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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중국25사(위서 열전) 부여/백제/가야
2005.08.11. 00:47
복사 http://blog.naver.com/eraka/100016006468
출처 석현이의 블로그 | 개벽
원문 http://blog.naver.com/chosukhyun73/120003271108
魏書 列傳
북제(北齊) 사람 위수(魏收)의 저술한 역사서. 114권(本紀 12권, 志 10지, 列傳 92편)으로 되어 있다.
문선제(文宣帝) 천보(天保) 2년(551)에 만들어졌고, 현재 전하는 것은 잃어버린 부분을 송(宋)나라 때
보완한 것이다.
魏書卷一百
列傳第八十八
高句麗·百濟·勿吉·失韋·豆莫婁·地豆于·庫莫奚·契丹·烏洛侯.
高句麗 (고구려)
<高句麗>者, 出於<夫餘>, 自言先祖<朱蒙>. <朱蒙>母河伯女, 爲<夫餘王>閉於室中, 爲日所照, 引身避
之, 日影又逐. 旣而有孕, 生一卵, 大如五升. <夫餘王>棄之與犬, 犬不食; 棄之與豕, 豕又不食; 棄之於路,
牛馬避之; 後棄之野, 衆鳥以毛茹之. <夫餘王>割剖之, 不能破, 遂還其母. 其母以物 之, 置於暖處, 有一
男破殼而出. 及其長也, 字之曰<朱蒙>, 其俗言[朱蒙]者, 善射也. <夫餘>人以<朱蒙>非人所生, 將有異志,
請除之, 王不聽, 命之養馬. <朱蒙>每私試, 知有善惡, 駿者減食令瘦, 駑者善養令肥. <夫餘王>以肥者自
乘, 以瘦者給<朱蒙>. 後狩于田, 以<朱蒙>善射, 限之一矢. <朱蒙>雖矢少, 獸甚多. <夫餘>之臣又謀
殺之. <朱蒙>母陰知, 告<朱蒙>曰: [國將害汝, 以汝才略, 宜遠適四方.] <朱蒙>乃與<烏引>·<烏違>等二
人, 棄<夫餘>, 東南走. 中道遇一大水, 欲濟無梁, <夫餘>人追之甚急. <朱蒙>告水曰: [我是日子, 河伯外
孫, 今日逃走, 追兵垂及, 如何得濟?] 於是魚鼈 浮, 爲之成橋, <朱蒙>得渡, 魚鼈乃解, 追騎不得渡. <朱
蒙>遂至<普述水>, 遇見三人, 其一人著麻衣, 一人著納衣, 一人著水藻衣, 與<朱蒙>至<紇升骨城>, 遂居
焉, 號曰<高句麗>, 因以爲氏焉.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다. 스스로 말하길 선조는 '주몽'이다.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의 딸로,
'부여왕'이 궁실안에 잠그었으나 태양이 이곳을 밝게 비추어, 몸을 끌었으나 이를 피하였지만, 태양의
그림자가 또한 쫒아 왔다. 그러는 동안에 아이를 베니 알 하나를 낳았다. 크기가 다섯되나 되었다.
'부여왕'이 이를 버려 개에게 주었지만, 개는 먹지 않고, 다시 버려 돼지에게 주었지만, 역시 먹지
않았다. 이를 길가에 버렸지만, 소와 말이 이를 피했다. 후에 이를 들에 버렸는데, 새의 무리가 털로
써 이를 길렀다. '부여왕'이 이를 쪼개어 나눌려고 했지만, 능히 깰수 없었다. 그 어미에게 돌려 주자,
어미가 이를 보자기에 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한 사내 아이가 알을 깨고 나왔다. 이미 자라 있으니,
이름을 '주몽'이라 하였다. 풍속에 '주몽'이란 말은 '활을 잘 쏜다'이다. 부여사람이 '주몽'이 사람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장차 다른 뜻이 있을 것이다 하여 주몽을 죽이자고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고, 그를 말지기에 명하였다. '주몽'이 매양 사사로이 실험하여, 좋은말과 나쁜말이 있음을 알고,
좋은 말은 음식을 적게 주어 여위게 하고, 나쁜 말은 잘 길러 살찌우게 하였다. '부여왕'이 살찐 말은
스스로 타고, 여윈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후에 사냥을 할 때, 주몽은 활을 잘 쏘아 하나의 화살을
쏠 시간동안에 적은 화살로 많은 짐승을 잡았다. 부여의 신하들이 또한 '주몽'을 모살할려고 하자
조몽의 어미가 은밀히 이를 알고, '주몽'에게 말하길, "나라에서 장차 너를 해치려 한다. 너는 재주로
써, 마땅히 먼 곳에 가야한다." '주몽'이 이에, '오인','오위' 두사람과 함께, '부여'를 버리고, 동남쪽으
로 도망하였다. 도중에 우연히 큰물가에 이르러, 건너려고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부여'인들이
이들을 급히 쫓았다. 주몽이 물에 고하여 말하길 "나는 태양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하여 달아나는데, 병사가 쫓아와 이에 이르렀다. 어찌 건널수 있겠는가?" 그러자, 물고기와
자라가 함께 떠올라 다리를 이루었다. '주몽'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이에 흩어저, 쫓아온 기병들
은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이 '보술수'에 이르러, 우연히 세 사람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마의를 입고,
한사람은 납의를 입고, 한사람은 수한의를 입었다. '주몽'과 함께 '흘승골성'에 이르러, 거처를 정하고,
'고구려'라 불렀다. 이런 연후로 성씨를 고씨(?)라 하였다.
初, <朱蒙>在<夫餘>時, 妻懷孕, <朱蒙>逃後生一子, 字<始閭諧>. 及長, 知<朱蒙>爲國主, 卽與母亡而
歸之, 名之曰<閭達>, 委之國事. <朱蒙>死, <閭達>代立. <閭達>死, 子<如栗>代立. <如栗>死, 子<莫
來>代立, 乃征<夫餘>, <夫餘>大敗, 遂統屬焉. <莫來>子孫相傳, 至裔孫<宮>, 生而開目能視, 國人惡
之. 及長凶虐, 國以殘破. <宮>曾孫<位宮>亦生而視, 人以其似曾祖<宮>, 故名爲<位宮>, <高句麗>呼相
似爲[位]. <位宮>亦有勇力, 便弓馬. <魏><正始>中, 入寇<遼西><安平>,/$《三國魏志》卷三 《東夷傳》·
《隋書》卷八一《高麗傳》[遼西安平]作[西安平]. 按《後漢書》《郡國志》二<安平國>屬<冀州>,《志》五, <西安
平>屬<幽州><遼東郡>. <遼西郡>沒有<安平>或<西安平縣>. 這裏[遼]字衍, 或[遼]下脫[東]字.$/ 爲<幽
州>刺史< 丘儉>所破. 其玄孫<乙弗利>, <利>子<釗>, <烈帝>時與<慕容氏>相攻擊. <建國>四年,
<慕容元眞>率衆伐之, 入自<南陝>, 戰於<木底>, 大破<釗>軍, 乘勝長驅, 遂入<丸都>, <釗>單馬奔竄.
<元眞>掘<釗>父墓, 載其屍, 幷掠其母妻·珍寶·男女五萬餘口, 焚其宮室, 毁<丸都城>而還. 自後<釗>遣
使來朝, 阻隔寇 , 不能自達. <釗>後爲<百濟>所殺.
처음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아내가 아이를 베었는데, '주몽'이 도망한후 남자 아이를 낳았다.
