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울역입니다 / 최숙미
지하철 7호선을 탔습니다. 딱히 갈 데는 없었지요. 향방을 잡지 않았으니 서두를 일도 아니었습니다. 불각시리 까치울역에서 내렸습니다. 안내원 목소리가 꼭이 까치처럼 들리더군요. 까치울이라는 역명도 마음 자락을 붙잡았지요. 까치가 울어 주길 기대했을까요. 까치가 울어 줄 날이 오늘이길 바랐을까요. 목적 없이 나선 길이니 기대마저도 안하면 좋으련만 기대가 물안개처럼 차오릅니다. 무소유에 길들여지지 않은 탓인가 봅니다. 멍 때리기 정도이길 바랐는데 말이죠.
하늘은 물기 톡톡 털어낸 까치처럼 맵시가 있군요. 하늘아래 눈이 가는 곳마다 연초록이 싱그럽습니다. 비상하는 까치 같이 날렵한 바람도 스치네요. 혼자여서 까치울 하늘을 볼 수 있었을까요. 혼자여서 길한 손님 같은 바람도 만날 수 있었을까요. 아무 골목이나 들어섰습니다. 머지않은 과거엔 시골이었던 마을이 전원주택으로 꾸며져서 품위가 있어 보입니다. 공원은 주택의 앞마당인 양 초록 숲이 짙습니다. 드문드문 들리는 자동차 소리를 밀어내니 새들의 재잘거림이 숲속에 온 듯합니다.
장미 넝쿨 넌출 대는 골목을 걸었습니다. 고즈넉해서 꽃잎이라도 떨어뜨릴까봐 걸음이 조신해졌습니다. 운동화를 신을 걸 그랬다 싶군요. 사람이 없는 대신 어디에선가 내 발자국을 세는 카메라가 돌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동네를 훔쳐보는 좀도둑치고 지나치게 미소를 짓고 다닌 것 같기도 합니다. 다른 골목을 들어서려는데 <구경하는 골목>이라고 씌어 있네요. 발소리 죽이지 않아도 될 일이었지요. 사람은 아니고 골목만 외지인들을 맞으라고 내어 놓았을까요. 지나가는 길손에게 물 한 바가지 건네 줄 우물 같은 사람은 안보입니다. 도심에서 이 정도의 내어줌에도 감사할 일이기는 하네요. 내심 사람이 그리웠던 것 같습니다. 까치울에 대한 기대치가 사람이었을까요. 혼자여서 까치울 골목과 친할 수 있었다고 말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외로움을 즐기려 했다면 그것도 오만이지 싶습니다.
비 오는 날에도 7호선을 탔습니다. 낮에 남편과 좀 안 좋았습니다. 같은 장소에서 일하는 부부들이 느끼는 날선 감정이었어요. 안내원의 목소리는 여전히 까치 같은 하이 음입니다. 목적지인 양 까치울역에서 내렸습니다. 비 오는 날의 까치울은 소 콧김 섞인 흙냄새를 뿌려댑니다. 엄마의 남새밭 냄새 같기도 하고 보리 피는 냄새 같기도 합니다. 언짢았던 마음이 까치울 흙냄새에 희석이 되는 듯합니다.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살 부러진 비닐우산에서 듣던 음률과 비슷합니다. 우산을 위로 튕겨 보았습니다. 음표가 튕겨져서 오선지가 난삽해지는 것 같아요. 비닐우산을 튕겼을 때의 음표들만큼 사푼히 내려앉지는 못하는군요. 비닐우산으로 빗물을 튕기며 <얼굴> <등대지기>를 부르던 추억이 떠올라 콧노래를 흥얼거렸습니다. 지금껏 남편과 같이 있었다면 이토록 쉬이 감정이 풀어지지 않았겠지요.
젖은 발도 닦을 겸 찻집으로 갔습니다. 지인들과 가끔 들르는 <올라>라는 찻집입니다. <올라>가 스페인으로 ‘안녕’이라고 하네요. 찻집 여사님을 뵈면 마음이 차분해 집니다. 기타 치며 노래하는 모습은 살포시 내리는 가랑비 같거든요. 오늘 같은 날 가랑비 같은 노래 한 곡 듣고 싶기도 합니다. 낮인데도 무리 지어 차를 마십니다. 비 오는 날의 원두커피 한잔은 없는 듯 마주 앉은 친구 같습니다. 책꽂이에 꽂힌 지인의 소설집을 뒤적이다가 남편에게 문자를 했어요. 내가 먼저 손 내밀기였죠. 이미 내 영혼은 쉴만한 물가에 있었거든요. 바로 답이 왔습니다. ‘밥 시킨다.’ 찻잔이 비어서 일어섰다면 웃으시겠지요.
