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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이성지]
조선의 교우들은 항상 예고 없이 닥친 박해로 어렵게 모셔들였던 성직자를 번번이 잃게 되어 쓰라린 슬픔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러던 중에 이미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 길에 올랐던 본방인(한국인) 사제를 맞이했던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으리라. 이제
한국인 사제로는 처음 서품되어 귀국 길에 오른 김대건 신부는 고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강경 부근의 황산포(나바위)에 무사히 상륙하여
사목 활동에 임하게 된다.
고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 활동 지역은 은이를 중심으로 용인, 이천, 안성 지역
등지에서 이루어졌다. 은이는 박해 시대 숨어살던 천주교 신자들에 의해 이룩된 교우촌이고, 은이(隱里)라는 말 그대로 ‘숨겨진 동네’, 또는
‘숨어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김대건 신부는 은이를 중심으로 경기 이천, 용인, 안성지방을 두루 다니며 사목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바로 이
은이성지는 이미 유학 길에 오르기 전, 1836년 나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 성사와 첫 영성체, 그리고 신학생으로 선발된 곳이기도 하다. 또한
처음으로 조선 교회 안에 자발적으로 시작된 성소자 양성의 결실을 맺은 곳이 ‘은이성지’이다. 이렇게 은이는 김대건 신부에게 있어 첫 사목
지역이었고 조선 천주교회의 역사상 본방인 사제가 사목한 최초의 본당이었다. 이 시기에 김대건 신부는 경기지방의 은석골, 텃골, 사리틔,
검은정이, 먹뱅이(묵리), 한덕골, 미리내, 한터, 삼막골, 고초골, 용바위, 모래실, 단내 등지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베풀고
사목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당시에 행하신 김대건 신부의 사목 활동 모습은 1866년(병인박해)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정은 바오로
가문에 정 레오 신부에 의해 다음과 같이 전해 온다. “집안 어른들께서는 김 신부님께 성사(고해성사)받던 이야기를 하시곤 했는데 김 신부님은
항상 밤으로만 다니셨다 한다. 미사짐도 없이 단내(丹川)에서 10리가 채 못되는 동산 밑동네(東川里)에서 오시어 고해성사만 주시고 바로 떠나셨다
한다. 김 신부님과 복사가 깊은 밤중에 대문밖에 오시어 ‘정생원! 정생원!’ 하며 증조부 바오로를 찾으시는 소리에 식구들은 모두 잠을 깨었으나
누가 무슨 일로 찾는지 두려워 주저하게 된다. 복사가 작은 목소리로 ‘김 신부님께서 성사 주러 오셨으니 주저하지 말고 빨리 나오시오’하는 말에
깜짝 놀라 일어나 증조부 바오로께서는 이웃이 알까 쉬쉬하며 반가이 신부님을 방으로 뫼시고 곧 성사 받을 준비를 하는데 그 준비는 간단하였다.
벽에 깨끗한 종이를 한 장 붙이고 그 위에 십자가상을 정성되이 뫼셔 건다. 김 신부님께서는 10여명의 고해자들에게 성사를 주시고 다시 배마실(현
용인시 양지면 남곡리 양지성당 소재지)로 가시어 거기서 성사를 주시고 ‘은이’로 가시면 날이 샌다고 하신다.” 이 증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험한 산길을 밤으로만 다니면서 사목 활동을 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렇게 6개월 간의 사목 활동을 하시던 중
고(高) 페레올 주교의 명령이 새롭게 주어진다. 그 명은 중국에 체류하고 있는 선교사들과의 연락, 또 곧이어 조선에 입국해야 할 매스뜨르 신부와
최양업 토마스 부제의 입국로를 알아보기 위한 임무였다. 따라서 김대건 신부는 또다시 어머니와 생이별을 하게 되는데, 이때의 이별이 모든 교우들이
예상했듯이 마지막 이별이 되었다.
1846년 4월 13일 김대건 신부는 은이 공소에서 교우들과 마지막 미사를 봉헌한 후 조선 교회의
숙원 사업인 성직자 영입이라는 중요한 임무를 띠고 길을 떠나게 된다. 은이를 떠나시기 전에 김대건 신부는 교우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다.
