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유한 자여! 종과 횡으로 걸어라.
2007년 9월 9일 / 대예배 / 창 13:5-18
마 11:28-30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29)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 5:5 / 온유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아브라함과 롯 두 사람 중에 누가 마음의 안식을 얻었으며, 땅을 기업으로 받았는가를 비교검토하면 우리는 아브라함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위에 나오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2개의 성구는 이론이 아닌 실제적인 것임을 본문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목소리 큰 사람, 권력이 있는 사람, 재물이 있는 사람이 이긴다고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뿐 아니라 이삭 경우도 그러했습니다.
창 26:14-16 / 이렇게 양떼와 소떼가 자꾸 불어나고 또 종들도 많아지자 그 땅에 살고 있던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에게 샘을 내었다. 15) 결국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살아 있을 때 그 종들이 파놓은 우물을 다 메워 버렸다. 16) 그 즈음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말하였다. `이보게, 이제 우리 땅에서 떠나 주었으면 좋겠네. 자네가 우리보다도 재산이 더 많게 되니 좀 곤란하네.'
이삭이 하나님의 은혜로 거부가 되자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떠나 줄 것을 부탁하니 하는 수 없이 식구들을 이끌고 그곳을 떠나 그랄 계곡에 자리를 잡고 천막을 쳐서 한 동안 살게 되었습니다.
당시 우물을 얻기란 그리 쉽지 않았고 우물이 없다면 그곳에 정착하여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큰 걱정없이 우물을 얻게 되었습니다. 온유한 자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블레셋 그랄 땅에 사는 목자들이 계속 시비를 걸어와 우물을 자기 것이라고 우기기에 이삭은 양보를 했습니다. 이러기를 3번씩이나 하였습니다. 블레셋 땅에 머물면 또 시끄러울 것 같아 그곳을 떠나 브엘세바로 올라갔습니다.
마음이 온유한 이삭이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복을 주셔서 어디를 가든지 형통케 하셨습니다. 이삭 역시 하나님께서는 주시는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러자 또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상상치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비멜렉이 그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이삭에게 와서 조약을 맺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니 블레셋보다 강성해져서 아비멜렉이 자청해서 조약을 맺자고 애원을 하는 것입니다. 조약은 나라와 나라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것으로 그만큼 이삭이 강해졌음을 시사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이 온유한 자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창 26:26-33 / 어느 날 아비멜렉이 그의 고문관 아훗삿과 군대사령관 비골과 함께 그랄에서 이삭을 찾아왔다. 27) 그러자 이삭은 `그대가 나를 보기 싫어하여 나를 떠나보내고서는 또 무슨 볼일이 있어서 나를 찾아왔소?' 하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28) 그러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여호와께서 그대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히 알게 되었소. 그러니 우리를 너무 나무라지 마시고 또 우리를 서운하게 생각지 마시오. 그대와 내가 서로 이러이러한 일을 하지 않고 또 어떤 경우에는 이러이러하게 하겠다고 맹세를 하고 조약을 맺읍시다. 29) 우리가 그대를 해치지 않았으니 그대도 우리를 해치지 않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시오. 우리가 그대에게 그래도 잘해 주지 않았소? 그대를 보낼 때 그대에게 뭐 잘못한 일도 없지 않았소?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려 주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난 잘 알고 있소' 30) 그래서 이삭은 잔칫상을 차려 놓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 31) 다음날 아침 그들은 일찍 일어나 어제 이야기하였던 내용대로 서로 신의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조약문에 함께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이삭이 그들을 보내자 그들은 평안히 그곳을 떠나갔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심으로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그가 한 일은 다른 사람에 비해 그리 많은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온유한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께서 본보기로 더 은혜를 주신 것 같습니다.
▶ 이 세상사람 치고 매사에 성공을 원치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모든 일에 성공하기를 바라면서 일들을 추진해 나가지만 결과는 실패로 끝나는 때가 많아 안타까움과 고통이 따릅니다.