이름을 '시여해'라 하였다. 자라, 주몽이 나라의 주인임을 알고, 곧 어미와 함께 도망하여, 이에 돌아
오니, 이름을 '여달'이라 하고, 나라의 일을 맡기었다. '주몽'이 죽고, '여달'이 대를 이어 섰다.
'여달'이 죽고, 아들 '여율'이 섰고, '여율'이 죽고, 아들 '막래'가 섰다. 이에 '부여'를 침공하여 '부여'가
크게 패하니, 속하였다. '막래'의 자손이 서로 전하여 '궁'에 이르렀다. 나면서부터 눈을 떠 능히 보니,
나라사람이 미워하였다. 자라 흉폭하고, 사나우니, 나라가 깨어졌다. '궁'의 증손 '위궁'이 또한 나면서
부터 보았다. 사람들이 증조 '궁'과 같다하여, 고로 이름을 '위궁'이라 하였다. 고구려에서 서로 같음
을 '위'라 하였다. '위궁'역시 용력이 있고, 활과 말타기를 잘하였다. '위'나라 '정치' 중에 '요서' '안평'
을 침입하였는데,[삼국위지 동이전과 수서 고려전에 '요서안평'은 '서안평'으로 적혀있다.
후한서 군국지에 '안평'은 '기주'에 속하며, 삼국지에 '서안평'은 '유주' '요동군'에 속한다. '요서군'은
'안평' 혹은 '서안평현'에 있다. 이중에 '요'자가 남았거나, 혹은 '요'자 밑에 '동'자가 빠졌다.] 유주자사
'관구검'이 깨뜨렸다. 그 현손 '을불리'와 '리'의 아들 '쇠'가 '열제'때에 함께 '모용씨'와 서로 공격하였
다. '건국' 사년 '모용원진'이 무릴 거느리고 이를 정벌하고 '남섬'에 스스로 들어와서 '목저'에서 싸워
'쇠'군을 크게 깨뜨렸다. 승승장구 하더니, '환도'에 이르르자 '쇠'가 달아나 숨었다. '원진'이 '쇠'의
아버지 묘를 파해치고, 그 주검을 싣고, 그 어미와 처와, 보물과 남녀오만여명을 함께 노략질 하고,
그 궁실을 불살라, '환도성'이 패허가 되자 돌아 왔다. 그 후로 '쇠'는 사신을 보내 알현함이 멀어지
고, 서로 막혀 원수처럼 지냈는데, 뒤에 가서 '쇠'는 '백제'에게 죽었다.
<世祖>時, <釗>曾孫<璉>始遣使者<安東>奉表貢方物, 幷請國諱. <世祖>嘉其誠款, 詔下帝系名諱於其
國, 遣員外散騎侍郞<李敖>拜<璉>爲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
句麗王>. <敖>至其所居<平壤城>, 訪其方事, 云: <遼>東南一千餘里, 東至<柵城>, 南至<小海>, 北至
舊<夫餘>, 民戶參倍於前<魏>時. 其地東西二千里, 南北一千餘里. 民皆土著, 隨山谷而居, 衣布帛及皮.
土田薄 , 蠶農不足以自供, 故其人節飮食. 其俗淫, 好歌舞, 夜則男女 聚而戱, 無貴賤之節, 然潔淨自喜.
其王好治宮室. 其官名有謁奢·太奢·大兄·小兄之號. 頭著折風, 其形如弁, 旁揷鳥羽, 貴賤有差. 立則反拱,
拜曳一脚, 行步如走. 常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其公會, 衣服皆錦繡, 金銀以爲飾. 好 踞. 食用俎 . 出
三尺馬, 云本朱蒙所乘, 馬種卽果下也. 後貢使相尋, 歲致黃金二百斤, 白銀四百斤.
'세조'때에 '쇠'의 증손 '련'이 사자 '안동'을 파견하여, 표를 받으러 방물을 받치기 시작하면서, 나라의
이름을 받기를 청하였다. '세조'가 그 정성을 아름다이 여기어, 조서를 내리어 그 나라의 이름을 내리
니 '원외산기시랑''이오'를 보내어 '련'에게 내리길 '도독요해제군사 정동대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
군개국공 고구려왕'이라 하였다. '오'가 거하는 '평양성'에 이르러 여러 가지 일을 물었다. 말하길,
'요'는 동남으로 일천여리이고, 동쪽은 '책성'에 이르고, 남쪽은 '소해'에 이르고 북족은 옛날 '부여'에
이른다. 백성은 전의 '위'날 때보다 3배이다. 그 땅은 동서로 이천리이고 남북이 일천여리 이다.
백성은 모두 땅에 정주하며, 산과 골짜기에 근거하여 거한다. 옷은 베와 비단과 가죽으로 하고, 흙과
밭이 척박하여 양잠과, 농사가 족하지 않아 사람들이 음식을 절약한다. 그 풍속이 음란하고, 노래와
춤을 좋아하며, 밤이 되면 곧 남녀가 무리지어 모여 즐기니, 귀한과 천함의 절도가 없다. 그러하여, 깨끗함을 스스로 즐기니, 왕도 그 궁실을 다스리길 좋아한다. 관명에는 '알사''태사''대형''소형'이라 불
리우는게 있다. 머리에는 절풍을 하는데 그 형태가 고깔과 같고, 두루 새의 깃털을 꽂아 귀천의
차이를 두고, 서 있을 때는 팔짱을 끼고 꿇어엎드려 절을 할 때엔 한 쪽 다리를 뻗는다. 걸음은
달리는 것과 같다. 항상 시월에 하늘에 제사를 하니 나라에서 큰 모임이다. 그들이 공회에서 입는
옷은 모두 비단에 금이나 은으로 수를 놓아서 장식을 한다. 그들은 또 걸터앉기를 좋아하고 음식에
는 그릇을 이용한다. 삼척마가 나는데, 원래 주몽이 타던 것이라고 한다. 말의 종류가 즉 과하마이다.
그 뒤로부터는 사신을 보내서 서로 찾았고, 해마다 황금 이백 근과 백은 사백 근을 바쳤다.
時<馮文通>率衆奔之, <世祖>遣散騎常侍<封撥>詔<璉>令送<文通>, <璉>上書稱當與<文通>俱奉王
化, 竟不送. <世祖>怒, 欲往討之, <樂平王><丕>等議待後擧, <世祖>乃止, 而<文通>亦尋爲<璉>所殺.
이때 '풍문통'이 무리를 거느리고 도망하니, '세조'가 산기상기'봉발'을 파견하여 '련'에게 고하길 '문통
'을 보내라 하니, '련'이 상서와 '문통'을 함께 갖추어 왕화를 받들겠다 하나, 끝내 보내기 않았다.
'세조가 노하여, 가서 이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낙평왕''비'등이 의논하여 나중에 일어나자고 하니,
'세조'가 이네 중지하였다. '문통'은 또한 '련'에게 살해를 당하였다.
後<文明太后>以<顯祖>六宮未備, <璉>令薦其女. <璉>奉表, 云女已出嫁, 求以弟女應旨, 朝廷許焉,
乃遣<安樂王><眞>·尙書<李敷>等至境送幣. <璉>惑其左右之說, 云朝廷昔與<馮氏>婚姻, 未幾而滅其
國, <殷> 鑒不遠, 宜以方便辭之. <璉>遂上書妄稱女死. 朝廷疑其矯詐, 又遣假散騎常侍<程駿>切責之,
若女審死者, 聽更選宗淑. <璉>云: [若天子恕其前愆, 謹當奉詔.] 會<顯祖>崩, 乃止.