“험난한 때에 우리는 천주님의 인자하심을 믿어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거룩한 이름을 증거 할 용맹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구합시다. 지금 우리의 주위에는 검은 마귀의 손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내일의 삶을 모르는 위급한 처지에 처해 있는 우리들입니다. 내 마음과
몸을 온전히 천주님의 안배하심에 맡기고 주 성모님께 기구하기를 잊지 맙시다. 다행히 우리가 살아 있게 된다면 또 다시 반가이 만날 날이 있을
것이오. 그렇지 못하면 천국에서 즐거운 재회(再會)를 합시다. 끝으로 내 홀로 남으신 불쌍한 어머님을 여러 교우 분들이 잘 돌보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이 말씀을 은이 공소와 용인 지방 교우들에게 유언(遺言)으로 남기시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셨다. 교우들은 떠나시는 신부님의 모습을 은이성지에서 1Km 정도 떨어진 ‘중담’ 모퉁이까지 나와 눈물로 전송했다.
그동안 교회
내에서 잊혀져 왔던 은이성지의 개발은 1992년 6월부터 시작된 서울교구 주평국 신부의 ‘도보성지 순례’를 계기로 알려지고, 1996년 5월
은이 공소터 530여평을 매입하면서 시작되었다. 같은해 6월에는 야외제대와 김대건 신부 성인 상을 세우고 성상 축복식을 거행하게된다. 또한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을 맞아 시작된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 건립 추진’ 운동도 시작되고, 2002년에는 은이성지 주변 5200여평
매입과 이어 2003년 사제관과 성당, 숙소 건물을 포함한 1200여평을 매입하면서 그해 9월 성지 전담신부 발령으로 본격적인 은이성지 개발이
시작되었다.
출처 : 은이성지
신부님께서 서품 받으신 상해 김가항 성당 복원(공사중)
[소년 김대건과 골배마실 성지]
김대건의 본관은 김해이고, 증조부는 김진후(金震厚, 비오, 1738~1814)이며, 조부는 김택현(金澤鉉)이다. 부친은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 1796~1839년) 성인이며 모친은 고 우르술라로 선대때부터 여러대에 걸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충청도 솔뫼에서 살아왔다. 김대건은 1821년에 탄생하였고 아명(兒名)은 재복(再福)이며, 보명(譜名)은 지식(芝植)으로 관명(冠名)은 대건(大建)이다. 김대건의 가문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은 증조부 김진후였다. 그는 1791년(신해박해)에 체포되어 1801년(신유박해) 때에 유배되었다가 1805년 다시 잡혀 충청도 해미에서 10년 간의 옥중 생활을 하던 중 1814년에 순교하였다.
김대건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였던
‘골배마실’이라는 지명은 배마실이라는 동네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즉 배마실(현 양지성당 소재지)은 옛날부터 첩첩산중인데다 뱀과 전갈이 많이
나오는 지역이라서 뱀마을, 즉 ‘배마실’이라고 불러왔다. 그리고 김대건의 가족이 거주하던 집은 배마실까지 이어지는 골짜기 안에 있어
‘골배마실’이라고 붙여졌다.
소년 김대건이 세례성사를 받게 된 때는 한국에 프랑스 선교사로서 처음 입국한 나 모방 신부로부터 15세
되던 해인 1836년 은이 공소에서였다. 그러나 소년 김대건은 세례는 받지 않았어도 곧바로 신학생 후보로 선발이 된 사실로 미루어 보아 가정에서
이미 교리 공부와 기도 생활은 착실히 배워 실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816년 이후 시작된 평신도 지도자들의 꾸준한 성직자 영입
운동이(매년 중국교회를 방문했던 시기) 무르익어 결실을 앞두고 있던 때였기에 소년 김대건은 성직자에게 직접 세례 성사를 받고자 하는 뜻을 갖고
기다렸음이 확실하다.
이처럼 골배마실 성지는 김대건의 소년 시절의 향취가 남아 있는 곳이요, 성소의 꿈을 키우던 장소이다. 조선 땅에
이제 곧 오실 신부님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교리를 익히고, 조선 교회의 미래를 위해 한 몸을 바치고자 하는 포부를 가슴에 담고 살았던 장소이고,
세례성사와 첫 영성체를 준비하면서 설레는 마음을 간직하고 생활했던 곳이다.
