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일/집결 : 2018년 9월 8일(토) / 4호선 길음역 3번출구 (10:30)
◈ 산행코스 : 길음역-정릉역옆-정릉-북악산길-508스카이단지-북악골프연습장-육각정-보국사-뒤풀이장소
◈ 참석자 : 8명 (종화, 재홍, 승열, 원무, 동준, 정한, 광일, 양기)
◈ 동반시 : "진정한 여행" / 나짐 히크메트
◈ 뒤풀이 : 양염돼지고기 구이에 소·맥주, 막걸리 및 물냉면 / '청수장' < 정릉동, (02) 913-6176 >
'시산회' 343번 째의 날이다. 오늘이 가을을 알리는 백로(白露)이다. 이때쯤이면 밤에 기온이 내려가고, 대기중의 수증기가 엉켜서 풀잎에는 이슬이 맺혀 가을의 기운이 완연히 나타난다. 아침부터 맑고 쾌청한 가을의 날씨이다.
옛 중국 사람들은 백로입기일(白露入氣日)로 부터 추분(秋分)까지 시기를 5일씩 삼후(三候)로 나누어 그 특징을 말하였는데, 초후(初候)에는 기러기가 날아오고, 중후(中候)에는 제비가 강남으로 돌아가며, 말후(末候)에는 뭇새들이 먹이를 저장한다고 하였다. 이 때의 쯤에는 장마도 걷히고 중후와 말후에는 청결한 날씨가 계속된다고 한다.
산우들 대부분은 약속시간인 10시 30분, 집결장소인 길음역에 모였다. 이 총장님과 정릉동에 살고있는 염재홍 친구는 이정표를 보며 산책코스를 협의하고 있다. 8명의 산우들이 집결하여 정릉방향으로 출발이다. 우이신설선인 정릉역 근처의 아리랑골목시장을 지나서 한 이정표에는 좌측으로 300m에는 조선 제1대 태조비인 신덕왕후 원찰인 '흥천사'가 있고, 바로 앞에는 서울 정릉의 정문이 있다고 표시되어 있다.
정릉의 정문 입구에는 매포소와 검표소가 있었고, 정릉에 대한 안내촉지도 및 세계유산과 사적 제208호 설명서가 표기되어 있다. 정릉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1396)의 릉으로 그 면적은 299,573㎡ 이다. 때마침 정릉의 문화해설사(황병주 씨)가 아닌 주말이면 자원봉사를 해 주신다는 정한일(?)씨가 정릉(貞陵)에 대해 상세히 설명을 해 주신다.
태조와 신덕왕후가 처음 만나 사랑을 싹 틔운 일화는 유명하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 어느 날, 말을 달리며 사냥하다가 목이 타서 우물을 찾았다. 마침 우물가에 있던 처자에게 물을 청했는데, 그녀는 바가지에 물을 뜨더니 버들잎 한 움큼을 띄워 이성계에게 건네 주었다. 이성계가 버들잎을 보고 화를 내자, 처녀는 "갈증이 심해 급히 물을 마시다 체하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그리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대답을 들은 이성계는 갸륵한 마음 씀씀이에 반해 그녀를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그녀는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마자 현비로 책봉되었고 이성계와의 사이에서 방번, 방석 두 왕자와 경순공주를 낳았다. 본래 태조의 원비는 신의왕후였으나 태조 즉위 전인 고려 공양왕 3년(1391)에 사망했기 때문에 조선 왕조의 최초 왕비는 신덕왕후 이다.
태조(이성계)는 고려시대 풍습에 따라 향처(고향 부인), 경처(개경 부인)를 두었는데, 강 씨는 경처로 황해도 곡산부 상산부원군 강윤성의 딸이다. 이성계는 원 동녕부를 원정, 공을 세우고 남해 일대 왜구를 수차례 토벌하면서 고려 중앙인 개성에 진출했다. 하지만, 지방 토호라는 출신 때문에 한계를 느꼈고, 개성의 권문세족 출신인 강 씨와 정략적으로 혼인을 하였었다.
