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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삼청동에서 서울역까지
삼청동에서 서울역까지 트레킹
2022-09-28(넷째 수요일 / 흐림)
코스 : 삼청파출소 -> 정독도서관 -> 가희동(백인제가옥) -> 헙법재판소 ->
동십자각 -> 광화문광장 -> 서울시청 -> -> 대한문 -> 덕수궁돌담길 ->
남대문시장 석식(갈치조림) -> 서울로7017 -> 서울역
함께하신 분들
자하잘 / 피오나 / 회오리 / 이프로/ 해든 / younseo / 청마(靑馬)
코스 안내 / 자하잘
사진 촬영 청마(靑馬)
Canon EOS 5D Mark IV (오막포)
광각렌즈 EF16-35mm F2.8L III USM
단렌즈 EF 50mm f/1.2 STM
첫 번째 중학교였던 정독 도서관
서울시 종로구 화동 언덕에 있는 정독 도서관은 원래 우리 나라에서 가장 먼저 생긴 중학교였어요. 1900년에 문을 연 조선에 단 하나뿐인 중학교였지요. 그래서 이름도 없이 그저 ‘관립 중학교’라고 불렸어요. 관청에서 세웠다는 뜻이지요.
이곳에서는 열일곱 살부터 스물다섯 살까지의 청년들이 4년 동안 공부했어요. 관립 중학교는 얼마 뒤 경기 공립 중학교로 이름이 바뀌고 1938년에는 최신식 건물이 지어졌어요. 이 건물이 바로 지금의 정독 도서관이에요. 이곳은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의 집이 있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정독도서관은 서울 종로구 북촌에 위치한 옛 경기고등학교 자리에 1977년 1월에 개관하여, 49만 여권의 장서와 16,300여 점의 비도서자료를 소장하고 있으며, 부설 서울교육사료관에는 12,000여점의 교육사료를 소장하고 있는 서울시립공공도서관이다.
정독도서관은 서울시민에게 최신정보를 제공하고, 교양ㆍ학습 등을 지원하여 문화발전 및 평생교육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도서대출, 자료실 및 열람실 이용 외에도 매월 작가초청 강연회와 사진전 그리고 독서회, 인형극, 음악회, 댄스공연 등의 문화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백인제 가옥
조선시대 최고 권력가, 재력가들이 살았던 북촌 일대 대형한옥 중 당시 규모로 오늘날까지 남은 것은 `백인제 가옥`과 `윤보선 가옥` 두 채. `윤보선 가옥`은 현재 거주 중인 사택으로 대형한옥이 일반 시민에게 상시 개방되는 것은 `백인제 가옥`이 최초다.
`백인제 가옥`은 1913년 당시 한성은행 전무였던 한상룡이 북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2,460㎡ 대지 위에 전통방식과 일본양식을 접목해 지은 근대 한옥이다. 부근 한옥 12채를 합친 널따란 대지에 당시 새로운 목재로 소개됐던 압록강 흑송을 재료로 지은, 규모는 물론 건물 그 자체로도 당시 최고급 가옥이다.
현재 명칭은 마지막 소유주인 백인제 박사에서 유래했으며 역사적인 보존가치가 인정되어 1977년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됐다.
백인제 가옥 역사가옥박물관 관람료는 무료이며 관람 시간은 평일·주말 오전 10시∼17시다.(공휴일을 제외한 매주 월요일, 1월 1일 휴관)
관람 방법은 예약이 필요 없는 자유관람과 사전 예약이 필요한 가이드투어(소요시간 50분, 하루 4번) 2가지가 있다. 예약은 서울시 공공예약시스템에서 하면 된다.
