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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노스티코스 Gnostikos (1)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해제
허성석 신부
1. 『프락티코스』와의 관계
이 작품은 『프락티코스』와 『케팔라이아 그노스티카』와 함께 삼부작을 이룬다. 에바그리우스는 『프락티코스』의 머리말 아나톨리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점을 지적하고 있다 “수행적 가르침은 100개의 장으로, 영지적 가르침은 50개의 장과 다시 600개의 장으로 짧게 나누어 요약했습니다”(머리말 9) 50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100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프락티코스』와 600개의 장으로 구성된 『케팔라이아 그노스티카』 사이에 일종의 전환점을 이룬다. 특히 『그노스티코스』와 『 프락티코스』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8-199쪽)
2. 관상가의 정의와 역할
에바그리우스는 수행을 ‘영혼의 욕정부(欲情部)를 정화하는 영적 방법’(『프락티코스』78)으로 정의한다. 수행은 영혼을 욕정에서 자유롭게 하여 아파테이아*를 얻게 한다. 그리고 아파테이아는 영지적인 삶, 곧 관상생활로 들어가 영적 인식(을 맛보게 한다. 이처럼 수행자는 수행을 통해 관상가가 된다. (199-200쪽)
㈜ : 아파테이아는 말 그대로는 ‘욕정들의 부재(不在)를 뜻한다. 이 용어는 에바그리우스의 핵심개념 가운데 하나로 수행을 통해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욕정에서 해방된 영혼의 내적 평정 상태다.
에바그리우스의 ‘관상가’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에게서 유래한다. 그노스티코스로란 말은 클레멘스와 더불어 그리스도교 문학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노스티코스는 덕행실천과 공부를 통해 영적 인식에 도달한 그리스도인을 나타냈다. 이 용어는 에바그리우스에 의해 직접 받아들여져 수도승 문학 안에 널리 유통되었다. (200쪽)
클레멘스의 관상가처럼 에바그리우스의 관상가도 가르침을 고유 역할로 하고 있다. 관상가가 된 수도승은 더 이상 수행자처럼 자기 자신이나 자기 정화에만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는 다른 사람을 돕고 아직 수행 중에 있는 사람에게 욕정에서 정화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200쪽)
관상가의 역할은 가르침이다.
3. 가르침의 조건
관상생활은 아파테이아 혹은 어느 정도의 아파테이아 획득을 전제한다. (200쪽)
아파테이아는 영혼의 평정을 의미한다.
아파테이아에는 단계가 있다. 먼저 영혼의 욕망부(慾望部)*에서 오는 욕정** 혹은 '육체의 욕정을 극복했을 때 이르게 되는 '작은 아파테이아’ 또는 ‘불완전한 아파테이아’가 있다 이것 이후에 정념부(情念部)에서 오는 욕정***혹은 ‘영혼의 욕정’을 포함한 모든 욕정을 극복함으로써 얻어지는 ‘완전한 아파테이아’가 있다. (201쪽)
㈜ : *에바그리우스는 인간 영혼이 이성부, 정념부, 욕망부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 육체와관련된탐식, 음욕, 탐욕
*** 마음과 관련된 슬픔, 분노, 아케디아(영적 태만)
관상생활은 우리가 아파테이아의 문턱에 도달했을 때 시작되며, 완전한 아파테이아를 향해 나아간다. 실제로 관상생활은 천사적인 삶이기 때문에 결코 인간 조건에서는 충만히 실현되지 않는다. 따라서 수행, 즉 영혼의 정화는 어느 정도 관상생활에서도 계속된다. 관상가는 수행의 덕을 계속 실천하면서 부단히 덕에 나아가야 한다. (201쪽)
관상가는 여러 사람과의 잦은 교제에서 오는 분심(11장), 음식과 의복에 대한 온갖 걱정(38장)과 근심(10장)을 경계해야 한다. 성 바오로가 그랬듯이 엄격한 규율로 자기 육체를 다스려야 한다. (201쪽)
관상생활로 나아가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영혼의 정념부에서 오는 욕정들, 우선 영적 인식의 주된 장애물인 분노에서 정화되어야 한다. 오류가 외적 인식에 장애가 되듯 분노는 영적 인식에 장애가 된다(4장). 관상가는 또 분노와 증오와 슬픔에서 자유로워야 한다(10장). (201쪽)
슬픔은 분노에 밀접히 연결된 영혼의 욕정이다. 이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관상가는 특히 소송을 피하고 모욕(불의)을 감수해야 한다(8장). 또 험담과 비난이 악령에게서 오는 유혹임을 알고 그러한 것들에 초연해야 한다. 악령들은 인식을 맛보지 못하게 하려고 관상가에게 증오와 원한을 불러일으키려고 애쓴다(32장). 따라서 관상가는 온갖 분노를 없애야 한다(5장). 에바그리우스는 영혼의 정념부가 평온한 이 상태를 ‘온유’라고 부른다. '아파테이아의 딸’과 ‘인식의 문'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온유는 관상가의 탁월한 덕이다. (201-202쪽)
화를 내지않을 때 온유에 머문다.
애덕은 우선 자선이다(7장). 관상가는 가르치면서, 이익이나 복리나 헛된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심 없이 가르치면서 사랑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전에서 쫓겨난 상인과 같을 것이다(24장). (202쪽)
사랑은 나눔이다. 나누지 않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관상가는 자기에게 오는 사람에게 상냥하고 친절해야 하지만, 덕들의 균형을 깨뜨리지 않으려면 너무 관대해서도 안 된다(6장). (202쪽)
덕에 있어서도 중용은 필요하다.
