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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강해 제 20장 이스라엘의 내전
레위인의 충격적인 고발로 인하여 문제가 전 지파에 확산되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내전을 일으키게 된다.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레위인에게 기브아 사건의 진상을 자세히 묻고 기브아 성읍을 치기로 결의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공격을 하기 전에 비류들을 넘겨달라고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베냐민 지파가 이를 거절하고 도리어 군사를 모아 먼저 전쟁을 개시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전쟁이 돌입하게 된다.
1. 미스바 총회의 결의 (20:1-16절)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 총회는 기브아를 칠 것을 결의하고 네 가지 세부 지침을 가결한다.
첫째, 기브아 비류들을 징계하기 전에는 아무도 집에 돌아가지 않는다.
둘째, 전체 백성 중 1/10을 군사로 모집하여 그들에게 군량미를 공급하도록 한다.
셋째, 딸을 베냐민 자손의 아내로 주지 아니한다.
넷째, 하나님의 총회에 나오지 아니한 지파를 멸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브아를 공격하기 전 베냐민 지파에게 비류들을 넘겨달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베냐민 지파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군사를 일으키니 내전을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연맹군은 처음부터 베냐민 지파를 완전히 섬멸할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온 이스라엘은 모두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다. 이 말은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라는 말과 완전한 대조가 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유일한 왕은 오직 ‘여호와’한 분뿐임을 시사해 주고 있으며 여호와의 통치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미스바’는 ‘망대’라는 뜻으로 두 곳이 있는데 하나는 길르앗 땅에 있고, 또 하나는 베냐민 지파 가까운 곳에 있으며 이스라엘 군대가 모인 곳은 베냐민 지파 근방에 있는 미스바이다. 이곳은 이후에 국가적 총회의 장소로 나타나는데 사무엘 시대에 미스바 총회가 열렸으며 후일 마카비 시대에도 이곳에서 총회로 모였다.
이곳에 모인 장정의 수는 40만이었는데 출애굽 당시 전체 군대의 수효가 60만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대군이 모인 것이다. 후일 사울 왕이 암몬과 싸울 때에 군사의 수가 33만 명이었던 것과 족히 비교할 수 있다. 앞서 레위인이 첩의 시체를 열둘로 나누어 각 지파에게 보냈기 때문에 베냐민 지파도 이를 받았을 것이며 사건의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총회로 모였을 때에 베냐민 지파에게 알리지 않았으며 베냐민은 총회가 모인 이후에 이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이것은 잘못된 결정이라 할 수 있는데 베냐민 지파에게도 총회 소집을 알리고 참석하게 했다면 불필요한 오해를 잠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베냐민 지파가 불참한 총회에서 이스라엘 총회는 비류들의 사건에 대해 재판하기 위하여 레위인으로 하여금 사건의 전말을 보고하게 하였다. 4절-7절에 걸친 레위인의 보고에서 레위인은 기브아 사람들이 실제로 노린 것은 자기의 목숨이었으며 자기의 첩을 욕보여 죽게 했다는 것이다. 그는 진실을 말하지 않았고 은근히 자기 죄를 감추며 사실을 왜곡하여 보고한 것이다. 레위인의 이야기의 초점은 기브아 비류들이 자기를 치려고 일어나서 집을 에워싸고 자기를 죽이려 하고 첩을 욕보여 죽게 했다는 것인데 자기를 상관하려고 했기 때문에 자기 대신에 자기 첩을 내어주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분노를 일으키도록 충동질한 것이다. ‘욕보여’라는 말 ‘인누’는 ‘여성을 무지막지하게 능욕했다.’는 강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레위인은 첩의 시체를 각 지파에게 보낸 이유에 대해 특별히 강조함으로써 사람의 시체를 각을 뜬 자신의 잔인한 행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약화시키고 있다. 