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고은학회 창립”
현실과 역사에 대한 관심
삶의 인식을 시로 전개
‘분노는 힘이다’ 외치며
시대와 함께 해온 문인
한국전쟁 때 출가 해
정화운동·불교신문 창간…
‘글 버릴 수 없어’ 환속
‘무사승(無師僧)’. 고은 시인이
자신의 문학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스승에게 전수받은 일 없이 스스로 시인이 되었다는 말이다.
“정작 나는 문학 도중에야 이것저것 고전을 만난다. 나는 문학전집 안 보고 문학을 시작했다. 신석정 <촛불> 따위나 좀 읽어본 것밖에는 없다. 백지가 내 문학의 시작이다.”(1973년 6월 3일 고은의 일기) 1960년대 본지 주간으로 있을 때 신문의 빈 공간을 메우기 위해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고은 시인은 지난 60년간 한국문학의 꽃이었다. 저서 150여 권을 펴내고, 세계 25개 국에 그의 작품이 번역돼 소개되면서 한국의 깊은 정서를 알렸다. 지난 11일 고은 시인의 문학세계를 연구하기 위한 고은학회(회장 한원균)가 창립했다. 이날 발표된 자료를 토대로 ‘고은의 문학’을 짚어봤다. |
지난 11일 수원문화재단에서 열린 고은학회 창립식에 함께 한 고은 시인과 학회 회원들. |
고은 선생의 문학이 학문으로 가능할까. 한원균 한국교통대 교수는 지난 11일 고은학회 창립기념세미나에서 ‘고은학’을 주제발표했다. 한 교수는 “고은은 한국문학사의 타자라고 할 수 있다. 자기시대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모든 글쓰기의 전범에 그가 있었다. 고은은 근현대 역사를 문학으로 투영한 거울과 같은 존재”라며 문학적 가치를 평가했다.
“1987년 고은은 어느 시국 선언자리에서 ‘분노는 힘입니다’라고 외쳤다. 우리는 여기서 ‘존재는 시작하는 것’이라는 헤겔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매개를 통해서, 동시에 그 자신의 지양(Aufheben)인 매개를 통해서 발생한다’는 명제에 동의해야 할 것이다. 매개를 형성하는 것, 그것이 학회의 필요성이다. 생존 시인에 대한 연구가 가능하지 않다는 논리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 문학을 연구하던 사람들이 정치적 문제를 피하려던 국문학계의 관습이 원인이다.”
고은 시인에 대한 연구는 1990년대부터 시작됐다. 진보주의 운동이 쇠퇴하고 소비에트 연방과 동구권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한국의 분단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 졌다. 이에 고은의 문학관과 철학을 통해 이런 현상을 보려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
한 교수는 “고은 시인은 새로운 감수성과 기법을 통해 세대의식의 발현, 현실과 역사에 대한 관심, 삶에 대한 통합적 인식이라는 구조로 시를 전개하고 있다. 고은의 문학은 정치적 상상력, 현실주의적 지평을 심화 확대시키는데 기여했다”고 평가하고 “고은의 시는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을 보인다. 하나는 삶의 경험을 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내 보임으로써 비판적 지성이 강조되는 ‘정신의 시’를 구축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보편언어’로 명명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관의 모색이다. 고은의 시는 여전히 역사와 현실의 모순과 이에 대한 극복의지에 초점화되어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특히 “남북 갈등의 해소가 당위적인 차원이 아니라, 인류사의 보편적인 문제의 하나라는 사실과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으로부터 해결점은 다시 찾아야 한다는 시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며 시대의 아픔에 함께 하려는 고은 시인의 노력을 주목했다.
“고은문학은 이제 그 자체로 ‘시원으로서의 학문’으로 성립되어야 한다. 고은문학이 한국 근대사의 파행적 국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고은문학을 정치적 관점, 혹은 저널리즘 감각으로 읽는 오류와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고은의 글쓰기는 자기시대의 모든 삶과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있지만, 그 삶의 문제에 예속되지 않는다.”
