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 걷기가 그렇게 좋다고? / 솔향
요새 거울을 보면 인상이 찌푸려진다. 세월만큼 군살도 따라붙어서다. 한숨을 쉬다가 맨발로 걸으려 초당산으로 향했다. 손으로 꼽아 보니 시작한 지 7일째다. 양말을 벗어 운동화에 한 짝씩 집어넣고 신발장에 가지런히 놓았다. 신발 속에 갇혀 있던 것이 빼꼼히 나왔다. 아직도 꺼내놓는 건 어색하다. 맨발이 흙바닥에 수줍게 닿았다. 흙과 모래와 작은 돌이 발바닥을 콕콕 찌르는 계단을 올라가면 새로 깔아 찰진 황톳길이 반긴다.
맨발로 흙을 디디면 어릴 적 논밭, 모래밭, 흙바닥에서 마음껏 뛰어놀았던 자유로운 감촉이 전해진다. 촉촉하고 쫄깃한 바닥이 부드럽게 발끝을 자극한다. ‘뱀 출몰 지역’이라고 쓰인 표지판 아래쪽엔 좀 더 물기를 머금어 몰랑몰랑한 황토 반죽 구역이 있다. 어르신 서너 분이 보리밟기라도 하듯 부지런히 한발 한발 떼어 가며 제자리걸음하고 있다. 재밌어 보여 끼어들었다. 발가락 사이로 누런 물똥 같은 것이 비집고 올라왔다. 간질간질한 게 웃음이 났다. 어린아이처럼 뒤뚱뒤뚱거렸다. 이게 접지(땅과 우리 몸을 연결하는 것)에 좋단다.
발에 황토를 잔뜩 묻히고는 다시 숲길로 들어섰다. 초입은 소나무 군락지이다. 요리조리 몸을 뒤틀고 있는 거친 소나무들이 서로 조화를 이뤄 그림 같은 풍경을 자랑한다. 숨을 길게 들이마셔 본다. 솔향이 나는지. 풀과 나무, 흙냄새가 스치는 걸 보니 코가 막힌 건 아닌가 보다. 오솔길 한쪽으로는 맥문동이 가지런히 살랑이는데, 꿈꾸는 보랏빛이다. 그 빛이 화려하더니 며칠새 꽃잎이 많이 떨어져 희미해졌다. ‘어서 오세요. 제 꽃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라는 듯이 마지막 힘을 쓰고 있다. 한들거리는 보라색 원피스에 쪽빛 나염 손수건을 걸스카우트처럼 목에 두르고 귀여운 벙거지 모자를 쓴 작은 몸집의 중년 여인이 허리를 굽혀 꽃향기를 맡는다. 달력에 나오는 소녀 같은 몸짓이다. 나도 따라 코를 댔다. 어, 냄새가 없다. 바로 내 옆으로 나랑 비슷한 또래 여자가 ‘북북 부륵부륵’ 방귀를 뀌며 씩씩하게 지나갔다. 악! 그 여인의 향기가 내 코와 입으로 밀려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은 착각이겠지? 슬쩍 쳐다보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한 표정이다. 요즘 ‘방귀 산책’이라는 게 건강에 좋다고 미국에서 인기라는 기사를 봤는데 전파가 빠른 건가.
짧은 오르막길이 나온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발가락과 허벅지까지 잔뜩 힘을 주면 콧잔등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가볍게 헉헉거릴 만큼 숨이 찬다. 위에 다다르면 바람길이 기다린다. 산들바람이 수고했다고 온몸을 쓸어 준다. 다시 가벼운 걸음으로 내려가자마자 활엽수들이 자태를 드러내는데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후박나무, 아까시나무도 보인다. 이름을 아는 건 몇 안 된다. 잎이 자잘하고 동그란 저 나무 이름은 뭘까? 나뭇잎들이 넘어가는 햇살에 반짝이고 실바람에 잔잔하게 흔들리면서 세상엔 아름다운 게 이렇게 많다고 속삭인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도 싱그럽다. 집중해서 들어본다. 뽀로롱 길게 노래하는 새, 삑삑 짧게 노래하는 새. 다 다르다. 문득 여기에 어떤 새들이 사는지 궁금해졌다. ‘새소리 찾기’라고 휴대폰 검색창에 쳤다. 버드넷(birdnet)이라는 앱이 있다. 역시 지구엔 똑똑한 인간이 많다. 필요한 건 다 있다니까. 앱을 깔고 녹음 버튼을 눌렀다. 오리엔털 매그파이(Oriental Magpie, 까치)라고 나온다. 오, 되네. 다시 귀 기울여 보니 ‘깍깍’하고 두 번씩 반복하는 것이 까치가 맞는 것 같다. 신난다. 더 해 보려는데 까치 소리가 너무 커서 다른 새소리가 묻힌다. 내일 또 도전해야지.