후에 '문명태후'가 '현조'가 육궁이 아직 준비 되지 않았다 하여, '련'에게 칙서를 내려 그 여식을
받치라 하니, '련'이 칙서를 받들어, 말하길 여식은 이미 출가 하여, 구하여 동생의 여식으로 응하니,
조정에서 응하였다. 이에 '안락왕''진과 상서 '이부'를 파견하여, 그 곳에 이르러 비단을 보내었다.
그 좌우에서 말하자, '련'이 미혹되니, 말하길 조정에서 옛날에 '풍씨'와 혼인을 하였는데, 낌새도
없이 나라가 멸망당하였다. '은'나라의 본보기가 멀지 않습니다. 마땅히 방편으로써 사양해야 합니다.
'련'이 상서를 올려 계집이 죽었다고 거짓으로 칭하니, 조정에서 그 교사를 의심하여 또한 가산기상
시'정준'을 파견하여 이를 꾸짓고, 만일 여식이 죽었으면, 다시 일가 친척에서 가려뽑아 청해야 한다.
하니 '련'이 말하길 "만일 천자가 전의 잘못을 용서한다면, 삼가 마땅히 받들겠다."하였다. 때마침
'현조'가 붕하니, 이내 그치었다.
至<高祖>時, <璉>貢獻倍前, 其報賜亦稍加焉. 時<光州>於海中得<璉>所遣詣<蕭道成>使<餘奴>等送
闕, <高祖>詔責<璉>曰: [<道成>親殺其君, 竊號<江>左, 朕方欲興滅國於舊邦, 繼絶世於<劉氏>, 而卿
越境外交, 遠通簒賊, 豈是藩臣守節之義! 今不以一過掩卿舊款, 卽送還藩, 其感恕思愆, 祗承明憲, 輯寧所
部, 動靜以聞.]
'고조'때에 이르러 '련'이 2배의 공물을 받쳤다. 그 하사품도 또한 점점 더하였다. 이 때에 '광주'가
바다 가운데에서 '련'이 '소도성'에 파견하는 사자 '여노'등을 궁궐에 보내왔다. '고조'가 조서를 내려
'련'을 책망하여 말하길, " '도성'이 친히 그 임금을 죽이고 왕의 이름을 도둑질해서 '강'의 왼쪽에
있으니, 짐이 바야흐로 군사를 일으켜 그 나라를 멸하고, 끊어졌던 대를 '유씨'에게 이어 주려
했는데, 경은 국경을 넘어 외교를 해서 멀리 찬역하는 적들과 통하니 이 어찌 번신의 절조를 지키는
의리란 말인가. 그러나 이제 이 한가지 과실로 해서 경의 지난날의 정성을 가려 버리고 싶지 않기로
곧 돌려 보내 주는 것이니, 경은 여기에 감동하여 그 허물을 뉘우치고 다만 조정의 밝은 법에 순종
하여 편안히 맡은 바 땅을 다스리고 그 곳의 형편을 알려 주기 바란다] 했다.
<太和>十五年, <璉>死, 年百餘歲. <高祖>擧哀於東郊, 遣謁者僕射<李安上>策贈車騎大將軍·太傅·<遼
東郡開國公>·<高句麗王>, 諡曰<康>. 又遣大鴻 拜<璉>孫<雲>使持節·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
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賜衣冠服物車旗之飾, 又詔<雲>遣世子入朝, 令及郊丘之禮.
<雲>上書辭疾, 惟遣其從叔<升于>隨使詣闕, 嚴責之. 自此歲常貢獻. <正始>中, <世宗>於東堂引見其使
<芮悉弗>,/$諸本[宗]作[祖],《北史》卷九四《高麗傳》作[宣武]. 按上稱[正始]年號, 自當作[世宗], 北史例稱帝
號. 今改正.$/ <悉弗>進曰: [<高麗>係誠天極, 累葉純誠, 地産土毛, 無愆王貢. 但黃金出自<夫餘>, 珂則
<涉羅>所産. 今<夫餘>爲<勿吉>所逐, <涉羅>爲<百濟>所幷, 國王臣<雲>惟繼絶之義, 悉遷于境內. 二
品所以不登王府, 實兩賊是爲.] <世宗>曰: [<高麗> 世荷上將, 專制海外, 九夷 虜, 實得征之. 甁 ,
誰之咎也? 昔方物之愆, 責在連率. 卿宜宣朕旨於卿主, 務盡威懷之略, 披害 , 輯寧東裔, 使二邑還復舊
墟, 土毛無失常貢也.]
'태화'십오년 '련'이 죽으니, 백여세였다. '고조'가 동쪽 성밖에서 슬피 울고, 알자복사 '이안상'을 파견
하여 '거기대장군 태부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을 더하고, 시호를 '강'이라 하였다. 또한 '대홍려'를
파견하여 '련'의 손자 '운'에게 '사시절도독 발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통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을 내리고, 의관과 복물, 거기 등의 장식을 하사했다. 또한 조서를 내려 '운'에게 세자를
입조하는데 보내어, 교구의예를 치루라고 하였다. '운'이 상서하여 병을 핑계되고, 그 종숙 '승우'를
사신과 함께하여 보내어, 궁궐에 이르자, 엄하게 이를 꾸짓었다. 스스로 이해부터 늘상 조공을 하였
다. '정치'중에 '세종'이 동당에서 그 사신 '예실불'을 불로 보았다.[다른 여러본에는 '종'이 '조'로 적혀
있다. 북사에는 '선무'라고 적혀 있으나 '정치'란 호는 '세종'이 지은 것이니 북사는 그 제호를 바꾸어
야 한다.] '실불'이 나아가 말하길 " '고려'는 멀리 하늘 끝에 걸리어 있어 해마다 순수한 정성을 바쳐
왔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나는 물건들은 바칠 것이 없아옵고, 다만 황금이 '부여'에서 나고,
옥이 '섭라'에서 나옵니다. 이제 '부여'는 '물길'을 섬기고, '섭라'는 '백제'에 병합되니, 나라의 왕이며
신하인 '운'이 끊어진 의를 이를려고 생각하여, 백성들을 모두 국경 안으로 옮겼아오니, 두 물건이
왕부에 오르지 못하는 것은 실상 이 두 적들 때문입니다." 했다. '세종'이 말하길, " '고려'는 대대로
상장직을 떠 맡아,바다밖을 제도 하고, 구이를 사로잡고, 실로 이를 정벌하여야 할 것인데, 이제 모든
부끄러움을 끼치고 있으니 이는 누구의 허물이겠는가?. 옛날에 공물을 바치지 않은 허물도 그 책임
이 그대들에게 있는 것이니 경은 마땅히 짐의 뜻을 경의 임금에게 전하여 짐의 생각하는 바의 대략
을 알도록 힘써, 무리를 해치는 자들을 잘라 없애고 동쪽 백성들을 편안히 하여 두 고을로 하여금
옛터를 회복하도록 하고 토산물도 빠짐없이 바쳐 오도록 하라] 했다.
<神龜>中, <雲>死, <靈太后>爲擧哀於東堂, 遣使策贈車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句
麗王>. 又拜其世子<安>爲安東將軍· 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正光>初, <光州>又
於海中執得<蕭衍>所授<安>寧東將軍衣冠劍佩, 及使人<江法盛>等, 送於京師. <安>死, 子<延>立. <出
帝>初, 詔加<延>使持節·散騎常侍·車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賜衣冠服物
車旗之飾. <天平>中, 詔加<延>侍中·驃騎大將軍, 餘悉如故. <延>死, 子<成>立. 訖於<武定>末, 其貢使
無歲不至.
