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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 |
시조 | 최사전(崔思全) |
주요 집성촌 | 광주광역시 광산구 산월동 |
주요 인물 | 최상, 최부, 최홍전, 최흥종, 최은희, 최정기, 최길선, 최순식, 최장현, 최민호, 최성, 최영호, 최진기, 최성용 |
인구(2015년) | 92,341명 |
탐진 최씨(耽津 崔氏)는 전라남도 강진군을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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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편집]
탐진최씨(耽津崔氏)의 시조(始祖)인 최사전(崔思全1067~1139)은 고려 때 상약원직장(尙藥院直長)을 역임한 최철(崔哲)의 손자이며, 장작감(將作監)을 역임한 최정(崔靖)의 아들이다. 최사전은 의술로 조정에 진출하였으나 고려 인종 때 이자겸(李資謙)을 제거한 공을 인정받아 공신에 책록되었고,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후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으로 수태위(守太尉),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랐다.[1]
최사전의 아들 최변(崔弁)과 최열(崔烈) 이후의 기록이 전란에 실전되어 각 파 중시조들의 세거지를 따서 그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분파[편집]
화성파
강진금천파(康津錦川派)
보성조내파(寶城兆內派)
광주성서파(光州城西派)
금남파(錦南派)
만경율리파(萬頃栗里派)
일산당산파
보작파
본관[편집]
탐진(耽津)은 전라남도 강진군(康津郡)의 옛 지명이다. 본래 백제의 동음현(冬音縣)이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탐진현으로 고쳐서 양무군(陽武郡)에 예속시켰다. 고려에서 영암(靈岩)에 속하였다가 장흥(長興)으로 이속시켰다. 1417년(태종 17)에 병마도절제사영을 도강현(道康縣) 소재지에 옮기고 두 현을 합쳐 강진(康津)으로 개칭하였고 치소는 탐진으로 정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탐진(耽津)의 성(姓)으로 최(崔)·조(曺)·유(兪)·안(安)·정(鄭)·하(河) 6성(姓)이 기록되어 있다. 1896년 전라남도 강진군으로 개편하였다.
인물[편집]
최상(崔尙) : 1035년(고려 정종(靖宗) 1년) 과거에 급제하여 1056년(문종 10) 예부낭중으로 칠도순무사(七道巡撫使)로 파견되었다. 1068년(문종 22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이르렀다.[2]
최부(崔溥, 1454년 ~ 1504년) : 1482년 친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부교리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전적(典籍)으로 있을 때 《동국통감(東國通鑑)》 편찬에 참여하였다. 1486년 문과중시에 아원(亞元)으로 급제하여 사헌부감찰(監察)·홍문관 부교리(副校理) 등을 지냈다. 1487년 추쇄경차관으로 제주에 갔다가 이듬해 부친상을 당해 돌아오던 중 풍랑으로 명나라 태주부(台州府) 임해현(臨海縣)에 표류했다. 반년 만에 한양에 돌아와 왕명을 받고 《표해록(漂海錄)》를 저술하였다.
최민호(崔旼鎬, 1956년 ~ ) : 제5대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장. 제3대 국무총리 비서실장.
최성(崔星, 1963년 ~ ) : 제17대 국회의원. 제8·9대 경기도 고양시장.
최영호(崔榮鎬, 1965년 ~ ) : 제7·8대 광주광역시 남구청장
■ 탐진최씨 상대선조 사적의 고증 문헌
상대선조 사적의 고증할 세전문헌은 실전되었고 <고려사>의 장경공 열전과 장경공 묘지가 있다.
(1) 장경공 열전 : <고려사> 부록으로서 고려조 중요인물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이 열전에 장경공이 나라에 끼친 대공훈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 바 세계(世系)에 관계되는 문구는 “崔思全 耽津人”이라 하여 탐진최씨의 선조임과 “有 二子 弁·烈...”이라하여 두 아드님이 계심을 알았고, 烈公은 효성이 지극하고 인자하다 하여 인종 임금이 효인(孝仁)이라 어필사명(御筆賜名)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열전에는 공의 상대(上代)나 묘소(墓所) 그리고 배위(配位)의 기록도 없어서 아쉬움이 크다.
(2) 장경공 묘지 : 묘지(墓誌)란 묘지석에 새긴 글이며, 묘지석은 묘전에 비석도 세우지만 비석이 연구세심(年久歲深)하면 훼손될 것에 대비하여 돌아가신 분의 행적(行蹟)을 돌에 새겨 묘내에 묻는다. 장경공의 묘지의 발견과 묘지석의 봉환한 경위, 그리고 묘지에서 새로 발현된 사실 내용을 적어본다.
○ 묘지의 발견 :
1919년 일제 조선총독부에서 한일 역사학자들을 총동원하여 우리나라 고대로부터 전해온 금석문(金石文)을 널리 수집하여 <조선금석총람>이란 서책을 간행한 바, 서책 102차목에 『개성최사전묘지開城崔思全墓誌』가 수록되어 있고 묘지석(墓誌石)이 일본 동경제국대학에 소장되어 있음이 병기(倂記)되어 있었다.
○ 묘지석의 봉환 :
문중과 전남도는 사실임을 확인하고, 전국대학회의를 개최하여 묘지석 봉환대책을 세워 탐진최씨 종인 3만여 명의 연서(連書)로 조선총독부와 동경제국대학에 청원하여 1921년 가을에 봉환하였다. 현재는 광주국립박물관에 소장되고 있다.
○ 묘지에서 새로 발견된 상대선조 사적 :
장경공의 아버님 靖公(장작감)과 조부님 哲公(상약국직장) 양위의 휘자와 관직이 밝혀졌다. 이로써 장경공이 해주최씨 유길공(惟吉公)의 아들이란 주장은 조작이며, 따라서 장경공이 해주최씨에서 분파한 탐진최씨의 시조이라는 주장도 근거가 없는 조작임이 명백해졌다.
(2) 장경공의 묘소가 개성 성남 장미산록 와곡임이 밝혀졌다. 이로서 강진소재의 소위 장경공 구전묘는 근거없슴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3) 공의 휘자가 휼세(恤世)이시며 휘자 사전(思全)은 선종 임금이 어필사명한 사실도 알게 되었다. 지문(誌文)에는 공이 나라에 끼친 공적이 기록되어 있으나 그것은 생략하고 전술한 부분만 원문과 해역(解譯)을 아래에 싣기로 한다.
公 諱思全 字 恤世 姓 崔氏, 其先 耽津縣人也. 祖 上藥局直長 名哲, 父 將作監 名靖.
공의 이름은 사전이고 아명은 휼세이며, 성은 최씨이며, 그 선대가 탐진현인이다. 조부는 관직이 상약국직장이고 이름은 철이며, 부친은 관직이 장작감이고 이름은 정이다.
至 己未三月六日 以疾卒 卽收其骨. 越 翌年 二月二十七日 葬于城南薔薇山麓瓦谷.