신덕왕후는 태조(이성계)와 사이에서 방번, 방석 두 왕자와 경순공주를 낳았다. 아들인 방석이 왕세자로 책봉되도록 애썼으며, 이와 관련해서 이방원 등 신의왕후의 장성한 아들들과의 후계 다툼으로 알력이 있었다. 정도전과 합세하여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한 뒤 신덕왕후는 1396년 음력 8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2년 후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의안대군을 포함한 신덕왕후의 아들들은 모두 제거되었으며, 사위인 이제까지 살해를 당하였다. 이성계는 강씨의 사망 이후 실의에 빠져서 직접 능 옆에 작은 암자를 짓고 행차를 아침,저녁으로 바쳤으며, 1397년 1년여 공사 끝에 170여 간 규모의 '흥천사'를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태종(이방원)은 신덕왕후를 후궁 지위로 격하시키고 태조가 애지중지하던 정릉을 태조의 사망(1408년 음력 5월 24일)후에는 파괴하고 이전했다. 태종 9년 1409년 정릉은 서울 정동지역에서 도성밖의 양주, 현재의 서울시 성북구로 옮겨졌다.
태종은 더욱이 정동에 있던 정릉의 원래 자리의 정자각을 헐고, 봉분을 완전히 깎아 무덤의 흔적을 없애도록 명했으며, 1410년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정릉의 병풍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게 하여 온 백성이 이것을 밟고 지나가도록 하였다.
진입공간에서 상설도를 자세히 설명하며,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길인 향로, 어로와 비각, 비각 비문 및 수복방, 제상과 신어상 등등의 설명과 태종의 명에 의해 현재의 자리로 옮긴 정릉은 향·어로가 "ㄱ"자로 꺾여 있어 일반적인 왕릉 조성양식과 차이를 보였으며, 정릉에서 제향일은 매년 9월 23일(양력)이란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정릉의 관람을 맞치고 정릉의 좌측에서 부터 경내의 둘레길을 한바퀴 돌고서 정문을 나왔다. 산우들은 북악산 '하늘한마당' 쪽으로 올랐다. '508스카이단지'를 지나 '북악산책길'이 있는 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배낭에서 간식을 내어 놓는다. 떡과 과일을 안주로 막걸리 한,두 잔을 마시고 다시 '북악산책길'로 걷기 운동을 하였다.
이정표에는 '하늘마루'종점에 까지 2.4km, '하늘한마당'시점 까진 800m로 되어있는 곳이다. 포장된 길가에서 휴식을 취한 후, 모다 점심때를 맞추어 뒤풀이장소로 내려 가기를 원한다. 산책길을 조금 내려가니 '북악골프연습장'이 있고, 쉼터 '육모정'도 있는데, 미세먼지 없는 좋은 날에 '육모정'에 앉아 먼 곳까지 전망이 좋은 곳을 배경으로 단체 인증사진을 촬영하였다.
육모정에서 휴식을 끝내고 미리 생각을 해 놨던 뒤풀이장소로 출발을 하였다. 뒤풀이장소는 양염돼지갈비가 맛있는 곳이라고 한다. 이 곳은 30년 전통 특제양염 돼지갈비와 함흥냉면이 유명한 식당으로 북악터널과 정릉2동주민센터 사이 '보국사' 건너편에 있는 '청수장'이란 곳이다.
'청수장'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양염 돼지갈비를 굽는 사이에 오늘의 동반시를 낭송하자고 한다. 핸드폰에 올려져 있는 동반시를 시력이 좋지않아 동반시를 낭송 할 수가 없는데, 옆에 앉아있는 종화 산우는 다촛점(돗보기+@) 안경을 건내 준다. 오늘의 기자라 다촛점 안경을 끼고 동반시('나짐 히크메트' 시인의 "진정한 여행")를 낭낭하게 낭송하였다.
"진정한 여행" / 나짐 히크메트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리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다.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낭만적인 혁명가로 불린 20세기 터키의 위대한 시인 '나짐 히크메트', 그의 시는 5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되었으나 조국 터키에서는 국적이 박탈되었고 1965년까지 시집이 금서였으며, 이후에도 그의 시를 읽는 사람은 공산주의자로 매도 되었다.