골배마실은 옛날부터 양지 교우(신자)들 사이에 김대건
신부의 가족들이 살던 집터로 구전되어 왔었다. 하지만 이곳을 발굴하게 된 때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골배마실 성지는 1961년 양지 본당 5대
주임이었던 정원진 루가 신부에 의해 발굴이 시작되어 돌절구와 갖가지 생활 도구, 즉 맷돌, 우물터, 구들장 등을 발견하면서 성지 개발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1997년에는 40년 가까이 옛 모습 그대로 있던 성지를 새롭게 단장하게 되었는데, 새로이 청동으로 제작된 2M짜리
성상을 모셔 7월 5일 대축일을 맞아 축성하였고 처음 골배마실 성지에 모셔졌던 성 김대건 신부 성상은 양지성당 정원에 모셔 지금에 이르고
있다.
[미리내 성지]
1. 미리내 교우촌의 유래와 성지
가. 미리내 교우촌의
유래
미리내 성지의 ’미리내’는 은하수(銀河水)의 순수 우리말로서 시궁산(時宮山 515m, 神仙峰으로도 전해짐)과 쌍령산
중심부의 깊은 골에 자리하고 있다.
골짜기 따라 흐르는 실개천 주위에,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와 점점이 흩어져 살던 천주 교우들의 집에서
흘러나온 호롱불빛과 밤하늘의 별빛이 맑은 시냇물과 어우러져 보석처럼 비추이고, 그것이 마치 밤하늘 별들이 성군(星群)을 이룬 은하수(우리말
‘미리내’)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아름다운 우리의 옛 지명이다.
미리내는 경기도 광주, 양평(양근), 용인, 안성, 화성, 시흥
일대와, 충청도 천안 목천, 진천 배티, 동골 등, 교회 초기에 우리의 신앙선조들이 교우촌을 이루었던 곳 중에서, 중부내륙 용인과 안성에 깊숙이
위치한 초기 비밀교회인 미리내, 한덕골, 골배마실, 굴암, 검은정이 중 한 곳이었다.
미리내와 인근의 이십리 안에 있는 한덕골,
골배마실, 검은정이 등의 교우촌들은 본래 신유박해(1801년) 이후에 크고 작은 박해를 거치면서, 주로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의 신자들이 산속을
찾아들어와 미리내 인근 산골짜기로 옮겨 살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고, 훗날 미리내는 공소와 본당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신자들은 이곳 골짜기 마다
작은 마을들을 이루며 주로 척박한 밭을 일구고 그릇을 구워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다.
이들은 아침저녁으로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을
일상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하였다.
이것이 바로 초대 교회로부터 내려오는 나눔과 섬김의 전통이었다.
기록상으로는
1827년 정해박해 때에 경상도 상주 ‘잣골’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체포 되어 순교한 신태보 베드로가,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일찍이 일가를
이끌고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 살았던 곳이 용인 교우촌 이었으며, 또한 여섯 살 소년 김대건이 1827년에 할아버지 김택현, 아버지 김제준을 따라
충청도 당진 솔뫼에서 박해를 피해 들어온 곳이 한덕골(묵리 한덕동 광파리골) 교우촌이다. 김대건 신부 묘역이 있는 미리내 고개 너머에 바로
인접한 골짜기 교우촌이다.
최양업 신부의 둘째 큰아버지 최영겸 베드로 일가가 1837년 충청도에서 박해를 피해와 정착해 살던 곳도
미리내 언덕너머 ‘한덕골’로서, 기해박해로 최양업의 아버지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가 순교하자, 최양업의 막내 어린동생 최신정이
최양업 신부가 귀국할 때까지 성장했던 곳이다.
또한, 1839년경 풍양 조씨 일가도 박해를 피해 미리내로 들어와 정착하였다
전해진다.
미리내 교우촌은 주로 충청도에서 피난해 온 신자들로 형성되었는데, 훗날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옮겨온 이민식(李敏植, 빈첸시오,
1829~1921)의 집안도 조부 때에 이미 이곳 미리내로 이주해 와 정착하였다.
이처럼 미리내 인근은 일찍부터 교우촌이 형성되어 굳건한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1846년 10월 30일 순교자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이곳에 안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미리내는 선교사들이 피신하여 우리말과 풍습을 배우고 익히는 장소가 되기도 하고, 1863년 가을에는 칼래(N. A.
Calais, 姜 니콜라오) 신부가 이곳에 머물면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 신부에게 서한을 작성한 사실이 기록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1866년의 병인박해로 인해 교우촌 신자들이 피신함으로써 미리내 교우촌은 일시 폐허가 되었다가, 박해가 끝난 뒤에 다시 교우촌이 재건되면서
교세가 증가하게 되었다.
