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앤솔로지
로마서 9:1-5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무더운 여름이다. 온 나라가 후끈 달아올랐다. 날마다 신기록을 경신 중이다. 이젠 태풍이나 지진, 풍수해만 재난이 아니라, 높은 기온과 고열도 기후 재난이라고 불러야될 것이다.
누구든지 무더위를 24시간 피해 다닐 수 없으니, 더위 중에 몸과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잘 지키기를 바란다.
오늘 설교 제목은 ‘바울 앤솔로지’이다. 앤솔로지는 그리스어 ‘앤톨로기아’(anthologia)에서 온 말이다. ‘꽃을 따서 모은 것’이란 뜻이다. 흔히 최고의 시, 사랑받는 명시를 추려낸 것을 ‘시선’(詩選), 곧 ‘앤솔로지’라고 부른다.
‘바울 앤솔로지’는 바울의 편지 13권에서 손꼽은 것이다. 예전에 누가 그런 작업을 했는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색동교회 새벽기도회의 ‘바울 앤솔로지’는 내 마음대로 선택해 본 바울의 명언록이다.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의 <하시디즘 100개의 이야기>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동유럽 유대인들에게 전승되어오는 짧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수집하였다.
누구나 그런 말들,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성경의 전통에서 ‘마기드’라고 부른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자주 하나님 이야기를 나눈다. ‘바울 앤솔로지’를 쓰는 이유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신앙이야기를 나누고, 신앙화하였는지 살펴보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시대, 우리 언어로도 가능하다. 우리 신앙을 시편화 하는 일이다.
1)
로마서 9장에는 바울의 슬픔과 탄식이 담겨 있다. 그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쓴다. 자신은 유대인이지만, 자기 백성 유대인들은 지금 메시야이신 예수를 부인한 까닭에,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거절하였다고 말한다.
바울은 이에 앞서 로마서 8장에서 구원의 진수를 잘 정리하였다. 그리고 9장부터 11장에서 그런 위대한 구원사건에 참여하지 못한 자기 백성 유대인들을 고발한다. 너무 안타까워서,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울의 슬픔을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바울이 유대인에게 그랬듯이, 우리도 민족의 구원 문제에 깊은 사랑을 지녀야 한다.
만약 ‘탈(脫) 세상’을 강요하고, ‘비(非) 현실’을 강조하는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교적이지 않다. 우리가 늘 경험하는 사회, 민족, 공동체, 이웃 문제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 관심사이다. 우리는 누구나 그 안에서 고민하며, 씨름하고, 부둥켜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기에 복음은 우리 삶과 밀접하다.
사도 바울의 슬픔과 탄식은 자기는 세상에서, 현실에서 예수 복음을 전하는데, 정작 자기 백성인 유대인은 그 복음을 외면한다는 안타까움이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1-2).
바울은 자기 동족 유대인의 구원 문제를 생각하며 슬퍼한다. 자기 백성 유대인은 자기가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였고, 그 복음을 훼방하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분노하기보다, 슬퍼한다.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서 탄식한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자기 백성 유대인에게 모욕을 듣고, 박해를 당했다. 그렇지만 바울은 자기 백성을 향해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랑의 마음으로 동정해야 할 백성으로 보았다.
지금 사도 바울은 자기 백성 유대인이 먼저 구원받아야 한다는 편협한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 백성에게 전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같은 민족인 유대 민족도 받아들이기를 소원했을 뿐이다.
한 사람, 사도 바울의 슬픔은 온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욱 뜨겁게 전염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
바울은 먼저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8-39).
그런데 이제 바울은 비장한 고백을 한다. 그는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일조차 마다하지 않겠다고 서슴없이 말하고 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3).
바울은 자기 백성과 깊이 공감해 온 사람이다. 오죽하면 유대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이 저주를 받겠다고 하였을까?
‘공감’(共感)이란 영어 단어는 콤패션(Com+passion)이다. 사실 원어 뜻 그대로 이해하면 ‘패션’(고통)을 함께 한다는 뜻이다. 공감보다, ‘공고’(共苦)가 더 분명한 뜻이다. 고통을 공유해야 진정한 친구이다.
일찍이 모세가 그랬다. 바울은 이런 모세의 마음과 공감(共感)하고, 공고(共苦)하려고 하였다. 이 사건은 유대인에게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이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은 급히 도망쳐 나온 후 시내 산 아래에서 한숨을 돌렸다. 그들은 얼마 전 시내 산에 올라간 후 소식이 없는 모세를 기다렸다. 산 아래에서 막막하게 기다려온 백성은 그들의 지팡이인 모세의 부재를 두려워하였을 것이다.
기다리다 못해 그들은 엉뚱한 마음을 품었다. 그래서 금붙이를 모아 애굽의 우상의 하나인 금송아지를 만들었고, 이를 예배하고, 찬양하였다. 그들 수준에서 상상한 하나님은 고작 애굽에서 본 우상, 황금송아지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불신과 무지 때문에 하나님을 배신하였다. 그 불신과 무지 때문에 하나님께 정면 도전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불같이 진노하셨고, 진멸하고자 하셨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의 분노를 피해 보려고 비상 수단을 쓴다. 그는 하나님에게 떼를 쓰고 매달리고 자비를 구하였다. 절절히 호소하다가 마침내 승부수를 띄웠다.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2).
