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mduCMP4z_DE
개인적으로 소설 ‘어린왕자’는 아주 어렸을 적 읽었음에 불구하고 항상 내 삶을 비춰볼 수 있는 반려가 되는 그런 책이다. 보살핌이나 책임에 대한 나의 소견은, 순수하게 그 자체만을 물리적 측면으로만 본다면 어렵고 피곤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단 그것을 투자하여 소기했던 행복이나 아름다움을 가져올 수 있느냐 없느냐를 별개로 둔다면 말이다.
나는 천성적으로 훈장기질이 좀 있어서 타인을 가르치고 길들이는 것은 좀 익숙하고 잘 수행되기도 하는데, 역으로 무엇에 길들여지는 것에는 선천적으로 매우 강한 알레르기가 있어서, 어느 누구의 유명한 논리 혹은 불멸의 어떤 학문이나 철학, 종교 등을 만났을 때, 어느 정도는 인정하지만 그것에 온전하게 길들여져 추종한 적은 없는 것 같다.
물론 그게 사람에게도 공히 적용되어서 남자든 여자든, 야~ 저 사람 정말 내 스타일이다. 이런 생각이 든 적도 한 번도 없었다. 하긴 내 마음이나 그대 마음이나 순간 순간 변하는 세밀한 마음 포착에나 큰 의미를 두고 있는 나에게, 장한 어느 누구의 어떤 스타일이란 것이 애초부터 나에게 어떤 의미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각설하고 길들여진다는 것, 나는 그것을 일단 어떤 피곤한 관계를 맺는다는 뜻으로 인식하고 있다. 길들여지기 전 우리는 서로에게 나 아닌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어느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원초적인 나는 당신이 필요 없고, 물론 당신에게도 내가 필요하지 않다.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우리는 다른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어느 한 사람에 지나지 않을 때는 그렇지만, 하지만 그 둘 중 누가 만일 상대방을 길들인다면, 우린 서로가 필요하게 된다. 그리고 당신은 나에게, 나는 당신에게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그 무엇이 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알다시피 길들여진다는 것은 피곤한 것이다. 생각해 보라, 나와 늘 어떠한 친절한 관계에 놓이는 세상의 여러 사람들 중, 늘 당신만이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그러나 문제는 거의 모든 우리는 날마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똑같은 생활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일과 돈을 좇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도 그 일과 그 돈을 좇는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나는 그들을 그것에서 떼어내기 위하여 안간힘을 쓴다.
일과 돈이 모두 비슷비슷해서 구별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도 모두 그 사람이 그 사람으로 별로 다를 게 없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쉬이 피곤해지면서도 심심해진다. 우리가 길들여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 순간 당신이 나를 길들인다면 내 생활은 환하게 밝아지는 것이다.
다른 모든 발소리와 구별되는 당신만의 발소리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된다. 다른 발소리들은 나를 땅 밑으로 기어들어가게 만들지만, 당신의 발소리가 들려오면 나는 음악이라도 듣는 기분이 되어 나만의 동굴에서 위험한 바깥으로 설레는 마음으로 뛰어나올 수 있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자신이 길들여진 것만큼 세상에 대하여 안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날 어둠 속에 혼자 서 있게 된다. 어둠 저 끝으로 산자락이 있고 거기에 갈대밭이 있다고 치자. 평소에 나는 어두운 밤 산자락 끝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둠이 무섭다기보다 어둠에 길들여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그 어둠이 나에게 그 어떤 것도 생각나게 하지 않는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것은 어쩌면 서글픈 일이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아름다운 검은 머리카락을 가졌다면, 그리고 당신이 나를 길들였다면, 나는 바람 부는 어둠 저 끝 편으로 갈대밭을 아주 멋지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의 머리카락에도 바람이 불어 나부끼고 있었으며 그 머리카락도 검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나는 나도 모르게 곧 어두운 갈대밭 사이를 스치는 바람 소리를 사랑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 서로에게 나를 길들여 달라고 말해야 될 근본 이유이다.