나. 미리내 성지
미리내 성지(안성시 양성면 미산리)는, 한국
최초의 방인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묘소와, 이윤일 요한 성인의 묘소 유지(遺址), 그리고 <16위 무명순교자의 묘역>이 있는
거룩한 성지이다.
또한 김대건 신부의 묘역에는 김대건 신부에게 부제품과 사제품을 준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高주교, 미리내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여 1929년까지 33년간 본당을 지킨 초대주임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세 번째 방인사제 중 한 분) 신부와, 간도지방 최초의
방인사제였던 미리내 본당 3대주임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의 묘소가 함께하고 있다.
묘역 왼쪽 윗 편으로는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인
고(高) 우르술라의 묘소,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이곳에 안장했던 이민식 빈첸시오의 묘소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사제가 되어 이 땅에 돌아온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46년 9월 16일 만25세의 나이로 극히 짧은 사목 활동을
마치고는 형장의 이슬이 되어 한 점 흠결 없이 순교하였다.
국사범으로 형을 받은 죄수는 통상 사흘 뒤에 연고자가 찾아 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김대건 신부의 경우는 참수된 자리에 시신을 파묻고 파수 경비를 두어 지키게 했다.
교우촌 어른들의 걱정과 격려를 받은
17세의 미리내 청년 이민식 빈첸시오는 파수군졸의 눈을 피해 김대건 신부님 치명한 지 40일이 지난 1846년 10월26일, 몇 몇 교우들과
시신을 한강 새남터 백사장에서 빼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시신을 가슴에 안고 등에 지고, 험한 산길로만 1백50여리 길을 밤에만 걸어서
닷새째 되는 날인 10월 30일 자신의 고향 선산이 있는 미리내에 도착하여 신부님을 무사히 안장 시킬 수 있었다.
김대건 신부
묘역을 아침저녁으로 보살피던 이민식은 그로부터 7년 후, 제 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Ferreol, 高) 주교가 선종하자, ‘거룩한 순교자의
곁에 있고 싶다.’는 주교의 유언을 따른 교회의 결정으로 그를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묘소의 옆자리에 안장하였다.
아들이 치명한 지 18년이
지난 1864년 5월17일,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 고 우르술라도 비극적인 처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남편 김제준 이냐시오(金濟俊
1796~1839, 1984년 성인위에 오름)와 대역죄인 아들신부를 천주께 보내고, 이집 저집 문전걸식을 하다시피 한 실로 눈물겨운 생애였다.
이민식은 고 우르술라 어머니도 김대건 신부의 묘소 옆에 나란히 모셔 생전에 함께 있지 못한 모자간의 한을 위로하였다. 미리내의 오늘을 있게 한
당사자인 이민식 빈첸시오 자신도 92세에 세상을 뜨니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 묘역 곁에 묻히게 되었다.
1883년에 <순교자
79위 시복 조사>를 담당하고 있던 서울교구의 뮈텔(Mutel, 閔德孝) 신부가 이곳을 방문하고 미리내 공소를 설립하였는데, 당시의 교우촌
신자 수는 모두 82명이었다. 김대건 신부가 미리내에 묻힌 지 50년 후인 1896년 5월, 강도영(姜道永) 신부의 부임으로 미리내에 본당이
설정됐을 때에, 이곳에는 이미 182명의 신자들이 한 교우촌을 이루고 있었고, 1906년 <미리내 요셉성당> 축성 때에는 교우 수가
1,600명을 넘었으며, 1922년에는 본당관할 12개 공소의 공소 신자가 1,453명에 이르렀다.
원삼면의 고추골, 용바위, 모래실.
내사면의 은이, 골배마실, 수여면의 별미. 미동면의 먹뱅이, 한터울, 안터, 사리틔, 쇠재. 남사면의 사미로니 등 12곳 공소들로서, 미리내
인근 30리 이내의 이들 교우촌들이, 옛 선조들의 신앙을 지키며 꿋꿋이 믿음살이를 이어가고 있었다.
김대건 신부 묘역 위 미리내
고개(오두재, 일명 애덕고개)를 넘어서면, 거문정이, 굴암골, 한덕골, 먹뱅이, 은이, 골배마실 골짜기에 이르는데, <용담 저수지>
옆 ‘묵리 먹뱅이’가 미리내 성지에서 5.5Km거리이고, 한덕골(광파리골)이 4Km, 거문정이, 굴암골이 2Km 이내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미리내에서 오두재(애덕고개) 해실이(망덕고개) 어은이고개(신덕고개)를 넘어가면 은이공소(미리내 성지에서 9Km)에 이른다.