동십자각(東十字閣)
동십자각은 광화문에서 연결되어 오는 경복궁 외궁성(外宮城)이 건춘문(建春門)을 향하여 꺾이는 부분에 세운 망루(望樓)이다. 석단(石壇)은 조선시대 초기의 유구(遺構)로 추측되나 누각은 대원군 시대의 건립으로 추측된다. 규모는 적으나 조화로운 예술적 조형미로는 경복궁내 뛰어난 건축물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건물은 궁성(宮城)의 동남 모퉁이에 세웠던 망루와 같은 돈대(墩臺) 건물의 기능을 갖고 있던 것인데 궁성 원장(垣墻)이 헐리면서 현재와 같이 길가에 독립건물같이 되었다. 이 건물은 궁성 전면 양모서리에서 궁내외를 감시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인데 서십자각(西十字閣)은 헐려 현재 볼 수 없다. 평면은 정면과 측면이 모두 3칸 방형(方形)이며 축부(軸部) 구성은 하방(下枋)과 창방(昌枋)만을 짜올리고 벽 없이 모두 개방하였다. 주간(柱間)에는 무벽(無壁)의 개방식이며 바닥은 흙바닥으로 되었다.
해치 ,해태(獬豸)
광화문 좌우의 높은 대 위에 앉아 전방을 응시하는 해치(獬豸)의 늠름한 자태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만약 이곳에 해치상이 없었다면 광화문의 위용은 물론 경복궁 전체의 권위가 반감되었을지도 모른다. 궁궐 내에서 볼 수 있는 동물상들은 주로 상서와 길상 또는 벽사의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광화문 해치처럼 궁궐 밖에 있는 해치상은 그런 것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해치의 권위 있는 자태 뒤에는 법과 정의에 따라 광명정대한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조선왕조의 정치철학과 요순의 정치를 이 땅에 펼치려 했던 조선 임금의 원대한 이상이 숨어 있다.
2008년 5월, 서울특별시의 상징동물 선정을 위한 자문회의에서 학자들 간에 광화문 해치상의 정체와 성격을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다. 해치가 시비곡직을 판결할 때 거짓을 말하는 사람을 외뿔로 응징하는 짐승임을 감안할 때 광화문 양쪽의 동물상은 뿔이 없으므로 해치가 아니라고 주장한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해치상은 맞지만 수문장으로 그 성격이 바뀌면서 뿔이 없어진 것이라는 희한한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편 송사와 관련 있는 신수(神獸)라면 사법부 건물 앞에 있어야 하는데, 궁궐 정문 앞에 있다는 점이 의심스럽다는 사람도 있었다. 논자들이 주장하는 근거는 오직 뿔의 유무와 해치상이 놓인 장소에 집중돼 있었다.
그렇다면 우선 광화문 해치상의 외형부터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몸은 동전 모양의 비늘로 덮여 있고, 부리부리한 눈에 주먹코가 돋보이며, 입술 사이로 앞니와 송곳니가 드러나 있으며, 다리에는 화염각(火焰脚, 불꽃 모양의 갈기)과 나선형의 갈기가 선명하고, 꼬리는 엉덩이를 거쳐 등에 올라붙어 있다. 정수리는 약간 불룩할 뿐이고 문제의 외뿔은 나타나 있지 않다.
한편 의심의 여지가 없는 해치상이 남양주 유릉(裕陵)에 있다. 신도(神道) 양쪽에 도열한 동물상들 중에 포함되어 있는데, 정수리에 솟아난 외뿔이 인상적이다. 그런데 바로 이 해치상 제작을 위한 겨냥도임이 분명한 『순종효황제산릉주감의궤(純宗孝皇帝山陵主監儀軌)』(1926년)에 수록된 해치 그림에는 정수리에 뿔다운 뿔이 묘사되어 있지 않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당시의 화원이 해치상을 그렸다는 사실이다. 광화문 해치상도 정수리에 뿔이 표현돼 있지 않지만, 경복궁 중건 당시 석공 이세욱이 이 상을 조각한 것이 분명한 사실이고, 또 모든 사람들이 해치상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누가 뭐라 해도 해치상인 것이다. 이는 동구 밖의 석상을 마을 사람들이 오랫동안 미륵불로 알고 경배해왔을 경우 도상적 특징이야 어떻든 그것이 미륵불로 인정돼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보면 경복궁 중건 후 2년째 되던 1870년(고종 7) 어느 날, 고종은 광화문 앞에서 아무나 말을 타고 다니는 일이 없도록 사헌부에 규찰을 명하면서 전교를 내렸다.
