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절~36절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다 놀라 서로 말하여 가로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누가복음4장 31절~41절
회당 안에 더러운 귀신 33절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성경을 주의깊게 읽으면 이전에는 미쳐 깨닫지 못하던 중요한 대목을 발견하곤 한다.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는 장소가 다름아닌 ‘회당 안’이라는 사실이다. 회당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공간이다. 유대인들의 예배당이다. 요즘으로 바꿔 말하면 ‘교회’에 해당한다. 한마디로 거룩한 교회 안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다는 말이다. 마치 냉장고 안에서도 음식이 부패하듯이 교회에 다니면서 심지어 거룩한 직분을 가진, 겉으로 봐선 멀쩡해 보이는 사람도 내면에는 심각한 영적인 문제 안고 살아 갈 수 있다는 놀라운 통찰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거나 교회에 다니면 저절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거나 의롭게 된 것처럼 착각한다. 하지만 교회는 완전한 의인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용서받은 죄인들의 공동체다. 건강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치유 받아야 할 사람들의 공동체란 뜻이다. 오늘 본문이 증거하는 핵심은 교회 안에서 거룩한 직임과 사역을 감당하면서도 명예욕과 권력욕, 사리사욕과 탐심 같은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힌 채 살아갈 수 있다는 엄중한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귀신의 정체는 무엇일까? 성경이 전하는 ‘귀신들림(demon possession)’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정신분열과 동일한 증상으로 여긴다. 하지만 성경에서 나오는 귀신들림은 현대의학적으로 말하자면 단순히 ‘정신분열’만을 말하지 않는다. 귀신들림이란 ‘정신장애(disorder)’를 포함한다. 정신장애란, 건강하지 못한 마음의 상태를 일컫는다. 일명 마음의 감기라고 하는 우울증을 비롯해서 망상장애와 공황장애, 불안장애와 인격장애 등과 같은 정신적인 문제를 총망라한다. 물론 악령에게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 ‘귀신들림’이나 ‘정신분열’과 ‘정신장애’를 동일하게 볼 순 없다. 또한 그 차이를 명확하게 구별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그 원인이 유전적인 요인 외에도 지나친 욕심과 지나친 경쟁과 지나친 상처, 지나친 스트레스와 지나친 탐욕으로 부터 비롯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성경이 말하는 귀신의 정체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탐욕으로 인해 생겨난 건강하지 못한 마음의 질병’을 통칭한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귀신들림’이란, 좁은 의미에서 악령의 지배나 정신분열을 겪는 특정한 사람들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면 건강하지 못한 마음 곧 정신장애를 가진 모든 사람들을 포함한다. 현대인들은 모양은 다르지만 크고 작은 마음의 질병을 앓고 있다. 놀랍게도 대부분의 경우 마음의 병을 가진채 살고 있다는 것을 자신과 타인 모두 인식하지 못하는 현실이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질병으로부터 예외 일 수 없는 것처럼 믿음의 사람들도 탐욕과 이기심, 미움과 분노에 사로잡혀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해서 거룩한 직임을 감당하는 이들 가운데도 지나친 탐욕에 이끌려 살다가 인생을 망치는 사건을 종종 목도하게 된다. 교회 안에서 교회 일을 하면서 탐욕스런 악령에 이끌려 자기과시와 열등감, 이기심과 정욕에 이끌려 극심한 분란과 소동을 일으키곤 한다.
영성의 지표를 통해 살펴 본 귀신의 개념
성경이 증거하는 귀신의 정체를 명확하게 정의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누가복음은 귀신을 다양한 언어로 묘사한다. 귀신을 가리키는 헬라어 원어를 살펴보면, 귀신(악령과 귀신들림)을 ‘포네라(πονηρὰ)’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더러운 귀신(정신분열, 정신장애)을 ‘아카다르톤 프뉴마(ακαθαρτον πνευμα)’로 기록한다. 또한, 광야에서 예수를 시험했던 마귀를 ‘디아볼로스(diaboblos)’와 ‘다이몬”(daimon)’ 곧 훼방자와 대적자로 표현하며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누가복음은 성령에 대하여 자주 언급한다. 누가복음이 증거하는 성령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든 아래 필자의 영성지표에 따르면, ‘악령(the Devil spirit)’은 탐욕보다 더 낮은 단계의 영적인 상태를 가리킨다. 악령은 최고의 영성을 나타내는 성령(The Holy Spirit)에 정반대 되는 개념이다.
