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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달음의 순간 ♤ 스크랩 김흥호 선생 인터뷰
강경수 추천 0 조회 219 12.07.27 11:22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지금여기 9-6호(2004년 11/12월)에서 발췌 - www.herenow.co.kr

김흥호 선생 인터뷰

마음에는 걸리는 것이 없고(心無事)
일에는 빈틈이 없다(事無心)


선생님께 듣고 싶은 것은 35세 때 하셨다는 3가지 체험입니다. 말씀하신 중에 다석 류영모 선생을 모시고 다니면서 3년만에 북한산 계곡에서 요한복음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선생의 설명을 듣고 귀가 뚫리는 경험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체험이었습니까?

북한산 자체가 바위가 많은 곳입니다. 장마가 지면 폭포가 생기는 곳이지요. 지금은 가보질 않아서 모르겠는데 옛날 류영모 선생님과는 늘 자주 갔었습니다. 3년만에 귀가 뚫렸다고 했는데 사실 그때 다 뚫리지는 않았어요. 대충 뚫렸던 거지요.
대개 성경에 어려운 말들이 많지요? 그 어려운 말들을 다 정리하면 나중에 모르는 말 3개가 나오는데 바로 ‘십자가’ 와 ‘부활’, ‘성육신’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말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우리가 어떻게 머리로 알겠어요? 부활도 성육신도 머리로는 알 수가 없지요. 머리로 알 수 없는 이 3마디가 남았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날 선생님께서 요한복음 14장 6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렇게 ‘길이요’할 때 그것이 ‘십자가’라는 것을, ‘생명이요’하는 것이 ‘부활’, ‘진리요’하는 것이 ‘성육신’이라는 것임을 알아채게 된 거지요. ‘십자가’의 도(道)와 ‘부활’의 생명과 ‘성육신’의 진리를…
성육신의 ‘진리’라는 것은 ‘성령의 진리’고 부활의 ‘생명’이란 ‘그리스도의 생명’이며, 도(道)라는 것은 하나님의 길이지요. 결국 ‘십자가’ ‘부활’ ‘성육신’이라는 이 세 마디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라는 말과 같다는것을 그때서야 알게된 거예요.

아직 도(道)라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그 말들이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는 말씀입니까?

그래요. 우리는 십자가, 십자가라고 말들을 하는데, 그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십자가는 바로 도(道) 즉, 길이라는 거지요. 말하자면 그전까지는 십자가를 대상적으로 예수의 ‘십자가’, 예수의 ‘부활’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내 ‘도(道)’요, 내 ‘진리’요, 내 ‘생명’과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독교를 믿을 때 객관적으로 자꾸 쫓아다니느라 애를 썼었는데 이젠 기독교가 내 안으로 들어오게 된 거지요. 그래서 예수가 밖에 있는 게 아니고 이젠 내 속에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산다.?라고 한 것을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아직 그렇게 사는 것이 뭔지는 모르지만 내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를 알게 된 거지요. ‘내가’, ‘내가’ 하며 그리스도를 자꾸 찾아다녔던 것은 유위(有爲)의 세계지요. 이제는 그게 아니고 무위(無爲)의 세계, 그리스도가 내 속에 들어와서 이젠 “예수가 내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의 것”이라고 뒤집힌 거예요. 이것이 회개입니다. 류영모 선생의 말이 그 동안 내가 모르고 했던 그 말들을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된 거예요. ‘지금이 곧 그때다’, 지금까지 예수를 밖에서만 찾았는데 이젠 예수가 내 안에서 살고 있다, 내가 하나님 품안에 있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내 품안에 있다는 것을 말이지요. 이것은 요한복음 14장 10절에 ‘나는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은 내 안에 있다.’라고 잘 나타나 있지요. 내가 성령의 말을 듣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내 속에서 성령의 말이 우르르 나온다는 거예요. 마태복음 10장 20절에도 있어요. ‘지금 내 속에서 나오는 말이 내 말이 아니고 성령의 말이다.’ 그래서 말하자면 내가 뒤집히는 경험을 하게 된 거예요.


소위 ‘외재(外在)’가 변해서 '내재(內在)'로 바뀐다는 거지요. 3년만에 그렇게 어설프게 깨우쳤는데, 6년만에 그 자리에 또 갔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또 그 말을 했지요. 그런데 3년 전에는 어슴푸레 알았던 것을 그때가 되어서는 확실히 알게 되었어요. 6년만에 말이지요. 그리고 더 이상 선생님에게서 들을 필요가 없어졌어요. 내 속에서 하나님 말씀이 나오는데 더 들을 필요가 없었던 거지요. 그때 류영모 선생 밑에서 나왔습니다.

더 들을 필요가 없다라는 것은 밖에서는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어졌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지요. 그때 선생님과 여러 가지 다른 사정도 있었지만, 주된 이유는 그러했기 때문이예요.

그 다음으로 35세가 되시던 해에 주역을 공부하다 정말 큰 ‘깨침’을 얻으셨다고 하시던데…

류영모 선생 밑에서 나온 후 혼자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우선 유교부터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유교가 결국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이런 것인데 이것들은 소승(小乘)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주역’은 대승이거든요. 그래서 주역을 알아야겠다 생각하고 공부를 시작했어요. 맨 마지막 64괘에서 8괘, 4상 그 다음으로 더 올라가면 양의, 태극, 무극인데 그 세계를 붙잡으려 애썼던 거지요. 그렇게 애를 쓰고 있는데 그해 3월 17일 오전 9시 5분, 나로서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되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글을 쓰게 된 거지요. 그것이 1단계입니다. 그 다음 2단계는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산다는 것이 확실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구체적으로 행동에 들어가게 되었지요. 그리고 3단계는 성령의 역사가 확실해져서 이후로는 말도 하게 되고 강의도 하게 된 거지요. 그 동안은 내면에서만 깨달았던 것이 구체화되어 드러난 것입니다. 말하자면 밖에서 안으로 들어갔던 것이 다시 밖으로 나오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글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게 될지는 모르지만, 내가 늘 말하는 문구가 있어요.