기미년(1139)년에 이르러 3월6일 질환으로 서거하자 즉시 뼈를 거두어 이듬해 2월27일에 (왕경개성의) 성남 장미산 기슭 와곡에 장례하다.
汝是上醫也, 因稱名曰 思全 御筆賜之
너는 명의로다 그러므로 이름을 사전이라 한다고 선종임금이 친필로써 내리다.
■ <역사인물사전>에 실린 탐진최씨의 저명인물
○ 최사전(崔思全) : 시호 장경공. 고려의 功臣(공신).
고려의 26대 忠宣王(충선왕)(1308~1313)은 조정의 개혁을 지시하면서
“공로를 평정함에 있어서 崔凝(최응), 徐熙(서희), 姜邯贊(강감찬), 최사전(崔思全), 趙沖(조충), 金方慶(김방경) 등과 같은 사람이라야 공신이라 할 수 있고 그의 자손도 등용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고려사 제84권>
“장경공은 65세에 守太尉(수태위.국가최고 원로 자문역. 從一品), 門下省(문하성. 국가 행정 총괄기관) 侍郞(시랑. 首長. 正一品), 平章事(평장사. 侍郞 다음 계급.)에 임명되시었다.”
<고려사절요 제9권 인종(제17대 왕.1122~1146) 9년>
○ 최경(崔涇) : 근제. 경기 안산 출신. 조선 세종 때 도서서 화원을 거쳐 별제에 오르다. 안견의 산수화와 함께 인물화를 잘 그려 유명하다. 성종3년(1472) 소헌왕후, 세조, 예종, 덕종의 초상화를 그린 공으로 안구마를 하사받고 당상관에 오르다. 안구마란 안장을 낀 말인데 이 말을 타고 궁궐에 들어가도록 허용된다.
○ 최부(崔溥) : 금남. 자는 연연. 진사 택의 아들이며 진의부사 정원(井元)의 손자. 나주 출생. 김종직의 문인. 성종3년(1472)에 진사로 친시 문과에 올라 을과로 급제하고 교서관(校書館)의 저작(著作)박사(博士), 군자감(軍資監)주부(主簿), 수찬(修撰)을 지냈다. 1486년 문과 중시에 올라 을과로 급제하고 사가독서를 한 뒤 교리로서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이어 제주 추쇄(推刷)경차관(敬差官)으로 부임했다가 이듬 해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 나주로 돌아 오던 중 풍랑으로 중국 절강성(浙江省) 영파부(寧波府)에 표류하고 온갖 고난을 겪고 반년만에 귀국했다.
즉시 왕명으로 <표해록(漂海錄)>을 저술하여 중국의 연안, 해로, 기후, 산천, 도로, 관부(官府), 풍속, 민요 등을 소개하였으며, 특히 수차(水車)의 제작과 이용법을 배워와서 뒤에 충청지방의 대한발(大旱魃) 때 이를 사용케 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 1492년 지평(持平)에 올랐다가 사간(司諫)으로 전임하고, 5년 후 성절사(聖節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무오사화(戊午史禍)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붕당을 조직하여 국정을 비방하였다는 죄로 단천에 유배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참형(斬刑)을 당했다가 뒤에 신원(伸冤)되었다.
○ 최학령(崔鶴齡) : 율정(栗亭). 자는 운로. 진사 숙의 아들. 진사 효로의 현손. 나주 출생. 하서 김인후에 종유. 중종34년(1539) 정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나 홍패에 별시로 오기되어 조정에 홍패를 반납하고 영달의 뜻을 끊고 고향에서 학문에 일생을 보냈다. 순수 도의학자로 명세한 바 시묘 6년 등 지극한 효심으로 후세에 알려졌다. 졸후에 정송강, 박사암선생의 품계로 홍문관 교리에 특증되다.
○ 최홍전(崔弘甸) : 사취당(沙趣堂). 자는 수회(壽會). 보성 영암군(靈岩君) 총(聰) 공의 후예. 문장으로 명세(名世)하고 천문, 지리, 역상(易象) 등에 밝았다. 숙종5년(167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한 후 각조(各曹)의 낭관(郎官)을 역임하다가 숙종15년(1689)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사퇴하고 고향에 은거(隱居)하다. 갑술년(1694) 성환도찰방(成歡 都察訪)에 뒤에 음죽현감(陰竹 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부임 전에 임명이 취소되었다.
■ 상대선조 5위단과 장경공 사당
1921년 장경공의 묘지석을 일본으로부터 봉환한 뒤에 개최된 대종회의에서 “장경공의 강진 묘를 무효화하고 설단(設壇)하고 봉사(奉祀)한다”는 결정에 따라 1922년 임술에 광주 고사차리(백운동)에 설단한 바, 1928년 무진에 무양서원을 건립함과 동시에 단을 서원 경내로 이단하였다.
1979년 9월에 장경공의 조부님 철공과 아버님 정공, 그리고 아드님 변 효인 양공 4위단을 새로 설단함에 따라 서원 옆에 장경공 단도 다시 이단(移壇)하여 5위단을 함께 모시다.
제향일(祭享日)은 매년 음력 3월6일(장경공의 서거일)이며, 현재 참여 중조파는 광주손암공파(光州遜菴公派), 광주서외파(光州西外派), 광주복작파(光州洑作派), 나주진사공파(羅州進士公派), 보성영암군파(寶城靈岩君派)이다. 강진파(康津派)는 불참하고 화성파(華城派)는 광주단(光州壇)과 강진묘(康津墓) 양측에 참여 중이다.
(2) 장경공께 유림(儒林)이 향사(享祀)하는 사당
○ 무양서원(武陽書院) : 소재 광주시 광산구 비아면 월계리. 1925년 6월에 광주향교에다 장경공 사우(祠宇) 창립 건의소를 설치하고 전국 200여 향교의 찬동을 얻어 1928년 무진에 건립하여 매년 음력 9월 6일에 향사하고 있다. 주벽(主壁)은 장경공이고 배향(配享)자는 후손인 금남 최부(錦南 崔溥), 손암 최윤덕(遜岩 崔允德)과 외손으로 미암 유희춘(眉岩 柳希春), 장암 나덕헌(壯巖 羅德憲)으로 모두 5位이다.
○ 강덕서원(康德書院) : 소재는 강진군 군동면(郡東面) 나천리(羅川里). 1966년 丙午에 건립하고, 매년 음력 3월15일에 향사(享祀)하고 있다. 장경공을 주벽(主壁)으로 모시고, 배향자(配享者)는 후손인 금남(錦南) 최부(崔溥), 은암(隱庵) 최표(崔彪), 용호(龍湖) 최극충(崔克忠)이다.
■ 탐진최씨가 대종회를 결성하지 못하는 이유
단적으로 표현하면 『상계선조와 장경공 유택』 문제를 정립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 탐진최씨는 유감스럽게도 상대선조세계 문제(강진파에서는 장경공의 부조 양위를 부인한다)와 장경공 유택 문제(강진파에서는 강진 의묘를 고집)가 하나라도 정립되기 전에는 대종회를 결성할 수 없으며, 따라서 대동보도 편수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시비를 앞에서 상세하게 고증문헌에 의거하여 논술했거니와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을 위해 강진파와 꾸준한 교섭을 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경위를 아래에 밝히기로 한다.
