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틀렸어
* 글감: 그럴 땐 이렇게 해봐
다은
이 글은 건실한 청년과 살아본 짧은 기록이다. 내가 아는 가장 건실한 청년과의 한집살이.
“나 글 쓰기 싫어. 안 맞는 것 같아.”
“어~ 일단 책상에 30분 앉아."
그리고 물 마셔. 청년은 유리컵에 보리차를 쫄쫄 따랐다. 다은은 부러 실눈을 뜨고 청년을 바라보며 보리차를 꿀떡 마셨다.
“이제 화장실 가.”
“웅.”
그래도 다은은 청년의 말을 잘 듣는다. 자신을 사랑하는 건실청년이 해로운 명령을 내릴 리 없기 때문이다.
“다 썼어…”
“잘했어~ 이리 와서 누워.”
청년은 자기가 등을 대고 앉아있던 침대를 톡톡 두드렸다.
“히히… 좋아아……”
글이니 그림이니 안 맞는다는 생각은 침대의 푹신함과 증발한다. 청년은 행복해하는 다은의 옆 얼굴을 쓰다듬는다. 다은은 기분이 좋다. 이대로 잠들 것 같다. 자신 같은 단세포가 창작 같은 중대한 일을 해도 되나 싶다. 어쩌면 이대로 망할지도. 그치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다. 혼자서는 그렇게 안 오던 잠이 이 순간엔 솔솔 쏟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은이 건실한 청년인지 아닌지 와는 상관 없이 마감은 찾아온다. 다은이 손수 꼼꼼하게 만들어놓은 마감 늪이다.
“건실청년이여. 이 글은 도저히 끝나지 않아요. 난 지금 마른 수건이에요.”
“음. 이제 물을 마셔요.”
물을 마시러 나온 청년이 다은 곁에 다가와서 모니터를 훑어보고, 책상에 놓인 뽀모도로 시계를 만진다.
“이제 삼십 분만 더 하고 침대로 와.”
청년은 시계를 30분에 끌어다 맞추고는 방으로 총총 들어간다. 으어어, 개운하게 기지개 켜는 소리가 들린다. 다은은 오늘도 부러워 죽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마른 뇌를 쥐어 짰다.
하아. 시간도 많으면서 심정만 마감에 쫓기다가 성의 없는 메일을 보냈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전체 메일로 석고대죄 하고 싶은 심정을 간신히 참는다.
“나는 한심한 발송인이야……”
“그치만 열심히 안 했잖아?”
“아아아아아악”
다은을 사랑하는 청년은 촌철살인을 꽂아넣고 저녁 메뉴를 알려준다.
“다은아 밥 먹자~”
예정되어있던 죄책감과 성실하지 못한 인간이라는 자책으로 골골대는 다은에게 청년은 밥을 삭삭 차려 먹인다. 고기와 버섯, 야채가 조화롭게 차려진 식탁이다.
“맛있겠다…….”
“그치?”
“버섯 간 무슨 일이야? 왜케 맛있어.”
“그치, 그리고 이거 봐.”
청년이 트위터에서 주운 짤을 보여준다. 다은은 이런 걸 어디서 주웠냐고 하하학 웃다가, 청년과 ‘네가 남자였다면’, ‘내가 남자였다면’으로 시작하는 결혼 가정을 늘어놓으며 티격태격 다툰다. 청년은 자기 아이를 낳고 싶다고 했고, 다은은 꼭 그렇게 아프게 DNA를 남겨야겠냐고 노려봤다. 둘은 어차피 못 낳는데 왜 다투는지 의문을 갖다가, 상대의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아'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다는 걸 깨닫는다. 앞으로 상대를 노려보는 대신 조금 더 열린 태도를 갖추기로 협의를 본다. 정말 현실이고 누구 하나가 남성이었다면 올해나 내년쯤 결혼하고 아이도 여차저차 낳아 길렀을 것이라는 얘기도 빠뜨리지 않는다.
"아~ 잘 먹었다. 밥 맛있었어요."
다은은 찬찬히 일어나 그릇을 치우고 설거지를 한다. 청년이 조심히 성실히 버섯을 구웠을 철 후라이팬을 닦으며 청년이 틀어놓은 인디 밴드 음악의 음을 흥얼거린다.
식사 흔적을 말끔히 치운 둘은 고양이 동료처럼 제 구역에서 도란도란 쉬다가 패딩을 주워 입었다. 후추만 열 다섯 개 널린 대형마트에서 온 상품을 둘러보며 티키타카 품평을 하면서 까르륵 웃다가, 진이 빠져서 없으면 곤란한 식사재만 몇 점 사고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버스에서 집에 가서 쉬자고 속삭이는 청년의 말에 싫다고 발을 빼놓고, 다은은 누구보다 길게 자버렸다.
“이거… 만화로 그리면 안 되겠지?”
“내일 글방이잖아.”
“맞아아악”
“글 쓰세요~”
“네……”
다은은 청년과 함께하는 동안은 생각을 멈추기로 한다. 아니, 행동하면 생각은 어차피 멈춘다. 덤으로 청년을 따라 살면 금세 졸려진다. 황새를 따라하는 뱁새처럼 가랑이도 조금씩 찢어진다. 피가 콸콸 쏟아지는 것은 아니고 한 방울씩 나오기 때문에 차차 굳은 살이 생긴다.
"그래서 난 뭔데?"
그래도 의문이 전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종종 청년이 사라질 때 다은에게는 혼자만의 생각이 밀려왔다. 다은은 도대체 자신이 뭐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아무도 모르는데, 모르는 상태가 두려워서 다은은 직업에 자신을 끼워맞추려고 발버둥쳤다. 이제는 혼자 살고 돈도 어떻게든 벌 수 있으니, 자신을 설명할 직업이랄 게 생기나 싶었는데 이제는 해가 갈수록 자신답지 않은 일을 벌였다. 그걸 책임지느라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듯 지나간 한 해가 곤란한 참이었다. 정다은은 계속 이렇게 살 것인가? 30대가 되고 40대가 되어도 이 모양 이 꼴일 것인가?
“이제 잘 시간이야. 이 닦자.”
“웅.”
하지만 건실청년이 돌아오자마자 양치를 해야했으므로, 다은은 관리 받는 강아지마냥 물을 찹찹 먹고 양치하기 위해 화장실에 간다. 이렇게 지내다보면 어떨 때는 인간답게 운동도 하고 뭐라도 쓴다. 다은은 이토록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자신을 보면서 혼자 지낸 반년을 되돌아보다가, 어처구니 없는 한숨을 쉬었다.
“에휴, 내가 여태 생각해서 망했냐, 행동해서 망했냐?”
다은은 그저 청년이 자신을 고른 덴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며 치실질을 꼼꼼히 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