'신귀'주에 운이 죽자, '영태후'가 동당에서 슬퍼하였다. 사신을 파견하여, '거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을 하사하고, 또한 세자 '안'에게 '안동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을 내렸다. '정광' 초에 '광주'가 또한 '소연'이 '안'에게 '영동장군의 옷, 관, 검, 패를 하사
하는 것을 바다 가운데에서 얻었다. 또한 사신 '강법성'등을 서울로 보내었다. '안'이 죽고 아들 '연'이
섰다. '출제' 초에 '연'에게 조서를 내려 더하길 '사지절 산기상시 거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
국공 고구려왕'이라 하고 의관과 복물과 거기를 하사하였다. '태평'중에 조서를 내려 '연'에게
'시중 표기대장군'을 더하고 나머지는 전과 같다. '연'이 죽고, 아들 '성'이 서고, '무정'말에 이르기
까지 공물과 사신이 끝이는 해가 없었다.
百濟國 (백제국)
<百濟國>, 其先出自<夫餘>. 其國北去<高句麗>千餘里, 處<小海>之南. 其民土著, 地多下濕, 率皆山居.
有五穀, 其衣服飮食與<高句麗>同.
'백제국'은 스스로 '부여'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 나라는 북쪽으로 '고구려'가 천여리에 있고, '소해'의
남쪽에 거한다. 그 백성은 토착하고, 땅은 습기가 많고, 산에서 거한다. 오곡이 있으며, 의복과 음식
은 '고구려'와 같다.
<延興>二年, 其王<餘慶>始遣使上表曰: [臣建國東極, 豺狼隔路, 雖世承靈化, 莫由奉藩, 瞻望雲闕, 馳情
罔極. 風微應, 伏惟皇帝陛下協和天休, 不勝係仰之情, 謹遣私署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 長史<餘
禮>, 龍 將軍·<帶方>太守·司馬<張茂>等投舫波阻, 搜徑玄津, 託命自然之運, 遣進萬一之誠. 冀神祇垂
感, 皇靈洪覆, 克達天庭, 宣暢臣志, 雖旦聞夕沒, 永無餘恨.] 又云: [臣與<高句麗>源出<夫餘>, 先世之時,
篤崇舊款. 其祖<釗>輕廢隣好, 親率士衆, 陵踐臣境. 臣祖<須>整旅電邁, 應機馳擊, 矢石暫交, 梟斬釗首.
自爾已來, 莫敢南顧. 自<馮氏>數終, 餘燼奔竄, 醜類漸盛, 遂見陵逼, 構怨連禍, 三十餘載, 財 力竭, 轉
自孱 . 若天慈曲矜, 遠及無外, 速遣一將, 來救臣國, 當奉送鄙女, 執掃後宮, 幷遣子弟, 牧 外廐. 尺壤
匹夫不敢自有.]
'연흥'2년에 그왕 '여경'이 처음 사신을 보내와 표를 올려 말하길 "신은 동쪽 끝에서 나라를 세웠으
나, 범과 이리가 길을 막고 있어, 비록 대대로 신령스러운 감화를 입기는 하오나 이것을 받들어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높은 대궐을 우러러 바라보니 망극한 마음만 달려갑니다. 서늘한 바람이
조금씩 불어오는데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황제폐하께서 성체 강녕하시온지 우러러 생각하는 정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이제 삼가 사사로이 관군장군 부마도위 '불사후' 장사 '여례'와 용양장군 '대방'
태수 사마 '장무' 등을 보내옵는 바 배들 타고 가다가 물결에 막혀 현진에서 길을 찾아 그 목숨을
자연의 운수에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리하여 만 분의 일의 정성을 바치고자 하는 바이오니,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굽어살피시어 넓으신 신령스러움을 길이 펴주시어 이들로 하여금 조정에
도달하여 신의 뜻을 펴게 해주시오면 비록 이 소식을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는대도 남는 한이 없겠
나이다.' 했다. 또 그 글에 말하기를, '신이 '고구려'와는 원래 그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습니다.
조상 때에도 간곡하신 정의를 도탑게 입었는데 그들의 조상 '쇠'가 경솔히 이웃 나라로서의 우의를
폐하고 친히 군사의 무리를 데리고 신의 국경을 침입해 왔습니다. 이 때 신의 할아비 '수'가 군사를
정리하여 제빨리 이를 쳐서 잠시 동안 전쟁이 계속되어 '쇠'의 머리를 베었습니다. 그런 후로 감히
그들은 남쪽을 내려다보지 못하더니 '풍씨'의 운수가 마치자 남은 사람들은 도망해 숨고 추한 무리
들이 점점 성해져서 드디어 신의 나라를 침입하게 되어 원수를 맺게 되고 화가 연달아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지 삼십여 년이 되오니 지물은 없어지고 힘은 다하여 드디어는 스스로 밟아 죽게
되었습니다. 이제 만일 폐하께서 사랑하시는 마음이 곡진하시어 먼 곳이나 밖의 나라까지도 미치신
다면 속히 한 장수를 보내어 와서 신의 나라를 구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하시오면 마땅히 신의 딸을
받들어 보내어 후궁에서 폐하를 모시게 할 것이옵고, 또 자식과 아우를 보내어 소와 말을 치게 할
것이오며, 한 자 되는 땅이나 백성 한 사람도 감히 신이 맘대로 갖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又云: [今<璉>有罪, 國自魚肉, 大臣强族, 戮殺無已, 罪盈惡積, 民庶崩離. 是滅亡之期, 假手之秋也. 且
<馮>族士馬, 有鳥畜之戀; <樂浪>諸郡, 懷首丘之心. 天威一擧, 有征無戰. 臣雖不敏, 志效畢力, 當率所
統, 承風響應. 且<高麗>不義, 逆詐非一, 外慕< >藩卑之辭, 內懷兇禍豕突之行. 或南通<劉氏>, 或北
約< >, 共相脣齒, 謀陵王略. 昔<唐堯>至聖, 致罰<丹水>; <孟常>稱仁, 不捨塗 . 涓流之水, 宜早壅
塞, 今若不取, 將貽後悔. 去庚辰年後, 臣西界<小石山>北國海中見屍十餘, 幷得衣器鞍勒, 視之非<高麗>
之物, 後聞乃是王人來降臣國. 長蛇隔路, 以 于海, 雖未委當, 深懷憤 . 昔<宋>戮<申舟>, <楚莊>徒
跣; 撮放鳩, <信陵>不食. 克敵建名, 美隆無已. 夫以區區偏鄙, 猶慕萬代之信, 況陛下合氣天地, 勢傾山
海, 豈令小竪, 跨塞天逵. 今上所得鞍一, 以爲實驗.]