(1) 장경공 묘지석 발견 이후의 일
장경공 묘지에서 공의 묘소가 개성임이 밝혀져 개성 현지를 답사(누가? 언제?)했으나 800년이란 장구한 세월이 경과한 지라 지명이 바뀌어 장미(薔薇)山이란 지명은 없고 미산(薇山)이란 곳이 개성 남방에 있는데 평산(平山)이었고 군데군데의 고분(古墳)이 파헤쳐져 있었다. 촌로(村老)들의 말에 의하면 그곳이 고려 때의 귀족 묘등(墓嶝)이라 하는데 추측컨데 장미산이 미산으로 개명되고 고려 고분의 부장 귀물을 노리는 일본인들의 도굴행위로 폐허가 된 듯했다.
개성 성남에는 왕릉도 여럿 있슴이 기록에도 있는데 고려가 쇄망하고 왕족들이 살아남기 위해 변성(變姓) 은신(隱身)하였으며 귀족들 역시 같은 처지이었을 터이니 조상묘를 수호할 수 있었겠는가? 현지 답사는 헛되고 장경공 개성묘는 영영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한편 강진 묘에 대한 처리를 신중히 해야 하는 견지에서 중중은 국내에서는 한학(漢學)과 보학(譜學)으로 제1인자인 田 간제(艮齊) 선생에게 질의한 바, 회신에서 “강진 소재의 묘는 고유정지(告由停止. 整理)함이 가하다” 하였다.
간제(艮齊)선생 : 전우(田愚. 1841~1922). 조선후기 유학자. 전주 출신. 호남의 대표적 유학자 중 1인. 한학(漢學)과 보학(譜學)에 밝았다.
(가) 1921년 9월에 일본으로부터 장경공 묘지석을 봉환한 뒤, 같은 해 11월 27일 개최된 대종회의에서 결의한 것은
. 장경공 묘지석은 광주종중에서 봉안(奉安)한다.
. 강진묘는 무효화하고 설단하여 봉사하기로 한다.
. 대동보를 편수하기로 한다.
이 결의에 따라 광주종중에서는 1922년 광주 고사차리(古斜靫里.현 백운동)에 우선 장경공 단을 모시고 음력 3월6일에 단향을 올렸는데 전국 종중대표가 참여하다.
강진파 종. 중에서는 강진묘가 수백년 전부터 있었으니 묘지석이 의심스럽다 하면서 그 강진 묘를 정리하지 않았다. 131쪽
(나) 1927년 정묘 2월6일 강진 덕동묘각(德東墓閣) 회의
1921년의 대종회의 결의가 실행되지 않기에 강진종중과 누차 교섭 끝에 6년 후인 이날에 광주와 강진 양측 종중대표가 회합하여 이렇게 합의하였다.
. 강진에다 장공공 단(壇)을 설치하고 묘지석을 단내(壇內)에 매안(埋安)할 것이며 광주단은 고유정지(告由停止)한다.
. 설단에 따른 석물설비(石物設備)는 강진종중에서 책임진다.
. 대동보(大同譜) 편수 사무소는 무양서원(武陽書院)에 둔다.
이 결의에 따라 동년 3월15일 무양서원에서 강진파 포함하여 전국 각종중 대표가 회합하여 대동보의 수보규약(修補規約)을 정하고 임원을 선정하였으며 경비 조달 대책을 협의하였다.
임원은 총재 최상규(崔相奎. 화성파. 전 성균관박사), 부총재 최술영(崔述永.강진파), 최낙희(崔洛喜.나주파)와 찬성위원 15인, 有司 6인, 총무 6인, 감인(監印) 10인, 장재(掌財) 1인, 개간(開刊) 5인, 회계(會計) 1인, 정서(正書) 6인을 각 문중에 고루 안배(按配)하였다. 탐진최씨 역사이래 숙원이던 대동보 편수에 착수하였으니 대동단합의 새로운 기운이 이룩됨을 온 족인이 기뻐하였다. 그런 후에도 강진파에서는 덕동묘각에서의 결의를 실행할 의사를 보이지 않아 결의가 또 무위(無爲)로 끝났다.
(다) 1933년 계유 2월9일 제2차 덕동묘각(德東墓閣) 회의
1차 덕동묘각 회의 이후 6년이 지나 1933년에 광주와 강진의 종중 대표는 다시 회합하고 전회 결의를 수정하여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
. <상대선조5위단>을 강진에 설단하기로 하고 동시에 <강진 덕동묘>와 <광주 단>은 고유정지한다.
. 설단에 따른 석물설비와 향화 수호의 비용은 양측이 공동 부담하며, 설단역사(設壇役事)는 강진이 제수(祭需)는 광주에서 담당한다.
. 묘지석은 무양서원 안에 봉안한다.
. 합의 사실을 양측 참석자가 서명 날인하여 전국 각파 종중에 통보한다.
이 회의에 참석한 대표는 광주에서 최종섭(崔鍾涉), 최달석(崔達錫)이며 강진에서는 나천파(羅川派)와 대구파(大口派)는 각 2인, 금천파(錦川派)는 3인, 벽송파(碧松派), 평덕파(平德派), 교동파(喬洞派), 이본파(耳本派), 계동파(桂洞派)는 각 1인씩으로 합 13인이다.
(라) 설단 및 대동보 편수의 좌절(挫折)
제2차 덕동묘각 회의에서 강진측의 요망대로 광주측의 큰 양보가 있었으니 이제는 틀림이 없을 것으로 믿고, 동년 3월2일에 광주 대표 양씨는 강진 종인들과 설단 개기제를 마쳤는데 난데 없이 강진 종인 4인이 폭도 5~6인을 인솔해 와 광주대표 양인(兩人)을 구타·폭행하여 방해함으로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일족 단합의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2) 폭력사건 이후부터 현재까지
1933년 계유의 폭력사건 이후 강진파는 여전하게 강진 덕동 墓를 수호·봉사하고
광주3파와 나주파는 광주단(光州壇)에 참여하며 상호 왕래가 없는 상태가 지속돼 왔다.
1982년에 광주단과 강진 덕동묘의 상호 인정하자는 제의가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84년에 화성파(자칭 기호파)의 최윤상(崔允相)이란 분이 주동하여 강진파와 합작하여 대종회라 사칭하고 대동보를 편수하자고 하였으나 『2대 현안 문제』(상계와 장경공 유택)가 하나로 정립되기 전에는 그러한 사업이 성립될 수 없기에 광주3파, 나주, 보성 각파가 불응하였고 결국 실패로 끝나다.
1985년에는 강진파에서 강진묘를 고수(固守)하기 위하여 장경공 묘지의 성남(城南)이 “개성(開城) 성남이 아니라 康津의 성남”이라고 궤변을 내놓았으나 일소(一笑)에 부칠 일이다.
