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연기
함석헌
사람의 일상 사용하는 말 중에는 이따금 아무 의미 없는 공각(空殼)만인 것이 있다. 이런 것은 얼핏 생각하기에는 아주 의심 없이 명료한 듯도 하고 별로 무해한 듯도 하나 기실 깊이 반성을 하여 볼 때는 하등의 사실적 내용을 가지지 않는 단순한 개념의 사해(死骸)에 불외(不外)하는 것이요, 그의 유령적 존재가 생명의 신선미와 약동력을 퇴축시키는 데 있어서 더구나 신앙생활의 경화, 영적 의식의 몽롱화에 있어서 그 힘이 실로 막대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물론 그 작용은 만성의 질병같이 극히 점진적으로 되는 것이다.
그런 말로서 보통 흔히 쓰이는 것의 하나는 우연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이 우연이라는 말을 아주 많이 사용한다 우연한 기회로, 우연한 이유로, 우연한 실수, 우연한 성공, 우연한 생각, 우연한 사단(事端), 우연한 재난, 우연한 질병 …그저 우연이다. 그렇게 간다면 개인도 우연, 사회도 우연, 역사도 우연, 인간만사 우연 아닌 것이 없어질 듯하다. 사실 허다한 사람이 인생을 우연한 일시현상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인생에는 우연한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우리로서 생각건대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 일호흡, 일별견(一瞥見)이 문자대로 우연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또 이 인생만이 아니라 온 우주의 모든 현상이, 개구리의 짓거리고 아메바의 오물거리는 것까지 다 그래야 할 목적이 있고 그렇게 되는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것이다. 모든 사물 모든 현상은 인생을 향하여 자기네의 영적 의의의 천명을 탄원하고 있다. 또 인생에는 그럴 만한 의무가 있다. 그런 것을 거의 반무의식중에 관용하는 ‘우연’이라는 일언하에 무시하여버리는 것은 너무나도 잔혹한 일이요 너무나도 무지다. 우주는 이 일언하에 암흑 속에 빠진다.
원래 이 말은 인생사실의 경화한 형식의 세계에서 나온 것이다. 고로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의 영적 지식의 빈약을 표명하는 것이요 엄밀한 의미에서 무신앙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연기’라는 말이다. 오늘 할 것을 내일로 연기하고 전주(前週)에 필(畢)하였을 것을 이 주에까지 연기하는 등 우리는 연기하는 일이 많다. 만일 우리가 날마다 연기하는 일이 눈에 볼 수 있는 체적(體積)을 가지고 퇴적(堆積)된다면 일생의 마지막에는 실로 놀랄 만한 산악(山嶽)이 묘문(墓門)앞에 솟을 것이다.
그러나 연기는 과연 가능한 일인가? 오늘 할 일을 미루면 내일 할 수 있다. 금년에 할 일을 명년으로 연기하면 그때에 가서 할 수 있는가. 이것도 역시 어리석은 일이다. 오늘 못하였으면 오늘은 잃은 것이요 죽은 것이다. 내일 하면 그는 내일 일이다. 그만큼 인생에는 손(損)이 있었고 생명에는 낭비가 있었고 영에는 패함이 있었고 악에는 이김이 있었다. 고로 생명에는 연기가 없다고 우리는 부르짖는다. 이는 육체적 생명에도 그랬지마는 더구나 영적 생명에 있어서 그러하다. 인생의 번민이 있을 때에 해결을 후일로(비록 여하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더라도)미루는 것은 인생을 그만큼 떼어 불진실에 팔아먹는 자다. 영의 목마름이 왔을 때에 참 샘을 구하기를 (비록 여하한 육적 보수, 여하한 일시적 청량제를 받고라도) 연기하는 자는 자기의 영을 그만큼 자해하여 죄악에 굴복케 하는 자다.
연기하는 자는 충분한 이유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피로라든가 분주라든가 안정을 얻을 수 없다든가 스승을 기다린다든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그 어떠한 것임을 물론하고 결국은 도덕적 불충실로부터 오는 양심의 회오(悔悟)ㆍ자책을 결여케 하여 일시적 자위를 얻으려는 아지적(兒智的) 수단이나 그렇지 않으면 노력하는 생활을 싫어하여 현상유지의 구안(苟安)을 탐하려는 나약에서 나오는 것에 불외(不外)한다. 이러한 자기 생활의 불진실, 자기 영혼의 빈약을 증명하는 일시적 마취의료제의 복용으로도 정말 자기의 상상대로 연기가 되는 줄 믿고 내일을 기다려 책임을 다하려하는 인생들은 실로 가련한 자들이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에 조금만 고요한 맘을 가지고 조금만 주의하여 듣는다면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환색(還索)한즉 어떠하겠나뇨” 하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누가복음 9장 60∼62절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여기에 대한 가장 적절한 교훈이다. 그는 순시찰나(瞬時刹那)의 여유 주저도 불허하는 즉각적 복종을 요구하는 명령이다.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고로 책임을 벗는 듯이 오상(誤想)하고 ‘되는 대로’ 살아도 좋게 되고 오늘 못하면 내일 할 수 있다고 망상하는 고로 분투의 용기를 잃게 된다. 전자는 진리를 은폐하는 관념적 유령이요 후자는 실행력을 소모시키는 정신적 신기루다. 허다한 사람이 이 유령의 불빛을 따라, 신기루를 찾아 육체적 내지 정신적 일시의 쾌락을 추구하여 헤매는 동안에 황량한 사막의 원두(原頭)에 그의 사해(死骸)를 남기게 된다. 진리의 생활을 하려는 자는 모름지기 어리석은 지혜의 비복(婢僕)인 두 괴물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서조선 1929. 8월, 8호
저작집30; 18-107
전집20; 5-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