또 말하기를, '이제 '연'이 죄가 있어 그 나라가 저 스스로 어육이 되어 대신들이 제 종족들을 못
살게 굴어 죽이는 일이 그치지 않사오니 죄가 가득 차고 악이 쌓여서 백성들이 거의 무너지고 떠나
가게 되었아오니, 이는 바로 그들이 멸망할 기회이옵고 손을 쓸 때인 것입니다. 또 '풍씨'의 족속들은
사람이나 말들이 본래 살던 땅을 그리워하여 '낙랑'의 모든 고을들은 고향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하오니 폐하께서 한 번 위엄을 떨치시어 한 번 군사를 일으키시면 다만 정벌이 있을 뿐이요,
싸움은 없을 것입니다. 신은 또 비록 불민하오나 뜻을 모으고 힘을 다하여 마땅히 거느린 군사들을
이끌고 바람을 쫓아 거기에 응할 것입니다. 또 '고려'는 의롭지 못하여 반역하고 간사한 일이 한
가지만이 아니어서, 밖으로는 '외효'의 번국을 낮게 여긴 말들을 사모하고 안으로는 흉화의 산돼지
처럼 달려드는 행동을 생각하여, 혹 남쪽으로는 '유씨'와 통하고 혹 북쪽으로는 '유유'와 약속하여
서로 순치 사이가 되어 천자의 지경을 침략할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옛날 '당요' 같은 지극한 성인
으로서도 '단수'를 벌 주기에 이르렀고, '맹상'이 어질다고 일컬었으나 도리와 연류의 물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오니 마땅히 이것을 막으시옵소서. 지금 만일 이것을 취하지 않으면 장차 후회해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지난 경진년 후에 신이 서쪽 국경 '소석산' 북쪽 나라 바다 속에서 시체 십여
개를 보고 옷과 그릇과 말안장과 굴레 등속을 얻어 왔아온데, 이것을 보니 '고려'의 물건은 아니었습
니다. 뒤에 듣자오니 이는 왕인이 와서 신의 나라에 항복했는데, 긴 뱀이 길을 가로막아서 이 물건
들을 바다에 던졌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비록 이치에 합당하지는 않사오나 깊이 분한 마음이 생깁
니다. 옛날에 '송'나라가 '신주'를 죽이자, '초장'왕은 맨 발 차림으로 송나라를 쳤고, 새매가 비둘기를
움키는 것을 보고 '신릉'군은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모두 적을 쳐서 이름을 세워 아름다운
행동을 한없이 한 사람들의 일입니다. 대체로 이들은 구차스런 변방 나라로서도 오히려 만대를 내려
오는 믿음을 사모한 것이온데, 하물며 폐하께서는 기운이 천지에 합하시고 세력이 산과 바다를 기울
이시는 터에 어찌 저같은 조무래기들로 하여금 폐하의 땅을 밟고 다니게 하시나이까. 이제 신이
얻은 말안장을 바치오니 한번 시험삼아 살피시옵소서.' 했다.
<顯祖>以其僻遠, 冒險朝獻, 禮遇優厚, 遣使者<邵安>與其使俱還. 詔曰: [得表聞之, 無恙甚善. 卿在東隅,
處五服之外, 不遠山海, 歸誠魏闕, 欣嘉至意, 用 于懷. 朕承萬世之業, 君臨四海, 統御 生. 今宇內淸一,
八表歸義, 襁負而至者不可稱數, 風俗之和, 士馬之盛, 皆<餘禮>等親所聞見. 卿與<高麗>不穆, 屢致陵犯,
苟能順義, 守之以仁, 亦何憂於寇 也. 前所遣使, 浮海以撫荒外之國, 從來積年, 往而不返, 存亡達否, 未
能審悉. 卿所送鞍, 比校舊乘, 非中國之物. 不可以疑似之事, 以生必然之過. 經略權要, 已具別旨.]
현조는 그 나라가 몹시 궁벽되고 먼 데도 험한 것을 무릅쓰고 조공한 것을 생각하여 예의로 대접하
고 후하게 대한 다음 사신 '소안'을 보내서 그쪽에서 온 사신과 함께 돌아가게 했다. 이 때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경의 표문을 보아 아무 일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몹시 기쁜 일이다. 경은 동쪽
모퉁이에 있고 오복 밖에 거처하면서 산과 바다를 멀게 여기지 않고 그 정성을 위나라 대궐로 바치
니 기쁘게 여기고 아름답게 생각하여 마음에 깊이 간직하려 한다. 짐은 만대를 내려오는 왕업을
계승하여 사해에 군림하여 모든 중생들을 통솔하고 있다. 이제 천하는 한결같이 맑고 깨끗하며,
온 백성들이 의리 있는 데로 돌아와서 어린이를 엎고 오는 자를 헤아릴 수가 없다. 풍속의 화평한
것과 군사와 병기의 융성한 것은 이번에 온 여례 등이 친히 본 바와 같다. 경이 고려와 화목하지
못하여 여러 번 침범하는 일이 생겼다 하니 진실로 의리에 순종하고 어진 것을 지킨다면 또한 원수
라고 해서 무엇이 근심되겠는가. 전에 사신으로 '부례'를 보내 먼 외방의 나라를 무마하게 했더니,
간 지 여러 해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아서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도착했는지 아닌지를 알 수가
없다. 경이 보낸 말안장은 옛날 여기서 쓰던 것과 비교해 보니, 이것은 중국 물건이 아닌즉 이를
의심할 필요가 없다. 아울러 따로 뜻을 전하는 바이다 했다.
又詔曰:[知<高麗>阻强, 侵 卿土, 修先君之舊怨, 棄息民之大德, 兵交累載, 難結荒邊. 使兼<申胥>之誠,
國有<楚><越>之急, 乃應展義扶微, 乘機電擧. 但以<高麗>稱藩先朝, 供職日久, 於彼雖有自昔之 , 於
國未有犯令之愆. 卿使命始通, 便求致伐, 尋討事會, 理亦未周. 故往年遣<禮>等至<平壤>, 欲驗其由狀.
然<高麗>奏請頻煩, 辭理俱詣, 行人不能抑其請, 司法無以成其責, 故聽其所啓, 詔<禮>等還. 若今復違旨,
則過咎益露, 後雖自陳, 無所逃罪, 然後興師討之, 於義爲得. 九夷之國, 世居海外, 道暢則奉藩, 惠 則保
境, 故羈 著於前典, 貢曠於歲時. 卿備陳强弱之形, 具列往代之迹, 俗殊事異, 擬 乖衷, 洪規大略, 其
致猶在. 今中夏平一, 宇內無虞, 每欲陵威東極, 懸旌域表, 拯荒黎於偏方, 舒皇風於遠服. 良由<高麗>卽
敍, 未及卜征. 今若不從詔旨, 則卿之來謀, 載協朕意, 元戎啓行, 將不云遠. 便可豫率同興, 具以待事, 時
遣報使, 速究彼情. 師擧之日, 卿爲鄕導之首, 大捷之後, 又受元功之賞, 不亦善乎. 所獻錦布海物雖不悉達,
明卿至心. 今賜雜物如別.] 又詔<璉>護送<安>等.