『2대 현안 문제』가 정립되기 전에는 대종회도 대동보도 성립될 수 없음을 인식한 각파 종중은 각 중조파 대표로써 협의회를 구성하여 모든 고증자료에 의거한 연구협의하자는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1987년에 화성, 강진, 나주, 보성, 광주3파 전 중조파를 망라하여 대표가 여러차례 회합하였으나 강진파에서는 고증문헌을 연구해 보려는 의사는 없고 종전 주장만 반복하기로 현안 문제 해결에 일보의 진전이 없었다.
이와 같이 협의회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자 또 화성파와 강진파가 주동하여 대종회 간판을 서울 모처에 내걸었다 하나 조상을 기만(欺瞞)하는 반쪽짜리 종회로서 부질없는 일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대종회라 하면, 대종회의 구성 목적은 반드시 시조(始祖) 또는 상조(上祖)의 봉사(奉祀)가 제일 목적이며 우리 탐진최씨의 경우 상대 선조 사세오위(四世五位)의 봉사를 함께 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재 상황이 강진파에서는 장경공의 부조(父祖) 양위(兩位)를 부인하고 있으며, 광주손암공파, 광주복작파, 광주서외파, 보성영암군파, 나주진사공파는 철공(哲公)을 상조로 모시고 광주 소재의 상대 선조 4세5위 단(壇)에 봉사하고 있는데 어떻게 대종회가 성립될 수 있겠는가?
우리 효로진사공파 종중은 대의원 회의를 거친 의결사항을 각 중조파에 다음과 같이 제의한다.
. 상계 문제는 장경공 묘지(墓誌)에 따라 상조 철 - 정 – 사전 – 변·효인으로 한다.
. 장경공 유택(幽宅) 문제는 강진 소재의 구전묘(口傳墓)는 무효화하고 그곳에 광주소재의 5위단을 이전한다.
. 이상의 제의에 동의하여 각 중조파가 합의되면 대종회를 구성하여 실행하고, 정상 운영이 될 때에 대동보(大同譜)도 편수할 수 있다.
. 이상과 같은 순서에 어긋난 사이비 대종회 구성(大宗會 構成)이나 대동보 편수(大同譜 編修)에는 절대로 가담하지 않다.
장경공 열전(장경공 列傳)
최사전(崔思全)은 탐진인으로서 처음은 내의(內醫)로 출사(出仕)하였으나 여러 관직을 거쳐 소부소감(小府少監:종4품)이 되었을 때 예종(睿宗) 임금의 등에 종기가 나서 사전을 불러 보였더니 가벼운 종기이니 걱정할 것 없다하여 치료를 안했다가 병이 점점 커져 고치지 못하고 드디어 승하하였다.
이 일 때문 공은 재상 한안인(韓安仁)과 문공미(文公美: 최사추의 사위) 등의 청으로 인종 임금으로부터 인책되어 2년간을 관직에서 해임되었기에 이 악감(惡感)으로 이자겸(李資謙: 인종의 장인, 최사추의 사위)에게 고자질하여 안인과 공미 두 사람을 귀양가게 했다고 <안인전>에서 전해지고 있다.
※한안인(韓安仁)과 문공미(文公美) 두 사람은 인종(仁宗)의 즉위를 못마땅히 여겼고 예종(睿宗)의 아우인 대방군 왕보(王甫)를 내세워 왕위를 찬탈하려 했다는 죄로 1122년에 한안인은 처형되고 문공미 등 50여 인이 귀양을 갔다.
※ 인조의 장인인 이자겸(李資謙)은 해주인 최사추(崔思諏)의 사위이다. 문공미 또한 최사추의 사위이나 동서인 이자겸이 인종을 옹립하는데 반대해서 서로 정적(政敵)이 되었다.
공이 군기소감(軍器少監:종4품)에 재임할 때 이자겸(李資謙)이 병사들로 궁궐을 침범하고 위세가 대단하여 정권을 전횡하였다. 이자겸은 드디어 역의(逆意)를 품고 왕을 유폐하여 모든 관료의 시위(侍衛)를 금지하였으나 사전만은 본래 시의(侍醫)임을 핑게로 출입할 수 있었기에 왕은 사전(思全)과 은밀히 모의하니 사전이 “이자겸이 발호하는 소이(所以)는 오직 척준경(拓俊京)을 믿고 있슴이니 만약 준경을 이쪽으로 끌어들여 병권(兵權)을 내속(來屬)한다면 자겸은 다만 필부(匹夫)에 불과합니다.” 라고 아뢰었다.
왕은 “준경이 자겸의 심복이 되어 혼인을 맺기까지 하였으며 준신(俊臣.준경의 아우)과 순(純.준경의 아들)이 모두 관병(官兵)에 살해되었으니 준경이 호응해 줄지 의심스럽다.” 고 말하였다.
이내 점괘에서 길하다는 계시를 얻기도하여 공이 척준경의 집에 찾아가 충의로 설유(說諭)하기를 “태조와 역대 왕의 신령이 하늘에 계시어 화복(禍福)이 두려운데 자겸이 다만 궁궐의 세도를 믿을 뿐으로 신의가 없으니 그가 하자는 대로 해서는 안될 일이요. 공은 마땅히 한마음으로 나라를 받들어 영원한 세대에까지 사그라지지 않을 공을 세우도록 하라.“ 하니 준경이 그말을 내심 옳게 여겨 마침내 결심함으로써 이자겸 일당을 제거하였다.
왕은 준경에게 공상을 내리고, 사전을 병부상서(兵部尙書)로 발탁하면서 추충위사공신호를 함께 내리고 이어 수사공(守司空)상서(尙書) 좌복야(左僕射)를 더 내리면서 교서로 선포하기를 “내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외척(이자겸)이 정권을 전횡하여 권세를 부리는 탓으로 피해자가 많았다. 이자겸이 한인안을 죽이고 문공미와 최홍재 등 50여인을 귀양보내어 이 때문에 조정이 텅비어 역도의 위세는 전국에 떨쳐 나는 고립이 되었다. 이로부터 역도당의 세력이 더욱 커져 화가 장차 측량하기 어렵게 되었는데 병오(1066)년 2월에 근시(近侍)하는 관원들과 한 두 대신이 그들 권세 제거를 청하므로 내가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었더니 그들은 마침내 포악한 행동으로 궁궐과 부고(府庫)를 불지르고 진탕을 처서 남은 것이 없기로 나는 연경궁으로 나아가니 좌우에 시위하는 군사들을 혹은 베어 죽이고 혹은 귀양 보내어 흉악한 기세가 더욱 치열하고 화변(禍變)은 측량하기 어려운 때 경(卿)은 은밀히 척준경을 타일러 마음을 합하여 계책을 결정함으로써 5월 20일에 역도당을 소제하고 왕은 그후 다시 영을 내려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을 봉하고 참지정사(參知政事:종2품)와 판상서형부사(判尙書刑部事:종1품)로 발령하고 얼마 있다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2품)로 승진 발령하였다.