또한 일부 몇 사람의 비류들이 자행한 행위를 기브아 사람들 전체의 악행인 양 과장하여 이것이 전 이스라엘 지파에 대한 범죄임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이에 대한 국가적 대처 방안을 강구할 것을 촉구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죄는 감추고 사적인 분노를 민족적인 분노로 미화시킨 것이다. 레위인은 그의 말의 끝에 음란죄와 살인죄에 대한 형벌을 촉구했는데 만일 그의 말대로라면 기브아 사람 전체가 이스라엘 지파에서 끊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만장일치로 베냐민 지파를 징벌할 것을 결의했다. 사실 재판은 공정해야 하는데 고발자의 말만 듣고 성급하게 결정하는 것은 정당한 재판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베냐민 지파의 두령들을 불러 진상을 조사하고 사건의 전말에 대해 시비를 가려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인 성급한 판단을 했던 것이다. ‘일어나다’라는 말 ‘쿰’은 성전이나 어떤 직무를 수행할 때 예비적 동작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한 지파의 범죄를 징벌하기 위한 심판자로서 일어난 것이다. 저들은 기브아 비류들을 응징하기 위하여 각 지파 중에서 1/10을 선발하여 출전시키기로 하였는데 문제를 대처함에 있어 혼연 일체가 되어 이스라엘 내의 죄악을 제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보조하고자 하는 궐기는 높이 평가될 만하다. 그러나 저들은 형제 지파를 정죄하기에 앞서 자신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통절히 느껴야 했고,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민족의 현실 앞에 회개해야만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브아 비류들이 행한 윤간 행위에 대해 하나님의 법을 어긴 심각한 범죄 행위로 보고 징계하려 했는데 사실 각종 성범죄는 인간의 영혼과 인격을 파괴하는 죄악이며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깨뜨리는 중대한 범죄인 것이다.
이스라엘 지파들은 베냐민 사람들에게 공식적인 전갈을 보내어 악행에 대해 묻고 비류들은 송환하여 이스라엘 내에 악행을 제거하여 불필요한 희생을 막고자 하였다. 기브아의 비류들을 징벌하여 이스라엘이 도덕적으로 순결을 유지할 수 있도록 범죄자 인도를 요청하였다. 율법에는 가증한 일을 행한 성읍만 징벌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냐민 지파는 자기 지파 내에 가증한 일을 행한 성읍이 있다는 사실 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아마도 미스바에 모인 40만 대군을 보고서 분개하였거나 자존심이 상한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기브아 비류들의 범죄는 십계명의 6,7,10 계명을 범하였기 때문에 사형의 처벌을 받아야 마땅하였다. 만일 그러한 죄인을 묵과하면 율법의 권위가 실추되어 백성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극심한 죄악에 빠져 사회에 큰 혼란이 야기될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 하나님의 정책이 내려질 것이 자명하다.
그러나 베냐민 지파 사람들은 마음이 완악해져 있었으므로 죄인들의 죄를 용납할 뿐만 아니라 그 일을 행한 자를 정당화시키고 성읍들로부터 사람들을 징집하여 이스라엘과 전쟁하려 하였다. 베냐민 지파의 성읍은 26개이며 각 성읍에서 나온 군사는 26,000명이며 기브아에서 선발된 군사는 600명이었다. 베냐민 지파의 광야 1차 인구조사 때 군사는 35,400명이며, 2차 인구조사 때 군사는 45,600명이었기 때문에 지금은 상당히 줄어든 숫자이다. 특히 기브아 군사는 700명인데 다 왼손잡이라고 하였다는 것은 그들의 용맹의 막강함을 보여 준다. 이들이 이스라엘 총회의 군대에 비하면 1/15 정도이나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감히 전쟁을 일으킨 것은 타고난 용맹 때문이었다. 일찍이 야곱은 이들의 용맹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창49;27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2. 이스라엘 연맹군의 패배 (20:17-28절)
이스라엘 연맹군은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베냐민 지파에게 연일 연패하였다. 그리하여 온 백성이 거족적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의 제단을 쌓았다. 이들이 패배한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 베냐민 지파를 형제로 여기지 않고 마치 이방인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둘째, 전쟁에 임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회개의 제단을 쌓지 않았기 때문이다.
