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CTAL/ 장미도
바이닐은 붉은 색이다 너는 신중히 지문을 고른다 그때의 RPM은 33이었다 비가 내리거나 겹겹이 두터운 목소리를 가지게 되는 날에는 45가 되기도 했다
바 자리에서는 같은 방향을 보게 된다
헤드 셸이 바이닐 위로 수평 이동을 하는 것처럼
어떤 마음은 물속에 손을 넣어 물거품을 만지는 것 같다
통유리 창 안으로 햇빛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고
나날이 익어가는 얼굴이 앉아 있다
밤이 오면 산은 하늘보다 어두워진다 경계를 다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둠 속에서도 왜 여기와 저기가 나뉘는 걸까
너는 빈 의자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오래도록 바라보고 조심스럽게 만지면
무언가 생길 것 같은 예감
그런 것들은 오래전에 하수구 속으로 흘러 들어갔고
누군가는 수영을 한다 누군가는 뜰채로 죽은 벌레를 건져낸다
빗방울이 수면을 뾰족하게 부수며 낙하한다
돌아오는 마음은 찾아가는 발걸음보다 빨랐다
옆모습으로 앉아 있는 사랑
폭이 좁은 허공에서는 왼발을 헛딛게 되고
붙잡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스스로 물속에 뛰어든 개미가 있을까
손이 허공을 휘저어도 밤은 무너지지 않고
음악은 뒷면에서도 가능했다
아주 천천히 개미는
앞면에서 앞면의 이쪽으로 이동한다
헤드 셸은 늘 같은 부분에서 음 이탈을 했다
- 2020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당선작
■ 장미도 시인
- 1995년 출생
- 명지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재학
[심사 경위]
올해로 20회째를 맞는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에는 시 부문 576명, 소설 부문 501명, 평론 부문 34명이 작품들을 보내주었다. 새로운 감각과 사유를 통해 ‘문학’이라는 이름의 외연을 창조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미래의 텍스트를 찾기 위해, 올해 역시 많은 분이 심사 자리에 참여해주었다. 시 부문에는 오은, 임승유 시인과 김나영 평론가가, 소설 부문에는 손보미, 정용준, 천운영 소설가가, 그리고 평론 부문에는 우찬제 평론가가 『문학과사회』 편집 동인(강동호, 김형중, 조연정, 조효원)과 함께 투고작들을 읽어나가며 한국 문학의 현재를 되짚고, 미래를 예감해보는 시간을 나눌 수 있었다.
우선 4월 10일에 전 부문 예심을 진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코로나 사태라는 전례 없는 상황을 고려하여 일부 심사위원들의 경우 비대면 방식으로 예심을 진행했다. 이후 본심에 오른 작품들(시 부문 16명, 소설 부문 11명, 평론 부문 4명)을 대상으로 2주 동안의 검토 기간을 거쳐 최종적으로 4월 24일에 당선작을 선정하는 자리를 가졌다. 그 결과 시 부문에 장미도 씨, 소설 부문에 구소현 씨, 그리고 평론 부문에 김보경 씨를 당선자로 선정하며, 실로 오랜만에 전 부문에서 신인을 배출하는 기쁨을 얻게 되었다. 세 분의 당선자에게는 각별한 축하의 인사를 전하며, 소중한 원고를 보내준 모든 응모자께 깊은 감사와 응원의 말씀을 드린다. - 심사위원 일동
● 제20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응모자는 시 부문 576명
본심에 오른 응모자들은 총 16명.
권루스, 김나우, 김보배, 김초롬, 김태형, 나헌, 박다래, 백선율, 백인기, 신원경, 윤재성, 이아영, 이혜리, 장미도, 최민지, 차현준
▲심사위원들이 주목한 응모자의 작품들
강동호(문학과사회 편집동인) : 김나우, 나헌, 윤재성, 장미도
김나영(문학평론가) : 윤재성, 차현준, 나헌, 장미도
오은(시인) : 윤재성, 김나우, 나헌, 김초롬, 장미도
임승유(시인) : 차현준, 김초롬, 이혜리, 윤재성, 장미도
[심사평] 나를 잘게 쪼개도 내가 남는다 / 오은
(…전략…)
쓸모없음에서 출발해서 “생과 사의 무게를 슬쩍하”는 일, 잠시 우주가 되는 일, 신인은 우주에 첫발을 내디딘 사람일 것이다. 여기가 우주인지 몰라 자기도 모르게 기울어지기도 하면서, 그런데 이 느낌이 왠지 싫지 않아서 자꾸 빙빙 돌기도 하면서.