구 분 | 세 분 | 마음의 가치(동기와 목적) | 삶의 결과(열매) | 영(얼) Spirit | 1. 성 령 (The Holy Spirit) | 희생, 헌신, 섬김, 나눔, 용서 충성, 온유, 절제, 기쁨, 평화 | 하나님 나라, 거룩, 안식, 일치 | 2. 정 신 (Spirit) | 보편가치, 자유, 평등, 인권, 진선미 봉사, 환경, 정직, 질서, 신용 | 보편가치의 실현, 공정사회, 복지국가 | 3. 마음과 생각 (Mind & Heart) | 지성(知性),감성(感性),의지(意志) | 진선미(眞善美), 희노애락(喜怒哀樂) | 육 Flesh | 4. 필요(Need) | 의, 식, 주 | 일용할 양식 | 5. 탐욕(Desire) | 명예욕, 권력욕, 물욕, 이기심, 정욕, 쾌락, 사리사욕 | 시기, 질투, 다툼, 분쟁 | 6. 악령(the Devil) | 귀신들림, 우상숭배, 공중권세 | 타락, 죽음, 전쟁 |
귀신의 정체
34절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려 왔나이까, 나는 당신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전까지는 잠잠하던 귀신이 크게 소리 지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비로소 회당 안에 있던 귀신의 정체가 드러난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대하는 귀신의 반응에 주목해야 한다. 놀랍게도 귀신은 ‘예수님이 누구시며, 예수께서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증거한다.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는 귀신의 말을 통해 ’귀신들림(마음의 질병)‘이 예수님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또한, '우리를 멸하려 왔나이까' 라는 말을 통해서 예수께서 오신 목적이 마음과 영혼을 병들게 하는 악한 권세를 멸하러 오셨다는 사실도 증거한다.
예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은 악령에게 포로된 사람들을 자유케 하시기 위함이다. 마음의 질병을 겪는 이들을 치유하는 일이다. 분노와 탐욕에 붙들린 사람들에게 평강과 기쁨으로 회복시키는 일이다. 예수께서는 정신장애를 넘어 정신분열로, 정신분열을 넘어 귀신들림까지 이어지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들을 자유케 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구체적인 사명이 놀랍게도 귀신의 입을 통해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의 목적은 예수께서 행하신대로 귀신들린 자들을 온전케 하는 치유의 사역을 감당해야 마땅하다. 치유는 단순히 병을 고치는 치료의 차원이 아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치유’란 마음의 변화를 통한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삶의 변화’를 가리킨다. 위의 영성표에 언급한대로 성령의 역사는 희생, 기쁨, 평화,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다. 이와 달리 악령의 역사는 미움, 다툼, 시기, 질투, 타락, 전쟁, 죽음이다. 참된 크리스천의 사명은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탐욕에서 희생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저마다 발딛고 있는 가정과 삶의 현장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참된 교회의 역할은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세계의 전 영역에서 벌어지는 악령의 역사으로부터 성령으로 가득찬 세상을 만드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오늘날 한국교회는 성령충만은 커녕 탐욕충만을 넘어 악령충만에 가깝다. 명예욕과 권력욕, 물질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혀 있는 까닭이다. 오늘날 타락한 교회지도자들은 인기와 명예 같은 세속적인 영광과 부의 축적과 사치와 같은 세속적인 탐욕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성령과 귀신은 반비례 한다
35절~36절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다 놀라 서로 말하여 가로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귀신의 정체만 드러난 것이 아니라 더러운 귀신이 쫓겨 나갔다. 빛이 비취면 어둠은 소멸하듯이 성령과 악령은 반비례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엡 6:17)이라는 바울의 말대로 성령충만은 곧 ‘말씀충만’이다.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주님의 말씀을 읽을 때, 그 말씀이 우리의 영혼에 중심에 와 닿을 때, 그 거룩한 가치에 붙들려 살아갈 때, 우리 안에 있던 숨겨진 죄악이 드러난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에 속한 더러운 가치들은 소멸한다. 성령으로 충만한 말씀 앞에서 우리는 더러운 탐욕과 이기심에 붙들려 살아가던 나 자신을 비로소 조명하게 된다.
어거스틴의 통찰대로 ‘어둠은 빛의 부재(不在)’일 뿐이다. 어둠이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빛이 없는 상태’가 바로 어둠이다. 빛 가운데 어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불평’이란 ‘감사없음’이다. 감사하면 불평은 사라진다. ‘두려움’이란 ‘믿음없음’이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두려움을 이겨낸다. ‘다툼’은 ‘평화없음’이다. 평화가 회복되면 다툼은 사라진다. ‘절망’은 ‘희망없음’이다.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은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죽음’이란 ‘생명없음’이다. 이처럼, 빛 되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임하시면 어두운 악령은 쫓겨 갈 수 밖에 없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성프란시코(St. Francis of Assisi)의 기도는 이와 같은 거룩한 성령의 역사를 간구하는 대표적인 기도다. 어두운 영에 대적하기 위해 마땅히 간구해야 할 기도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 오는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하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고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영혼을 병들게 하던 악한 권세를 멸하고 건강한 영혼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예수께서 오신 목적이요, 오늘날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오늘날 성령충만(희생, 헌신, 섬김, 나눔, 용서, 충성, 온유, 절제, 기쁨, 평화)해야 마땅한 교회는 탐욕충만(명예욕, 권력욕, 물욕, 이기심, 정욕, 쾌락, 사리사욕)을 넘어 악령충만(다툼, 분쟁, 타락, 죽음, 전쟁)하기만 현실이다.