공은 한미한 지위에서 몸을 일으켜 최고의 은총을 입었으나 조정에서 물러나기를 왕께 아뢰니 왕은 윤허하고 큰 집 한채를 하사하면서 또 칭찬하기를 “내가 듣건데 거센 바람이 일 때 굳센 풀을 알 수 있고 조정이 어려울 때 충신을 알 수 있다고 들었다. 병오년(丙午年)에 화란이 소장에서 일어나 종묘사직이 위태롭고 조정이 극히 어지러웠다. 나의 좌우에 있는 충의로운 관정들은 죽음을 면치 못할 위기에 처해 누가 충성심을 발휘하여 사직(社稷)을 보위할 것인지 추측이 어려울 때 오직 경(卿)이 분발하여 일신의 위험을 불고(不顧)하고 훌륭한 모책으로 척준경을 변론으로 순리와 역리를 타이르고 화복의 득실을 이해하도록 설유(說諭)하니 비록 척준경과 같은 간악한 자라도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고 종사의 존귀함을 깨닫게 되어 전화위복으로 종사를 안정하게 하였으니 이 모두가 경의 공로로다. 경이 비록 조정에서 물러나지마는 내 어찌 포상할 마음을 조금이라도 늦출 것인가?” 하며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종1품)와 수태위(守太尉)에 상주국(上柱國:종1품)이란 최고의 영예를 내렸다. 종1품은 민간인으로서는 최고의 품계이다.
공이 서거하자 시호(諡號)를 장경이라 내렸으며 나중에 인종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였다.
공이 변(弁)과 열(烈) 두 아들을 두었던 바 공이 금 술잔을 한벌씩 주었는데 공의 첩(妾)이 한 벌을 몰래 감추었기로 변이 찾고자 하니 아우인 열이 “이 사람은 아버님이 사랑하던 사람으로서 우리가 가산을 기울여서라도 구휼(救恤)해야할 처지인데 하물며 그런 물건 쯤으로 그럴 수 없으니 남아있는 하나를 형이 가지면 될 것이요.” 하고 만류하였다는 소식을 왕이 듣고 열을 가상히 여겨 효성스럽고 인덕이 있다하여 어필(御筆)로 효인(孝仁)이라 사명(賜名)하였다.종묘사직을 다시 안정한 그 공적을 잊을 수 없노라.”고 찬양하였다.
최사전묘지명(崔思全墓誌銘)
공은 이름은 사전(思全)이고, 자는 휼세(恤世)이며, 성은 최씨(崔氏)이다. 선조는 탐진현(耽津縣) 사람인데, 조부는 상약직장(尙藥直長) 철(哲)이고, 아버지는 장작감(將作監) 정(靖)으로, 모두 의술(醫術)로 나아가 조정에서 벼슬하였다.공은 성품이 꾸밈이 없고 충성스럽고 정의로웠다. 지혜와 꾀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의술에 정통하였다. 나이 15세 되던 해(선종 1, 1084) 선종(宣宗)이 궁궐로 불러 들여 “의원은 마땅히 모든 것을 온전하게 하는 것[十全]을 으뜸으로 삼아야 하는데, 그대가 바로 최고의 의원이 될 것이오”고 하면서, 이에 이름을 사전(思全)이라고 하고 친히 글을 써서 내려주었다. 이 때부터 여러 대에 걸쳐 벼슬을 하였는데, 항상 친밀한 믿음을 보여 주었다.당시 외척이 권세를 함부로 하고 정령(政令)을 사사로이 내어 나라 안팎의 온 나라 백성들에게 악을 마음껏 베풀었으므로, 아낙네와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싫어하고 서로 상심하여 해독을 참지 못했다. 임금이 그것을 근심하여 병오년(인종 4, 1126) 2월에 한두 명의 대신과 함께 의(義)를 들어 해로운 것을 없애려 하였다. 그러나 적신(賊臣)이 먼저 알고 대궐을 침범하여 궁궐이 타버리게 되자, 임금이 거처할 곳이 없어서 사가(私家)로 피하여 머물게 되었다. 외가에서 권력을 휘두르니, 그 때에 외척에 붙었던 자들은 출세하여 공(功)과 상을 받았으나, 임금을 호위했던 자는 도리어 유배를 가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이 때에 조정에 가득 찬 공경사대부들이 모두 외척에게 붙었으나, 오직 공만은 그렇지 아니하고 충성으로 임금을 받들어 끝까지 한결같은 절의를 지켰다.이 때 적의 무리들이 더욱 불어나고 권신이 발호하여 장차 불측한 흉계를 자행하려 하였다. 임금이 이 일을 알고 몸을 보전하고 해(害)를 멀리하고자 하여 장차 외가에 왕위를 넘겨주려고 하였다. 공이 간언하기를, “삼한(三韓)은 삼한의 삼한이지, 폐하의 삼한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선왕 태조(太祖)께서 부지런히 힘써서 국가를 이루셨으니, 청컨대 소홀하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하였다. 임금이 오랫동안 울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만약 회복시킬 수 있다면, 생사를 같이 한 피붙이와 같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공이 머리를 조아리고 두 번 절한 뒤 저 무리의 우두머리를 회유할 비책을 아뢰었다. 흉악한 무리들이 소탕되자, 임금은 “삼한을 다시 바르게 하고 사직과 종묘를 받들어 편안하게 한 것은 모두 공의 힘이오”라고 하고, 특별히 조서를 내려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으로 삼고, 자손에게 벼슬을 주어 관리가 되게 하였다.공은 공(功)으로 일찍이 수대위 문하시랑평장사(守大尉 門下侍郞平章事)에 임명되었는데, 63세에 나이를 이유로 물러나기를 청하였다. 공을 이룬 것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불법(佛法)을 공경하고 믿었으며, 재산을 모으는 일에 힘쓰지 않았다. 기미년(인종 17, 1139) 3월 6일 병으로 돌아가시니, (화장하고) 곧 그 유골을 모아서 다음해 2월 27일에 성 남쪽의 장미산(薔薇山) 기슭 와곡(瓦谷)에 장례지냈다.(공에 대한) 기록을 멀리까지 전하고자, 힘써<뒷면>명(銘)을 짓는다.공의 아름답고 뛰어난 덕이여, 꾸밈이 없이 바르고 지혜가 많았으며어려서부터 업(業)을 배우니 의가(醫家)의 갈래로다.십전(十全)의 오묘한 솜씨가 임금을 위해 넉넉하니항상 침전에서 함께 하며 총애를 받았다.여러 임금을 모시면서 끝까지 곁을 떠나지 않으니오랫동안 친신(親信)한 관계를 맺어 더욱 지키고 보호할 것을 다짐하였다.개연(介然)하게 절개를 지키니, 험하거나 평탄하거나 어찌 바뀜이 있겠는가,일이 있으면 반드시 고하여 임금의 오랜 원로가 되었다.병오년(인종 4, 1126)에 이르러 외척이 권세를 오로지 하자사람들이 많이 무리 지어 붙었으나 자신만은 홀로 그러하지 않았다.2월의 재난에는 임금 앞에서 죽음을 무릅쓰고5월에 변란에는 지모로써 온전함을 도모하였도다.원악(元惡)이 제거되고 무리의 의구심도 사라지니나라는 더욱 편안하고 조종(祖宗)에게 산 짐승으로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이와 같이 될 수 있던 까닭을 살펴보면 다만 공의 힘이 있었으니충성스럽게 호위하는 근면함을 끝도 없이 보였네.아름답도다, 이 한 사람이야말로 가상하게 큰 공을 세웠으니집안에 은총을 내리고 벽(壁) 위에 그 형상을 그렸다.사람은 죽었다고 하나 그 영예는 더욱 빛나니그것을 멀리 전하고자 명(銘)을 지어 돌에 기록하노라.