단단무위자연성(斷斷無爲自然聲)
즉심여구토성불(卽心如龜兎成佛)
삼위부활영일체(三位復活靈一體)
천원지방중용인(天圓地方中庸仁)

이것을 그때 나도 모르게 써 내려갔습니다. 오전 9시 5분인데, 아주 골치가 아팠어요. 그래서 책을 보려해도 보기가 싫고 그냥 가만히 앉아 낙서를 하고 있는데 마치 누가 내 손을 붙잡고서 글을 써주는 것처럼 글이 써지는 거예요.

선생님의 의식으로 쓴 글이 아니라 저절로 쓰여진 글이군요.

그래서 계시라고 볼 수 있죠. 내가 무슨 생각을 해서 쓴 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골치가 아파서 생각할 수도 없는데 이런 글이 나온 거예요. 이 글을 쓴 후 지금도 무슨 뜻인지 몰라요.

2000년 12월 신동아에 났던 기사에는 해석이 되어 있던데요.

그것은 날 소개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해석한 거지요. 이런 것은 해석할 글이 아닙니다. 나는 단지 이 글을 통해서 어떤 상징을 보는 거예요.

상징이라는 것도 의미 아닙니까?

상징과 의미는 다릅니다. 이사야 53장을 보면 예수가 ‘어린양’의 상징을 보게 되는데 그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봅니다. 양이라는 상징, 그 양이 예수의 운명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운명을 자기운명으로 깨닫고 자기가 십자가를 지는 겁니다. 자기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게 하는 그 상징이 양이라는 거지요. 어린 양이 되어 하나님 앞에 제물이 되고 마는, 그저 상징이 아니라 자기의 운명을 바꿔놓는, 자신이 되는 겁니다. 예수가 그것을 보고서는 안 죽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상징은 보통의 일이 아닙니다.

받아들인다는 것과 깨닫는다는 것은 무엇이 다릅니까? 아까는 상징을 깨달았다고 하셨는데요.

상징을 보는 거지요. 상징을 보면 앞으로의 내 운명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그 운명에 따라서 내가 또 살아가게 되는데, 상징을 본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아까 쓴 그 글들 속에서 나도 내 운명의 상징을 본 겁니다.

어떤 상징을 보셨어요?

글쎄, 그건 내 상징을 보는 거지요. 그 상징을 통해 다시 하나님의 상징을 봅니다. 예수가 자기의 상징을 볼 때에 양인 것처럼, 나도 하나님의 상징을 이 글(단단무위자연성~)을 통해서 보게 되는 거지요. 그것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게되고, 나도 어떤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며 하나님과 나와는 어떤 관계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것을 소위 “하나님은 내 안에 있고 나는 하나님 안에 있다”라고 하지요. 상징을 봤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 상징을 좀더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그건 말로 하지 말아야 되는 것이고, 또 말을 못하게끔 되어 있어요. 그게 동양의 하나의 전통입니다.

그 상징은 선생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까?

그렇지요.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해당되지 않아요. 내 운명이니까요. 십자가를 드는 것은 예수뿐이지 다른 사람들이 십자가를 드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만의 유일한 운명이지요. 그런 것을 “하나님은 내 안에 있고, 나는 하나님 안에 있게 된다”고 하지요. 그것이 결정되면 다음은 ‘내 할 일이 무엇인가’가 나오게 되요. 그것을 도(道)라고 합니다. 그 다음은 할 일을 하게되는 것이고요. 내 할 일을 하는 게 내 도(道)인데 그것이 말하자면 내 십자가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십자가를 도(道)라 하는 겁니다.

선생님의 할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일식(一食)’하는 것과 ‘일좌(一坐)’라고 해서 새벽에 공부하는 것, ‘일언(一言)’이라고 해서 밤에 일찍 자는 것, ‘일인(一仁)’이라고 해서 낮에는 운동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4가지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의 십자가와 내 십자가가 다르지요. 예수는 금식기도 했지만 나는 금식기도가 아니라 일식?일좌입니다. 그렇게 ‘일식?일좌’ ‘일언?일인’이 내 십자가예요.


누구든지 각자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게 됩니다. 내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가는 겁니다. 내 십자가를 왜 내가 져야 되느냐면 내 속의 그리스도가 그걸 지워주기 때문이예요. 그것을 소위 내 도(道)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그걸 지키고 있는 거지요. 내가 하나님을 보았다라는 것이 없으면 이런 것이 안나오지요. 또 이것을 보면 또 다른 것이 나오는데 그것이 성령입니다. 내가 30에 깨우친 것을 입(立)이라면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을 보는 것이 40의 ‘불혹(不惑)’과 같은 거예요. 그리고 50에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것을 하게 되니 ‘지천명(知天命)’이지요. 나는 학교 선생이니까 전부 가르치는 것이었지요.


맨 처음 시작한 것이 ‘사색’이라는 잡지를 낸 것입니다. 그것을 144호까지 냈어요. 그 당시 이화여대 학생이 8천명이었어요. ‘사색’이라는 책을 맨 처음 보기 시작한 사람이 그중 2천명이니까 1/4이 본거지요. 그런데 마지막까지 본 사람도 2천명입니다. 그렇게 144호까지 12년 동안 계속해서 2천부씩 냈어요. 그런 다음 정년퇴직 후에 이 모임을 계속 해오고 있습니다. 지금 이게 내가 해야될 셋째 단계지요. 이것이 아까 말했던 성육신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지요. 그래서 매일 가르치면서도 이건 내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가르치는 것이지요. 그런 믿음으로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 말씀이 성령의 말씀이다, 그래서 성육신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군요. 그것을 믿음으로 한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믿는 것과 선생님이 믿는 것은 무엇이 다른가요?