"대궐 문에 해치를 세워 한계를 정하니, 이것이 곧 상위(象魏, 서울 성문〔城門〕. 상〔象〕은 법상〔法象〕, 위〔魏〕는 '높다'는 뜻으로, 옛적에 법률을 성문에 높게 달았던 데서 나온 말임)이다. 조정 신하들은 그 안에서는 말을 탈 수가 없는데, 이것은 노마(路馬, 임금의 수레를 끄는 말 또는 임금이 타는 말)에 공경을 표하는 뜻에서이다."
이 내용에서 우리는 광화문 해치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첫째 고종이 불렀던 대로 광화문 석수의 이름이 해치이고, 둘째 '상위'는 엄정한 법률제도를 뜻하는 말이므로 해치가 법과 연관이 있는 동물이고, 셋째 해치상과 광화문 사이 지역이 임금의 수레만 들어갈 수 있는 성역으로 설정돼 있다는 사실이다.
끝으로 근대의 월간잡지 『별건곤』에 실려 있는 광화문 해치에 관한 내용을 하나 더 소개한다.
"광화문이란 세 글자의 문액은 정학교의 필이요, 상량문은 이유원이 찬하고 신석희가 썼으며, 문전의 쌍해치(雙獬豸, 치〔豸〕는 신양이요, 음은 해치이니 속칭 해타이다)는 근세 미술대가 이세욱(혹은 태욱〔泰旭〕)의 작이다."(민병한, 「경성 팔대문과 오대궁문의 유래」, 『별건곤』 제23호, 1929년 9월)
위와 같은 기록들이 증명해주고 있으므로 이제 광화문 석수가 해치냐 아니냐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일은 의미가 없다.
2020년 말 공사에 착수, 2022년 8월 완공되어 8월 6일 재개장했다. 재공사의 주요 계기가 되었던 월대와 해치상은 2023년 복원을 완료할 예정이다.
서울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남쪽 세종로에 있는 광장. 조선시대 육조거리가 있던 자리로 2009년 양쪽 차로를 두고 가운데 섬 형태로 조성되었고, 2022년 서쪽으로 영역을 확장하여 정부서울청사 본관 및 세종문화회관과 연결되도록 재공사가 완공되었다. 세종대왕 동상과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으며, 조선시대 관청의 유구와 매장문화재가 원형대로 전시되어 있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 일대 광화문 남쪽에 조성된 광장. 조선시대 주요 관청이 모여 있던 육조거리(六曹街)가 있던 자리로, 2009년 8월 기존 왕복 20차로가 있던 세종대로의 중앙 공간에 처음 조성되었다. 이후 접근성의 한계와 역사성의 복원 문제가 제기되면서 2020년 재공사에 착수, 2022년 8월 서쪽으로 면적을 확대하여 접근성을 높여 재개장했다. 세종대왕 동상과 이순신 장군 동상 등의 시설물이 있다.
광화문에서 남쪽으로 광화문 사거리까지 이어지는 공간은 조선시대 의정부를 비롯한 중앙 관청이 모여 있던 육조거리(六曹街)였다.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이후 광화문 자리에 조선총독부 건물이 들어서고, 기존 육조거리는 '광화문통(光化門通)'으로 불리면서 오늘날 세종로가 형성되었고, 오랫동안 서울의 중심 가로로 사용되었다.
해방 후, 일제강점기에 제자리를 잃었던 광화문이 1968년 제자리에 철근콘크리트로 중건되고 광화문 사거리 북쪽에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공간적 역사성을 복원하려는 노력으로 해방 이후 중앙청 청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어 왔던 조선총독부 청사가 1996년 철거되었다. 2000년 들어서는 광화문의 원형 복원과 함께, 육조거리의 역사성 복원과 서울 중심가를 대표하는 광장 조성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도로로 사용되던 공간을 축소하여 광장으로 활용하는 안이 채택되어 양쪽 차로 10차로를 각각 6차로로 축소하고 중앙에 광장을 조성하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 결과 광화문 남쪽의 월대를 부분 복원하고 남쪽로는 세종로 사거리까지 이어진 폭 35m, 길이 740m, 면적 18,840m2의 광화문광장이 완공되었고, 2009년 8월 1일 일반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광화문광장에는 기존 이순신 장군 동상의 북쪽으로 경복궁에서 즉위하고 승하한 최초의 임금이며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기리는 세종대왕 동상이 설치되었다. 세종대왕 동상은 높이 6.2m, 폭 4.3m 규모로 4.2m 높이의 기단 위에 좌상형태로 남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왼손에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들고 있다. 기단에는 <훈민정음> 원문과 해석, 동상 앞에는 세종대왕의 주요 과학 발명품인 해시계, 측우기, 혼천의 모형을, 후면부에는 세종대왕의 업적을 상징하는 기둥 형태의 6개의 열주가 세워져 있다.