셋째, 베냐민 지파의 막강한 전투력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총회의 군사가 40만 명이라고 하지만 실제는 길르앗 야베스의 군사가 빠진 숫자이다. 21:9절에 보면 야베스의 주민이 거기 없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요단 강 동편 지파가 빠진 40만 군대라는 것은 거의 대부분이 참가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묻기 위해 벧엘로 올라갔는데 실로로 가지 않고 왜 벧엘로 갔는지 견해가 다양하다.
첫째, 벧엘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에 사실은 하나님의 집인 실로로 갔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무리수가 따른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집’이라고 할 때에 ‘벧 하 엘로힘’이라고 기록하기 때문이며 ‘벧엘’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지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벧엘로 올라간 것이 정확한 해석이다.
둘째, 당시 벧엘에는 산당이 있었기 때문에 실로는 거리가 멀고 가까운 산당으로 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상 벧엘이 종교적 중심지로 각광을 받게 된 것도 이때부터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로가 벧엘보다 조금 멀다고 하여 산당이 있는 벧엘로 올라갔다는 것이며 그렇다면 이는 바른 행동이 아닌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은 관례적인 행위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 전쟁에 대하여 먼저 묻고, 그 다음에 전쟁을 수행할 방법에 대해 물어야 하는데 저들은 베냐민 지파를 가나안 족속과 동일한 대적으로 간주하여 마치 이방인과 싸우는 것처럼 승리만을 기원했던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베냐민과 싸움에서 패배의 원인이 된 것이다.
이스라엘 군대는 전열을 갖추고 베냐민과 싸우려고 했는데 ‘전열을 갖춘다’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가장자리를 향하여 전투 대형을 벌인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적을 포위하는 형태로 전투를 하는 것인데 이때 중요한 것은 전력 면에서 상대방보다 월등히 우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베냐민의 병력에 대한 정확한 정보나 작전도 없이 무턱대고 포위 공격을 감행했던 것이다. 이때 베냐민 군사는 기브아에 매복 작전을 펼쳤다가 때를 맞추어 공격하여 이스라엘 연맹군 22,000명을 섬멸하였다. 연맹군이 패배한 원인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그들은 자체 내에 죄악을 지니고 있었는데 단 지파의 죄악과 베냐민 지파의 죄악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동족상잔의 비극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통감하고 이스라엘 공동체로서 회개해야 하는데 오히려 심판관의 위치에서 교만과 어리석음을 범했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의 경고를 받은 것이다.
둘째, 베냐민 군사들은 전쟁에 패한다는 것은 지파의 멸망과 직결되었기 때문에 생사를 초월한 결사적 전투에 임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항오를 재정비하고 싸움을 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저물도록 울며 엎드리고 나서 다시 전투를 해야 할 것인지를 물었으며 하나님의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두 번째 전투에서도 이스라엘은 패하여 18,000명의 군사가 죽임을 당하였다. 그렇다면 저들이 흘린 눈물은 회개의 눈물이 아니라 자신들의 패배로 인한 원망의 눈물이었던 것이다. 저들은 한 번 패배를 맛보고 나서도 바른 자각을 얻지 못하고 동일한 실수와 범죄를 반복한 것이다.
두 번의 패배를 맛본 후에 이스라엘은 보다 근원적인 패인을 생각하게 되었고 스스로 교만했던 것과 완악했던 모습들을 회개한다. 지금까지는 병력의 수효만 믿고 하나의 요식 행위로 하나님을 찾았지만 이번에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갔다. 저들은 고난을 통하여 자신의 죄악된 실상들을 직시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도우심을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세를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다시 벧엘로 올라가서 여호와 앞에서 울고 저물도록 앉았다가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 당시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있었고 아론의 손자인 비느하스가 그 앞에 모시고 있었다. 그렇다면 실로의 성막을 벧엘로 옮겼다는 말이 되는데 엘리 제사장 시절 블레셋 사람들에게 언약궤를 빼앗길 때까지 언약궤는 실로에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법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베냐민과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옮긴 것이 분명하다. 당시 제사장은 비느하스인데 이 사람은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이 부디엘의 딸을 통하여 얻은 아들이다. 비느하스는 모세와 함께 광야에서 이미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그렇다면 이 시기는 사사기 초기임이 분명하다.
