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의 행함
야고보서 성경은 행함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참 믿음이 있다면 행함이 따른다는 말씀이죠.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은 헛것입니다. 물론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당연히 행함으로 그 믿음이 나타나야 합니다. 만일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그 믿음은 진실된 믿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3:13에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라고 했습니다.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인가? 당시에는 헬라 문화권이었습니다. 헬라는 지혜를 추구하는 민족입니다.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리고 플라톤 등으로 이어지는 지혜의 문화는 큰 물줄기처럼 흐릅니다. 그래서 진정한 지혜는 어떤 것인가? 너희 중에 참 지혜가 있다면 선한 행동으로 그 지혜를 나타내 보여라! 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위로부터 오는 지혜 즉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참 소피아는 어떤 것이 있는가? 위로 하나님께로 부턴 온 지혜가 아니면 이 세상적 지혜라는 것입니다.
첫째,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성결
17절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라고 시작합니다. 성결은 ‘하기오’입니다. 거룩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는 거룩하며 성결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성도는 거룩한 무리입니다.
성도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입니다. 아가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가페는 희생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우정을 의미하는 필레오와 차이가 있고 남녀간의 사랑인 에로스와는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아가페적인 사랑을 나눕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합니다. 여기서 벗어나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 아니요 마귀의 것입니다.
거룩의 반대는 세속적입니다. 15절에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14절에 이어 설명하는 말씀인데 여기서 ‘세상의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적 지혜라는 것입니다. 이 땅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정욕적이고 마귀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제일 중요한 것인 성결입니다. 성결은 주 안에서 유지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서 주안에서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주 안에 머물 때 우리는 성결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주님을 떠나 주님 밖에서는 이미 성결과 거룩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 안에 믿음으로 머물 수 있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둘째, 위로부터 난 지혜는 화평입니다.
위로부터 나는 지혜, 즉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는 화평입니다. 화평은 헬라어로 ‘에이레네’입니다. 신약의 ‘에이레네는’ 마음의 평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인간관계에 있어서 화평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어로 ‘샬롬’입니다. 샬롬은 마음의 평안과 가정의 화목과 이웃과 화평과 국가의 안녕을 포함합니다.
14절에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런 것들은 위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며 마귀적이라는 것입니다. 시기와 다툼은 성령의 평안과 반대입니다.
교회에서는 항상 평안이 충만해야 합니다. 서로 분쟁하고 싸우고 분노하고 다투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배후에는 마귀가 역사해서 분쟁과 분노가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항상 평안과 기쁨과 은혜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도 평안이 넘치고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서로 화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셔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 서로 화평하는 것은 당연하죠.
셋째, 위로부터 난 지혜는 관용입니다.
관용은 넓은 아량입니다. 서로 받아주는 것입니다. 서로 용납하고 받아주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관용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좀 부족한 면이 있어도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고 받아주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몸이 연약하고 또 여러 면에 약한 사람은 더 이해하고 사랑을 받아주어야 합니다. 장애자나 사회적 약자가 교회에 오면 더 사랑으로 맞이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세상에 방황하고 살다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사랑으로 받아주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그렇게 죄짓고 살아가 이제 늙어서 교회 오느냐고 핀찬을 주면 안 됩니다. 주님도 회개하고 믿음을 가진 자를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서로 관용하지 못 하고 잣대를 재서 정죄하고 비판하고 날을 세운다면 어찌 교회의 천국의 예배생활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넷째, 위로부터 난 지혜는 양순입니다.
양순은 ‘유페이데스’라는 말인데 ‘온순’과 같은 말입니다. 온순한 것을 말합니다. 즉 온유한 것을 말합니다. 교회는 온유한 사람으로 가득차야 합니다. 온유하는 것은 부드럽고 친절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양순은 부드럽고 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도를 하면 순수하게 순종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권하면 그 말씀을 존중하고 자신의 욕심을 죽이고 순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권함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센 사람이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면 받아들이지 않고 순종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경우 어떻게 말씀을 가르치고 훈육을 하겠습니까!
사도행전에 보면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적이어서 그 말씀이 그러한가 하여 묵상하였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7:11에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일행이 2차 선교여행 때 마게도냐 첫성 빌립보 선교를 하고 이어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거기서 전도를 하다가 핍박이 심하여 이어 베뢰라오 갔습니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들은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날마다 그 말씀이 그러한가 하여 상고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할 때에도 거세게 반발을 하고 핍박을 하더니 바울 일행이 베뢰아에 가서 전도하는데 그곳까지 와서 핍박을 하였습니다.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뢰아 사람들은 더 신사적이어서 그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였다고 했습니다. 아멘 우리는 베뢰아 사람 같은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처럼 포악하면 안 됩니다. 아멘
다섯째, 위로부터 난 지혜는 긍휼입니다.