지금 말하는 것을 사람들은 내가 말하는 줄 알지만, 나로서는 이것이 성령이 말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성령이 말하는 것이라고 단순히 생각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무엇이 있는 것입니까?

깨달음이 있어서 말하는 거지요. 깨달음이 없으면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지요. 기독교인들을 앞에 두고 불교에 대해서, 노장사상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다 깨달음이 있어서 말하는 것이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20~30년 동안 계속 말이 나오는데 그것이 내 힘으로 나오는 건 아니겠지요. 내 말이라면 오래 나오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자꾸 나오는 것이지요. ‘나를 알라’고 했는데, 난 복음이 우리의 정신을 깨우는 거고, 내 육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해요. 교회에 가면 그저 십자가, 십자가 하는데, 난 내 정신을 깨우는 것이 ‘십자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전혀 다르잖아요? 내가 그런 말을 어떻게 자신 있게 하겠어요? 나로서는 성령이 도와서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자기 십자가의 상징을 발견하기를 바라시는 것이군요. 그렇다면 자신의 십자가를 발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발견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있으니까 이게 계속되지 그렇지 않으면 계속되지 않아요. 한사람이라도 깨는 사람이 있어야 앞으로도 계속되겠지요. 깨는 사람이 계속 있으면 100년도 계속할 수 있고, 1000년도 계속할 수가 있지요. 그러나 깨는 이가 없으면 계속이 안돼요. 예수가 있고 바울이 있어야 계속되듯이 말이지요. 또 바울 다음에 어거스틴이 있고 어거스틴 다음에 루터가 나와야지요. 기독교(감리교)로 말하면 웨슬리가 나와야 하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들이 나오지 않았으면 계속이 안됩니다. 반드시 여기에는 내가 말한 대로 ‘대승(大乘)’이 나와야 합니다. 대승의 ‘승’은, 스승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큰 스승이 나와야지, 큰 스승이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지요. 류영모 선생은 내게 큰 스승이지요. 그분은 자기가 말한 것을 자기가 말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말한 것은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말한다고 했지요.


‘삼위부활영일체(三位復活靈一體)’. ‘삼위’라는 것이 성부?성자?성령입니다. 성부?성자?성령이 내 속에서 부활하여 내가 삼위와 하나의 몸이 되는 이것이 ‘영일체’입니다. 내가 이것을 받은 다음에 깨우치게 된 것이지요. “아! 사는 것이 내가 사는 것이 아니구나.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산다. 내가 말하는 것은 성령이 내 안에서 말하는 거다.”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가야 진짜 말이 됩니다. 내 생각만 그냥 말한다면 학교에서 지식을 가르치는 것과 같겠지요.

‘삼위부활영일체’라는 말을 선생님도 모르게 쓰셨는데 그것이 어떻게 앞으로는 이렇게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것을 한마디 한마디로 해석하면 해석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내 말뜻은, 해석한다고 해서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을 통해서 그 속에 있는 상징을 보게 되어야 진정 가치 있는 글이 됩니다. 누구든지 계시를 받으면 그는 계시 속에서 상징을 보게 되지요. 상징이 자기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건 설명할 필요도 없고, 내 상징이 뭐라는 말을 할 필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또 그 사람 나름대로 받는 것이 다릅니다.

그 상징에 대해서 좀더 말씀해 주십시오.

알아봤자 쓸모가 없어요. 왜냐하면 지금 묻고 있는 선생도 선생대로 계시를 받아야지, 내 계시를 알아 봤다고 해서 선생이 계시를 받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럼 상징을 받기 전까지는 그냥 기다려야 합니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다려서 되는 것도 아니고, 받으려고 해서 받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건 신앙이니까요. ?지금이 곧 그때다.? 하는 순간이 사람마다 다르게 옵니다. 예수는 30살에 그 상징을 받았어요. 모세는 80살에, 웨슬리는 37살입니다. 그렇게 상징을 받는 때가 다른데 다만 같은 것이 있다면 가슴이 뜨거워졌다는 경험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진정한 웨슬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웨슬리가 아무리 뜨거워지려고 한다해서 뜨거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선생님은 답답함을 풀기 위해 공부하시고, 주역도 이해하려 애쓰며 노력하신 것으로 압니다만…

노력을 했다고 하면 율법이 되고 말아요. 바울이 예수를 믿으려고 애쓰다가 바울이 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다 바울이 된 것입니다. 그런 경우 노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불교에서는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말합니다. 혜능은 뭔가 답답한 것이 있었고 그래서 찾으려는 애씀이 있었지요.