[출전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전남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에 자리한 금남 최부와 그 아버지 최택의 묘. <사진작가 황헌만>
1488년 윤 정월 초3일, 최부와 그의 일행 43명은 제주를 떠나 육지로 향했다. 항구에서 5리쯤 바다로 들어오자 날씨는 변덕을 부렸고 때 아닌 비바람이 치면서 위험한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부모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급히 가는 길이어서 회항을 하기도 어려워 계속 앞으로 나아가자, 날씨는 더욱 악화되면서 43명의 운명은 풍전등화에 놓이고 말았다.배 안에는 하인이나 종을 포함해서 대부분 하류층으로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막말을 하고 도에 벗어나는 행위를 하려는 사람도 있었지만, 주자학과 성리학의 이론으로 인격까지 갖춘 최부의 인품은 그럴 때마다 그들을 위로하고 달래서 위기를 넘기고 있었다. 인간은 극한 상황에 놓일 때에야 그 본디의 성품이 드러나고 인격이 발휘되는 것이다. 경전과 사서에 밝고 고사나 옛일에 넉넉한 지식이 있던 최부는 막돼먹은 사람에게도 인격적 감동을 주어, 참으로 어려울 때마다 위기를 극복하면서 표류하는 뱃속 생활을 해냈다.윤 정월 12일 해적을 만나 겨우 위기를 벗어나고 마침내 중국의 절강성 영파부(寧波府) 땅에 이르게 되었다. 해적을 만났을 때, 조선의 벼슬아치임을 과시하기 위해 상복을 벗고 관복으로 갈아입으라는 옆사람의 권유를 뿌리치고, 죽음을 당할망정 선비의 도리에 어긋나게 해서는 안된다던 최부의 절조는 대단한 정도였다. 해적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목숨까지 위태로운 때에도 그는 조선선비의 위풍당당함을 전혀 흐트러뜨리지 않고 버티는 지조를 발휘할 수 있었다. 그래서 대단한 선비라는 것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해서는 안되고, 조금이라도 정직하지 못한 것이 드러나면 반드시 의심을 살 것이니 언제나 정도를 지켜야 한다”(윤정월 16일조)고 끝까지 주장하던 최부의 정신은 이 나라 민족정신의 위대한 유산이 아닐 수 없다.겨우 중국땅에 오르자 이제는 왜구, 즉 왜적으로 의심받아 또 어려움에 봉착했다. 조선의 관인임을 증명하는 온갖 증표를 보여주어 드디어 조선인임을 인정받고 황제를 만나러 북경으로 향할 수 있었다.# 수차(水車)의 제작법을 배우다
애국자이던 최부, 농사짓는 조국의 백성들에게 이용후생할 마음을 버린 적이 없었다. 3월23일 중국의 봉신역(奉新驛)에 이른다. 농부들이 수차를 이용하여 쉽게 논으로 물을 퍼올리는 것을 보고는 최부는 자세히 그 제작법을 배운다. 영·정조 시대에나 등장했던 중국을 통한 과학기술의 보급을 최부는 벌써 그때 실현하였다. 그는 뒷날 고국에 돌아와 벼슬하면서 가뭄이 든 충청도에 파견되어 수차제작법을 가르쳐주어 가뭄을 극복한 큰 공을 세우기에 이른다.조선의 홍문관 학사라는 이름에 부끄럼 없이 역사와 지리에 밝고 경전과 문학에 밝았던 최부는 철저한 선비적 자세와 생활이 중국의 황제에게까지 인정받아 후한 상품을 받고 끝내 호위를 받으며 그리운 조국 땅으로 다시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 자신만이 아니라 동승했던 43명 전원이 아무 탈 없이 모두 무사히 귀국하였다. 모두가 최부의 인격과 학식, 뛰어난 위기관리 능력에서 나온 위대한 생의 부활이었다.
최부 묘소 아래에 있는 제각. <사진작가 황헌만>
# 넘실대는 영산강 강변의 묘소탄생지를 찾아가 달랑 서있는 ‘유허비’ 하나만을 보고 말았던 우리는 나주와 무안을 잇는 영산강 위의 다리를 건너 최부와 그의 아버지 최택의 묘소가 있는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 느러지 마을을 찾았다. 필자의 고향 땅이어서 가끔 들른 적이야 있지만, 거기가 바로 역사와 사상의 땅이자 고향임은 크게 생각하지 않고 지냈던 것이 사실이다.왕릉의 크기에 부족함이 없는 최택의 묘소 아래, 크기는 훨씬 작아 아담한 금남 최부의 묘소가 영산강을 바라보며 고즈넉이 누워 있었다. 안내판에는 본디 해남에 최부의 묘소가 있었으나, 해방 후로 후손들의 노력으로 아버지 묘소가 있는 이곳으로 이장했다고 적혀 있었다. 제각(祭閣)도 덩실하게 서 있어서, 수효도 많지 않은 후손들의 따뜻한 마음이 드러나 있었다.이곳 이산리는 무안군 땅이지만 강 하나만 건너면 나주의 동강면으로 실제로는 최부의 탄생지와 이곳은 바로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래서 애초에 아버지의 묘소가 있게 되었고, 효성이 깊었던 아들을 아버지 묘소 아래로 모신 것은 그것을 알고 있던 후손들의 뜻이었으리라.
금남 최부의 묘비 앞면(왼쪽)과 뒷면.
세상에 아직 크게 조명되지 않은 진사 최택과 당대의 학자 관인이던 최부 부자의 묘소는 그렇게 소홀하게 취급할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 호남의 젖줄인 영산강이 넘실대는 하류, 몽탄강(夢灘江)의 바로 곁에 풍광도 아름답게 자리잡은 묘소는 호남의 문화와 학문을 열고, 이용후생의 큰 뜻을 최초로 조국 땅에 뿌린 탁월한 인물의 유골과 혼이 묻혀있는 역사적 땅이라는 것이다.