모세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다. 그는 자기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의 이름을 지워도 좋다고 밝혔다.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담보 잡힌 셈이다.
사도 바울 역시 같은 심정이었다. 하나님의 책에서 자기 이름을 삭제해도 좋다는 모세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겠다는 바울이나 모두 자기 백성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표현한다.
그들의 목표는 자기 백성의 해방이요, 자기 민족의 구원이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목숨 걸고 사랑했던 모세 때문에 용서의 은혜를 베푸신 것처럼, 바울 역시 자기 영적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하소연하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진노의 그릇을 사용하여 심판하기에 앞서서, 긍휼의 그릇으로 자비를 베푸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다(22-23).
이스라엘의 비극은 하나님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자기 아들을 예비하셨으나, 외려 선민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은 하나님의 구원을 거절했다는 데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열심히 지켰지만, 그 핵심인 하나님의 사랑은 외면하였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지닌 커다란 자부심 때문에 오히려 결정적인 하나님의 선물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4-5).
사실 이스라엘은 이미 과분한 은총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은총을 오해하여 정작 결정적인 하나님의 선물을 보지 못하였다. 그 과거에 받은 은총은 특권화 되고, 율법주의로 변질되어 하나님과 생생한 인격적 관계가 사라지고, 형식적 관계만 남았다.
그것이 유대인의 비극이었다. 유대인의 자부심은 외려 구원의 걸림돌이 되었다.
3)
<하시디즘 100개의 이야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위대한 마기드가 제자인 주샤에게 말했다. 나는 네게 섬김의 원칙 열 가지를 가르칠 수 없다. 그러나 너는 그것을 어린아이와 도둑에게서 바울 수 있다.
세 가지는 어린이에게 배워라.
어린이는 별다른 이유가 없어도 명랑하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꼭 필요한 것이 있으면 온 힘을 다해 그것을 얻어내려고 한다.
일곱 가지는 도둑에게서 배워라.
그는 밤에도 일한다.
그날 밤에 하지 못한 일은 다음 날 밤에 꼭 해낸다.
동료를 사랑한다.
사소한 데 목숨을 건다.
열심히 일해서 차지한 물건이라도 쌓아두지 않고 푼돈에 줘 버린다.
매 맞거나 고생할까 봐 마음이 흔들리거나 물러서거나 않는다.
자신의 손재주를 뿌듯해하며 절대로 다른 일과 바꾸지 않는다.”
바울도 이스라엘의 일곱 가지 자부심을 열거한다. 그 자부심 목록은 바울이 꼽은 ‘앤솔로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선민으로서 특권인 ‘양자됨’
- 출애굽 후 체험한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는 ‘영광’
-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 모세를 통해 받은 ‘율법’
- 제사장의 나라로서 부여된 특권인 ‘예배’
-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
- 믿음의 ‘조상’들
이것은 모두 구원받기에 확실한 미리 주신 은총이고, 보증수표와 같았다.
그런데 이 일곱 가지 특권이 오히려 유대인들에게 결격사유가 된 셈이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는 혈통으로 유대인 출신이었으나, 그들은 업수이 여겼다.
“...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5).
우리 주변에도 자신이 지닌 특권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외면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 특별한 은총이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을 거부한 채, 그들의 마음의 문을 닫고, 눈을 가리고 말았다.
바울의 안타까움은 그런 유대인의 선민의식, 특권의식에서 비롯된다. 유대인의 비뚤어진 열심은 목표를 빗나가 버렸다. 그 열심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고작 자기 의를 위해 애쓴 것이기 때문이었다.
유대인의 안타까움은 너무 부족하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 충분했다는 데 있다. 바울의 슬픔은 그들의 부요함이 오히려 하나님의 가난한 선물을 외면하였다는 데 있다. 그들은 너무 교만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였다.
지금 한국교회도 다르지 않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서 얼마나 많이 분열되고, 경쟁하고, 우쭐하고, 형식주의에 빠졌던가?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열방의 구원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분단된 한민족의 온전한 구원과 주님의 평화를 위해 우리는 충분한 사랑을 나누었던가?
우리 시대의 슬픔은 점점 공감(共感)과 공고(共苦)를 잃어버린다는 사실이다. 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그에게도 복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데, 그런 치열한 열심을 잃어버렸다.
우리 민족의 구성원에게 더욱 친절히 다가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 해야 하는데 그 진심도, 방법도, 노력도 상실하였다. 다시 8월이다. 이런 역사적인 달에 우리가 우리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더욱 기도하고, 사랑해야 한다.
바울이 가장 위대한 선교사라 불리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과 함께 하려는 그의 ‘공감’ 때문이었다. 우리는 바울의 기쁨에 공감하듯, 바울의 슬픔과도 공감해야 한다. 이를 통해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인 ‘바울 앤솔로지’를 내 것으로 삼는 복된 기회를 얻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선물을 먼저 받아들인 우리를 통해 민족의 화해와 평화, 복음 전파와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