혜능이 ‘점수’하다가 혜능이 된 것은 아니지요. 찾으려고 하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혜능은 혜능대로 ‘돈오’한 것이지 무얼 찾으려고 노력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세계는 ‘무사(無思)’, ‘무위(無爲)’, ‘무언(無言)’과 같이 무의 세계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겠다 하는 ‘내’가 있으면 안 됩니다. 나도 노력하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은총’이라고 합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예수도 왜 예수가 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만들었으니 예수가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소위 ‘무의 세계’가 되고 이것이 ‘신앙의 세계’입니다. 내가 열심히 하면 뭐가 되겠지 라는 것은 무(無)의 세계가 아니고 유(有)의 세계지요. 이것이 ‘성즉리(性卽理)’와 ‘심즉리(心卽理)’가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송학(宋學)은 객관적 유심론인 성즉리의 철학과 주관적 유심론인 심즉리의 철학으로 나뉜다 - ‘생각없는 생각’ 中에서). 물론 내 경우에는 ‘점수’도 해가다가 나중에는 이렇게 된 것도 있지만, 이건 내가 그렇다는 것이지 다른 사람도 꼭 그렇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노력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지만 ‘노력으로 될 일은 아니다’라는 말씀이 깊이 와닿습니다. 지금 뭔가 자기의 답답함을 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많고, 기독교의 경우에는 은총을 받기 위해서 믿음을 갖는 사람들도 많은데, 종국의 세계에 다다를 때는 노력과 상관이 없다는 것이군요.

바울이 애쓰다가 그렇게 됐다고 말할 수 없듯이, 무의 세계는 그냥 무의 세계로 두어야지 그것을 유의 세계와 연결 지으려 한다고 해서 연결 지어지지는 않습니다. 0에다 0을 아무리 더해도 0이듯이 말이지요. 0은 0이지 하나가 될 일도 없고 둘이 될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그런 세계가 있다는 거지요. 이런 것을 소위 형이상(形而上)이라고 합니다. 형이상의 세계가 있다는 것,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있다는 것, 나도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얻으려고 애쓴 것이 아닌데, 어떻게 하다가 그렇게 된 것뿐이지요. 그렇게 되어서 지금 하듯이 이렇게(김흥호 선생은 20년 동안 국경일도 명절도 없이 한결같이 매주 일요일 이화여대 교회 강의실에서 오전 9시부터 동양경전과 성경을 강의해오고 있다: 편집자 주)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게 내 운명이고 상징입니다. 이 운명을 다른 사람은 흉내낼 수도 없고, 낼 필요도 없지요. 그 사람은 그 사람 나름대로의 인생을 살아가는 겁니다. 인생은 다 그런 것이지요. 다 독립하고, 다 자유로운 거지, 누가 어떻게 했다고 해서 나도 그렇게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세계란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영문으로 된 선생님 책에 ‘Thought beyond thought’란 제목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생각을 넘어선 생각’이라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그것을 한문으로 말하면 ‘무사(無思) 무위(無爲) 동어대통(同於大通)’이라고 합니다. 생각을 넘어서서, 내 생각이 아니고 성령이 도와서 말하는 글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강의하는 것이 더 이상 선생님의 말이 아니고 성령이 도와서 한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성령이 말한다는 것을 선생님 내면에서는 어떻게 느끼십니까?  

내가 잘 알지 못했던 것을 깨달았을 때 성령의 도움이라고 합니다. 35세때 느꼈던 것 뿐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에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내가 강의에서 말했던 것들은 이전에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입니다. 마태복음을 읽고 가만히 생각하면서 5~6일이 지나는 어느 순간 오늘 내가 말한 것들이 머리에 떠오르더군요. 떠오르는 것을 우리는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이것들은 지금까지 내가 전혀 생각해 본적이 없던 것이예요.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과연 내 생각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이 도와서 나를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음’과 ‘성령’은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생각한다는 것은 ‘생각’일 뿐입니다. 그런데 ‘beyond(~을 넘어서)’라고 붙인 것은 내 생각이 아니라 깨달았다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사색 잡지에 칸트를 읽고 소개하는 글을 썼던 적이 있어요. 그 당시 칸트의 생각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가만히 생각하다가, 그 핵심이 나에게 잡힐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그것을 그 달의 권두언으로 썼습니다. 그렇게 쓴 글을 보고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하는데, 그 말이 한없이 순진하다는 거예요. 진리라는 거지요. 사람이 쓴 것 같지 않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Thought beyond thought’가 되는 겁니다.

사람의 생각을 짜내서 만든 것 같지 않다는 것이군요.

무언지 모를 한없는 깊은 뜻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요즘은 책이 있으면 한 번 보고 내버리는 시대인데, 그렇게 써 내려간 144권이나 되는 글을 대학생들이 계속해서 본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 이건 하나님이 도와서 하는 일이지, 내 힘으로 하는 일이 아니다는 거지요. 매번 쓸 때마다 다음 호엔 또 어떻게 쓸지 매우 고민하면서 144호까지 써갔는데, 학생들에게 읽혀진 것은 그들에게 끌리는 뭔가가 있었던 거지요. ‘thought beyond’가 있으니까 학생들에게 끌린 것이라고 봅니다.
무(無)라는 것은 허공이나 진공입니다. 진공이 있으면 밖에 있는 공기가 막 끌려 들어갑니다. 이렇듯이 사람들을 끌 수 있는 힘이 어디 있을까요? 그것은 ‘무아’에 있는 겁니다. 내가 여기에서 여러분을 가르치겠다는 생각을 하면 사람들이 절대로 안 오지요. 나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좀더 쉽게 풀어보려고 애쓰는 그 매력에 사람들이 온다고 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이 보내지 않았으면 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처럼 여기 온 사람들도 하나님이 보내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강의 들으러 온 사람이나 나나 욕심을 채우려는 게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내 욕심 앞세워 돈 받으려고 나오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평택에 사는데 여기 이화여대 교회까지 아침에 오려면 일찍 출발해야 합니다. 이것도 내게는 보통 힘든 일이 아니지요(김흥호 선생은 85세임). 나라고 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올 가치가 없는 일이예요. ‘나’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니까 할 수가 있는 거지요. 나라고 하는 것이 없는 것, 이게 진공인데, ‘진공묘유(眞空妙有)’입니다. 진공이 될 때에 묘유는 아주 신비한 힘이 나오는 겁니다. 진공이 안되면 묘유가 안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라는 것은 ‘나’가 없는 상태입니다. 나라고 하는 것이 있으면 아무 것도 안된다는 말이지요.


