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맛에 산다 / 박명숙
출근 준비하느라 바쁜데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시월 4일에 별다른 일 없는가?”라고 물었다. 달력을 보니 결혼기념일인 개천절 뒷날 수요일이다. 요일에 따라 다르게 하는 일터라는 걸 아는 터라 쉬는 날인지 물어본 거다. 그날은 한 시간만 하면 되는 거여서, 직장에 미리 양해를 구하고 다음에 보충하면 될 것 같다고 대답했다. 십여 분 후에 또 벨이 울렸다. “2일 오후에 출발해서 5일 오전에 도착하는 비행기표 끊어 놨네. 다른 계획 세우지 말소.”라고 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3박 4일 제주도 여행 일정과 준비물을 문자로 보내 왔다.
성격이 급하고, 자기 생각만 옳다고 하는 이기적인 남자란 생각에 화가 나, 오기가 발동해 부끄럽게도 자주 다퉜는데 이런 깜짝 선물로 감동을 주다니. 이럴 땐 미웠던 감정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줏대 없이 그저 좋았던 일만 떠오른다. 결혼기념일과 생일을 한 번도 안 빠지고 챙겨 주는 남편이 올해도 몰래 물밑 작업을 벌였다. 시월 3일이 결혼 30년째다. 가시처럼 뾰족했던 성격도 세월 앞에 닳고 무뎌져서 제법 둥글둥글해졌다. 누가 콕 찔러도 바로 튕겨 나오지 않는 말랑말랑한 맛이 나는 남자가 됐다. 얼굴은 쪼글쪼글해져도, 마음은 포도알처럼 탱글탱글 다시 예뻐지고 있다.
출발하기 전, 결혼 초 같으면 여행 가방에 짐을 챙기는 것부터 생각이 달라 충돌했을 텐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둔다. 꼭 있어야 할 물건을 안 챙겨 와도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면서 무덤덤하게 넘어간다. 자기 말만 하던 사람이 내 생각에 귀를 세워 듣고 존중하려고 한다. 자존심이 강해 속 이야기를 쉽게 꺼내지 않아 무슨 생각하는지 도무지 몰랐다. 남의 남자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친구처럼 별 수다를 다 떨면서 서로 깔깔거리니 완전히 내 편이 된 듯싶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쫓아다니며, 앞서려고만 하더니 이제는 내 걸음걸이 속도에 발을 맞춰 걷는다. 힘들게 보이는지 손도 잡아 주며 같이 가자 한다.
30년 만에 처음으로 쉼과 사랑이 나란히 걸어가는 자유 여행을 맛보았다. 제주 드림타워 38층 라운지 포차에서 먹었던 옛날 노란 도시락은 어릴 적 아궁이 매운 연기에 눈물 흘려 가며 계란야채전을 부쳐서 넣어 주던 어머니의 젊은 시절을 그리워하게 했다. 가파도, 우도, 송악산의 시원한 바닷바람을 다시 만나려면 건강 관리를 잘해야 할 것 같다. 부부는 닮는다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우리도 서서히 물이 들어 가는 중이다. “고마워요. 내 곁에 있어 줘서.” 이런 맛에 산다.
첫댓글 신혼여행 글인줄 알았네요. 하도 달달해서. 하하
우와, 벌써 30년이나 됐어요? 새색시 같은데?
30년 축하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말랑말랑하고 탱글탱글한 분하고 행복하게 사시는군요.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분이시군요. 자잘한 잘못쯤은 다 덮을 만합니다. 30년 동안 서로 말랑말랑해지면서 잘 살아오셨네요. 축하합니다.
멋진 남편분이네요.
저는 한 번도 이벤트를 해 본 적이 없는 남편과 28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30주년 축하합니다. 말랑말랑한 맛이 나는 남자와 좋은 여행 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