세 번째 전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하나님은 비로소 승리를 보장해 주셨고 이 승리의 약속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관계가 다시 회복되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3. 연맹군의 승리와 그 결과 (20:29-48절)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승리의 확신을 얻은 이스라엘 연맹군은 마침내 베냐민 지파를 섬멸하고 승리한다. 이전처럼 수적인 우세에 자만하지 않고 신중하게 전투에 임했으며 아이 성 전투와 유사한 전술로 확실한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연맹군은 기브아 사면에 군사를 은밀하게 매복시키고 이전과 같은 대형을 펼쳤다. 베냐민 사람들은 유인술에 걸린 줄도 모르고 기세가 등등하여 기브아 성을 떠나 이스라엘 연맹군을 추격하였다. 베냐민 지파는 전과 같이 돌격하여 삼십 명 가량을 죽이기 시작하자 교만하여졌으며 이를 역이용한 이스라엘은 큰길까지 베냐민을 유인하여 마침내 매복군과 합세하여 협공을 전개하였다. ‘바알다말’은 ‘종려나무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기브아 근처였다. 바알다말에서 싸움에 정신이 없던 베냐민은 기브아에 매복했던 복병들이 자기들의 성읍을 치고 난 후 후미를 공격하는 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베냐민 지파의 군대 수효는 26,700명 인데 비하여 이 전쟁에서 죽은 사람은 25,100명이고 죽지 않고 도망친 사람은 600명으로 합계 25,700명이 된다. 그렇다면 처음 숫자와 1,000명이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이것은 처음 전투와 두 번째 전투에서 죽은 자들이었을 것이다.
29-35절은 전투 상황을 좀 더 자세히 부연 설명하고 있다. 세 번째 전투에서는 양쪽에서 협공하는 이스라엘 군에 의하여 고전하는데 특히 자기 성읍에서 일어나는 연기를 보고 자기들이 패한 것을 깨달았다. 그 뒤로부터 병력들은 우왕좌왕하게 되고 결국 25,000명이라는 엄청난 군사들이 죽임을 당하고 만다. 40절에 베냐민 사람들이 돌아보았다는 말은 슬픔과 탄식이 섞인 눈으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즉 베냐민 자손들이 자기들이 패한 것을 깨달은 것은 기브아 성읍 전체에서 피어오르는 구름 기둥 같은 연기를 보았을 때이다.
도망가는 것처럼 위장하고 유인 전술을 펼쳤던 이스라엘이 돌이킬 때에 베냐민 자손들은 화가 자기에게 미친 것을 보았는데 이들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했지만 중과부적이었으며 이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줄로 깨달았을 것이다. 베냐민 군대는 여리고로 통하는 광야 길로 도망했으며 그 이유는 요단 계곡에 도착하기만 하면 굴이 많았기 때문에 숨을 돌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베냐민 지파는 추적자들을 따돌리고 기브아 앞 동편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지만 그곳이 그들의 무덤이 되고 말았다. 이때 죽은 용사가 18,000명이었고, 림몬 바위로 가던 도중에 7,000명이 죽어 이 날에 죽은 자가 모두 25,000명이었으며 림몬 바위에 피한 사람은 겨우 600명이었다. 이들은 그곳에서 넉 달을 지내며 생존했는데 하나님께서 육백 명을 남겨두신 것은 진노 중에라도 언약을 잊지 않으시고 긍휼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시에 600명을 남겨 두지 않았다면 후일에 바울 사도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림몬 바위에 숨은 600명을 색출하는 대신에 베냐민 성읍으로 돌아와서 그곳 백성들뿐만 아니라 가축도 모두 죽이고 성읍들을 불살라 버리고 말았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같이 잔인하게 베냐민 지파를 학살한 것은 이들이 기브아 성읍을 옹호하며 동일한 범죄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냐민 지파는 스스로 뿌린 씨앗의 열매를 거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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