내가 지금 하는 강연 내용을 심중식 선생이 풀어 썼는데 1시간 말한 것을 녹취하려면 10시간이 걸립니다. 그 동안 100시간, 1000시간을 말했는데 1시간 분량을 10시간씩 걸려서 다 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해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분도 하고픈 것이 아닐텐데, 하여튼 이렇게 나오는 이유는 서로간에 ‘나’라고 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심중식 선생에게 고맙다라는 말 한번 한 적도 없고 점심 한끼를 대접한 적도 없어요. 그런데 저절로 저절로 자꾸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무위자연’이라고 합니다. 누가 한 것도 없는데 저절로 저절로…


오늘 인터뷰도 억지로 내가 무슨 말을 하겠다고 하는 것이 없어요. 이전에 생각한 것도 없고, 또 어떤 사람이 찾아오겠다고 하면 누가 찾아오는지도 모르지요. 그렇지만 지금 30분이 지났는데 이 30분 동안 말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어야 ‘진리’가 됩니다. 나라고 하는 것이 없으니까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라는 것이 없이 하는 것이 ‘무위’요, 그렇게 되어야 ‘자연’이고 진리입니다. 말할 때도 내 생각을 이 사람에게 알려줘서 ‘내 파(派)를 만들어야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 생각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굳이 하나를 만든다면 나는 하나님의 파를 만들겠다는 거지요. 나는 내일 죽을지도 모르고, 언제까지 갈지도 모르지만 할 수 있는 것은 하다가 죽어야겠다는 거예요. 그것이 내 운명이니까요. 운명은 내 마음대로 될 수 있는 게 아니예요. 예수가 십자가를 예수 마음대로 졌나요? 아닙니다. 지기 싫은데도 할 수 없이 졌어요. 이것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도 했는데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했지요. 예수도 할 수 없이 그렇게 가는 거지요. 그러면서도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할 적에는 자기라는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것은 예수가 아니지요. 예수가 아닌 그 무엇이 달리는데 그 무엇을 인자(人子)라고 말합니다. 인자가 거기에 달리는 거지, 예수가 달리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인자’라는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어떤 존재가 거기에 달리게 된다는 겁니다. 예수가 잘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무아의 세계’에서 그렇게 되는 거지요.


사색이라는 잡지를 144호까지 낼 수 있었던 것도 무아의 세계에서 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beyond'라는 말이 자꾸 나오는 거예요. 'beyond'가 '무아'라는 말이지요. 무아에서 나오는 무사(無思)를 'beyond thought(생각을 넘어선 생각)'라고 한 것입니다.

그게 상징을 받았다는 의미가 되는군요.

상징을 받은 것과 연결되지요. 그렇지만 상징이 곧 그것이다라는 것은 아닙니다. 상징은 3개인데, 하나님의 상징을 보고 그리스도의 상징을 보고 그 다음 성령의 상징을 봅니다. 성령의 상징을 본 때 이후로 '사색'이란 잡지를 12년 동안 했고, 여기 이화여대에서 매주 일요일마다 강연을 20년 넘게 하고 있는 거지요. 그 상징을 보지 못했으면 이것이 되지 않습니다.

3개의 상징을 봤다고 하셨는데, 상징을 받았던 때가 다 다릅니까?

류영모 선생님과 헤어지고 나서 1년 내내 주역 공부를 했습니다. 공부를 하다가 주역의 맨 나중인 무극이 태극하는 그 세계를 붙잡지 못하다가 35살 나던 3월 17일 그때 붙잡은 거지요. ‘천원지방중용인’ 이라는 것이 주역의 핵심인데 그때 상징 하나를 봤지요. 바로 하나님의 상징이었어요. 십자가라는 것은 하나님께 나를 바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상징이라고 해도 되지만 나로서는 ‘하나님의 상징’입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하나님을 보게 되니까요. 6월 5일에 또 하나를 봤는데 그것은 ‘진리의 상징’입니다. 그 다음이 그해 12월 12일에 본 ‘성령의 상징’으로 ‘생명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가 내게 있어서는 3월 17일, 6월 5일, 12월 12일에 본 각각의 상징 3개가 되는 거지요.

6월 5일 진리의 상징을 받으실 때를 조금 더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6월 5일 그 당시 나는 ‘중용, 대학’을 공부하면서 그것을 내 식으로 번역했어요. 대학을 번역해서 류영모 선생께 가져다주었지요. 선생이 번역한 것을 읽어보더니, ‘이건 김군이 쓰긴 썼는데 김군이 쓴 것이 아니요.’라고 했어요. 김군이 쓴 것이 아니고 성령이 썼다는 거지요. 그때부터 류영모 선생이 나를 보고 ‘현재(鉉齋)’라는 호를 지어 주었습니다. 현재는 ‘계시’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내가 쓴 글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로 썼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또 중용을 번역했는데 번역하면서 상징을 보게 된 것입니다.

중용의 어느 글귀를 번역하실 때였습니까?

중용 1장을 번역할 때였어요. 그것을 어떻게 표현했는가 하면 ‘하늘 밑에 숨긴 마음 몬몸 끊고 자라나옴 보임’이라고 했어요.

[全文] 한울믿혜 숨긴마음 몬몸끈코 잘아나옴 보힘 / 한얼잘알 몬몸숨김 / 숨긴몬몸 잘알한얼 / 마음끈임 나옴믿힘 / 믿힘나옴 끈임마음 / 마음힘끈 한몸잘킴 / 잘킴한몸 힘끈마음

보임 이라는 것은 ‘보인다’ 라는 뜻입니까?

