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스앤젤레스에서 프린스턴, 그리고 리치먼드로
김도일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승인 2023.04.12 10:31
◇ 남미 교사훈련단, 1988
로스앤젤레스에 머물던 당시 나는 동양선교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서 사역의 첫발을 내디뎠었다. 교육부서의 담당인 이중용 목사님께서 가장 젊었던 교육전도사인 내게 총무전도사를 맡기는 바람에 다양한 사역을 경험해 볼 수 있었다. 그러한 중책을 맡기 직전에는 남미 교사훈련단 여정에 동행하는 특별한 경험도 하게 되었다. 1988년 즈음이었을 텐데 그때 동행했던 교우들 중에 생각나는 이름은 이중용, 최만삼, 최근숙, 송창현, 김강, 엄애경, 김부연, 황은철, 조상윤, 이정우(직함을 생략하고 사진이 몇 장 남아 있으나 이름이 기억나질 않아 무척 애쓰며 물어물어 대충 적어본다) 정도다.
그중 최만삼 장로는 나를 끔찍이도 사랑해 주던 맏동서였다. 그런데 사십 대 후반에 간에 질병을 얻어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셨다. 그가 병환과 싸우느라 장로교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나는 마침 프린스턴신학교로의 먼 길을 떠날 때였다. 멸균실에서 병마와 고투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유리창 너머에서 안타까워만 하고 있는 내게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따스하게 웃어주었다. 그 희미한 웃음이 얼마나 커다란 격려이자 응원의 표현인지 알았기에 나는 눈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끝까지 곁을 지키지 못하는 사무치는 미안함으로 길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 대면이었다. 그는 병으로 고생하며 생사를 오가던 중에도 유서를 남겨 주변을 정리하는 정갈한 성품의 사람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아끼던 볼보(당시에도 무척 오래되었지만 매우 단단해 보이던)를 내게 주고 싶어했다. 그 차를 팔아 신학을 공부하며 하나님의 사역을 준비하는 내게 보탬이 되길 바랐다. 사진에서는 맨 뒷줄 우측에서 좌로 다섯 번째에 서 있는 분이다.
당시엔 그리 중요한 사역자도 아니었던 나에게 남미까지 동행하는 특권이 주어진 게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여기지 못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단장이었던 최 장로님의 배려였고 이중용 목사님이 나를 훈련하고자 계획했던 특별한 은총이었다. 브라질, 파라과이, 아마존 지역 등을 두루 다니며 교사훈련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마다 나는 어린이 전도에 관한 세인트루이스 워링턴 소재 어린이전도협회 본부에서 훈련받은 내용과 그때의 경험을 나눌 수 있었다. 많은 교사 앞에서 글 없는 책, 노래, 게임 등을 안내하고 소개하는 중에 긴장할 때마다 박종호의 찬양을 워크맨으로 들으며 마음을 다잡고 다시 열린 마음으로 프로그램에 임하곤 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그런 여러 여정과 관계를 뒤로하고 떠나온 프린스턴신학교에서의 시간이 처음엔 군대에서의 시간처럼 잘 흘러가지 않았다. 신학적 훈련도 잘 되어있지 않았지만, 워낙 서부의 분위기와는 다른 동부의 분위기가 다소 차갑고 냉소적으로 느껴져 낯설게 보였다. 게다가 추위가 몰려오는 한겨울에도 앞사람이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 주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던 문화는 내게 정나미가 없어 보였다.
바이올라 교수들의 소박한 정서와 학생들을 위해 따스하게 기도해 주는 분위기를 프린스턴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가끔은 이인숙 박사처럼 어머니의 품을 느끼게 해주는 교수도 있었지만, 대개는 차가운 이성주의자들로 보였다. 물론 나의 그러한 느낌은 편견에 가득 찬 것이었음을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되었다.
로마서를 가르친 요한 베커 교수는 겉으로 보면 별로 흠모할 것이 없는 학자로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그의 삶을 들여다보니,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트렌턴 시내에 집 없는 노숙자들의 삶을 돌봐주던 성자 같은 사람이었다. 앎과 믿음대로 실천하려 애썼던 그를 글과 말로만 판단하려 했던 나를 돌아볼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큰 은혜였다.
보수적인 관점과 진보적인 관점을 아우르는 강의로 구성되었던 프린스턴신학교의 수업은 하나하나 무척 소중했다. 평생(아마도 17년 동안)을 힌두문화권에서 지내며 선교했던 찰스 라이어슨 교수의 선교학 강의, 개혁신학의 핵심을 짚어준 다니엘 밀리오리와 이상현 교수, 교회사의 맥락을 짚어준 캐서린 세켄필드, 상담학의 도날드 캡스 교수, 기독교교육학의 프레다 가드너, 리차드 오즈머, 제임스 로더, 이인숙 교수의 헌신적인 가르침은 지금도 내게 깊이 남아있다.