또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들어 알건대 '고려'가 험하고 강성하여 경의 땅을 침입해 와서 선군의
묵은 원한을 펴고 백성으로서의 큰 덕을 버리려 하여 여러 해 동안 군사를 내어 서로 싸워 변방
사정을 매듭 지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사신은 '신서'의 정성을 겸했고, 나라에는 '초'나라와
'월'나라의 급한 사정이 있으니 이에 의리를 펴 적은 자를 돕기 위하여 기회를 타서 번개같이 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만 '고려'는 선조 때 번신이라고 일컬어 직책을 다하였으니, 저들이 비록 옛날부
터 흠을 일으키긴 했지만 그 나라가 법령을 범한 허물은 없는 터이다. 경이 이제 비로소 사신을
통해 와서 그들을 치기를 요구하였지만, 깊이 일의 경로를 생각해 볼 때 이치가 역시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그런 때문에 지난해에 '례' 등을 '평양'으로 보내서 실정을 살펴오도록 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고려'가 글을 올려 자주 청하여 그 말뜻이 이치에 합당하므로 여기에서는 그들의 청하는
것을 억누를 수가 없고, 법을 맡은 관리도 그들의 일을 죄로 다스릴 수 없었다. 그런 때문에 그들의
아뢰는 것을 들어 주어 '례'에게 조서를 내려 돌아오게 했었다. 그러니 이제 다시 내 뜻을 어긴다면
그 죄과가 더욱 드러날 것으로 뒤에 가서 아무리 변명한대도 그 죄를 도망할 수가 없을 것이니,
그렇게 된 뒤에 군사를 일으켜 치는 것이 의리에 합당할 것이다. 구이의 나라가 대대로 바다 밖에
살아서 도가 창달하면 번신의 도리를 지키고 은혜를 베풀면 국경을 보존해 왔다. 그런 때문에 견제
하기를 전대의 법칙보다도 더해 왔고, 고시 바치는 것을 해마다 걸러 왔다. 그런데도 경은 강하고
약한 형상을 갖추어 바쳤고, 지난 대의 자취를 갖추어 베풀어서 풍속이 다르고 일도 각각인데 간곡
한 충성을 베풀어 그 넓은 규모와 큰 계략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제는 중국이 하나로 평정되어
나라 안이 근심이 없다. 그래서 매양 동쪽끝에 위엄을 펴고자 하여 깃대를 국경지방에 걸어 편벽된
지방백성들까지 구제하고 천자의 풍도를 먼 지방에까지 펴고자 한다. 그런데 고려의 청이 있기로
아직 정벌을 하지 않고 있는 터이다. 이제 만일 짐의 조서의 뜻을 쫓지 않는다면 경이 전해 온 계교
가 짐의 뜻에 부합되는 바이니 군사를 일으켜 멀다 하지 않고 거느리고 나갈 것이니 일을 구비하여
기다리도록 하고, 때때로 사신을 보내서 보고하여 속히 저들의 정경을 알아보도록 하라. 군사를
일으키는 날에는 경이 마땅히 길을 인도하는 앞장을 설 것이요, 크게 승리한 뒤에는 또 원훈의 상을
받을 것이니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바쳐 온 비단과 포목과 바다에서 난 물건들은 비록 여기에
일일이 도달하지 않았지만, 경의 지극한 마음을 분명히 알겠기로 이제 여러 물건들을 별지와 같이
하는 바이다' 했다. 또 '연'에게 조서를 내려 '소안' 등을 호송해 보내라 했다.
<安>等至<高句麗>, <璉>稱昔與<餘慶>有 , 不令東過, <安> 等於是皆還. 乃下詔切責之. 五年, 使
<安>等從<東萊>浮海, 賜<餘慶>璽書, 褒其誠節. <安>等至海濱, 遇風飄蕩, 竟不達而還.
'안'등이 '고구려'에 이르자, '련'이 옛날 '여경'에게 원수가 있어 동쪽으로 지나가게 하지 못하게 하여
'안'등이 이에 다시 돌아 왔다. 이에 조서를 내려 책망 하였다. 오년 사신 '안'등이 '동래'를 거쳐 바다
로 나아가 오니, '여경'이 새서(옥새가 찍힌 문서)를 하사 하며, 그 성정을 칭찬하였다. '안'등이 바닷
가에 이르러 갑자기 풍랑을 만나니, 끝내 돌아 오지 못하였다.
勿吉國 (물길국)
<勿吉國>, 在<高句麗>北, 舊<肅愼國>也. 邑落各自有長, 不相總一. 其人勁悍, 於東夷最强. 言語獨異.
常輕<豆莫婁>等國, 諸國亦患之. 去<洛>五千里. 自<和龍>北二百餘里有<善玉山>, 山北行十三日至<祁
黎山>, 又北行七日至<如洛 水>, 水廣里餘, 又北行十五日至<太魯水>, 又東北行十八日到其國. 國有大
水, 闊三里餘, 名<速末水>. 其地下濕, 築城穴居, 屋形似塚, 開口於上, 以梯出入. 其國無牛, 有車馬, 佃
則偶耕, 車則步推. 有粟及麥 , 菜則有葵. 水氣 凝, 鹽生樹上, 亦有鹽池. 多猪無羊. 嚼米 酒, 飮能至
醉. 婦人則布裙, 男子猪犬皮 . 初婚之夕, 男就女家執女乳而罷, 便以爲定, 仍爲夫婦. 俗以人溺洗手面.
頭揷虎豹尾. 善射獵, 弓長三尺, 箭長尺二寸, 以石爲鏃. 其父母春夏死, 立埋之, 上作屋, 不令雨濕; 若
秋冬, 以其屍捕貂, 貂食其肉, 多得之. 常七八月造毒藥傅箭鏃, 射禽獸, 中者便死, 煮藥毒氣亦能殺人. 國
南有<徒太山>, <魏>言[太白], 有虎豹 狼害人, 人不得山上 , 行逕山者, 皆以物盛.
'물길국'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다. 옛날의 '숙신국'이다. 읍락에는 각각 스스로 우두머리가 있어 서로
하나로 합쳐지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사납고 포악하니, 동이에서도 가장 강하다. 언어는 혼자서
다르다. 항상 '두막루'등의 나라를 가벼이 여기니, 여러 나라들이 또한 근심하였다. '낙양'에서 오천리
를 간다. '화룡'에서 북쪽으로 이백여리에 '선옥산'이 있고, 산에서 북쪽으로 십삼일을 가면, '기려산'
에 이른다. 또 북쪽으로 칠일을 가면, '여낙괴수'에 이르는데, 물이 넓기가 한리에 이른다. 또 북쪽으
로 십오일을 가면 '태노수'에 이르고, 동북쪽으로 십팔일이면 그 나라에 이른다. 나라에 큰 강이 있으
니, 그 넓기가 삼리라 되는데, 이름하여, '속말수'라 한다.그땅은 아래가 습하며, 성을 쌓고, 구멍을
파고 거하는데, 집의 형태가 무덤과 같다. 문이 위로 나 있으며, 사다리로써 출입을 한다. 그 나라는
소가 없고, 수레와 말이 있다. 밭을 갈때에는 사람이 곧 갈고, 수레을 사람이 끈다. 조와 보리와 기장
이 있고, 채소는 푸성귀만 있다. 물에 소금기가 응결하니, 나무위엣 소금이 산출되고, 또한 소금기가
있는 못도 있다. 돼지는 많으나 양은 없다. 쌀을 침식하여, 술을 만들고, 능히 이를 잘 마셔 취할때까
지 이른다. 여자들은 베로써 치마를 만들어 입고, 남자들은 돼지나 개 가죽을 입는다. 처음 결혼하는
날 밤에 남자가 여자의 집에 이르러, 여자의 가슴을 만지는 것으로 그치는데, 이로써 정해지는 것으
로, 이로써 남편과 부인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풍속으로 사람의 오줌으로 손과 얼굴을 씻고,
머리에는 호랑이나 표범의 꼬리를 달고, 활과 사냥에 능하다. 활은 길이가 삼척이요, 화살은 일척
이촌이며, 돌로써 화살촉을 만든다. 그 부모가 봄이나 여름에 죽으면, 세워서 이를 묻고, 무덤위에
집을 지어, 비에 젓지 않도록 한다. 만일 가을 겨울에 죽으면, 그 주검으로써 담비를 사로잡는데,
담비가 그 고기를 먹어, 많이 얻을 수 있다. 항상 칠팔월이면 독약을 만들어 화살촉에 발라, 동물을
사냥하는데, 보통은 죽는데, 독약을 익히면, 능히 사람도 죽을 수 있다. 나라의 남쪽에 '도태산'이
있는데, 위나라 말로 '태백'이라 한다. 호랑이와 표범, 곰과 이리가 사람을 해치어, 사람은 산에서
소변과 대변을 하지 못하고, 좁은 산길을 가는 자는, 모두 물건으로써 감싼다.
