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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
2.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 기록하기를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먼저 보낸다. 그가 네 길을 닦을 것이다."
3.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한 것과 같이,
4.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서,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5. 그래서 온 유대 지방 사람들과 온 예루살렘 주민들이 그에게로 나아가서,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6.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7. 그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이가 내 뒤에 오십니다. 나는 몸을 굽혀서 그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
8.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막1:1-8)
1 This is the Good News about Jesus Christ, the Son of God.[a] 2 It began as the prophet Isaiah had written:
“God said, ‘I will send my messenger ahead of you
to open the way for you.’
3 Someone is shouting in the desert,
‘Get the road ready for the Lord;
make a straight path for him to travel!’”
4 So John appeared in the desert, baptizing and preaching.[b] “Turn away from your sins and be baptized,” he told the people, “and God will forgive your sins.” 5 Many people from the province of Judea and the city of Jerusalem went out to hear John. They confessed their sins, and he baptized them in the Jordan River.
6 John wore clothes made of camel's hair, with a leather belt around his waist, and his food was locusts and wild honey. 7 He announced to the people, “The man who will come after me is much greater than I am. I am not good enough even to bend down and untie his sandals. 8 I baptize you with water, but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시작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
1 This is the Good News about Jesus Christ, the Son of God.[a]
구약의 첫머리에는 성부 하나님을 통한 이 세상 시작 이야기가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도 그 첫머리에 또다시 세상 시작 이야기가 쓰여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영생의 하나님 나라의 시작입니다.
태초에 온통 혼돈과 어두움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그 어두움을 빛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도 어두움과 혼돈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1. 여러분도 전에는 범죄와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2. 그 때에 여러분은 범죄와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3. 우리도 전에는 그들 가운데서 모두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바라는 대로 행하여,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로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엡2:1-3)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 복된 소식은 없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세상에 죽음을 끌어들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결국 죽음으로 끝장이 나버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렇게 죽음의 존재들에게 영생을 얻을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비로소 복된 소식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얼마 전에 붓글씨를 배운 적이 있었습니다.
제일 먼저 배운 것은 한일자 쓰고 점을 찍는 것이었습니다.
점찍는 일쯤이야 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화선지 위에 점 하나를 선생님처럼 찍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주 확연하게 그 수준 차이가 드러났습니다.
선생님 점, 내 점!
먹물을 화선지에 뿌려버린다고 점이나 한 일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공을 들인다고 그 점 하나를 선생님처럼 찍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백질이 모이더니 그것이 병균이 되고 원숭이가 되더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소리입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는 그것을 철저히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을 그대로 유지조차 못 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빛을 어두움으로 생명을 죽음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렇게 세상이 죽음의 깊음 위에 놓여있게 되었는데 그 회복의 일을 죄인이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또 이 세상을 회복하셔야 했습니다.
그를 위해 이 땅에 오셨던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복음
그리스도는 완전한 의인으로써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감당하신 것입니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영생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또다시 죽음에서 생명을 회복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회복을 하신 분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나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그런가 하는 사람이 허다할 것입니다.
고재봉은 그 나라를 뚜렷하게 경험한 한 사람입니다.
그는 사형수로 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어느날 한 집사님이 감옥을 그를 방문했습니다.
그가 나도 죽을 사람인데 예수님 때문에 생명을 얻었다는 고백을 그에게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 집사님이 전에는 자신과 같은 사형수였었나 오해했습니다.
나는 죽음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거짓말을 그만합시다.
그 때 일가족을 도끼로 살해했던 고재봉이도 사력을 다해서 성경을 읽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에게도 죽음이란 받아들일 수 없는 끔찍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고재봉이 앞에 옥문이 열리더니 그가 석방되었던 것이 전혀 아닙니다.
고재봉이에게 다른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눈앞에 하나님의 나라가 훤히 보이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는 그의 죽음이 기다리는 사형틀로 찬양하며 올라갔습니다.
그에게 죽음은 영생의 나라에 이르는 관문이었습니다.
그는 찬송을 부르면서 그 문을 지나서 영생의 나라에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하나님 나라의 생명이 큰 진주라면 이 땅의 생명은 그에게 작은 진주였습니다.
그는 영생의 나라 큰 진주를 보고는 작은 진주를 팔기로 했던 것입니다.
빨리 팔리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래야 큰 진주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작은 진주를 팔기 위해 찬송하면서 사형틀을 향해 걸어갈 수 있습니까?
*이사야의 글
2.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 기록하기를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먼저 보낸다. 그가 네 길을 닦을 것이다."
2 It began as the prophet Isaiah had written:
“God said, ‘I will send my messenger ahead of you
to open the way for you.’
