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38선을 넘어서 하조대에 이르다(강릉 사천에서 양양 하조대까지 32km)
4월 18일, 밤에 내리던 비가 멎고 흐린 날씨다. 전날 저녁을 든 진보횟집에서 황태해장국으로 아침을 들고 스트레칭을 하는데 부산의 이승희 씨가 인근에 도착했다고 전화한다. 야간버스를 타고 새벽에 강릉에 도착하여 사천해변까지 혼자 찾아온 것이다. 찹쌀모치와 약초로 담근 음료를 베낭에 지고 오느라 애를 쓰는 성의가 고맙다. 모치가 먹고 싶던 일본인들이 어찌알고 때맞춰 가져왔냐며 크게 기뻐한다. 조선통신사 걷기에 참여한 적이 있는 재일동포 최갑신 씨가 강릉의 종친모임에 참석했다가 일부러 찾아와 인사한 후 돌아가는 정성도 감사하고.
사천해안길을 따라 한 시간 반쯤 걸어가니 주문진항이다. 동해안 굴지의 수산물시장의 규모가 크고 각종 어물이 좌판에 진열돼 있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한 시간 쯤 걸어가니 강릉시계를 지나 양양군으로 접어든다. 소나무 숲이 잘 가꾸어진 지경해수욕장에서 잠시 쉬다가 해변길을 따라가니 남애항이 나타난다. 그곳의 돌바우횟집이 점심장소, 11시 반에 식당에 들어서니 상에 점심메뉴인 물회가 차려졌다.
수산시장이 큰 주문진항
점심 후 사흘간 함께 걸은 이소라 양이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우시오 게이코 씨와 모녀처럼 다정하게 걷는 모습이 아름다웠고 젊은 기운을 불어넣어주어서 좋았다. 12시 반에 오후 행진에 나섰다. 한 시간 걸은 죽도해수욕장, 그 너머 동산항을 지나서 한 시간 걸으니 국도변에 경찰전적비가 우뚝하다. 곳곳에 나라 위해 몸바친 순국인사들이 넋이 서려 있구나. 경찰전적비에서 30여분 걸어가니 38선표지가 보인다. 기념촬영을 한 후 표지 아래를 살피니 평화통일이라 새긴 돌판에 황금찬 시인의 통일을 염원하는 불망기라는 싯귀가 눈길을 끈다. '겨레여. 이곳을 저 파도소리처럼 잊지말라. --- 국토통일의 그날까지.'
한마음으로 통일을 염원하며
흐리고 약간 쌀쌀하던 날씨가 오후들어 맑아지고 기온도 올라가 걷기에 쾌적하다. 오후 세시 지나 목적지 하조대 입구에 들어서니 겹사쿠라꽃이 화려하고 여유를 찾은 일행들의 콧노래가 이어진다. 오후 3시 50분, 하조대해변의 알프스비치모텔에 도착하니 강은수 천혜경로원장이 보낸 편지가 먼저 와서 주인을 기다린다. 매월 후원자들에게 보내주는 경로원 소식지와 함께. '매일매일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두 분께 하나님위 보호하심이 함께 하기를 기도드립니다. 친구에게 이야기했더니 ;야, 대단한 분들이구나.' 합니다. 어제 함께 걸으면서 엄청나게 걷는 분들과 비교하며 우리를 비웃었지요. 부디 건강하시구요. 밥맛은 꿀맛 저리가라가 이닐까요? 잠은 두들겨깨야 일어나시지 않나요?' 고향마을을 찾은 할머니의 소회를 적은 소식지의 마지막 멘트는 이렇다.'아, 누가 그 아름다운 날을 가져다 줄것이냐. 그 즐겁던 때를.'
휴식을 취하다가 저녁을 들기 위해 밖으로 나오니 넓은 백사장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푸짐한 저녁식탁이 입맛을 돋운다. 메뉴는 쌈밥, 엔도 일본 대표는 가장 좋은 저녁식사라며 엄지를 쳐든다. 일부는 하조대에 올라가 주변의 풍광을 살피자는데 대부분 피곤한 몸이라 숙소로 곧장 돌아가기를 원한다. 노자와 가즈하루씨가 아내에게 묻는다. 마음이 불타는 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고. 가슴이 뜨겁다고 말해주니 걷는 동안 계속 가슴이 뜨겁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이처럼 가슴이 뜨거운 여정을 걷노라. 해안길 걷기도 내일이면 마지막, 컨디션 조절하며 속초까지 잘 걷자.