# 금남의 학문 연원과 학파의 형성
필자는 몇해 전에 호남유학의 전개과정을 설명하는 ‘17~8세기 호남유학의 전통’이라는 논문에서 호남에 최초로 학문과 의리의 씨앗을 뿌린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1384~1455)를 이어 본격적으로 제자를 양성하고 학파를 형성한 학자로는 금남 최부라는 주장을 편 적이 있다. 금남은 나주 태생이지만 해남의 정씨(鄭氏)에게 장가들면서 주로 해남을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해남 출신인 외손자 유희춘에 의하면, 해남은 본디 바닷가에 치우쳐 있어 옛날에는 문학과 예의(禮儀)도 없었고 거칠고 누추한 고을이었는데,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처가인 해남에서 노닐면서 우선 세 제자를 길러냈다는 것이다. 첫째는 해남윤씨로 진사시에 합격한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 둘째는 조선 중기의 대문호이던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의 숙부인 임우리(林遇利), 셋째는 유희춘 자신과 자신의 형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큰 명성을 얻었던 유성춘(柳成春)의 아버지인 성은(城隱) 유계린(柳桂隣)을 가르쳐냈다고 하였다. 호남을 대표하는 세 가문이 바로 금남의 문하에서 나왔음만 보아도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가는 금방 짐작할 수 있다.해남윤씨 윤효정은 윤행(尹行)·윤구(尹衢)·윤복(尹復) 등 3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문명을 날리던 고관들이었고, 그 후손으로 고산 윤선도, 공재 윤두서로 이어지는 명문의 학문가를 이룩했다. 석천 임억령의 형제들 또한 조선의 명사들이 많았고 호남문단에 석천이 미친 영향 또한 대단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유성춘·유희춘 형제는 금남의 외손자로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더구나 금남의 사위에는 나주나씨의 나질이 또 있다. 이분의 아들 나사침은 호가 금호(錦湖)로 효행과 학행으로 천거받아 현감을 지냈는데 금남의 외손자다. 금호는 나덕명(羅德明)…나덕헌(羅德憲) 등 여섯 아들을 두었다. 모두 금남의 외증손들이면서 이른바 ‘육룡(六龍)’이라는 별호를 들을 정도로 명망이 큰 문사들이었다. 호남의 웅도인 나주 일대에 그들이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금남의 학문과 사상의 영향은 바로 호남유학의 ‘개산조(開山祖)’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당시는 영광땅이나 지금은 장성땅에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1459~1547)이 있었다. 금남보다 5세 연하지만 과거에 합격한 것은 금남보다 9년 뒤여서 송흠은 금남을 대선배로 모시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같은 시기 같은 조정에서 벼슬하던 두 사람은 같은 호남출신이라는 인연도 있어 자주 내왕하면서 아주 가까이 지낸 것으로 기록에 나온다. 벼슬 초기에 송흠은 휴가를 받아 고향에 왔고, 고향에 체류한다는 금남의 소식을 듣고 금남의 고향집으로 송흠이 인사차 찾아갔다고 한다. 금남이 물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고향까지의 교통편은 무엇이었느냐고. 나라에서 관인에게 내주는 역마를 타고 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대 집에서 우리 집까지의 교통편은 무엇이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마찬가지로 역마를 타고 왔다고 했다. 금남은 벌컥 화를 내며 나라에 고발하겠다고 송흠을 꾸짖었다고 한다.이유인즉, 서울 집에까지는 휴가니 의당 역마를 사용할 수 있으나, 자기집에 찾아옴은 사사로운 일이니 역마를 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벼슬아치가 공사를 구별하지 못함은 절대로 안된다고 하면서 가까운 고향 후배를 끝내 나라에 고발하여 문책을 받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바르고 청렴하며 공사에 엄격했던 분이 금남이었고, 이런 경계를 받은 송흠은 그 일을 계기로 세상에 이름난 청백리로 고관대작의 벼슬살이를 했다고 전해진다.송흠의 제자에는 호남의 대학자가 많다. 하서 김인후, 면앙정 송순, 학포 양팽손 등이 대부분 송흠 문하에서 젊은 시절에 학문을 익힌 분들이었다. 송흠의 학문과 사상 및 청백리 정신이 최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보면 호남의 석학들은 대부분 최부의 영향을 어느 정도는 받았다고 추정하기 어렵지 않다.‘표해록’의 가치와 중요성은 생략한다. 1769년에 일본에서도 번역되었고 최근에는 영문이나 중국어로도 번역되어 세계적인 여행기록으로 정착한 지 오래다.최부는 직계 후손들의 수도 적고 세력도 미약하다. 금남 최부의 고향 마을에서 생가 터를 확정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그는 ‘표해록’을 통해 일찍이 세계화정신을 이 땅에 뿌렸고, 연산군의 패정과 고관대작들의 비리를 폭로하다 갑자사화로 처형당했다. 그런 만큼 최부의 고향 나주는 그 외로운 의리정신은 묻혀버릴 수 없는 이 땅의 사상적 유산으로 현양하기에 충분한 곳이다. 의리 높고 박학한 학자 금남 최부의 혼과 사상을 충분히 이해하고 활용하는 일만 우리들의 몫으로 영원히 남아있다.
탐진(耽津)
탐진(耽津)은 전라남도(全羅南道) 강진군(康津郡)에 속해 있던 옛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동음현(同音縣)인데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이 탐진현(眈津縣)으로 고치고 고려 때 영암(靈岩)#장흥(長興) 등으로 이속되었다가 1417년(태종17) 도강현(道康縣)과 합하여 강진으로 고쳤으며, 1895년(고종32) 강진군(康津郡)이 되었다. 탐진 최씨(耽津崔氏)는 고려 때 상약원 직장(尙藥院直長)을 지낸 최 철(崔 哲)을 원조(遠祖)로 하고
고려 때 장작감(將作監)을 지낸 정(靖)의 아들 최사전(崔思全)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으나 사전의 아들 변(弁)과 열(烈) 이하의 기록은 누차의 전란으로 문헌이 실전(失傳)되어 각파(各派) 중시조(中始祖)들의 세거지를 따서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장경공의 휘자는 사전(思全)이요.자(字)는 휼세(恤世)니,성(姓)은 최씨이며 그 선대가 탐진현(耽津縣)사람이라. 조부는 상약국직장(尙藥局直長)으로 이름은 철(哲)이요 부친은 장작감(將作監)으로 이름은 정(靖)이니, 의술로써 조정에 벼슬하였다. 사전(思全)은 처음에 의술(醫術)로써 조정에 나갔으나 1126년(인종4) 이자겸(李資謙)이 궁궐을 범하고 함부로 권세를 부리자
왕과 협의하여 자겸의 심복 척준경(拓俊京)을 설복하여 이자겸을 제거한 공으로 공신(功臣)에 책록되어 병부 상서(兵部尙書)에 올랐다. 그후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으로
수태위(守太尉)·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며, 만년에 스스로 은총이 넘친다 하여 치사(致仕)하기를 원했다.
그는 두 아들 변(弁)과 열(烈)을 두었는데, 변(弁)이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올랐고 둘째 아들 열(烈)은 [효인(孝仁)]이란 칭호를 왕으로부터 받았다.
일찍이 사전(思全)은 두 아들에게 금 술병을 한 벌씩 주었는데 그가 죽은 후에 첩(妾)이 그 하나를 훔쳐
내었다.