이사야는 마가가 살기 수백년 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수백 년 후를 미리 내다본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리스도 예수님도 미리 내다보았고 그 길을 예비하는 요한도 미리 내다 보았습니다.
요한은 이제 거꾸로 수백년 전의 이사야의 글을 통해 그리스도와 자신을 읽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 교인들은 물론 이사야의 말씀을 믿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사야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박해했습니다.
유대교인과 기독인의 심각한 대립은 이사야를 통해 그리스도를 읽어내는지 읽어내지 못하는지에 유래합니다.
실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2,000년 전 갈릴리에서 예수님께서 거창의 나에게 하신 말을 읽는 중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2,000년 전의 책 성경을 펴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심부름꾼
하나님께서는 요한을 주님의 심부름꾼으로 보내셨습니다.
주님의 심부름꾼!
저 역시 목회자로써 주님의 심부름꾼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또 요한을 제 목회의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요한은 이사야를 읽더니 자신을 주의 심부름꾼으로 읽어냈던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인만이 가지는 독특한 역사관입니다.
이 역사의 주관자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내가 스스로 내 길을 계획하며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들은 성경 안에서 내 갈 길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역사는 성경 말씀대로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진화하는 것도 아니고 또 잘난 몇 사람이 세상 역사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외치는 이의 소리
3.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한 것과 같이,
3 Someone is shouting in the desert,
‘Get the road ready for the Lord;
make a straight path for him to travel!’”
목사의 본분은 외치는 일일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외치시자 세상이 창조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목사로 하여금 외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또 신앙의 양심을 속이고 엉뚱한 소리를 외치게 할 것입니다.
요한은 모두가 입을 열 생각조차 못 했던 말을 세상에 외쳤습니다.
제수를 빼앗아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고 헤롯 왕에게 외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헤롯에게 목이 잘리고 말았습니다.
사람 목을 자를만한 사람들이 꼭 그런 범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목 잘릴 각오를 하지 않으면 요한처럼 외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외쳐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외치는 일은 믿는 자들의 소명입니다.
17.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하여라.
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할 때에, 네가 그 악인을 깨우쳐 주지 않거나, 그 악인에게 말로 타일러서 그가 악한 길을 버리고 떠나 생명을 구원 받도록 경고해 주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신의 악한 행실 때문에 죽을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을 너에게 묻겠다.(겔3:17,18)
물론 헤롯은 요한의 말을 정면으로 거부한 악당이었습니다.
*광야에서
애급에서 400년 그의 백성들이 심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고통의 호소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바로의 손에서 구해주셨습니다.
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그 애급 땅을 나올 때 하나님의 열 번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홍해를 걸어서 넘었습니다.
그런 기적들을 경험하고 보니 계속 12번째 13번째 만사형통의 길이 열리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눈떠보니 형통은커녕 메마른 사막이었습니다.
2.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다.
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항의하였다. "차라리, 우리가 이집트 땅, 거기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배불리 음식을 먹던 그 때에, 누가 우리를 주의 손에 넘겨 주어서 죽게 했더라면 더 좋을 뻔 하였다. 그런데 너희들은 지금,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나와서, 이 모든 회중을 다 굶어 죽게 하고 있다."(출16:2,3)
그런데 그들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광야가 정말로 싫었습니다.
애급땅보다 더 싫었습니다.
그래서 애급땅에서 주의 손(하나님의 손)에 죽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광야로 그들을 이끄신 손이 하나님의 손입니다.
애급에는 그들을 이끌 하나님의 손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그 백성을 광야로 이끄셔서 훈련 시키고 계셨습니다.
그 과정을 거친 다음에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영생에 이르는 그 길을 걸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이르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광야의 길이셨습니다.
요한은 바로 그 예수님의 길의 심부름꾼으로 불리움을 받은 것입니다.
*주의 길 그의 길
세상 사람들은 세상 보장을 위해서 길을 선택합니다.
나막신 장사를 하다가 굶게 생기면 돈 더 많이 남기는 우산 장사를 하는 식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자신의 길을 정하신 것입니다.
그 길은 자신이 원하는 처세의 길과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길을 두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36.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막14:36)
예수님의 길은 생명까지 희생하시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을 희생하심으로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신 것입니다.
그 길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었습니다.
*광야에 나타나서
4.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서,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4 So John appeared in the desert, baptizing and preaching.[b] “Turn away from your sins and be baptized,” he told the people, “and God will forgive your sins.”
그런데 그는 하필 꼭 광야에서 세례를 베풀어야했을까요?
제가 미국을 갔는데 발견한 사실입니다.
그들은 영어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편한 곳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광야에서 통할 뿐입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한 일은 세례를 베푼 일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로 유명 연예인을 초청하거나
교회에 화려한 카페를 차리거나
몸짱을 만들기 위해 러닝 머신과 아령을 차려두고 교회 안에 수영장을 짓고.......
