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희생자 김범우의 묘소
<명동대성당의 ‘명례방 집회’ 성화(聖畵).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대회 및 103위 시성식’ 기념으로
김태 화가(1931~2021)가 그림. 가운데 푸른 옷을 입은 이벽이 이승훈 등의 앞에서 사제 역할을 하고 있다. 당시 천주교에 대한 지식에서 이벽을 능가할 사람은 없었다.>
1783년(정조 7년) 중국에 동지사(冬至使)가 파견될 때 이승훈의 아버지 이동욱(李東郁)이
서장관(書狀官)으로 합류하게 되자, 우리나라 천주교의 창시자 이벽(李蘗 1754~1785)이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을 찾아가서, 사절단에 동행하여 천주학 자료를
구해 달라고 부탁했고, 이승훈이 승낙하자 이벽은 동료들과 함께 여비를 모아 주며
교리와 그 실천 방법을 자세히 살필 것 등 여러 가지를 상세히 일러주었다.
이승훈은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매제이고, 이벽은 약현의 처남이었으므로
서로 가깝게 지내는 사이여서, 이벽의 영향으로 이승훈도 천주교 교리를 이해하고 있었다.
이벽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자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독학으로 천주교를 연구하여 스스로 입교한 데다가, 주위 사람들을 입교시켜
조직을 키워나간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고조부인 이경상이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수행하여 북경을 다녀온 이후
그의 집안에는 천주교 관련 서적이 있었으며,
이를 통해 이벽이 서학과 천주교를 익힌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이승훈은 1783년 11월 8일(음력 10월 14일) 한양을 떠나
1784년 1월 13일(1783년 음력 12월 21일) 북경에 도착했다.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천문학, 수학, 과학을 공부하는 등 견문을 넓히는 한편
천주당을 찾아가 필담으로 교리를 배우면서, 천주교의 오묘한 가르침에 끌려
결국, 자진하여 세례받기를 청했다.
1784년 음력 1월 그라몽(Jean de Grammont 梁棟材) 신부는 이승훈에게
조선 천주교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뜻에서 베드로(반석)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주었다.
당시 북경에 있던 서구 선교사들은 이 사건을 매우 놀라워했다.
선교사가 가 본 일도 없는 미교화국의 젊은 청년이 스스로 찾아와
세례를 받은 사례는 로마 가톨릭 사상 유례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선교가 아닌 구도(求道)에 의해 한국 최초의 세례 교인이 된 이승훈은
1784년(정조 8년) 4월 13일(음력 3월 24일) 기하학, 각종 과학서적, 성서, 천주교 자료,
성상, 묵주 등을 가지고 한양에 돌아왔다.
<이벽 세례자 요한> <이승훈 베드로 영세>
이벽은 이승훈에게서 많은 교리서를 받자마자 서울 수표동의 외딴집을 세내어
이의 연구에 전념하면서 이승훈과 정약전, 약종, 약용 3형제와 권일신 부자 등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1784년 11월 이승훈은 이곳에서 이벽, 정약용(요한),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조선순교자비망기』의 기록에서 다블뤼 주교는 이벽에 대해
“생각이 아주 고상하고 품행이 아름다우며, 열정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사방 사람들에게 천주교에 관해 공부하도록 자극시켜,
이 나라에 구세주가 오시도록 길을 닦는 역할을 한 것이 세례자 요한과 비슷하다 하여
세례자 요한이라는 본명을 붙여주었다.”고 썼다.
이로써, 1784년이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창설 년이 되었다.
이 모임에 평소 이벽과 가까이 지내며 천주교를 받아들였던 김범우 등 중인들이 참석했고
이승훈은 김범우(토마스), 이존창, 최창현, 최인길, 지홍 등에게도 세례를 주었다.
양반 계급에서 퍼져나가던 천주교에 중인과 여성들도 받아들여지면서
수표동 집이 비좁아지자 이해 겨울 장악원(掌樂院) 앞에 있던
김범우의 명례방(明禮坊) 집으로 장소를 옮겨, ‘명례방 공동체’가 탄생하도록 했다.
<장악원 : 조선 시대 궁중에서 연주되는 음악 및 무용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조선 초기 장악서와 악학도감의 전통을 전승한 1470년(성종 1) 이후 427년 동안
공식적으로 사용된 국립음악 기관의 명칭이다.>
김범우의 집 자리에는 1898년,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는 서울 명동성당이 들어섰다.
<탁희성 작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공적 집회도.’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소장.>
1785년 봄, 이승훈과 정약전, 약종, 약용 3형제 및 권일신(權日身) 부자 등
양반과 중인 신자 수십 명이 모여 이벽의 설교를 듣고 있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던 형조의 관원이 도박장으로 의심하고 수색하다가
예수의 화상과 서책과 성물 등을 발견하고는 전원을 체포, 추조(秋曹)에 보냈다.
[추조 : 조선 육조(六曹) 중 법률ㆍ소송ㆍ형옥ㆍ노예 따위의 일을 담당하던 관아.]
이들을 취조한 판서 김화진(金華鎭)은 피의자 대부분이 사대부가의 자제들임을 확인하자
이들이 ‘잘못 들어가게 된 것을 애석히 여겨, 알아듣게 타이르고는 내보내 주고
다만 김범우만 가두었다. 判書金華鎭惜其士夫子弟, 亦爲誤入, 開諭出送, 只囚範禹’고
‘벽위편’에 기록돼있다.
[벽위편 : 사도(邪道)를 물리치고 정도(正道)를 옹호한다는 ‘벽사위정(闢邪衛正)’의 준말을
표제로 하였다. 현행본(現行本)과 양수본(兩水本)의 두 가지가 있다.