소풍가기 좋은 날 까치울역으로 가족 나들이 어떠세요. 들녘 같은 무릉도원이 큰 품으로 맞아 줄 겁니다. 꽃길 사이로 종종 거리는 아이들의 모습에도 반할 테고요. 이 순간이 행복이라고 환호성을 올리며 찜하실 듯해요. 하루가 꽃숲에서 유영하느라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게 갈 것입니다. 실내 식물원엔 코너마다 어르신들의 해박한 해설이 또 한몫합니다. 눈으로 훑고 지나치는 구경과는 차원이 다르지요. 시니어 일자리 창출이 아주 훌륭해 보였습니다.
까치울역이 머시다고요. 어디에 계시든 목적 없이 길을 한번 나서보시지요. 가다보면 비닐우산에 음표 튕기며 흥얼거릴 수 있는 샛길을 만날 겁니다. 그곳이 까치울역이고 무릉도원이지 않을까요.
까치울역은 부천 도심에서 서울 도심을 잇는 오작교 같은 역입니다. 까치가 실제로 있느냐고 물으시렵니까.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만 길한 손님 대접은 받고 오곤 합니다. 행복한 날, 궂은 날, 우울한 날에도 까치울역 문은 열릴 겁니다. 모시처럼 올올이 결 고은 까치울 햇살에 온몸을 맡겨 보시지요. 도심에서 스멀거리던 고충들이 쌀벌레들처럼 빠져 나갈 겁니다. 눅눅했던 삶의 헌 옷들도 뽀송뽀송 마를 테고요. 헌데엔 새살이 돋아 팔랑 대는 까치같이 날 수 있을 겁니다. 까치울 바람을 실어 다시 돛을 올리시지요. 어느 쪽으로 가든 길한 손님 대접을 받을 겁니다.
지금도 바쁘신지요.
두 도시가 생기를 다 뺏어가 버리기 전에 까치울역에서 돛을 손질해 보시지 않으시렵니까.
[최숙미] 수필가. 계간《에세이문예》수필, 《한국소설》소설 등단.
한국문협, 국제 펜문학, 한국문학세계화 위원회 중부지부장
<한국수필문학진흥연구회>주관 2015년 40인에 선정,
* 풀꽃수필문학상, 에세이문학상, 원종린수필문학상 작품상 등.
* 《칼 가는 남자》 《까치울역입니다》
읊조리듯 속삭이듯 문장이 참 편안하고 고요합니다.
까치울로 훌쩍 떠나고 싶네요. <올가>에서 원두커피 한 잔, 얼마나 좋을까요? 까치울이 아니면 어때요? 발길 닿는 곳 어디든 까치울이 될 수 있으니까요.
카페가 없어도 상관없겠네요. 저 사진 속 들길에선 누구나 ‘길한 손님’ 대접 받을 수 있다니까요. 반겨주는 들꽃이 청초하네요. 걷다 보면 여문 벼이삭이며 수숫대가 넘실대고, 메주콩대가 발길에 채기도 해요. 햇살도 좋고 바람도 그만입니다. 뭉쳤던 마음이 흔적 없이 풀어지지요.
가을입니다. 지금 들녘으로 나가보세요.
첫댓글 까치울역이 아니어도 좋지요..
전주는 동서남북 어디나 다 좋은 고장입니다
인심좋고 자연좋고 전주는 참좋은 곳입니다
카메라가 있으면 더 좋고
없으면 요즘은 폰도 너무 좋은 사진이 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네 선생님~~
제 고향 안동도 좋지만
안동보다 더 오래 산 전주도 참 좋습니다.
가을비 오는 오늘도 얼마나 감사한지요
좋은 나날 보내세요!
양반의 도시 안동이 고향이시군요
여름에 하회마을 다니면서 땀 흘리던 여행이
생각납니다
정들면 고향이지요..
저는 고향은 순창이지만 이제는 전주에서 살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