주위에 있던 아낙네들도 덩달아 합세하여 흥겨운 춤판이 벌어졌다. 숫기가 없는 어머니는 어린 딸을 의식해서인지 웃으며 바라보고만 계셨다.
나중에 어머님 말씀이 그 할머니는 남편과 사별하고 고생 고생 키운 외아들마저 병으로 잃어 한(恨)이 많은 여자라고 했다. 그때는 어려서 한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나중에 커서 알게 되었다. 할머니의 토속적인 춤은 서민의 삶 속에 뿌리 내려 살아있는 애환의 몸 동작으로 매우 슬펐다는 것을. 그 춤의 묘한 매력 때문에 나는 그 후로 자주 굿판을 기웃거리게 되었다.
그 시절, 우리들의 구경거리는 굿보러 가는 것밖에 없었는데, 두두둥 북소리와 함께 징 치는 소리가 나면 나는 잽싸게 그곳으로 뛰어나갔다. 벌써 많은 사람들로 웅성거리고 있는 어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나는 맨 앞에 앉아서 구경했다. 삶은 돼지머리와 칼이 꽂힌 떡시루판 앞에서 무당의 주술에 따라 주인은 두 손을 비비며 소원 성취를 빌다가 나중에는 무당을 따라 껑충껑충 뛰며 춤을 추는 것이었다. 굿판이 무르익으면 구경꾼들 중에서도 여럿이 나가 장단에 맞추어 몸을 풀었다. 돼지 입에 지폐를 물리고 흥이 나면 손가락에 낀 반지도 빼어 주고 신바람 나는 몸 동작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즉흥적 독무(獨舞)들은 종국에는 호흡들이 하나가 되는 군무(群舞)가 되
어 절정을 이루었다.
지금도 나는 붓을 들어 무(舞)자를 써서 들여다보면 전설처럼 떠오르는 할머니 춤과 무당춤이 무성영화시절의 한 장면처럼 떠올라 그 리듬이 강하게 가슴을 흔든다. 백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슴의 응어리를 풀어버리던 그 생동감이.
삶의 고뇌를 수필이라는 그릇에 담아내는 글쓰기, 그리고 먹빛과 선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붓글씨 쓰기, 명수필을 읽을 때 춤의 리듬같이 박진감 있는 생명력을 전달받게 되면 기쁨이 솟는다. 명필을 감상할 때도 춤보다 강렬한 율동미를 발견할 때 삶의 환희를 느낀다.
그러한 수필을 쓰고 싶다. 그러한 붓글씨를 쓰고 싶다. 눈으로 감상하고 가슴으로 느끼는 공간예술인 춤의 리듬이 깃들인 작품을, 모든 예술의 뿌리는 하나이므로.
1998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