그런 일을 않았습니다.
그것은 강남에 있는 교회나 하는 것입니다.
광야의 교회에서는 세례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또 이렇게 말을 하면 기독인들은 요한이 주는 세례는 신통해서 그렇지 할 지 모릅니다.
계시를 따라서 포천에 우물을 팠더니 거기에 신령한 물이 솟아나서 그 물을 마시면 앓던 병도 낫고......
요한이 베푸는 세례 역시 신통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세례라는 의식 자체가 신통해서.......
그것도 아닙니다.
*회개의 세례
세례 의식이 그렇듯 전 사람이 물에 빠져 죽은 일이었습니다.
그 죽은 사람이 새사람으로 살아나는 체험인 것입니다.
세례의 순간 불같은 뜨거움을 체험했다고 하더라도 회개가 동반되지 못하면 그것은 세례가 아닌 것입니다.
세례를 받아도 전 사람이 그대로 살아있어서 사람들이 그 사람 그대로네 하면 그런 세례는 받아봤자 의미가 없는 것입
니다.
회개가 없다면 그 세례는 불체험을 동반해도 헛것입니다.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
하지만 그 회개에 이르는 길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던 길을 돌이켜야만 하는 이유를 모르면 안됩니다.
이 세상의 삶이 그렇게 좋은데 말입니다.
가장 먼저 자신의 주소지가 끔찍한 어두움의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죄인이다!
그 죄를 절감하고 스스로 죽겠다고 물에 빠져야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신앙인이 깨달아야 할 죄는 세상이 알고 있던 그런 죄가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죄란 거짓말한 것, 욕한 것, 싸운 것.......
그 윤리적인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성경은 죄에 대해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9. 나를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을 말씀해 주실 것이며,(요16:9)
멱살 잡고 싸우는 것이 죄라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하시는 죄가 나에게 도무지 죄로 여겨지지 않은데 어떻게 그 죄를 회개할 수 있겠습니까?
또 그 죄를 제대로 깨달았다고 그 죄의 문제를 사람이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바리새인이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11.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토색하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또는, 이 세리와도 같지 않습니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눅18:12,13)
바리새인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그런데 바로 옆의 세리는 처음부터 한숨만 쉬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한심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13. 그런데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눅18:13)
그는 친일해서 풍요를 누리고 살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생각해도 한심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주일날 교회 가기는 했는데 하나님께 면목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강대상 가까이에 접근하는 것도 불경한 행위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괴로운 현실을 하나님께 하소연했는데 하나님께서 바리새인의 감사가 아니라 세리의 하소연을 들으셨던 것입니다.
그의 죄를 용서 하신 것입니다.
4.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4 “Turn away from your sins and be baptized,” he told the people, “and God will forgive your sins.”
세례는 마치 세리의 기도와 같아야 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끌어들이는 회개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세리의 하소연)이어야 합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의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란 1조인지 10조인지 일반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액수를 이르는 것입니다.
읾나 달란트는 내가 돈 벌어서는 갚을 수 있는 액수가 아닙니다.
그러니 내가 회개 즉 돌이켜봐야 별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회개해서 일생 동안 내가 10억의 죄의 빚을 갚을 수 있을까?
내가 갚은 빚은 내가 진 빚에 비교해서 새발의 피입니다.
그런데 세리는 그 빚의 문제를 하소연으로 해결한 것입니다.
그 죄의 빚을 다 탕감받은 것입니다.
거기 바리새인은 자신이 엄청난 분량의 죄의 빚을 가지고 있는지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그의 의로운 행위를 통해서 10억의 죄의 빚을 갚고 9조 9,990억을 아직 갚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용서를 바랄 뿐입니다.
그것이 요한의 세례의 뜻이었습니다.
*온 유대지방 사람들과 온 예루살렘 주민들
5. 그래서 온 유대 지방 사람들과 온 예루살렘 주민들이 그에게로 나아가서,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5 Many people from the province of Judea and the city of Jerusalem went out to hear John. They confessed their sins, and he baptized them in the Jordan River.
요한의 교회는 몫 좋은 강남의 대형 아파트 단지에 서 있지 않았습니다.
거기는 광야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입니다.
그 광야까지 온 서울 사람들과 온 거창 사람들이 다 모여들었던 것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자신의 교회에 온 서울 사람 끌어들이려고 얼마나 혈안인가!
교회 안에 수영장 세워야 하나?
카페 차려야 하나?
그런데 그 일은 교회가 수영장, 러닌 머신, 카페....... 몸짱 만드는 수박씨를 뿌려 놓고는 영생의 호박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일입니다.