변(弁)이 화가 나서 매를 치려고 하니 열(烈)이 말하기를 "이는 선군(先君)이 사랑하시던 사람이라 마땅히 가산(家産)을 기울여서라도
구제해야 옳겠거늘 하물며 이 물건이 문제가 되겠소. 제가 얻은 것이 또 있으니 청컨대 이것을 형님에게 드리리다."하였다. 왕이 듣고 가상히 여겨 "효자요
또 인인(仁人)이라고 할 만하다."하며 어필로 <효인(孝仁)>이라고 써 주었다고 한다.
문헌에 나타난 각 파의 중시조(中始祖) 이래의 내력을
살펴보면 화성파(華城派)는 중조(中祖) 응규(應奎)가 고려 때 중서령(中書令)을 지냈고,
그의 아들 상(尙)은 1056년(문종10) 예부낭중(禮部郎中)으로 감찰어사(監察御使)를 거쳐 1065년(문종19) 예부상서(禮部尙書)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거란에 다녀와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상(尙)의 아들 원습(原鈒)은 태복시정(太僕寺正)을 지냈고, 원길(原吉)은 중랑장(中郞將)에 올랐으며, 원습(原鈒)의 아들
용폐(龍陛)#용승(龍陞)#용승(龍陞)의 아들 숙륜(叔倫)이 당대에 뛰어났다.
강진금천파(康津錦川派)의 중조(中祖) 준량(浚良)은
생원(生員)으로 우문관 대제학(右文館大提學)에 추증되었고, 아들 령(齡)이 예의 판서(禮儀判書)를 지냈으며,
령(齡)의 아들 직림(直霖)은 판도판서(版圖判書)로 오산군(鰲山君)에 봉해졌다.
직림의 아들 봉(鳳)이 조선 때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지냈으며 봉의 아들 만(滿)이 조선 세종(世宗) 때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역임했다
만경파(萬頃派) 중조(中祖) 효로(孝老)의 현손(玄孫)이고 능참봉을 지낸 숙(淑)의 아들 학령(鶴齡)은 당대의 명신(名臣) 김인후(金麟厚)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1539년(중종34) 진사로 정시문과에 장원했으나 어사의 홍패(紅牌)에 틀린 글자가 있다고 받기를 거절하고 돌려 보낸 뒤 포의(布衣)로 고향으로 돌아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학문으로 일생을 보냈다.
보성조내파(寶城兆內派) 중조(中祖) 총(聰)의 아들 표(彪)는 당대에 명성을 날린 학자 이 색(李 穡)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공양왕(恭讓王) 때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고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그의 아들 귀령(龜靈)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담양부사(潭陽府使)를 지냈고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강호(江湖)에 숨어 살았다. 광주성서파(光州城西派) 중조(中祖) 윤덕(允德)은 고려 말 영도첨의(領都僉議)로 조선이 개국한 후 광산으로 귀양가서 살았으며,
손자 호(灝)가 중종 때 계공랑(啓功郞)에 이르렀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한성판윤 겸 오위도총부 총관(五衛都摠府摠管)에 추증되었으며, 호의 손자 언웅(彦雄)은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금남파(錦南派) 중조(中祖) 정원(井元)의 손자 부(溥)는 학자 김종직(金宗直) 문하에서 글을 배워 1482년(성종13) 진사로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교리(校理)로
[동국통감(東國通鑑)] 및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뒤에 호당(湖堂)에 뽑혔다
만경율리파(萬頃栗里派) 중조(中祖) 해(海)는 세조(世祖) 때 벽동군수(碧潼郡守)를 지냈으며, 아들 한춘(漢春)은
의영고직장(義盈庫直長)에 있었고 한춘의 증손 경란(景瀾)은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지내다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만경율리(萬頃栗里)에 은거(隱居)함으로 후손들이 문호를 열었다. 그 밖에 인물로는 채희귀한도(蔡姬歸漢圖)를 그린 조선 성종(成宗) 때의 화가 경(涇)이
소헌왕후(昭憲王后)와 세조·예종·덕종의 초상을 그린 공으로 성종(成宗)이 안구마(鞍具馬)를 하사하였으며 1484년 당상관(堂上官)에 올랐다. 사전의 후손 홍전(弘甸)은 문장에 능했고 천문(天文)·지리(地理)·역상(易象) 등에 밝았으며, 1679년(숙종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후 낭관(郎官)을 지냈다. 중일(中一)은 1450년(세종32) 진사로 문과에 급제한 후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를 역임하였고
부교리(副校理) 겸 독서당 응교(讀書堂應敎)·지평(持平)을 거쳐 사간(司諫)에 이르렀다.
최사전묘지명(崔思全墓誌銘)
公諱思全字恤世姓崔氏其先耽津縣人也祖尙藥直長名」
哲父將作監名靖皆以醫術進仕於朝公性質直忠正智」
謀過人自少○於其術年十有五歲宣宗時召入殿內謂」
曰醫者宜也十全爲上汝是上醫也因稱名曰思全御筆」
賜之自是歷仕數代常見親信時外戚擅權政令私出」
肆其惡於中外一國之民至於婦人小子擧皆疾首」
相非不忍毒上患之丙午春二月與一二大臣欲擧義」
除害而賊臣先認犯闕以至宮室焚蕩上失所依」
○在私第受制於外家其時附外者立見功賞衛上者」
反被流殺時滿朝卿士盡皆附外公獨不然忠誠奉」
上終始一節時賊類益熾權臣跋扈將肆不測之謀上」
稍認欲以全身遠害將讓位於外家公諫曰三韓者」
三韓之三韓也非止陛下之三韓也先君太祖勤勞以致請」
勿忽之上哭泣良久乃曰汝若復之生死而肉骨也公稽首」
再拜密告以謀和誘彼黨之渠魁掃蕩凶類上謂」
曰復正三韓載安宗社皆公之力也特下詔旨以爲三韓」
後壁上功臣仍許子孫入仕公以功曾任守大尉門下侍郎」
平章事年六十三引年乞退不居成功敬信佛法」
不事産業至己未年三月六日以疾卒卽○其骨越翼年二」
月二十七日葬于城南薔薇山麓瓦谷欲遠其傳强
(陰記)
爲之銘曰
公之懿德 質直多謀 自小受業」
醫家者流 十全之妙 爲上所優」
常於寢殿 泮渙爾游 歷朝侍衛」
終好不離 久結親信 益思護持」
介然守節 夷險何移 有事必告」
爲王耆龜 屬當丙午 外戚專權」
人多朋附 我獨不然 二月之災」
○死王前 五月之變 以智圖全」
元惡卽除 衆疑頓息 家國益安」
祖宗血食 顧此之由 惟公有力」
忠衛之勤 示之罔極 媚玆一人」
嘉乃丕績 錫寵于家 圖形於壁」
人之云亡 厥譽愈赫 欲遠其傳」
銘之在石」
[출전 :『韓國金石全文』中世上篇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