광화문광장 재조성
광화문광장 개장 이후 도로로 둘러싸인 접근성의 한계와 광장 조성 과정에서 월대의 원형이 훼손되는 등 역사성이 무시되었다는 비판이 잇달으면서 재공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2019년 서쪽인 세종문화회관쪽의 도로를 없애 광장으로 연결하여 접근성을 높이고 월대를 원형대로 복원하는 데에 중점을 두는 재공사의 기본안이 마련되었고, 2020년 말 공사에 착수, 2022년 8월 완공되어 8월 6일 재개장했다. 재공사의 주요 계기가 되었던 월대와 해치상은 2023년 복원을 완료할 예정이다.
2022년 재공사가 완공된 광화문광장의 폭은 60m이며, 총면적은 40,300m2로 종전보다 2.1배 넓어졌고, 광장 내 녹지의 면적도 기존 2,830m2의 3.3배에 이르는 9,367m2로 확대되었다. 재공사 중 발굴된 육조거리의 유적 가운데 사헌부 문터, 삼군부터, 형조터, 공조터 등 유구와 매장문화재 일부는 발굴 당시 모습으로 현장에 전시되었다.
왜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고 할까
1999년 서울시에서 걷고 싶은 거리 1호로 지정했고, 2006년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습니다. 서울시 중구 정동길입니다. 가을에는 낙엽 쓸지 않는 길로도 유명하지요. 정동길은 너비 18미터의 일방통행 도로로, 정동교회 앞 사거리에서 이화여자고등학교 동문 앞을 지나 새문안길에 이르는 구간을 일컫는데요. ‘덕수궁 돌담길’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합니다. 그래서 이영훈이 작사 작곡하고 이문세가 부른 노래 〈광화문 연가〉에서는 이런 가사로 등장하지요.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 이영훈 작사 ,〈광화문 연가〉
누군가에게는 걷고 싶은 길이고, 누군가에게는 옛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는 곳, 정동. 그런데 이곳은 조선 왕조의 비극이 묻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정동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 강씨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지어졌습니다. 태조는 강씨의 능을 이곳에 정성스럽게 치장해서 조성했고, 자신도 이곳에 함께 묻히려 했습니다. 하지만 아내를 사랑한 평범한 필부로서의 꿈은 아들 이방원 때문에 산산조각 나버립니다. 이복 동생이자 강씨의 아들인 방번과 세자 방석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태종은 140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에 정릉을 도성 밖으로 이전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렇게 이전한곳이 지금의 성북구 정릉동이지요. 또 태조의 능은 양주로 옮겼는데 지금의 구리시입니다. 일부러 아버지와 계모의 능을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은 것입니다.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방해한 계모에 대한 이방원의 분풀이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정릉을 파괴해서 봉분을 완전히 깎아 흔적을 남기지 말도록 했고, 정자각은 헐어서 목재는 태평관을 짓는 데, 석조물은 돌다리를 만드는 데 썼는데 이 다리가 광통교입니다. 장안에서 가장 넓은 다리를 만들면서 일부러 정릉의 석조물을 쓴 것은 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라는 잔인한 의도가 담겨 있었지요. 대신 무덤을 호위하고 있던 문무석인은 그대로 묻어두라고 했는데 아직까지 발굴됐다는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조선 최초의 이 조각물은 아직 중구 정동 영국대사관저 주변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을이면 유난히 더 걷고 싶은 거리 서울 정동길. 백 년이 넘은 건물들과 아름다운 가로수, 잘 꾸며진 도로가 어우러진 풍경은 아늑하고 포근해서 산책로로, 데이트 장소로 사랑받고 있는데요. 그러나 어떤 연인들은 이 길을 걷는 것을 주저했던 적이 있거나 주저할 수 있습니다. 바로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 때문입니다. 속설치고는 참 야박합니다. 아름다운 연인들이 아름다운 길을 걸으며 사랑을 속삭이는 즐거움을 막는 것이니까요. 왜 이런 말이 나왔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설이 있어 소개합니다.