긍휼은 인자와 자비를 말합니다.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사랑으로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인생을 따지고 보면 다 불쌍합니다. 살아가려고 애쓰는 모든 것이 불쌍합니다. 그래서 서로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끝없이 사랑하시며 한없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마치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한없는 연민으로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긍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긍휼이 있어야 합니다. 약한 사람을 한없이 불쌍히 여기는 긍휼이 있어야 합니다. 어려움 당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크라이나 사태가 났는데 그 피난민들이 얼마나 고통을 당하겠습니까!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화) 컨페션-자비의 단체
우리나라에도 컨페션 자비의 단체가 있습니다. 이 컨페션 단체는 우리나라 6.25가 터졌을 때 우리나라를 돕던 구제단체입니다. 지금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유명한 연예인 차인표 등이 이 단체를 통해 기부와 구제도 합니다. 차인표씨 간들을 들어보면 그가 아프리카에 방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단체에서 하도 같이 동행을 해주면 좋겠다고 해서 반 억지로 가기는 갔습니다. 갈 때 이번엔 꼭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비행기 비즈니스 석에 타고 갈 때에도 은혜를 체험하지 못 했습니다. 아프리카 오지에 가서 한 어린이를 만났는데 아주 불쌍한 어린이였습니다. 그 어린이가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하며 기다렸다는 듯이 맞아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얼굴에서 주님의 마음을 읽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차인표씨 마음에 그런 감동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를 여기서 기다렸단다.] 그 아프리카 오지의 어린이 얼굴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성경에 [한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하였습니다. 차인표씨는 그 불쌍한 어린이를 도우러 갔는데 오히려 그 어린이가 차인표씨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고 큰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아멘
여섯째, 위로부터 온 지혜는 선한 열매가 가득합니다.
시기와 질투와 거짓과 악이 가득한 것이 아니라 착한 마음이 가득하며 인자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으며 서로 돕는 사랑이 가득한 것이 위로부터 오는 지혜입니다.
위로부터 온 지혜는 선한 열매로 가득합니다. 무엇을 해도 선한 열매로 채워집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며 사람들이 볼 때에도 은혜가 되는 좋은 일들을 많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적 지혜는 이기적이고 비판하고 싸우고 분노하고 다투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땅에서 나는 열매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열매가 아니고 선한 열매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선한 열매를 가득 맺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선한 열매는 하나님도 기뻐하지만 사람도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인도 기뻐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도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아멘
일곱째,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편견과 거짓이 없습니다.
편견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우리 모두를 사랑합니다. 부모도 자녀를 다 같이 사랑해야지 편견을 두면 자녀들이 교훈이 바르게 되지 못합니다.
오늘날에도 사람을 차별하면 안 됩니다. 출신이나 나이, 성별, 등을 차별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사람을 편견하여 대우하면 안 됩니다.
공평한 사회가 되어야 하며 공정한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를 사랑합니다. 이사야서에서도 정의와 공의가 강같이 흐르도록 나라를 위해 기도합니다.
위로부터 온 지혜는 거짓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것을 좋아합니다. 정직이 능력이며 실력입니다. 정직한 것이 순간에는 어리석은 삶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정직한 사람이 반드시 승리합니다.
악한 세상은 거짓되고 남을 속이는 사회입니다. 그러나 건강한 사회는 정직한 사람이 성공하는 신용사회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란 신용사회가 되니 신용으로 모든 것들을 운영하는데 정신적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사회가 서로 신뢰하지 못하고 불신하면 그 사회는 행복하고 강한 사회로 성장하기 힘듭니다.
더구나 교회와 성도는 정직이 생명입니다. 정직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그러나 정직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하고 거짓을 제일 싫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겸손하고 정직한 사람을 제일 좋아하십니다. 아멘
결론) 하나님의 사람은 의의 열매를 맺습니다.
18절에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닮아서 화평케 하는 자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안에서 서로 화평한 것을 기뻐하십니다. 아멘
그리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의가 가득한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합니다. 아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도이며 의인입니다. 우리는 의인으로 의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