*엔도 대표가 일본인들에게 한국인이 당한 슬픔을 감안하여 언행에 각별히 신경 쓰며 숙연한 분위기를 지니자고 강조한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프란치스코 교황을 비롯하여 많은 외국인들이 위로와 도움의 뜻을 표한다. 하나님이여, 슬픔에 젖은 당사자들과 우리 모두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20. 낙산사를 돌아 속초에 입성하다(하조대에서 속초까지 30km)
4월 19일, 4.19 54주년 기념일이다. 걷는 중 울진군 북면을 지날 때(4월 13일) 그날이 3.1만세운동봉기일이라서 오전에 기념행사를 갖는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숙연한 마음이었는데 어제는 양양의 한적한 국도변 언덕 민주열사를 기리는 공원이 조성된 것을 보며 곳곳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애국충정의 넋이 서린 것을 확인하였다. 이 땅의 민주주의를 꽃 피우기 위해 산화한 영혼들이여, 하늘의 복을 누리시라.
아침 7시, 숙소의 식당에서 황태해장국으로 식사를 하고 8시에 하조대 해안길을 따라 해파랑길 마지막 코스인 속초로 향하였다. 한 시간여 걸으니 동호리 해안, 다시 한 시간 걸으니 오산리 해수욕장이 나온다. 오산리 도로 안쪽에는 선사문화유적박물관이 있고 해안쪽에 대규모 리조트 솔비치가 자리잡고 있어서 고대와 현대가 병존하는 느낌이다. 리조트 주변에는 영산홍이 아름답게 가꾸어지고.
'양양은 송이와 연어의 고장'이라는 표어가 곳곳에 붙어 있는데 10시 45분 쯤 연어의 산란지로 유명한 남대천을 지난다. 바다로 이어지는 하천의 강폭이 한강만큼이나 넓은 남대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낙산대교, 다리 건너니 낙산해수욕장이 가깝다. 백사장이 넓고 송림이 울창한 해수욕장 길을 따라 한참 걸어가니 음식점과 상가들이 밀집한 곳에 이른다. 그곳이 점심장소, 11시 15분으로 점심들기에 약간 이른 시간이다. 메뉴는 뼈다귀 해장국, 일본인들이 입맛에 맞은 듯 잘 먹는다.
백사장이 넓은 낙산해수욕장
점심을 들고 나오니 오전에 맑던 날씨가 흐려지고 기온도 더 내려간 듯, 약간 추운 느낌이 오후 내내 이어진다. 12시 20분에 식당을 나서 인근에 있는 낙산사를 한 바퀴 돌았다. 신라 고승 의상대사가 7세기에 창건한 낙산사는 경관이 수려하고 불자들의 순례코스로 널리 알려진 곳, 의상대에서 기념촬영한 후 주변을 살피니 '의상대 해돋이'를 새긴 시비가 눈에 띤다. 철운 조종현 대선사가 읊은 싯귀, '천지 개벽이야 눈이 번쩍 뜨인다 불덩이가 솟는구나 가슴이 용솟음친다 여보게 저 것 좀 보아 후끈하지 않은가'
낙산사를 돌아나오니 오후 1시 20분, 양양에서 속초로 연결되는 국도에 들어서니 쌩쌩 질주하는 차량들로 오싹한 기분이 든다. 낙산해수욕장 이웃이 설악해변, 그 다음은 정암해변, 이어서 물치항에 이른다.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물치교를 건너니 속초시계에 접어들고 국립공원 설악산이 눈에 들어온다.
환동해 시대의 국제관광도시를 표방하는 해안 풍광이 아름답고 지척으로 보이는 설악산의 웅자가 속초시의 품격을 높여주는 듯, 부산에서부터 먼길 걸어온 길손들의 마지막 발걸음이 힘차다. 운치있게 설계한 설악대교를 건너니 숙소인 이스턴관광호텔이 눈에 띠어 반가운 마음이다. 숙소 앞으로 뱃길이 형성되어서 이를 건너려면 한참을 돌아가야 한다는 주민의 설명, 땟목배로 건너면 1인당 200원 주고 가로 질러 갈 수 있단다. 막판에 땟목타고 매듭짓는 것도 재미 있네. 숙소에 도착하니 오후 4시, 30km를 걸었다. 부산에서 속초까지는 570여km, 멀고 먼 해파랑길 무사히 걸었구나.
땟목 타고 건너기
6시부터의 저녁식사는 호텔 앞의 횟집이다. 대구지리와 생선구이에 맥주, 소주, 막걸리를 곁들인 풍성한 메뉴에 지금까지 걸은 여정에 대한 평가회를 겸하였다. 한결같이 아름답고 즐거운 해파랑길, 어려움도 있었지만 한 마음 되어 20여일 무사히 걸어온 것을 감사하는 마음들이다. 이틀간 함께 걸은 이승희 씨는 심야버스 타고 내려간다며 아쉬운 작별을 고하였고. 내일은 휴식일, 모두들 느긋한 기분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푹 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