첫 번째는 이혼한 부부들이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기 때문이라는 설입니다. 1927년, 이 길에 경성재판소 건물이 들어섰습니다. 해방 후에는 대법원이었다가 1995년에 서초동으로 이전하자 리모델링을 거쳐 2002년 서울시립미술관으로 개관했습니다. 그러나 법원이 아직 정동에 있던 시절 이혼 소송을 하기 위해, 혹은 마친 후에 버스를 타려고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가는 부부가 많았고 그래서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말이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배재학교 학생들, 이화학교 학생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덕수궁 돌담길 주변에는 대한제국 시기에 설립한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춘기 풋풋한 첫사랑을 시작한 남녀 학생이 함께 이 길을 걷다가 정동교회 앞에 이르면 헤어져야 했습 니다. 왜냐고요? 각자의 학교로 들어가야 했으니까요.
그러나 덕수궁 돌담길에는 이 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보다 더 슬픈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덕수궁이라는 이름부터 그렇습니다. 본래 이름은 경운궁으로 지금의 세 배 넓이에 170동 이상의 전각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궁궐이었습니다. 고종이 일제의 강압으로 물러나면서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었지요. 정치 일선에 나서지 말고 ‘덕을 쌓으며’ 물러나 있으라는 굴욕적인 뜻이 들어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경운궁의 70퍼센트를 분할 매각해서 궁을 축소하고 중간에 길을 내고 담을 쌓았는데 그 길이 오늘날의 덕수궁 돌담길입니다. 덕수궁 돌담길 자리는 원래 경운궁 안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덕수궁 돌담을 보면 궁궐 담치고는 참 삐뚤삐뚤, 조악합니다. 이래저래 슬픈 전설을 간직한 덕수궁. 앞으로는 덕수궁이라고 부르지 말고 경운궁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데요. 언젠가 그렇게 된다면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도 옛말이 되겠지요.
서울로 7017 - Seoullo 7017
서울로 고가도로를 개조하여 만든 보행 공원이다. 서울로 고가도로는 서울역을 끼고 퇴계로와 만리재로, 청파로를 이어주는 총길이 938m, 폭 10.3m, 높이 17m의 고가 차도로 1970년 8월 15일 개통됐다. 1970~1980년대 남대문시장과 청파동과 만리동 봉제공장 등 상인들이 상품을 싣고 나르며 경제성장을 견인하는 데 든든한 다리 구실을 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노후화돼 안전성에 문제가 생겼다. 이에 서울시는 2014년 미국 뉴욕의 ‘하이라인 파크’를 모델로 서울역 고가도로를 ‘사람’ 중심의 녹색 시민 보행공간으로 재생시키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곧이어 서울역 고가도로를 보행길로 바꾸는 서울역 7017 프로젝트가 시작됐으며 공사를 거쳐 2017년 5월 20일 ‘서울로 7017’이란 이름으로 개장했다.
서울역 고가도로는 서울역을 끼고 퇴계로와 만리재로, 청파로를 이어주는 총길이 938m, 폭 10.3m, 높이 17m의 고가차도로 1970년 8월 15일 개통됐다. 서울역 고가도로는 1970~1980년대 남대문시장과 청파동과 만리동 봉제공장 등 상인들이 상품을 싣고 나르며 경제성장을 견인하는 데 든든한 다리 구실을 했다.