성공을 원하지만 실패로 끝나는 이유는 각자의 상황과 처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볼 때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① 성공을 원하지만 성공적인 선택에 실패한다는 점입니다. 성공에는 길과 방법이 있기 마련인데 무턱대고 간다고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공하려면 성공적인 선택이 중요하며 선택에 실패하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② 성공적인 자세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성공적인 마음, 태도, 생각을 가져야 하며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③ 성공적인 삶이 잘못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진정한 성공이란 성공적인 삶 속에서 얻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의 씨앗을 뿌리면 행동의 열매를 얻게 되고, 행동의 씨앗을 뿌리면 습관의 열매를 얻게 되고, 습관의 씨앗은 성품을 얻게 되고, 성품은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성공적인 생각은 성공적인 행동으로 이어지고, 성공적인 행동은 성공적인 습관으로 나타나며 성공적인 습관은 성공적인 삶으로 열매 맺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성공한 것 같으나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와 실패한 것 같으나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1. 아브라함은 이익이 수반되는 선택권을 롯에게 넘겼습니다.
아브라함과 롯 이들은 숙질간으로서 롯은 아버지 하란을 일찍이 여위고 삼촌 아브라함 밑에서 자랐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을 거쳐 가나안으로 이주를 할 때 롯도 삼촌을 따라 이사를 왔으며, 지금은 같은 지역에서 목축업을 하며 지내는 사이인데 어느 날 아브라함과 롯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이 비좁은 지역에서 목초지(木草地) 문제로 다투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본 아브라함은 그 지역의 불신자들 앞에서 다투는 것이 덕스럽지 못함을 알고는 다투느니 서로 마음 편하게 헤어질 것을 결심하여 롯에게 제안을 하게 됩니다.
13:8-9 / 아브람이 롯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서로 한 핏줄이 아니냐? 그러니 네 가축 떼를 치는 목자들과 내 가축 떼를 치는 목자들이 서로 싸워서야 되겠느냐? 9) 그러니 우리 서로 떨어져 사는 것이 어떻겠느냐? 아무 쪽이든 네가 원하는 곳을 골라라.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겠고 또 네가 오른쪽으로 간다면 내가 왼쪽으로 가마.’
이쯤 되었으면 롯은 삼촌,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헤어지다니요 같이 살아야지요. 제가 좀 더 양보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면서 삼촌의 생각을 돌리려고 했어야 합니다. 만일 아브라함의 제안이 현실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문제라면 “삼촌이 먼저 선택하십시오. 제가 어찌 선택권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라는 화답이 아랫사람의 마땅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롯이 물욕이 강렬하였을지라도 삼촌 앞에서는 체면상이라도 어떤 양보의 제스처 정도는 보여주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성경은 그러한 내막까지는 기록이 없지만 내용을 보면 이런 행동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롯의 마음은 욕심으로 가득차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롯은 눈을 들어 마음에 드는 목초지를 바라본 후 자신의 유익만을 위하여 부모와 후견인 같은 삼촌을 떠나 소돔과 고모라 성이 있는 기름진 요단 평야를 향하여 떠났습니다.
창 13:10-11 / 롯이 둘러보니 소알까지 펼쳐져 있는 요단 들녘에는 물이 매우 넉넉하였다. 이때는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전이었기 때문에 요단 들녘은 여호와의 동산과 같이 매우 기름져 보였고 또 애굽 땅과 같이 비옥해 보였다. 11) 그래서 롯은 이러한 요단 들녘에 마음이 끌려 요단 들녘을 차지하기로 하고 동쪽으로 옮겨 갔다. 아브람과 롯은 이렇게 해서 헤어져 살게 되었다.
그동안 동고동락하던 조카 롯을 보내야만 했던 삼촌 아브라함의 심정은 어떠하였겠습니까? 무척이나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멀리 고향 땅을 떠나 함께 생활해오면서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던 그들 사이의 결별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인간적인 고독과 허탈감 속으로 빠져들게 했을 것입니다. 목축업으로 삶을 꾸려 가던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목초지 선택의 우선권을 조카 롯에게 그냥 넘겨준다는 것은 대단한 결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롯에게 좋은 곳으로 여겨지는 목초지를 양보한 아브라함은 물도 푸른 초장도 제대로 없는 가나안 산자락에 이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창 13:18 / 그리하여 아브람은 식솔들을 이끌고 치고 살았던 천막을 거두어 가지고 헤브론에 있는 상수리나무 숲 부근으로 옮겨 자리 잡았다 그 상수리나무 숲은 마므레라고 부르는 숲이었다. 아브람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다.
삼촌으로서, 윗사람으로서, 아니면 그동안 보호자요 후견인으로서 자신의 기득권을 능히 주장할 만한 위치임에도 선택권을 롯에게 넘겼으니 얼마나 멋지고 넓은 마음(온유한 마음)입니까?