물론 우리 모두 항상 그러고 싶기는 하지만, 우리들에겐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고 사업상 만나야 될 고객들이나 문제가 있는 친구들, 또는 고마운 친구들을 찾아보아야 하고, 그 날 그 날 해야 할 이런 저런 일들, 해결해야 할 문제들, 기억해야 할 중요한 일들, 어느 누구의 생일, 어느 누구의 결혼식 등등이 너무 많다.
또한 그러기엔 우리들 사이에 그것 말고도 복잡다단한 많은 일들이 마귀들의 복마전처럼 존재하고 있음을 안다. 그 모든 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우리가 종국에 가서 그 무엇을 안다는 것은, 결국 우린 우리가 길들여진 것만을 알 수 있으며 그것 말고 다른 것은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요즈음 사람들은 어떤 것의 진실을 알 시간을 가지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가 필요한 그 무엇을 자신이 만드는 게 아니고, 가게에서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들을 산다. 참으로 편리하고 간단 명료한 세상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정말 오묘하고도 중요한 사실은 이 세상엔 몸을 파는 사람들이 있는 가게는 있어도, 친구를 파는 가게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게에서 그런 것들을 사려는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자신에게로 올 자신의 친구를 없애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친구를 가지고 싶다면 내가 누구를 길들이거나, 누가 나를 길들이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친구를 가지려는 자는 이 세상 바깥으로 난 모든 입 닫고 상당히 오랜 시간을 묵묵히 견딜 줄 아는 참을성이 있어야 된다. 게시판 글 열 줄만 내려가면 그 페이지 덮어버리는 사고의 조루증 환자들은 그것을 포기해야 될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말이란 것이 필요가 없다. 그저 상대에게서 좀 떨어져서 동그마니 앉아 있는 거다. 아마 상대가 힐끔힐끔 곁눈질로 쳐다볼 거다. 그래도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말은 우리가 가져야 할 저 수많은 인식을 단 하나의 인식으로 고착화시켜 그 말과는 전혀 다른 오해의 근원을 만드는 데 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날짜가 지나감에 따라, 그리하여 당신은 조금씩 상대방과 가까운 곳에 다가앉을 수 있게 된다. 시간이 별 필요가 없을 듯하지만, 시간을 정해 놓고 상대에게 다가가는 게 훨씬 더 좋다. 그래야 만약 당신이 오후 세 시에 만나자면, 상대는 두 시부터 이미 행복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상대는 점점 더 행복해진다. 세 시가 되면, 그땐 이미 흥분해서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행복의 요체는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행복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은 그 순간뿐 이다. 규칙이란 것이 구속적인 내용을 함유하고 있어 좀 답답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 말고는 어느 하루를 다른 날들과 다르게 만들고, 어느 한 시간을 다른 시간들과 다르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길들임이건 언젠가는 떠나야 할 시간이 온다. 그 이유는 무궁무진하니 생략하고서라도, 그 떠남의 현상에 대하여 우리들은 통상 각각 상대방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은 길들임에 대한 오해의 산물임과 동시에 당신 때문에 길들임에 대하여 얻은 게 없다고 비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길들인다는 것이나 길들여진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것과 책임지는 것을 동시에 행위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친숙해지는 것은 서로를 위해 소비한 시간 때문에 발생한 우리들 사이의 마음 변화지, 딴 것 때문은 아닌 것 같다. 그 시간은 서로의 공동 책임 하에서 공동으로 만든 것임을 안다면, 그래서 행복은 우연이 아니라 서로의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졌음을 안다면, 우리는 헤어진 후 다른 길들임을 택했더라도, 그래도 그 때의 그 길들임과 길들여진 시간들을 고맙고 아름답게 기억해야 할 것이다.
길들여진다는 것. 그리고 친숙하게 된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아무리 힘들더라도, 우리가 그런 무위의 피곤에서 어떤 가능성 있는 고통을 만들고, 그 고통 속에서 우리가 서로 더 아름답고 행복해지려고 노력한 결과며, 그런 노력없는 삶은 더 이상 우리에게 가치없음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ㅡ 글: 쎙떽쥐뻬리의 ‘어린왕자’를 다시 읽고 남은 생각을 간추림. / 音 레스젝 모줴르 ‘좋은 아침의 멜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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