중한 열병을 치유하다
38절~39절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지라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예수께서 오신 목적은 마음의 질병 뿐만 아니라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도 건강한 삶으로 회복시키는 일이다. 정확한 병명을 알 수 없지만 시몬의 장모가 앓던 중한 열병을 고쳐 주셨다. 이밖에도 누가복음은 수많은 치유사건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치유는 현대의학이나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신비 그 자체다. 신비란 설명가능한 지식의 영역이 아니라 언표불가능한 체험의 영역이다. 나는 매주일 예배가 마치면 원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유기도를 행한다. 행여 신통방통한 치유의 능력이 나에게 전혀 없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5:16) 다만 말씀에 순종해서 예수님과 함께 하셨던 그 놀라운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간절히 기도할 따름이다. 그 가운데 크고 작은 치유를 행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수없이 목도했다. 앞서 언급한대로 이러한 치유사건은 나 자신과는 전혀 무관하다. 내몸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나를 통해서 주님께서 행하신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은총일 뿐이다.
예수님은 단순히 병을 고쳐주는 의사가 아니다. 예수께서 병을 고치시는 더 중요한 목적이 있다. 성경의 증거하는 모든 치유는 주님께 ‘의뢰할 때’ 비로소 치유를 베푸셨다.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누군가 병든 사람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병낫기를 간청했다. 기도의 본질은 ‘간구’와 ‘의뢰’다. 의뢰는 아무나에게 함부로 하지 않는다. 오직 신뢰할 수 있는 대상에게만 의뢰한다. 따라서 치유는 삶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는 자들에게만 친히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나타내시는 증거다. 성전미문의 앉은뱅이를 일으킨 베드로의 고백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3:11-16)” 치유를 통해서 단순한 병고침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행하신 일임을 널리 드러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 한 가지 예수님의 치유를 통해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병을 고침 받은 여인이 일어나 예수께서 하시는 일을 도와 수종을 들었다. 병고침을 받은 여인이 건강해져서 다른 병든 사람을 치유하는 일을 도왔다는 말이다. 치유도 중요하지만 건강하게 치유 받은 이후의 삶이 더 중요하다. 치유 받은 몸과 회복된 건강으로 자신과 같은 고통 받는 또 다른 이들을 돌보고 치유하는 일, 이것이야 말로 치유의 본질이다. 치유로 끝이 아니라 치유 받은 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삶까지 나아가는 것이 마땅하다. 누가복음의 치유는 이와 같은 ‘치유의 목적’과 ‘치유이후의 삶’에 대해 거듭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치유를 행한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이 가로채는데 급급하고, 치유 받은 자들은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일쑤다.
귀신만도 못한 사람들
41절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시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줄 앎이러라. 누가복음은 쫓겨 나가는 귀신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예수님은 누구시며 무엇을 위해 오셨는지 그 목적을 명확하게 선포하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귀신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정작 회당 안에 있던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끝까지 알아채지 못했다. 그들은 그져 예수를 요셉의 아들로만 여겼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설교를 들었지만 아무런 기적과 능력을 체험하지 못했다. 오늘 말씀의 진짜 주인공은 회당 안에 귀신들린 사람이나 치유받은 시몬의 장모가 아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끝내 알아채지 못했던 회당 안에 유대인들, 곧 귀신만도 못한 사람들이다.
건강한 몸과 마음은 누구나 원하는 한결같은 바람이다. 하지만, 우리는 삶에서 원치 않은 질병을 만난다. 때론 시몬의 장모와 같은 육체적인 질병이나 귀신들린 사람과 같은 심각한 마음의 병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이들은 질병을 통해서 도리어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마침내 치유 받아 그분이 누구신지, 이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체험하고 나아가 밝히 드러내는 역할을 감당해냈다. ‘귀신들린 것’이나 ‘육체적인 질병으로 고통 받은 것’은 불행한 일이지만 오히려 그것을 통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건됐다.
모든 일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동시에 존재하는 양면성이 있다. 좋은 일 속에도 나쁜 일이 있고 나쁜 일 속도 좋은 일이 있다. <참된 믿음의 사람은 누구인가>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의 해석을 해내는 사람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어딘가 솟아날 구멍을 찾는 사람이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도하실 것을 믿기에 어떤 문제와 인생의 장애물을 만나든지 그 속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도록 쓰임 받길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겪고 살아가는 모든 삶의 어려움을 통해서 결국 주님께서 하시는 일(하나님의 영광 곧 치유와 회복, 성숙과 변화)이 나타나길 부단히 의뢰하며 끝까지 인내하는 믿음이다. 오늘도 예수께서는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서 변함없는 치유의 기적을 이루어 가심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뜻으로 읽는 누가복음, LUCAS> 중에서
‘Lucas’ is the Latin form of the Greek first name Loukas (Λουκᾶς) This name is given to honor Luke the Evange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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