‘관(觀)’입니다. 상징을 본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하늘 밑에 숨긴 마음, 몬몸 끊고, 자라나옴 보임.’ 이때 보임하는 것이 ‘상징’을 보는 것입니다.

[참고 중용1장 원문]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非道也 / 是故 君子 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 君子 愼其獨也 /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 致中和 天地 危言 萬物 育焉 / 仲尼 曰 君子 中庸 小人 反中庸 /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

번역을 하다가 상징을 본 것이 아니라, 상징을 보고 나서 번역을 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아마 그렇게 되는 것이 더 옳을 거예요. ‘하늘 밑에 숨긴 마음’, 마음, 마음 하는데 이 마음이라는 것이 하늘 밑에 숨어있다는 얘기지요. 이 마음이란 ‘내 마음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 마음대로 하옵소서’ 라는 그런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하늘 밑에 숨긴 마음 몬몸 끊고’에서 ‘몸’은 몸이고 ‘몬’은 물질이예요. 즉 ‘물질과 내 육체를 끊고서’ 이게 결국은 ‘부활’입니다. 물질과 몸을 끊고서 자라 나옴, ‘부활’이지요. 그렇게 자라 나온 그 모습을 내가 상징으로 본 거지요.

그러면 ‘하늘 밑에 숨긴 마음’이, 그것을 끊고서 나오는 것이군요.

자기 마음을 보는 거지요. 나는 내 속의 내 마음을 모르잖아요? 그런데 내 속의 내 마음을 내가 보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심즉리(心卽理)’입니다. ‘리(理)’자는 본다는 것입니다. ‘하늘 밑에 숨긴 마음, 몬몸 끊고 자라나옴 보임’ 하면서 소위 ‘내가 내 마음을 보게 된’ 거지요. 내가 내 마음을 본다는 말은 결국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될지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이기도 해요.

선생님의 마음을 보니까 어떠셨습니까? 마음을 봤다는 것이 앞으로 해야할 일이 어떤 것인지 알았다는 얘기입니까?

그것도 속해있지요. 말하자면 마음 때문에 하는 것이니까 마음이 없으면 못하는 거지요. 내가 이런 마음이니까 이 마음을 채워야 되겠다, 심즉리지요. 이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 내가 일식, 일좌, 일언, 일인 이 네 가지를 해야겠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소위 도(道)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도라 하고 맨 처음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는 것을 진리라고 하는 것이 맞는데 내가 볼 때는 맨 처음 볼 때가 도이고 그 다음이 진리가 되요. ‘하늘 밑에 숨긴 마음, 몬몸 끊고 자라나옴 보임.’ 의 '보임'은 '진리'입니다. ‘관(觀)’한다는 것이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12월 12일은 어떠하셨습니까? 진리를 보시고 나서 그 이후에 무엇을 하셨습니까?

12월 12일은 ‘햇빛은 물위에 오르고 달힘은 나무 가온을 잡았네.’입니다. 나무 가온은 나무 한가운데를 말합니다. 아침에 해가 뜰 때에, 동해바다에서 햇빛이 올라오는 세 번째 상징이 나타났습니다. 그 한 해 동안 내가 무엇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아요. 학교 선생이니 가르치고 있었겠지요. ‘햇빛은 물위에 오르고 달힘은 나무 가온을 잡았네’. 이것은 아침에는 해가 떠오르고 저녁에는 달이 나뭇가지에 걸려있다는 말입니다. '해와 달'을 말하는 것으로서 ?생명?입니다. 이것을 통해 세 번째 '생명'에 대한 상징을 보게 되었습니다. 햇빛이 지금 동해바다에 떴다는 것이 아니고, 그 말속에서 어떤 상징을 본다는 것입니다.


류영모 선생님의 시 ‘수출고고영현외(首出高高領玄外) / 요긴심심이황중(腰緊深深理黃中)’을 보다가 상징이 나왔을 겁니다. 시의 뜻은 첫 구절이 우리의 머리가 옷깃 위에 높이 올라와 있다, 즉 우리의 머리가 하나님 나라에 속해있다, 둘째 구절이 허리 속 아주 긴장된 단전 깊은 곳 진리의 땅속에 밝은 진리가 있다 입니다. 내가 류영모 선생의 글을 볼 때 딱 떠올랐던 것이 ‘햇빛은 물위에 오르고 달힘은 나무 가온을 잡았네.’ 였어요. 나는 그것을 햇빛과 달힘으로 그렇게 잡은 것이지요. 빛과 힘이 합쳐져서 생명이라고 본 거예요. 그 말을 통해서 생명의 상징을 본 것입니다.
정리하면, 3월 17일에는 ‘십자가의 상징’ 또는 ‘도의 상징’을 보는 것이고, 6월 5일에는 ‘부활의 상징’ 또는 ‘진리의 상징’을 보는 것이고, 12월 12일이 ‘육신의 상징’ 또는 ‘생명의 상징’을 보는 것이지요. 이 3가지가 내 일생에 제일 중요한 사건이지요. 그것이 없으면 오늘날 내가 강의하는 것이 나오지 못합니다.

그때 체험이 지금까지 변함없으신 것이군요.