은이공소와 골배마실은 작은 산을 사이에 두고 넘나들던 지척 간(1.5Km)이다.
다. 미리내 성지의 성역화와
성지순례
미리내의 성역화 작업은 지난 1972년부터 시작되었다.
미리내 성지 초입 우측 편에는, 초대 주임 강도영
마르코 신부와 본당신자들에 의해 1906년에 건립된 <미리내 성 요셉 성당>과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신자들 자녀에게 천주교리와
초등교육을 실시했던 미리내 교우촌의 <해성학원 교사> 건물이 잘 보존되어 남아있다.
이곳 요셉 성당과 해성학원은 교우촌
선조들의 땀과 나눔과 섬김의 전설을 침묵 속에 담아서 100년 세월을 지켜온 옛 이야기를 오늘에 전해준다. 성당 제대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유해, 하악골(아래 턱 뼈)이 안치되어 있다.
또한 요셉성당의 제대는, 일제시대 때 원산 <덕원수도원>에서 제작되어
우마차에 실어 미리내까지 운반해 왔으며, 제2차 바티간 공의회 이후에도 제대와 감실만을 분리하여 현재에도 옛 모습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종각에 올려진 <미리내 종>은, 1917년 강도영 신부가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로부터 들여 왔으며, 일제시대 태평양 전쟁
중에는 일본군 포탄제작을 위한 징발을 당해 하마터면 훼손될 뻔하였다. 이 종은 현재도 미리내 본당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요셉성당 옆에 있는
깊은 우물은, 강도영신부와 본당 신자들이 목을 축이던 유서 깊은 우물이다.
미리내 성당 윗 편으로는 16위의 무명 순교자 묘역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곳에는 또한 <이윤일 요한 성인>의 묘소 유지(遺址)가 진토로 남아있어, 순례자들의 기도와 묵상 속에 참배가
이어지고 있다. 묘역의 아래 언덕에는 수원 교구 성직자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성지 입구에서 묵주 기도처를 따라 성지를 오르다보면,
성지 중앙에 1991년 봉헌된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성당>이 있고 <성모당>이 있다.
시성 기념성당
제대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유해 <종아리뼈>가 안치되어 있으며, 2층 전시실에는 박해시대 천주교인에게 사용된 고문형구와 순교
참상의 모형물들이 있어 그날의 교난을 오늘에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성지의 제일 위, 미리내 언덕에는 가경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복에 맞추어, <한국순교자 79위 시복 기념경당>이 1928년 9월 ‘순교자의 모후경당’ 으로 봉헌 되었으며,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묘역을 찾는 순례자들은 묘역에 참배하고, 기념경당에서 성인의 <유해 친구>와 묵상과 기도로 순교영성에 깊이 잠기게
된다. 기념경당 내에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 발 뼈>와 성인의 시신이 담겨져 있던 <목관 일부분>을 안치하고 있다. 성인의
다른 유해는 현재 가톨릭 대학교(성신 교정) 성당 안에 안치되어 있다.
미리내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과 이윤일 요한 성인의 유해가
안장되었던 옛 무덤이 그대로 남아있다. 옛 무덤은 빈 무덤이 아니라 성인들의 피와 살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그들이 지닌 아름다운 신앙의 넋이
깊이 스며 배어진 진토(塵土)로서 빛나는 순교영성의 향기가 가득히 머문 곳이다.
김대건 신부는 1846년 스승과 동료 신부에게 보낸 옥중
서한에서
“저는 그리스도의 힘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형벌을 끝까지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느님, 우리의 환난을 굽어보소서. 주님께서 만일 우리의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님! 누가 감히 (이를)
감당할 수 있으리이까?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형제 최양업 토마스여! 잘 있게.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 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믿음, 겸손, 사랑, 순명으로 <십자가의 비결>을 살아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고 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과 이윤일 요한 성인, 16인 무명 순교자들이 꽃피운 순교의 영성을 묵상하면서, 이곳 미리내를 찾는 순례자들은 오늘 우리들 각자의
신앙생활을 깊이 되돌아보고,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이웃에 실천하며,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내일의 구원을 준비하는 순례여정이 되도록 다짐하여야 할
것이다.
출처 : 미리내 성지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 성당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기념 경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