去<延興>中, 遣使<乙力支>朝獻. <太和>初, 又貢馬五百匹. <乙力支>稱: 初發其國, 乘船 <難河>西
上, 至<太 河>, 船於水, 南出陸行, 渡<洛孤水>, 從<契丹>西界達<和龍>. 自云其國先破<高句麗>十
落, 密共<百濟>謀從水道幷力取<高句麗>, 遣<乙力支>奉使大國, 請其可否. 詔 三國同是藩附, 宜共和
順, 勿相侵擾. <乙力支>乃還. 從其來道, 取得本船, 汎達其國. 九年, 復遣使<侯尼支>朝獻. 明年復入貢.
'연흥' 중에 '을력지'를 보내어 조공을 받쳤다. '태화'초에 또 말 오백필을 조공하였다. '을력지'가 이르
기를, 처음에 나라에서 출발하였는데, 배를 타고 '난하' 서쪽 위로 거슬러 올라가, '태니하'에 이르러,
배가 물속으로 가라 앉아 버렸다. 남쪽 육지로 나와서 가다, '낙고수'를 건너고, '거란'의 서쪽 경계에
나아가다, '화룡'에 이르렀습니다. 스스로 말하길 나라에서 먼저 고구려의 열 개의 부락을 깨뜨리고,
비밀히, 백제와 함께 계교를 세워 수로로 해서 힘을 합하여 고구려를 취하자고 했다. '을력지'를 보내
어 대국의 뜻을 쫓고자 한다. 하고 가부를 청하였다. 조서를 내리기를 삼국은 모두 변방에 있으니,
마땅히 함께 하평하고, 순해야 한다. 서로 침략하고, 어지럽히지 말아라. '을력지'가 이에 돌아갔다.
그 왔던 길을 좇아 나아가다, 배를 얻어 타서, 그 나라에 이르렀다. 9년 다시 '후니지'를 파견하여
조공을 받쳤다. 이듬해 다시 입공하였다.
其傍有<大莫盧國>·<覆鍾國>·<莫多回國>·<庫婁國>·<素和國>·<具弗伏國>·/$按:卷六《顯祖紀》<皇興>
元年二月· 二年四月兩見此部, 都作[具伏弗]. 下《契丹傳》有[伏弗郁部], 上脫[具]字, 又[郁][部]二字倒誤,
但也可證這裏[弗伏]當作[伏弗].$/<匹黎 國>·<拔大何國>·/$按:下《契丹傳》有[何大何部], 卷六《顯祖紀》
<皇興>二年四月作[阿大何]. 這裏[拔]字當是[何]或[阿]之訛.$/<郁羽陵國>·<庫伏眞國>·<魯婁國>·<羽眞侯
國>, 前後各遣使朝獻.
그 곁에 '대막노국', '복종국', '막다회국', '고루국', '소화국', '구불복국',[권6- 현조기에 '황흥'원년 이월
이년 사월과 비교하여 보면, '구복불'로 적혀 있다. 거란전에는 '복불욱부'가 있는데, '구'자가 빠진
것이다. 또한 '욱''부' 두자는 잘 못된 것이다. '복불'이 맞다는 증거는 가히 옳지 않으니, '복불'로
고침이 마땅하다.] '필려이국', '발대하국',[거란전에는 '하대하부'가 있고, 권6- 현조기 황흥 2년 사월에
는 '아대하'로 적혀 있다. '발'자는 맞는것이니, 마땅히 '하'자나 '아'자가 잘못이다.] '욱우릉국', '고복진
국', '노루국', '우진후국' 이 있는데, 전후해서 각각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받쳤다.
<太和>十二年, <勿吉> 復遣使貢 矢方物於京師. 十七年, 又遣使人<婆非>等五百餘人朝獻. <景明>四
年, 復遣使<俟力歸>等朝貢. 自此 于<正光>, 貢使相尋. 爾後, 中國紛擾, 頗或不至. <興和>二年六月,
遣使<石久云>等貢方物, 至於<武定>不絶.
'태화' 십이년 물길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싸리나무 화살과 방물을 조공하였다. 십칠년, 또 사신
'파비'등 오백여인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경명'사년 다시 '사력귀'등이 와서 조공하였다. 스스로 이곳
에 이르르기를 '정광'년까지 사신이 서로 왕래했으나, 그 뒤로는 중국이 모두 시끄러워져서 간혹
오지않는 때도 있었다. '흥화' 이년 유월에 사신 '석구운' 등을 보내서 방물을 바치고 이로부터 '무정'
때에 이르기까지 끊어지지 않았다.
失韋國 (실위국)
<失韋國>, 在<勿吉>北千里, 去<洛>六千里. 路出<和龍>北千餘里, 入<契丹國>, 又北行十日至< 水>,
又北行三日有<蓋水>, 又北行三日有<犢了山>, 其山高大, 周回三百餘里, 又北行三日有大水名<屈利>,
又北行三日至<刃水>, 又北行五日到其國. 有大水從北而來, 廣四里餘, 名< 水>. 國土下濕. 語與<庫莫
奚>·<契丹>·<豆莫婁國>同. 頗有粟麥及 , 唯食猪魚, 養牛馬, 俗又無羊. 夏則城居, 冬逐水草. 亦多貂皮.
丈夫索髮. 用角弓, 其箭尤長. 女婦束髮, 作叉手 . 其國少竊盜, 盜一徵三, 殺人者責馬三百匹. 男女悉衣
白鹿皮 袴. 有麴釀酒. 俗愛赤珠, 爲婦人飾, 穿 於頸, 以多爲貴, 女不得此, 乃至不嫁. 父母死, 男女衆
哭三年, 屍則置於林樹之上. <武定>二年四月, 始遣使<張焉豆伐>等獻其方物, <武定>末, 貢使相尋.
'실위국'은 '물길'북쪽 천리에 있다. '낙양'에서 육천리를 간다. 길로 '화룡'에서 북쪽으로 천여리를
가면, '거란국'에 들어간다. 또 북쪽으로 십여일을 가면 '철수'에 이르고, 또 북쪽으로 삼일을 가면
'개수'가 있고, 또 북쪽으로 삼일을 가면 '독료산'이 있다. 이 산은 높고 크다. 둘레가 삼백여리나
된다. 또 북쪽으로 삼일을 가면 큰 물이 있는데 이름하여 '굴리'이다. 북쪽으로 삼일을 더 가면,
인수'이고, 북쪽으로 오일이면 그나라에 이르른다. 큰 물이 있어 북쪽에서 들어오는데, 넓이가 사리나
된다. 이름하여, '내수'라 한다. 나라의 흙은 습하며 언어는 '고막해', '거란', '두막루국'과 같다.