2. 롯이 선택한 길은 실패자의 길입니다.
롯은 자기가 보고 판단하여 선택한 그 곳이 자기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 여겼는데, 정말 그곳은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보일 만합니다.
창 13:10 / 롯이 둘러보니 소알까지 펼쳐져 있는 요단 들녘에는 물이 매우 넉넉하였다. 이때는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전이었기 때문에 요단 들녘은 여호와의 동산과 같이 매우 기름져 보였고 또 애굽 땅과 같이 비옥해 보였다.
① 물이 넉넉했다 / 물이 많다는 것은 농사가 잘 되고 모든 것이 풍족하다는 것을 의미
② 여호와의 동산 같았다 / 에덴동산을 생각하게 할 만큼 완벽한 조건과 환경을 갖춘 지역
③ 애굽 땅과 같았다 / 아브람과 롯은 기근 때문에 한 때 애굽 땅으로 피신한 적이 있었는데 롯은 아마 그곳에서 나일강을 중심으로 찬란한 도시 문화가 꽃피었던 애굽 문명의 화려함과 편리함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바로 그렇게 물댄 동산 같고,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은 그곳에 그만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정말 행복이 완전보장된 것처럼 보이는 땅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그 땅이 어떤 땅인지 아십니까? 바로 소돔과 고모라 땅으로서 역사적으로 가장 무서운 심판을 받았던 땅입니다.
겉으로는 화려한 도시요 매력 있는 도시지만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이 머물 수 없는 도시로서 단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행복을 약속해 줄 것 같은 착각을 주는 유령도시일 뿐입니다.
▶ 결국 롯은 만물을 지배하고 복 주시는 하나님을 택하지 않고 사람의 눈에 보기 좋은 것처럼 여겨지는 행복들을 찾아 소돔을 택하여 갔습니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고 잘못된 선택에는 비록 그것이 훗날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인데, 롯은 그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춘기 아이들(탕자)처럼 아무리 이야기해도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역시 알아듣지 못하는 법입니다.
롯의 비극은 아브라함을 떠나는 데서 시작되는데, 세상을 택했기 때문에 영에 속한(하나님께 속해 있는) 아브라함의 품을 떠났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을 떠나는 것이 왜 비극이 된다는 말입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복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 골로새서는 A. D. 62년경. 로마 1차 수감 중에(A. D. 61-63년) 바울이 골로새서에 있는 교우들에게 편지를 쓴 것인데, 골 4:7-18에는 바울을 도와 복음전도에 힘썼던 동역자에 대한 명단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는 A. D. 66-67년경. 2차 로마 투옥시. 바울 서신 가운데 최후로 써졌는데, 딤후 4:9-22에는 그간 바울을 도와 함께 일을 했던 사람들의 명단이 나옵니다. 이 두 곳에 겹쳐 나오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겹쳐져서 나오는 사람들 중에 데마가 있습니다. 골 4:14에서 “데마도 문안합니다.”라고 했는데, 딤후 4:10에서는 “데마마저 내게서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는 이 세상 향락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데살로니가로 가 버렸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고난 중에서도 바울과 함께 뜻을 같이 하다가 세상 세상 향락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세상으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바울이 데마를 책망했다기보다 그의 세상으로 돌아감을 안타깝게 여겼는데, 고난이 있어도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은 복됩니다.
창 13:12 /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그냥 머물러 살았으나 롯은 요단 들녘에 있는 여러 성읍을 돌아다니다가 소돔 가까이에 자리 잡게 되었다.
아브라함이 끝까지 거주한 땅은 바로 가나안 땅으로서 이곳은 외로운 땅이며 기근이 있는 땅이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그 땅을 붙들고 있었는데 롯은 어떠합니까? 세상과 물질을 따라가면서 인간적인 행복을 추구하는데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면서 서서히 그 장막을 소돔까지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여기 중요한 표현이 있는데 그것은 ‘소돔까지’라는 말입니다. 롯이 결국은 가게 된 그 소돔이란 곳이 어떠한 곳입니까? 우상숭배를 비롯하여 물욕, 명예욕, 정욕 등 죄악이 차고 넘쳐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고는 아니 될 죄악이 관영하여 멸망당할 도성입니다.