"지가 내 남편도 아닌데 나한테 그렇게 잔소리를 한다."며 전화로 아들 흉을 보고 있는 여자를 앞질렀다. 계속 들으면 그 집 사정을 다 알아 버릴 것 같아서. 퇴직하고도 한참은 지난 것처럼 보이는 노부부가 손을 잡고 간다. 애정을 뽐내는 건 좋은데 추월할 공간이 부족해 난감하다. 둘 다 키가 크고 늘씬하고 허리가 꼿꼿한 것이 고상해 보인다. 신기하게 산을 돌고 있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면 대충 나이대가 짐작된다. 살이 찌거나 날씬한 것이 기준이 안 되는 게 재밌다. 왼쪽 몸이 마비되어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절뚝이며 천천히 걷는 할아버지를 따라잡았다. 움직여야지 가만히 있으면 더 굳어서 못쓴다고 옆 사람한테 말하고 있다. 그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등이 공벌레처럼 말린 할아버지가 느리지만 조금씩 스프링이 낮게 통통통 튀듯이 움직여 나간다. 아흔 살은 넘어 뵌다. 가만히 보니 나름대로는 뛰는 것이다. 코끝이 시큰하다.
“그 아저씨가 헬스고 뭐고 다 해 봤는데 소용없고, 여기서 맨발 걷기 해서 배도 쏙 들어가고 살도 다 빠졌대. 맞아. 암도 고쳤다는 그 아저씨. 저 밑에다 접지하라고 아침마다 물 길어다가 삽으로 파서 넣잖아. 나도 잠도 잘 오고 혈액순환도 잘 돼서 혈압약을 끊었다니까. 병원에서 검사했는데 이제 안 먹어도 된대. 몸매도 이뻐져. 여기서 운동하고 내 친구들 다 몸매 이뻐졌잖아.” 목소리가 가늘고 높은 여자가 같이 온 친구에게 맨발 걷기가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침 튀기며 전도하고 있다. 배가 쏙 들어갔다는 말에는 귀가 솔깃하다. 한 번 넘어지면 3년씩 더 산다는 ‘3년 고개’ 이야기도 겹쳐 떠오른다. 저 여자 말처럼 이곳을 도는 사람들이 다 젊어지고 예뻐지고 건강해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초당산 맨발길이 해외 토픽에 오르겠지? 둘레길을 일곱 바퀴나 돌고 내려와 수도꼭지를 틀었다. 시원한 물줄기가 다리를 적신다. 누런 황토가 사라지고 뽀얀 맨발이 드러난다. 화끈거리던 발바닥이 시원해지고 다리가 가뿐해졌다. 양말과 운동화를 신고 걸으니 감각이 새롭다. 자연과 하나 되어 산소를 품은 맑은 생각을 채우고 돌아와 기분 좋게 땀과 먼지를 씻고 나왔다. 몸도 마음도 뽀드득뽀드득 건강하고 깨끗해진 것 같다. 아, 상쾌해! 왠지 살도 좀 빠진 것 같고 말이야. “와따, 우리 각시, 이제 아줌마 몸매 다 돼 부렀네.” 놀릴 거리를 찾은 남편이 눈치 없이 빙글거린다. 기분이 딱 잡친다. 그래도 여기서 화내면 지는 거다. “자기 배가 훨씬 더 나왔거든.” 재빠르게 되받아쳤다. 좀 약하다. 더 타격감 있는 신선한 거 없나? 그때, 이 남자가 마지막 공격을 날렸다. “거, 옆에서 보면 똥그랗다니까.” 아! 똥그랗...... “아니이이! 옆에서 보면 다 나왔지. 자기 몸매나 신경 쓰셔!” 벌게져서 쏘아붙이고 말았다. 더 열심히 맨발 걷기 해서 쏙 다 빼 버릴 테다. 으, 자존심 상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