그러나 2000년, 50만 터키 시민이 청원서에 서명하고 노벨문학상 작가 '오르한 파묵'이 '히크메트'의 문학을 재조명하면서 그의 국적복원을 촉구하는 지식인들의 목소리가 높아져 마침내 터키정부가 58년만에 그의 복권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유해는 아직 모스크바에 남아 있다고 한다.
그의 시 "감옥에서 쓴 편지"는 러시아어로 번역된 것을 백석 시인이 우리말로 번역을 하여 1956년 평양에서 출간했다. 잠언시 모음집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에 이 시를 처음 소개하면서, '히크메트'의 이 시를 위해 시집을 내는 것이라고 편집자에게 말했었다고 한다.
무한한 희망과 무조건적 긍정으로 가득한 시를 그가 장기수로 복역하면서 한 평의 감옥 안에서 썼다고 생각해 보라. 그만큼 깊은 울림이 있는 시이다. 삶이라는 감옥안에서 우리는 어떤 시를 쓰고, 어떤 희망을 노래하고 있는가? “진정한 여행”이란 시는 의미가 깊은 좋은 시이다.
'청수장' 식당에서 30년 전통의 양염 돼지갈비와 함흥냉면을 맛있게 먹었는데, 동준이 친구는 뒤풀이의 비용을 협찬 하겠다고 한다. 집행부와 산우들에겐 고마운 일이지만, 이 총장님은 인근의 찻집('커피나무 아래')에 가서 커피나 한 잔씩 하자고 하여 정릉역(2번출구) 근처에서 팥빙수를 시원하게 먹고, 커피를 운치가 있게 마셨다.
이번 산행은 신나는 산행은 아니었지만, 세계유산 조선왕릉중에 하나인 정릉(貞陵)을 탐방하여 조금이나마 조선왕릉의 역사를 알게끔 해 줘서 고마울 뿐이다. 조선조의 역대 왕릉에 대한 접근은 그 외형적 특징만으로도 당대의 역사적 사실들을 반증해 볼 수 있는 흥미로운 대상이다.
조선조의 왕릉은 27대 왕과 왕비 혹은 계비(繼妃), 그리고 추존된 왕들을 포함해 전체 44기의 릉(陵)이 조성되어 있다. 이 중 태조의 비(妃) 신의왕후의 제릉(齊陵)과 정종(定宗)과 비(妃)인 정안왕후를 모신 후릉(厚陵)만 북한 개성시에 있어 우리가 아직 답사할 수 없는 지역에 있고, 거리상으로는 유일하게 강원도 영월에 조성된 단종의 장릉(莊陵)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서울과 경기도에 산재해 있다.
특히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東九陵)이나 경기도 고양시의 서오릉(西五陵), 서삼릉(西三陵)은 왕릉군(王陵群)을 이루고 있는 필수 답사지역이라 할 수가 있다. 서울 주변은 단순한 관람으로 왕릉의 진면목을 이해하기에 여러 가지 부족한 점들이 많다. 앞으로는 왕릉의 모습들을 살펴보고 우리 역사를 더듬어 보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 아니겠는가...
조선왕릉은 전체 형태나 석물의 예술적 표현에서 고유한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중국이나 일본 능묘와 견주어 알 수 있듯이 조선왕릉의 봉분 축조방식이나 각종 석물배치는 주변나라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문무석인의 조형이나 병풍석과 난간석은 조선왕조 조형예술에서 달성한 독특한 경지를 잘 보여준다. 또한 홍살문에서 향로·어로를 따라 이어지는 정자각의 단순하면서 절제된 건축형태는 조선왕릉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엄숙하고 독특한 조형세계이다.
1910년 조선왕조가 막을 내렸을 때 왕릉의 제례 역시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운 여건에 처해졌다. 그러나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이 어려운 소임을 맡아서 제례를 계속해 나갔으며, 그것은 21세기에 접어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은 왕릉제례 외에 종묘제례도 주관하면서 조선왕조의 무형적인 문화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한다.
차후 산행 때에도 조선왕조의 또다른 왕릉을 탐방해 봤으면 하는 바램이며, 모든 산우들의 건강을 기원하면서, '시산회'! '화이팅'! '九九팔팔二三死'!
2018년 9월 10일 정한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