롯도 처음에는 그곳까지 갈 마음은 없었지만 그곳까지 가고 말았으니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지 못하고 물질의 세계를 택하면 결국은 불행의 길을 자신도 모르게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 주변에도 우리를 유혹하고 매료시키는 세상의 물질과 명예와 쾌락의 자리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속한 물질의 세계를 넓은 길 넓은 문, 멸망의 길 멸망의 문이라고 하셨으며 동시에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넓은 길, 넓은 문으로 들어가지 말고 좁은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넓은 길은 매력이 있고 구미가 당기는 길입니다.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인 반면 그 화려한 것과 그 쾌락의 뒤에는 항상 죄악이 도사리고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넓은 길 뒤에는 멸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반면 좁은 길 뒤에는 영생이 있습니다. 불편하다고 불행한 것이 아니고 편하다고 평안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영안이 어두워져 있기 때문에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지 못하고, 항상 멸망의 길인 넓고 편한 길을 선택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편에 선 아브람에게는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하십니다.
롯이 떠난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단순하지만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하나님은 언제 오시는가?’하는 문제입니다. 언제입니까? 바로 롯이 떠나고 난 이후입니다. 아브라함은 롯과의 갈등 속에서 손해를 볼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다소의 고민을 했겠지만 결국은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기득권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 롯은 떠나갔는데 이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자세히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곁에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롯과의 사이에서 기득권을 포기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눈물을 보고 계시고, 한숨을 알고 계시며, 기도를 들으시며 믿음이 성숙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떠나보내고 대단히 적막한 가운데 있을 때 14절의 말씀이 들려졌습니다.
창 13:14 / 아브람과 롯이 서로 헤어져 살게 된 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셨다. 아브람아, 네가 지금 서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 사방을 찬찬히 둘러보아라.
그저 단순한 명령이 아닙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는 것은 우리의 생에 있어서 복의 문을 여는 키워드(핵심의 말씀)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선택권을 먼저 받아 아브라함을 떠나갔던 롯에 대한 말씀은 없습니까? 13절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을 향한 축복의 말씀이 나타나기 전에 롯에 대한 앞날을 미리 예언해 줍니다.
창 13:13 /그런데 소돔 사람들은 하나님을 우습게 알 정도로 못된 짓만을 일삼았다.
결국은 롯이 다가가서 거처한 소돔 성이 얼마나 악한 성이었는지, 영적으로도 얼마나 어두웠는지를 능히 짐작케 하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롯은 이러한 악한 요소를 내다보지 못하고 다만 경제적인 가치를 최고의 가치로만 생각하여 그 성에 접근한 것입니다. 소돔 사람들이 악하고 하나님께 큰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했으니 얼마나 위험한 행동입니까?
▶ 롯이 왜 망했습니까? 롯이 무슨 죄를 지어서 재산을 다 잃고 아내까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까? 성경은 롯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롯이 망한 이유는 소돔이 망했기 때문입니다. 롯과는 상관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어디에 속했느냐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제 14절로 돌아갑시다. 이 말씀은 물질만이 최고라고 생각한 롯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세속적인 권리와 기득권을 롯에게 양보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쓸쓸히 서 있는 아브라함에게 찾아 오셨을 때 비전과 믿음과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시는 이야기로,
① ‘너는 눈을 들어’ 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땅을 보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령한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땅을 보지 말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현실과 환경을 보면 좌절하게 되며,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보면 자신이 없어지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그곳에는 놀라운 환상과 비전과 하나님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 법입니다.
② ‘너 있는 곳에서’라고 말씀입니다. ‘어떤 곳에 가서’라고 하시지 않고 ‘너 있는 곳에서’라고 하시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있는 곳은 특별히 설정된 거룩한 장소이거나 복이 쏟아지고 있는 황금지역이 아닙니다. 바로 아브라함이 먹고 자고 생활하던 일상적인 공간 바로 그 현장으로서 하나님은 그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어떤 격리된 요지(要地)나 특정 장소에 세워 놓고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살면서 믿음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시되 서 있는 지금의 자리에서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많은 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를 오해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 명령을 지킴에 있어서 현재의 위치를 이탈하여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이 다음에 성공을 해서 충성하겠다는 것과 지금의 어려운 환경을 벗어나 좋은 처지가 되면 그때 가서 열심히 일하겠다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장차 무엇을 하여야지, 이곳을 벗어나면 그때는 새롭게 성공적인 도전을 해 보아야지 라는 생각으로는 아니 됩니다. 성경은 오직 현재의 내가 있는 곳에서 즉 우리들의 삶을 꾸려 나가고 있는 생활 현장에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창 13:14 / … 아브람아, 네가 지금 서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 사방을 찬찬히 둘러보아라.