관상가의 유일한 목적은 자기에게 오는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치면서 그를 구원의 길로 이끄는 것이다(22장). 사실 어떤 욕정에 영감을 받은 탐구라든지 선을 향하지 않는 모든 탐구는 '관상가의 죄’인 그릇된 인식으로 이끌 수 있다(43장). (202쪽)
관상가의 목적은 다른 이를 구원의 길로 이끄는 데 있다.
4. 가르침의 내용
관상가는 아직 수행 중에 있는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욕정에서 정화되는 법을 가르친다(3장, 31장). 하지만 관상가의 주된 역할은 자기가 얻은 영적 인식을 받을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202쪽)
아파테이아를 통해 이 영적 인식에 접근(45장)하게 되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은총을 매개로 육체적이고 영적인,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피조물들을 이해하게 된다. (202쪽)
영적 인식에서 또한 성경 해석이 이루어진다. 성경 해석은 관상가의 가르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203쪽)
피조물에 대한 인식은 그것의 감각적 모습을 넘어 그 존재 이유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오리게네스의 충실한 제자 에바그리우스가 관상가에게 권고하는 성경 해석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성경본문의 문자를 넘어 그 영적 혹은 우의적 의미를 밝히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관상가는 이미 오리게네스가 권고한 바처럼 성경의 '관습들’을 설명하면서(19장) 본문의 참된 의미를 밝히려고 한다. (203쪽)
에바그리우스는 우의적 해석에 어떤 제한을 두고 있다. 그는 성경 본문에 언급된 모든 말씀의 영적 의미를 찾으려 하지 말라고 한다(21장). 또 본문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는 세세한 것들을 우의적으로 해석하지도 말라고 권고한다(34장). (203쪽)
우의적으로 해석할 부분과 문자적으로 해석할 부분이 있다.
5. 가르침의 방법
관상가는 오로지 자기 제자의 구원을 위하여 가르칠 뿐이다. 따라서 이 목적에 부합한 것을 가르쳐야 한다. (204쪽)
가르침의 방법은 각 사람의 영적 진보 상태에 따라 다양하다. 누구에게나 매번 모든 진리를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관상가 역시 각 사람의 수준에 맞추어야 한다. 이를 위해 그는 먼저 자기 청중의 상황과 삶의 종류와
직업을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각자에게 유익한 것을 말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15장). (204쪽)
가르침은 눈높이에 맞추어야 한다.
에바그리우스는 자기 스승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에게서 배운 바에 따라 관상가에게 고유한 덕을 열거하면서 정의(正義)를 각 사람의 신분에 따라 분배하는 덕으로 정의(定義)한다. (204쪽)
관상가는 영성생활 초심자에게 유익한 것은 명확하게 설명한다. 그러나 충분히 진보한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교의는 모호하게 말한다(44장). 영혼의 정화와 욕정에 대한 승리를 지향하는 윤리나 수행에 대한 가르침은 모두에게 적합하다. (204쪽)
관상가는 젊은이에게는 영혼의 욕망부에서 올라오는 욕정을 극복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나이든 이에게는 영혼의 정념부에서 올라오는 욕정에 맞서 싸우는 방법을 가르친다(31장). 초심자와 젊은이와 세속인의 경우, 자연학과 신학에 관해서는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을 말하는 것이 합당하다(12장, 13장). 이 영역에 대한 가르침은 욕정에서 충분히 해방되어 그런 가르침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유보된다. (204쪽)
신적 섭리나 심판의 이유와 관련된 교리, 즉 에바그리우스의 형이상학과 우주론과 종말론에 관한 주제들은 세속인과 젊은이에게는 가르쳐서는 안 된다. 그들이 단지 그것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 잘못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영적 인식을 맛보지 않은 사람은 무지가 단죄된 이성적 영혼이 당하는 고통임을 이해할 수 없다(36장). (204-205쪽)
관상가는 자기 가르침에서 수준을 너무 쉽게 높이지 말고 항상 청중의 수준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는 자신을 청중의 수준보다 약간 위에 두고 청중이 요구하면 수준을 더 높여야 한다(29장). 대답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관해 질문을 받을 경우에는 모르는 체 해야 한다(23장). 관상가는 설명의 때와 토론의 때 두 시기로 자기 가르침을 계획한다. 토론은 충분히
진보한 사람에게만 허락된다(26장). (205쪽)
성체성사 거행의 상징적 의미는 원칙적으로 관상가인 사제들과 오로지 질문자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이들에게만 유보된다(14장). (205쪽)
하느님께 대한 인식(신학)은 자연에 대한 인식(자연학)의 경우보다 더 큰 주의가 요구된다. 피조물에 대한 인식이 반드시 정의(定義)에 의존해야 한다면(17장). 그것이 하느님과 관계될 경우 그분을 정의하려 해서도 안 되며, 그분에 대해 경솔히 말하려 해서도 안 된다(27장). 사실 피조물에게 적용되는 것이 그분께는 전혀 적합하지 않다. 형언할 수 없는 분에 관해서는 침묵이 요구된다(41장). (205쪽)
관상가 자신은 피조물에 대한 인식을 뛰어 넘어 제일원인(第一原因)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신학에 어느 정도 다가가야 한다(49장, 50장). (20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