한원균 교수는 “이러한 문제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고은문학을 연구할 때, 한국문학의 지평이 새롭게 열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문학평론가인 염무웅 영남대 명예교수는 1975년 발간된 고은 시집 <부활>에 해설 원고를 썼던 자신의 기억을 소개했다. 당시는 유신체제에 대해 문인들이 집단 저항을 하던 시기였다.
“당시 고은 시인은 효봉스님 제자로 20대 초반의 나이에 불교신문 주필을 역임한 승려시인 정도로 인식됐다. 하지만 서정주 단회 추천으로 시인의 호칭을 얻으며 파격적으로 문단에 데뷔한 시인이었다”고 회고하며 “그는 순수시를 유지하면서도 현실참여의 정서를 문학 전반에서 수용했다. ‘선(禪)에서 고정된 것은 죽은 것이다. 문자도 같다. 고정된 것은 죽은 것이며, 문자로 정착된다는 것은 생명성의 상실을 의미한다’(고은의 시의 사춘기 중, 1961)는 그의 말처럼 선과 문학에서 고은은 정형화된 외피를 거부했다”고 말했다.
“선(禪)과 마찬가지로 시는 고은에게 있어 언어의 고정성·법칙성을 초월하여 자유의 영역을 추구하는 해방적 활동이다. 강물을 건너고 나면 뗏목을 버려야 하듯 시인은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 사물의 근원에 다가가는 작업을 끝없이 계속하면서, 그와 동시에 언어에 의한 사물포착의 순간에 벌써 텅 빈 기호로 굳어져가는 그 언어로부터 또한 끊임없이 떠나야 한다. ‘언어문자와 비문자 사이에서 나는 탕아입니다’라는 고백은 시인이, 어쩌면 선승이, 부닥친 역설적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일 게다. 그런 점에서 고은 문학의 양적 방대성은 반세기 넘도록 지속된 언어와의, 또는 언어의 불완전성과의 불굴의 투쟁의 뜻하지 않은 부산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고은 시인의 많은 작품 중에서도 <만인보>는 많은 논문의 제재로도 활용된 역작이다. 수많은 개인의 행적과 이력, 운명과 개성을 독립적 서정시로 담아낸 <만인보>는 그 자체가 우리나라 근대 역사이기도 하다.
염무웅 교수는 이에 대해 “만인보는 예술적 기획의 소산이면서 문학사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시도이고 매우 특이한 업적이다. 한반도의 모성적 대지와 민족의 현대사 전체를 그 실물크기에서 언어화한 서사시적 실험 그 자체로서, 아마 우리 문학사에 전무후무한 업적으로 남을 것이다”며 고은 시인의 문학을 평가했다.
한편 이번에 창립된 고은학회는 향후 소그룹 단위로 분과를 구성해 다양한 각도에서 고은 시인의 문학세계를 탐구해 간다는 계획이다.
구름에 대하여
고은
1980년 이래 나는 절대로 구름하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운 사람 하나 없이 하루하루 견디는 일이 가장 괴로웠습니다 오 거짓이여 세상을 내 어머니라고 말하고 황량한 날의 계엄령을 그리운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철창 사이로 한조각 구름을 처음 보았을 때 그 구름조각에게 한 찰나의 추파도 던지지 않았습니다 그 구름 두둥실 사그라진 남천에 대고 애걸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넘어가고 넘어가고 넘어가고 넘어가면서 끝내 무릎 꿇지 않았습니다 나는 밤에도 낮에도 암실에서도 별처럼 깨어나서 기원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위해 기원하지 않았습니다 지난날 나는 구름에 너무 많이 걸었습니다 나는 그 구름의 역사를 역사 속에 파묻어버렸습니다 |
[불교신문3139호/2015년9월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