그들의 가르침 덕에 나는 훗날 리치먼드 미 장로교 기독교교육대학원에 가서 박사학위 과정을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었다. 물론 그 바탕엔 바이올라대학교에서 읽은 책과 교수들의 가르침, 두 교회(나성영락교회와 동양선교교회)에서의 교육목회 사역의 경험을 가능하게 이끌어준 분들의 보살핌과 도움이 있었음을 분명하게 밝혀두고 싶다.
바이올라에서 대학원을 마칠 당시 교수 몇 분이 트리니티신학교에 가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교수로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나는 교수가 학생을 격려하는 덕담으로만 여겼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이클 앤쏘니, 딕 라이더, 스탠 레너드, 로버트 레드클리프, 매킨토쉬, 그리고 쉐릴 교수 등이 내게 깊은 관심을 기울여 주셨다. 그들의 소망대로 내가 만일 시카고의 트리니티에서 박사학위를 마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지만, 다 부질없는 상상이다.
아무튼 나는 프린스턴신학교로 갔고 장로교 개혁신학을 지속하게 되었다. 프린스턴신학대학원을 마치자마자 로스앤젤레스의 두란노서원에서 잠시 행사를 주관하였을 때 만난 하용조 목사님은 그 뒤로 끈질기게 나의 인생사에 계속 등장하시는데, 당시에 나를 서울 온누리교회로 초청하여 함께 사역하고 싶어 하셨다. 그러나 목회로 당장 뛰어들라는 초청에 응하기 전에 나의 공부 역사가 계속되어야만 했던 그야말로 새로운 도전에 당면했다.
프린스턴신학교 가족기숙사에서 우리 가족이 머물던 곳의 바로 위층에 살던 이는 당시 시애틀의 크리스천신학교에서 신학을 마치고 다시 대학원을 다니던 김진홍 목사였다(두레의 그분과는 동명이인이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꼭 할 말이 있으니 만나자는 것이다. 그는 본래 밤에는 잠을 자지 않고 공부를 하는 사람이었다. 위층 거실에서 밤새 삐그덕삐그덕 의자 소리를 내었기에 나는 그가 자지 않는 것을 알았다.
그런 그가 밤중에 만나자고 하더니 “사람이 젊은 시절에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전도사님, 우리는 유학을 와서 영어가 잘 들리지 않는데도 공부하는데, 어째서 전도사님은 이민을 와서 우리보다 영어를 잘 듣고 말할 수 있는데 공부를 계속하려 하지 않으세요?”
그때는 이미 박사과정을 여는 학교들이 학생선발을 완료한 시기였기에 그러한 계획은 이미 다 지난 일로 치부했고, 그의 말도 흘려듣고 싶었다. 그래서 아무리 설득해 보아야 공부할 마음이 더는 없다며 거절했다. 완강하게 거부하는 나에게 김진홍 목사는 후퇴할 기색을 보이지 않고 특유의 은근과 끈기로 밤새 밀어붙였다. 나는 마지막 배수진이었던 “이제 거의 모든 학교의 박사 학위 과정 응시가 마감되었다”며 피할 길을 모색했다. 그런데 그가 “아직 남아 있는 학교가 있다면 지원하겠느냐”고 하는 게 아닌가.
나는 결국 “여태 공부하느라 양가 어른들과 후원자들에게 폐를 끼쳤으니 전액 장학금과 일정한 생활비 지원이 관건”이라는 또 다른 조건으로 피했다. 그는 모든 상황을 인지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두 조건을 만족할 학교가 분명히 있을 거라며 한발 물러섰다. 하나님의 계획이 어디 있는지 분명하게 알지 못했던 나는 주님께서 나를 이끌어 가실 거라는 막연한 믿음만 갖고 있던 터였다. 김진홍 목사는 반드시 학교를 찾아봐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그날 밤 나를 놓아주었다.
나는 평소에 잠을 깊이 못 잘 뿐만 아니라 잠이 올 때면 초저녁이라도 잠자리에 들어야 버틸 수 있었고, 밤이 깊어질수록 초점이 흐려지고 몸이 힘들어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잠자리에 들어서도 그의 간절한 부탁과 여러 생각들이 떠올라 잠들지 못했고, 그와 약속한 대로 학교를 알아보게 되었다.
예상대로 거의 마감되었고, 마지막 학교에서 나를 무척 환영하며 전액 장학금과 약간의 생활비 지원도 해줄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다만 대학원 박사과정을 위한 영어 공인점수가 조건부로 붙어있었다. 나는 미국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기에 추천서만으로 프리스턴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박사과정의 경우는 달랐던 게다.
*김도일은 장신대 기독교교육학과 교수로 한국기독교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하며 다음 세대를 세우고, 가정교회마을연구소 공동소장으로 이 땅 위에 하나님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에 힘쓰고 있다. 이 지면을 통해 삶 속에 구체적으로 역사하시며 이끌어 오신 그분의 발자취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김도일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cnews1970@naver.com
출처 : 주간기독교(http://www.cnews.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