*죄를 자백하는
제가 있던 제주도의 교회 앞에 세탁소가 있었습니다.
어느 주일 세탁소 주인이 교회 예배를 참여했습니다.
생각도 못한 일 때문에 장로님 권사님 선물을 사들고 그 집을 방문했습니다.
“사장님 잘 생각하셨습니다. 교인들이 다들 세탁물 들고 이 집에 올 것입니다.”
세탁소 사장님은 그 소리를 듣고 너무 기분 나빠서 다시 교회를 나오지 않았습니다.
초신자인 세탁소 사장님은 영생을 바라고 교회를 왔는데 교인들이 오히려 수박씨를 들고 간 것입니다.
교회는 세탁물 문제가 아닙니다.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세탁소 주인이 옳았습니다.
교회가 다룰 문제는 오직 죄의 문제입니다.
*털 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6.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6 John wore clothes made of camel's hair, with a leather belt around his waist, and his food was locusts and wild honey.
이번에는 요한이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입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목회란 설교 잘하는 기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 행정 잘하는 기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목회는 목사의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생존 보장 수단조차 아닙니다.
세상 회사 다니는 일은 회사에서 실적만 많이 남기면 그가 무슨 차를 타든 무슨 집에 살든 상관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목회자는 강대상의 문제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음식을 먹는지 무슨 옷을 입는지 그가 어디에 무슨 집을 짓고 사는지 다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그의 모든 존재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그 목회자는 교인의 신뢰를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목회자를 두고 이렇게 욕을 할 것입니다.
“목회자도 우리와 똑같네!”
세상과 똑같다는 말은 목회자에게 제일 큰 욕입니다.
사는 곳이 광야여야 하고 먹는 것도 최소한의 절제된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인들의 신뢰를 얻을 수 없습니다.
신뢰를 못 얻으면 그 사람 목회는 다 끝이 난 것입니다.
신뢰는 전기를 흘려보내는 전깃줄과 같습니다.
신뢰를 잃은 목회자를 통해 성령이 전달되어서 거기에서 빛이 밝혀질 수 없습니다.
요한은 사는 곳 먹는 것 입는 것이 세상과 달랐습니다.
그는 절제와 희생을 먹고 입고 살았던 것입니다.
요한은 온 몸으로 하나님을 고백한 것입니다.
*선포하셨다.
7. 그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이가 내 뒤에 오십니다. 나는 몸을 굽혀서 그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
7 He announced to the people, “The man who will come after me is much greater than I am. I am not good enough even to bend down and untie his sandals.
요한은 세례를 베푼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요한은 선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목회자에게 선포만큼 중요한 역할이 또 있을까!
사람들은 이 말씀의 선포 안에서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 기대를 가지고 여러분은 일주일에 한 번 말씀의 선포 앞에 여러분은 앉혀 두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포하셨다.
당연히 예수님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되는대로 선포하면 안됩니다.
선포할 때는 요한이 했던 것처럼 “이렇게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선포할 내용은 자기 자신입니다.
요한은 자신을 두고 예수님의 신발끈도 풀 자격이 없는 자임을 선포했습니다.
이것은 목회자가 한 번 따라 해 볼 수 있는 쑈맨쉽이 아닙니다.
바울도 요한처럼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15.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이 말씀은 믿음직한 말씀이고,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말씀입니다. 나는 죄인의 괴수입니다.(딤전1:15)
나에 대한 이 내용을 제대로 전하지 않는 경우에 교인들이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강대상의 목사님은 자신들과 다른 줄 잘못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교주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일입니다.
절대의이신 주님을 전하다 보면 자신의 죄가 극명하게 대조되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의 괴수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러운 오물통에 마실 물을 담아야 하는 모순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할 수 없는 존재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입어서 거룩한 말씀을 대언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
8.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8 I baptize you with water, but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예수님의 신발끈조차 풀 수 없다는 것은 요한의 과장된 자기비하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그 근거가 있습니다.
요한은 자신을 두고 세례를 베푸는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똑같이 세례를 베풀지만 예수님의 세례는 요한의 세례와 질적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물걸레로 닦는 일이라면 예수님의 세례는 속사람을 불로 태워버리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사람을 재창조하시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5.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7. 너희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한 것을, 너희는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요3:5-7)
세례를 받을 때 뜨거운 불기운을 느꼈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불기운을 느끼지 못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세례를 받은 후에 새사람이 되었다면 세례를 제대로 받은 것입니다.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죄인이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가능케 하시는 분은 오직 성령님이십니다.
5.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7. 너희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한 것을, 너희는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요3:5-7)
육적인 존재를 영적인 존재로 바꾸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세례를 받고도 “세상과 똑같네” 소리를 들으면 헛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새사람을 만드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세례를 통해 죽을 죄인을 영생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