「원정」 외 9편을 응모한 윤재성의 시는 맴도는 시였다. 어딘가를 맴돌아 출발 지점으로 다시 돌아오는 시, 이것을 복귀나 귀환이라고 칭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너희가 돌아와 들려주었다”(「원정」)라는 구절에서처럼 보았거나 본 것 같은 매혹적인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결구가 주는 분명함과는 달리 갸웃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여기와 거기는 모두 미지(未知)의 상태라 세계의 형상을 그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환기(喚起)가 설득에 가닿으려면 붙박고 있는 공간은 선명해야 한다.
「Sunset Shake」 외 9편을 응모한 김나우의 시는 휘도는 시였다. 그는 지구든 마음속이든 어디든 뱅글뱅글 돌 수 있었다. 문장과 문장을 가로지르는 자유분방함과 차원을 넘나드는 상상력이 아니면 휘도는 일은 금세 시들해질지도 모른다. 그의 시에서 아지랑이가 걷어차이고 경계가 둥둥 떠오르는 것은 예삿일이다. 이 예삿일을 어떤 경지에 다다르게 만드는 것은 구심력일 텐데, 종종 원심력이 훨씬 더 강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소화하지 못하고 이탈하는 경우가 있었다.
「Balgetreter」 외 12편을 응모한 나헌의 시는 외도는 시였다. ‘오르간의 송풍(送風)용 풀무를 밟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표제작 제목처럼,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연주를, 외돌기를 그만두지 않을 것 같았다. 외따로 돌지만 시선을 거둘 수 없게 만드는 매혹이 있었다. 반복되면서 변주되는 문장들은 묘한 리듬감을 형성하며 시의 매력을 더한층 돋보이게 해주었다. 그러나 문장과 문장 사이의 긴장이 시와 시 사이의 그것으로 연결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패턴을 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부수면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의지도 필요하다.
「김초롬」 외 9편을 응모한 김초롬의 생생한 목소리를 기억할 것 같다. 발화(發話)가 발화(發火)하다가 발화(發花)가 되는 순간이 인상적이었다. 「거기에 무성한 측백나무와 아카시아에 대해」 외 9편을 응모한 차현준은 문장마다 숨통을 틔울 줄 알았다. 앞으로도 그가 문장의 이랑과 고랑을 오가며 경작을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마지막 바다에서」 외 9편을 응모한 이혜리가 들려주는 말에 귀 기울이던 시간도 잊을 수 없다. 물결이 숨결이 되고 빗줄기가 빛줄기가 되는 문장을 계속 써주었으면 좋겠다.
장미도의 「Fractal」 외 9편은 감도는 시였다. 다 읽고 나면 사라지지 않고 자꾸 아른거리는 게 있었다. “스스로 물속에 뛰어든 개미가 있을까”(「Fractal」)라는 질문이 턴테이블 위에서 빙글빙글 도는 장면을 상상했다.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시를 쓰는 것은 아니다. 시를 쓰면서 더 많은 질문이 만들어질 것이다. 개중 어떤 것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일 것이다. “젤리는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젤리는 불쑥 끼어들”(「젤리의 사생활」)기를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질문에서 발산해서 질문으로 수렴하는 과정을 반복할 것이다.
‘프랙털fractal’이라는 개념은 임의의 어떤 부분이 전체의 형태와 닮은 도형을 가리키는 수학적 용어다. 턴테이블 위의 엘피판은 끊임없이 돌면서 자기 자신에게 가까워진다. 구름이 피어오르면서 ‘그 구름’이 되듯이, 문장이 문장을 끌어당기면서 ‘그 문장’에 가까워지듯이. 그래서 시를 쓰는 일은 나를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장미도가 앞으로 시를 쓰면서 ‘나도 몰랐던 나’를 마주하는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 나와 닮은 모습이 나타나 화들짝 놀라기도 하면서, 김혜순 시인이 말한 것처럼 “‘나’라는 허구를 몽땅 구겨 넣”으면서, 한 발 한 발 자발적으로 나에 가까워지면서.
나를 잘게 쪼개도 내가 남는다. 나는 남는다. 백지 위에서 본격적으로 “부재의 건축”을 시작할 당선자에게 축하 인사를 전한다. 아울러 응모해주신 모든 분께 고맙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읽으면서 정말 좋은 자극을 받았다. 덕분에 실로 오랜만에 시가 쓰고 싶어졌다. - 오은(시인)
- 계간 <문학과사회> 2020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