네. 사색도 그것을 가지고 한 것입니다. 이런 것이 없으면 사색이 안 나오지요. 그래서 내 속의 생명이 약동하는 것이고, 또 듣는 사람의 생명도 약동하는 것이고 모든 생명이 약동해서 이 클래스가 되가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많이 오든, 적게 오든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김흥호 선생의 매주 일요일 이화여대 교회 무료강의는 100명 이상이 참석하고 있다). 한 사람이 와도 좋고, 오지 않아도 좋아요. 류영모 선생 역시 한 사람 혹은 오는 사람이 없어도 혼자서 두 시간을 앉아 있다가 가곤 했어요. 그런 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문제이기 때문이예요. 사람이 오건, 안 오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지요. 오면 말하는 것뿐이고, 안 오면 안 오는 것뿐이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거예요. 안 와서 기분이 나쁘다는 것은 없다는 거지요. 오기 싫어서 안 오는 것은 할 수 없잖아요. 이런 것을 소위 ‘무아의 세계’라고 해요. 그리고 기분 나쁜 일이나 화나는 일도 있을 수 있지만 그런 것은 다 운명이라고 생각하니까 문제가 아니라고 봐요.

35세가 되시던 해에 3가지 체험이 다 일어났는데 35세 전과 후에 달라진 점이 있습니까?

아까도 얘기했지만, 병이 없어졌습니다. ‘나알알나’라고 하는데 ‘앓다가 나은 거지요.’ 그전까지는 병이 굉장히 많았어요. 1년에 두 달 정도는 앓았지요. 그런데 그 이후에는 병이 없어졌어요. 이화여대에서 28년간 가르치면서 하루도 결근을 한적이 없습니다. 또 서울 감리교 신학대학에도 빠짐없이 15년간 나갔어요. 여기도 지금 20년째하고 있는데 빠짐없이 나오고 있어요. 그만 했으면 ‘나알알나’가 내게는 하나의 증거지요.

드러난 현상으로서만 그렇습니까? 아니면 선생님의 내면에서 뭔가 달라져서 병이 나은 것인가요?

내면에서 달라졌다는 것은 아까 말한대로 지금까지 내가 일식할 이유도 없는데 일식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색을 12년간 했는데 안 하려면 얼마든지 안 할 수도 있었고, 잘한다고 칭찬하는 사람도 없었기에 그만둘 수도 있었지만 계속 한 것입니다. 지금도 이렇게 강의 한다고 해서 잘한다고 하는 사람 하나도 없어요. 그래도 계속하고 있는 거지요.

선생님의 내면에서 느끼고 있는 것은…

지금 이것을 하고 있는 게 제일 좋습니다. 다른 걱정할 틈이 없거든요. 한 주 내내 성경 생각만 합니다. 다른 걱정을 하면 성경 생각을 어떻게 하겠어요? 그러니까 행복한 거지요. 그렇게 난 35세부터 지금까지 굉장히 행복하게 산 거예요. 병이 없어진 것이 제일 행복한 거지요. 그리고 30년 동안 계속 내가 발전해 온 것도 있지요. 잡지 하나씩 내는 동안만큼 내가 발전하는 거지요. 지난 주일에 몰랐던 것을 이번 주에 말하면서 알게 되고, 이 다음 주일에 말하면 또 알게 되는 거지요.


나는 그것을 생명이라고 합니다. 죽었다라고 하는 것은 발전이 없는 것입니다. 자꾸 발전이 있으니까 살았다고 느끼는 거지요. 살았다는 것에 대한 행복감, 다시 말해 ‘발전해 가는 것에 대한 행복감’이 참 좋다는 거지요. 이것을 안 하고 있으면 한 주가 그냥 휙 지나가고 마는데 이것을 하고 나면 한 주가 가질 않아요.

오늘은 뭘 가르쳐야 할지를 아주 고민합니다. 고민하는 동안 내가 발전하는 거지요. 이것도 다 내 십자가예요. ‘알아졌다’ 하면 굉장히 좋은 것이고, 굉장히 좋아서 그 말을 여기 와서 하면 내 말을 듣는 사람도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기쁨을 전하는 일’라고 말하는 겁니다. 장자(莊子)를 강의한다고 해서 장자를 전하는 것은 아니란 거지요. 장자는 하나의 재료일 뿐 사실은 내 속의 기쁨을 전하는 거예요. 내 속의 기쁨이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기쁨을 전하자는 것이지 내 기쁨을 전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순전히 이것은 ‘무사, 무위, 무언’ 이렇게 ‘무(無)’자가 들어가는 것이지요. 나는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아까 강의하시던 중에 ‘믿음은 말을 초월해야 한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믿음이라는 것은 자기의 생각을 초월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이 안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힘입니다. 그래서 나는 믿음을 ?밑힘?이라고 해요. 근본적인 ‘힘’이라는 거지요. 근본적인 힘이란 바로 하나님의 힘입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내가 사는 거지 내 힘으로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내가 왜 앓지 않았는지 지금도 몰라요. 이게 아마 하나님께서 내게 힘을 줘서 앓지 않게 된 것이 아닐까요? 내가 살아가는 게 하나님이 살아가는 것이지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살아가니까 앓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래서 ‘무아’인 거예요. 장자로 말할 때는 ‘무’가 붙는 것이고 그리스도로 말할 때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밑힘, 밑틈, 밑숨이라 해요. 밑틈이란 터 나온다는 거지요. 숨은 호흡한다는 ‘숨’이예요. 밑은 모두 근본적이라는 말이지요. 생명이라는 것을 나는 ‘밑숨’이라고 하는데, 밑이라고 하는 것이 근본적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신앙은 근본적인 사실이지, 현상적인 사실이 아니란 말입니다.

근본적인 체험이 없으면 진짜 믿음이 아닌 것이군요.