멀리 내다보라는 말씀이요 폭 넓게 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살아온 삶의 여정을 이미 다 알고계십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자신이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또 깊이 생각하지 못함으로 인해 영육 간에 실패와 어려움을 많이 겪었으며 또 많은 문제들을 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에게 이제 좁은 근시안적인 안목에서 벗어나 좀 더 멀리 영적인 시야를 높여 보라는 의미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 자동차에 달려 있는 백미러가 운전자에게 매우 유용한 것으로 운전자의 후면에 있는 것을 보게 하여 사각 지대를 최소화 시켜 주는 물건입니다. 우리들도 인간이 지닌 많은 한계들로 인하여 여러 면의 사각 지대를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신앙생활의 영역에서도 역시 이러한 면을 지니고 있을 것이며 우리들의 바라볼 수 있는 영적 시야의 폭도 사실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자신이 바라보았던 한 방향만 진리인줄 알고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는 방향은 인정을 잘 하지 않은 채 편협하게 살아온 것은 아닙니까? 내 자신이 보지 못했던 다른 방향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방향도 바라볼 수 있도록 신령한 눈을 뜨고 살아가도록 합시다.
4.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창 13:17 / 그리고 온 땅을 사방으로 왔다갔다 해보아라. 내가 그 땅을 모두 네게 주겠다.
‘눈을 들어, 바라보라’에 이어 이제는 ‘일어나.... 행하여 보라’ 즉 걸라고 하십니다. 신령한 복을 바라보며 누리는 길은 그 비전을 보고 그 곳을 향하여 일어나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저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사람은 미래를 가 본 일도 가 볼 수도 없겠지만, 비전과 믿음을 가진 자는 미래를 볼 수가 있습니다. 미래와 복은 믿음으로 밟는 사람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11:12).
지금 아브라함이 발을 딛고 옮기려는 땅은 곧 창 12:7에서 자신과 자신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바로 그 땅입니다. 17절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면 복이 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창 13:18,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하나님께서 명령한 일에 대하여 즉시 행동으로 옮긴 그 신속성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신앙의 성숙함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보았고 음성을 들었고 그리고는 일어나 종과 횡으로 걷기 시작하여 장막을 옮겨간 헤브론은 벧엘 남방, 예루살렘 남쪽 약 30여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입니다. 이곳에서부터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등 그의 후손은 가업을 이어가게 되는데 이제 그 모든 비전을 품고 헤브론으로 옮겨온 현실은 아직 상수리나무의 수풀로서 어제나 오늘이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 적막한 곳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변했습니다. 태양을 본 사람은 촛불에 만족하지 않듯이 그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하나님께 듣고 약속을 받았기에 그의 마음에는 서서히 미지의 세계에 뜨거운 열망을 가졌습니다.
아브람이 헤브론으로 옮겨온 후에 먼저 무엇을 하였습니까? 단을 쌓은 일입니다. 그는 고독하고 외로웠지만 미래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현실에서 하나님께 단을 쌓았는데 단을 쌓았다는 것은 오늘날의 방식에서 볼 때 거룩한 예배를 드렸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매사에 하나님과 밀착되어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마 6:26 / 공중의 새들을 보라. 새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어들이거나 양식을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으나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기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희는 새들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느냐?
예수님께서는 가지에 앉아있는 새를 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공중의 새를 보라고 말씀하심은 먹이를 찾기 위하여 일하는 새, 행동하는 새를 보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선택이란 대단히 중요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세상을 버리고 영생을 결정하여야 하는데, 어떠한 것을,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어떤 가치관, 어떤 안목을 가지고 판단하고 선택하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세상의 물질보다는 믿음으로 신령한 것을 택하였으며 믿음의 안목과 가치관으로 양보하는 가운데 마음에 상처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더 큰 축복과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더 높이 더 멀리 축복의 하늘을 오르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들의 신앙을 점검하고 영적 정비를 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과 생각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환경을 확보하였어도 생각이 부실하고 건전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다 같이 일어납시다. 여러분의 사업만이 아니라 교회가 서 있는 터전에서 종과 횡으로 전도의 발길을 걸어 봅시다.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