현행본은 이기경(李基慶)이 편찬을 시작하고, 후손들이 계속 자료를 보충하여
1931년 5대손인 이만채(李晩采)가 석인본으로 간행한 7권 2책이고,
양수본은 이기경 자신이 편찬한 것으로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의 후손 집에서 전해져 온
4권 4책의 필사본이다.
천주교를 사교로 몰아 이를 저지하려는 정부와 유교의 입장에서 정리한 사료이다.]
이 사건을 ‘명례방사건' 또는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라 한다.
집주인이었던 중인(中人) 김범우는 가혹한 형벌을 당하고 지방으로 도배(徒配)되었고,
형벌의 여독 등으로 1~2년 뒤 병사했다.
조선 왕조의 형벌은 태(笞)·장(杖)·도(徒)·유(流)·사(死)의 5등급이 있었는데
도배는 귀양 가서도 편히 있지 못하고 도형(徒刑 : 소금을 굽거나 쇠를 불리거나
수군에 종사케 하는 등 강제 노역 1~3년)이 부가되는 처벌이었다.
♱ 김범우 토마스
<김범우 토마스> <체포되는 김 토마스>
김범우는 역관 김의서(金義瑞)의 아들로, 1773년(영조 49년) 역관 증광시(增廣試)에 합격,
종6품 한학우어별주부(漢學偶語別主簿)가 되었다.
증광시는 나라에 큰 경사에 있을 때 실시하는 임시 과거였다.
학문을 좋아하여, 이벽과 친하게 지내 천주교에 입교한 뒤
천주교 신앙을 열렬히 전도하며 아우 이우(履禹)와 현우(顯禹)를 비롯,
가족과 역관 친구들을 가르쳐 개종시켰다.
세례를 받은 뒤에는 즉시 윤지충 등에게 교리를 전하거나
교회 서적을 빌려주었으며, 자신은 철저히 교리를 실천했다.
♦ 김 토마스의 유배지
<김범우 묘소 입구-피정의 집>
샤를르 달레 신부가 쓴 《한국천주교회사》에는 “그를 충청도 동쪽 끝에 있는
단양읍으로 유배 보냈다.”고 기록돼있고,
1801년 신유박해 때 형조에서 신문을 받거나 사형 선고를 받은 이들에 대한 기록인
‘사학징의(邪學懲義)’에도 “범우가 병오년에 사학 사건으로
단양(丹陽)에 정배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묘소가 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리에 있고,
밀양시에 단장면(丹場面)이 있으며, 아들 김인고도 그곳에 내려와 산 것으로 보아
경상도 밀양으로 유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설도 있어서,
정확한 도배지는 좀 더 연구해야 밝혀질 숙제로 남아 있다.
♦ 김범우 토마스의 묘소와 시복 시성 추진
<김범우 묘소> <김범우 묘소와 묘지석>
부산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의 송기인 신부와 김동환 등 김범우의 후손들,
그리고 영남 지방 교회사 연구에 몸 바친 마백락 씨 등은 몇 년에 걸쳐
밀양과 삼랑진 지역을 답사하고 수소문한 끝에 1989년 극적으로,
집안 대대로 묘지를 관리해 오던 김범우의 외가 후손 손임덕(당시 78세)을 만나
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리 산102번지 만어산 중턱에서 김 토마스의 묘를 찾았다.
그해 5월 본격적인 묘 발굴을 시작하여 파묘한 결과
관 자리 위에 십자가 모양으로 놓인 돌 3개와 치아가 발견됐다.
이 돌은 순교자 황사영의 묘소 발굴 때와 같은 경우로,
성물이 귀했던 박해시대에는 성물 대신 십자가, 나무 묵주, 돌 등을
관 속에 넣어두는 경우가 많았다.
출토된 유물과 후손들의 증언을 토대로 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는
이곳을 김범우의 묘로 단정했다.
이후 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는 주변의 땅을 매입하여 순교자 묘역 조성사업을 진행했다.
묘역에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제대와 1천여 평의 잔디밭을 조성하고,
도로변에서 묘역에 이르는 산길에는 대형 원석에 그림을 새긴 십자가의 길 14처를 세웠다.
그리고 묘역에 이르는 길목에는 20개의 돌에 한국 천주교회의 기념비적 사건들을
기록했다.
수년간의 노력으로 묘역을 말끔히 단장한 후 2005년 9월 14일 준공 미사를 봉헌했다.
이어 2010년 11월 순례객들을 위한 김범우 순교자 기념 성모 동굴 성당 공사에 착수,
2011년 9월 20일 준공했다.
<성모동굴 성당> <성모동굴 성전>
<성모동굴 성당 성전에는 특이한 모양의 십자가가 있다.
돌로 이어 놓은 모양의 이 십자가는 김범우의 묘를 발굴할 때
머리맡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던 돌 십자가에서 유래된 것.>
교회사학계에서 인정하는 최초의 순교자는 윤지충이었고,
김범우는 순교자가 아닌 증거자로 분류되어있다.
이유는 김범우의 직접적 사망 원인이 정부의 박해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60~100대의 장형(杖刑)을 받고, 그로 인해 도배지 도착 즉시 죽었다면
분명 순교이지만, 도착한 후에 최소 1년 이상 더 살았기 때문에
장형이 죽음의 직접적 원인이 되지 못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김 토마스에 대한 시복 시성 추진 여부를 품의한 부산교구 측에게
교황청이 순교자의 절차로 추진해도 좋다고 허락함으로써,
증거자가 아닌 순교자로의 시복 청원이 진행되고 있다.
<큰길에서 만어산(萬魚山)을 올려다 보면 중턱에 우뚝 솟은 유럽의 성채같은
건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김 토마스의 묘역을 둘러본 느낌은 한 마디로
‘크다!’ ‘너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