나로서는 그렇지요. 그때부터가 믿음이지, 그전에는 아닙니다. 나도 초기에 믿음을 얻으려고 애쓴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믿지는 않은 거지요. 내가 믿음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나서 믿음을 얻으려고 부흥회도 다니면서 애썼는데, 결국 그렇게 해서 믿음이 얻어진 것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근본체험이 있던 3월 17일부터 ‘아! 내가 믿는다.’ 내가 뭘 믿는가? "십자가를 믿는다.  부활을 믿는다. 성육신을 믿는다. 그리스도를 믿는다. 나는 기독교인이다."가 되더군요. 기독교인이라는 자신이 생기니까, 그 다음에는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할 필요도 없고 남이 나보고 믿지 않는다고 해도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졌어요. 장자를 가르치면서도 나는 예수를 믿는 거지 장자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런 강의를 자꾸 하느냐 하면, 도교에서는 ‘유위’의 세계에서 ‘무위’까지 갔습니다. 또 불교에서도 대승까지 갔고, 유교에서도 주역까지 갔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기독교에서도 이 세계에까지 가야되지 않겠느냐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 교회의 사정을 가만히 보면 아직도 '율법'이지, '대승'까지 못 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강한 믿음, 믿음 하지만 실제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신자가 천 만명이라고 하지만 천 만명 가운데 믿음이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거예요. 그저 직업적으로 목사가 되기도 하고 교인들은 대부분 기복신앙이고, 정말 내가 진리를 깨닫겠다는 그런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아무리 오래 되었다 해도 사실은 기독교가 시작도 못했다고 보는 거예요.

다른 나라는 어떻습니까?

루터같은 사람이 나왔지요. 어거스틴도 있고 웨슬리도 있지요. 그런 사람들이 나왔다면 그건 진짜 믿는 거지요. 물론 다 그렇게 믿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도자만은 그런 사람이 나와야 된다는 거지요. 퇴계는 진짜 주자학을 믿은 사람이고, 원효도 진짜 불교를 믿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나왔다는 것이 우리 문화의 진정한 기초라는 것입니다.

원효가 진짜 믿은 사람이라는 것을 무엇을 보고 아십니까?

원효의 생애를 보면 언제 자기가 깨달았다는 것이 나옵니다. 그런 원효의 글을 보면 정말 대단합니다. 당시에 그 어려운 한문으로 불교를 어떻게 그렇게 요약했는지 보면 정말 대단하지요. 그가 쓴 글들을 읽어보면 정말 원효라는 사람이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화엄경도 요약해서 말하고 법화경도 요약해서 말한 글들이 있는데 그것이 핵심을 뚫었지요. 그런 사람이 있으니까 신라 문화가 나왔던 것이지요. 높은 산 하나가 있으면 낮은 산은 얼마든지 생기게 되고 높은 산이 없으면 낮은 산들이 시원치 않게 되지요. 또 높은 산이 있어야 물이 흐르지, 낮은 산에서는 물이 마르고 말아요. 일본인이 한국인 가운데 제일 숭배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하면 원효라고 합니다. 일본에 가면 원효의 책만은 그 사람들이 아주 받들어 모십니다. 퇴계의 주자학도 받듭니다. 그 사람들도 안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원효를 모르지, 일본인은 누구보다도 원효를 존경합니다. 그쯤 되니까 우리가 한국인이라고 할 수 있지, 원효같은 이가 없었다면 아프리카와 무슨 다름이 있겠어요. 우리에게도 이런 대승이 있었다는 거지요. 앞으로 기독교에서도 거저 목사가 아니고 대승인 목사가 나와야 됩니다. 기독교에서도 원효같은 사람이 나와야 기독교가 살지, 그냥 밤낮 떠들기만 해서는 안 되겠지요.

강의 중에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살았느냐? 죽었느냐?’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정신의 근원이지 물질의 근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질은 ‘있느냐? 없느냐?’ 이지만 정신은 ‘살았느냐? 죽었느냐?’ 혹은 ‘깨느냐? 못 깨느냐?’입니다. 사람의 핵심은 ‘정신’입니다. 우리가 동물과 다른 것이 정신입니다. 육체로 말하자면 호랑이 보다 못하지만 정신을 말하면 동물의 정신을 다 합한 것 보다 더 크지요.


그리고 정신이 있다고 해서 만질 수 있나요? 아닙니다. 진리를 깨달았다고 했을 때 밖으로 달라지는 게 있나요? 그런 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본인에게는 ‘깨달은 세계’와 ‘깨닫기 전’은 아주 달라지거든요. 병은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건 나타날 수도 있고, 안 나타날 수도 있지요. 바울도 깨달은 후에 바울의 병이 나은 게 아닙니다. 예수도 모든 병을 다 고친 것은 아니지요. 고칠 수도 있고, 못 고칠 수도 있어요. 그런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러나 깨는 것 만은 누구나 깰 수 있다는 거지요. ‘정신은 보편적인 것’ 입니다.

네.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장시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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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07.28 06:22

    첫댓글 김흥호 선생님 ...
    배울것이 많은 분 이네요.
    144권 ...

  • 12.07.28 18:14

    우리 인생에 개인적으로 부당한 일도 많이 발생하지요..
    그때 침묵하면 비겁하다고도 하지만...
    그것까지도 감내하는 십자가의 죽음이 없이는 부활도 성육신도 참으로 요원한 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평생을...
    저들은 ..용서하시옵소서라고 분노를 숨기고..
    소외된 자를 아끼듯 사위를 펼치고..
    자식의 도리를 흉내만 내며..
    하느님의 침묵에 슬퍼하고..
    나홀로 신앙에 고독해하며..
    내 양껏 이룬 것이라고 생각하다 죽을 것 같습니다..

    오롯이 에고가 살아 꿈틀거리는 성숙되지 못한 삶일지라도..
    내 영혼을 맡기리라는 베짱이..유일한 동아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날씨는 더운데 센치멘탈에 빠져 ..ㅎㅎ 고맙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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