서울역고가도로는 1990년대 말이 되면서 노후화돼 그 안전성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1998년 9월부터 13톤 이상의 화물트럭 운행을 제한하고 매년 보수공사를 실시했다. 2004년에는 서울역 앞 교차로로 진입하는 램프를 철거했다. 2006년 실시한 정밀안전진단 결과 그 안전성이 D급 상태로 판정돼 2008년에는 서울역 고가도로 철거와 주변도로 개선 계획을 수립했다. 2009년에는 예외적으로 허용돼 오던 노선버스와 공항버스 등의 운행을 전면 통제했고, 2009~2012년까지 서울역 고가도로 철거와 주변도로 개선사업 설계용역을 수행했다.
그러다 2014년 9월 24일 미국 뉴욕을 방문한 박원순 서울시장이 뉴욕의 ‘하이라인 파크(High Line Park)’를 모델로 삼아 서울역 고가도로를 ‘사람’ 중심의 녹색 시민 보행공간으로 재생시키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취약시설물은 보수 보강해 고가도로의 원형을 최대한 보존해 산업 유산에 녹지 프로그램을 통합하고 주변 숭례문, 한양도성, 남대문시장 등 문화유산과 연계한 새로운 서울의 도심 명소를 조성하겠다는 계획이다.
뉴욕 하이라인 파크는 1934년 길이 2.3km, 높이 10m의 고가화물철로로 탄생했다. 값비싼 식재료 운반로로 사용되면서 뉴욕의 성장을 도왔다. 하지만 46년 뒤인 1980년 뉴욕에 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기능을 잃은 청로는 잡초만 무성한 뉴욕의 흉물로 전락했다. 그러나 이 철도를 지키기 위해 비영리단체인 ‘하이라인 친구들’이 결성됐고, 그들의 제안으로 고가철도는 2009년 자연친화적인 공원으로 재탄생해 해마다 수백만명의 관광객이 찾고 있다. 철거 위기에 놓인 고가철로가 다시금 뉴욕을 부흥시킨 셈이다.
서울역 고가도로 폐쇄에 대해 남대문시장과 만리동 봉제공장 상인들이나 운송업자들은 대체도로 신설이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대체도로가 우선적으로 마련돼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는 만리재로-염천교-퇴계로 축과 칠패로-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동서간 간선축을 근거리 우회경로로 마련하는 등 16개 교차로 개선대책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서울시는 ‘서울역 7017 프로젝트’를 통해 서울역 고가를 산책로로 바꾸고, 서울역 광장과 북부역세권 등으로 통하는 17개의 보행로를 고가와 연결한다는 서울시의 도시재생 사업을 추진 중이다. 7017 프로젝트는 ‘1970년에 만들어져 2017년에 17개의 사람이 다니는 길로 다시 태어나는 역사적 고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서울시는 2015년 5월 국제현상설계공모 총 7개 작품 중 보행길을 수목원으로 담아낸 네덜란드 건축·조경 전문가 비니 마스(Winy Mass)의 ‘서울수목원’(The Seoul Arboretum)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서울시는 서울역 고가도로의 17개 진출입로를 나뭇가지에 비유해 인근 지역으로 뻗어 나가는 큰 나무 형상의 공중정원을 만들 계획이다.
서울역 고가도로는 2015년 12월 13일 자정에 폐쇄됐다. 25일 크리스마스에는 자동차 도로로 쓰였던 상판을 철거하기 전 마지막으로 서울역 고가도로가 보행로로 개방됐다. 12월 26일부터 노후 상판 철거공사에 들어가 2016년 4월까지 모두 철거되고, 그 자리엔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용도의 상판이 다시 설치될 예정이다. 이후 2017년 보행자 전용 도심 공중정원으로 재탄생될 예정이다.
공원으로 바뀌는 서울역 고가도로 위에는 유리를 통해서 발 아래 지나다니는 차들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마련되고, 공원 곳곳에 찻집과 꽃집, 약국 등 상점과 도서관, 박물관, 전시관도 들어서며, 상점은 계절과 철에 따른 업종이 바뀔 예정이다. 서울시는 공원사업에 들어가는 예산은 당초 계획했던 380억원을 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보시느라 수고하셨네요..
첫댓글 감사합니다~~
수고많이 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