두루 조와 보리와 기장이 있고, 오직 돼지 고기만을 먹으며, 소와 말을 기르며, 풍속이 또한 양이
없다. 여름에는 성에서 거하며, 겨울에는 물과 풀을 따라 간다. 역시 담비가죽이 많이 있고 장부는
머리를 꼰다. 각궁을 사용하며, 화살은 그 길이가 특히 길다. 여자는 머리를 동여매어, 엇갈리게 하여
상투를 튼다. 나라에 도국이 적어 하나를 훔치면, 세배로 갚는다. 사람을 죽인자는 말 3백필로 갚고,
남녀는 모두 흰사슴가죽으로 저고리와 바지를 입는다. 누륵을 빚어 술을 만들고, 붉은 구슬을 좋아
하여, 부인은 이것에 구멍을 뚫어 목에 걸어서 꾸미는데, 많은 것이 귀한 것이다. 여자는 이를 하지
못하는데, 시집가지 않은 것이다. 부모가 죽으면, 남녀가 모여 삼년을 울는데, 시체는 산속 나무위에
놓아둔다. '무정'이년사월 '장언두벌'등이 방물을 바치며 사자를 파견하기 시작하고, '무정'말에
이르러 서로 사자를 파견하여 조공하기 시작했다.
豆莫婁國 (두막루국)
<豆莫婁國>, 在<勿吉國>北千里, 去洛六千里, 舊<北夫餘>也. 在<失韋>之東, 東至於海, 方二千里. 其
人土著, 有宮室倉庫. 多山陵廣澤, 於東夷之域最爲平敞. 地宜五穀, 不生五果. 其人長大, 性强勇, 謹厚,
不寇抄. 其君長皆以六畜名官, 邑落有豪帥. 飮食亦用俎豆. 有麻布, 衣制類<高麗>而幅大, 其國大人, 以
金銀飾之. 用刑嚴急, 殺人者死, 沒其家人爲奴婢. 俗淫, 尤惡妬婦, 妬者殺之, 尸其國南山上至腐. 女家欲
得, 輸牛馬乃與之. 或言本<穢貊>之地也.
'두막루국'은 '물길국' 북쪽 천리에 있다. '낙양'에서 육천리를 가고, 옛날 '북부여'이다. '실위'의 동쪽
에 있으며 동쪽은 바다에 이른다. 사방 이천이며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궁실과 창고가 있다. 산과
언덕, 넓은 연못이 많으며, 동이의 지역중에서 가장 평평하다. 땅은 오곡에 마땅하나, 오과는 나지
않는다. 사람은 크고, 성질은 강하고 용감며, 삼가고, 후하니 도둑이 없다. 그 군장은 모두 여섯 가축
의 이름으로 관직을 하고, 읍락에는 호걸과 장수가 있다. 음식을 함에 조두그릇을 사용하고, 마포가
있으며, 옷은 '고려'처럼 그 폭이 넓게 마름질한다. 나라의 높은 사람은 금은으로써 치장을 한다.
형벌은 엄하고, 급히 처리하는데, 살인한자는 죽이고, 그 가족들은 노비로 삼는다. 풍속은 음란하지
만, 특히 투기하는 부인은 미워하여, 투기하는 자는 죽이는데, 시체를 그 나라 남쪽 산 위에 버리는
데, 여자 집에서 이를 얻을 수가 없다. 소나 말을 받치면, 이를 얻을 수가 있다. 혹은 말하길 본래
근본은 '예맥'의 땅이라 한다.
地豆于國 (지두우국)
<地豆于國>,/$《北史》卷九四[于]作[干]. 按本書他處也多作[地豆于], 間亦作[干],《北史》則多作[干], 間作
[于], 今仍之.$/ 在<失韋>西千餘里. 多牛羊, 出名馬, 皮爲衣服, 無五穀, 惟食肉酪. <延興>二年八月, 遣
使朝貢, 至于<太和>六年, 貢使不絶. 十四年, 頻來犯塞, <高祖>詔征西大將軍·<陽平王>< >擊走之. 自
後時朝京師, <武定>末, 貢使不絶.
'지두우국'은[북사 권94 - '우'가 '간'으로 적혀 있다. 본서 다른곳에서는 '지두우'가 많고, 간간히 '간'
자가 적혀 있다. 북사에는 '간'자가 많고, '우'자가 사이에 있다. 이와 같다.] '실위' 서쪽 천여리에
있다. 소와 양이 많고 이름있는 말이 나오며, 가죽으로 옷을 입는다. 오곡은 없어, 고기와 즙을 먹는
다. '연흥' 이년 팔월 사자를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태화' 육년에 이르기까지 사신이 끊이지 않았다.
십사년 변방을 자주 침략하자, '고조'가 서대장군 '양평왕' '이'에게 가서 정벌하라 하였다. 스스로
후에 다시 조공 하고, '무정'말에 이르기까지 조공이 끊이지 않았다.
庫莫奚國 (고막해국)
<庫莫奚國>之先, 東部<宇文>之別種也. 初爲<慕容元眞>所破, 遺落者竄匿<松><漠>之間. 其民不潔淨,
而善射獵, 好爲寇 . <登國>三年, <太祖>親自出討, 至<弱洛水>南, 大破之, 獲其四部落, 馬牛羊豕十餘
萬. 帝曰: [此 狄諸種不識德義, 互相侵盜, 有犯王略, 故往征之. 且鼠竊狗盜, 何足爲患. 今中州大亂, 吾
先平之, 然後張其威懷, 則無所不服矣.] 旣而車駕南還<雲中>, 懷服<燕><趙>. 十數年間, 諸種與<庫莫
奚>亦皆滋盛. 及開<遼海>, 置戍<和龍>, 諸夷震懼, 各獻方物. <高宗>·<顯祖>世, <庫莫奚>歲致名馬文
皮. <高祖>初, 遣使朝貢. <太和>四年, 輒入塞內, 辭以畏<地豆于> 掠, 詔書切責之. 二十二年, 入寇
<安州>, <營><燕><幽>三州兵數千人擊走之. 後復款附, 每求入塞, 與民交易. <世宗>詔曰: [<庫莫奚>
去<太和>二十一年以前, 與<安><營>二州邊民參居, 交易往來, 無疑貳. 至二十二年叛逆以來, 遂爾遠
竄. 今雖款附, 猶在塞表, 每請入塞與民交易. 若抑而不許, 乖其歸向之心; 聽而不虞, 或有萬一之警. 不容
依先任其交易, 事宜限節, 交市之日, 州遣上佐監之.] 自是已後, 歲常朝獻, 至於武定末不絶.
'고막해국'의 선조는 동부 '우문'의 별종이다. 처음 '모용원진'에게 깨어져 흩어진 자들이 '송막' 사이
에 숨어서 전해진 것이다. 그 백성들은 깨끗하지 않고, 궁술에 능하며, 도둑질을 좋아한다. '등국'
삼년, '태조'가 친히 나아가 정벌하니, '약낙수' 남쪽에 이르러 크게 깨뜨려 4개의 부락과 말, 소, 양,
돼지,십여만마리를 얻었다. 황제가 말하길 '이 오랑깨 무리는 덕과 의를 알지 못하여, 서로 침략하고,
도둑질하니, 왕의 다스림을 범하였다. 고로 이에 정벌한 것이다. 또한 도둑질하니, 어찌 근심이 아니
겠는가. 이제 나라가 어지러우니 내가 먼저 이를 평정한 것이다. 이런 연후에 위엄을 배푸니, 자연히
복종하지 않는바가 없는 것이다.' 이윽고 수레에 올라 남쪽으로 '운중'에 돌아오니, '연'나라와 '조'나
라가 복종할 마음을 품었다. 십수년사이에 '고막해'의 여러 무리가 모두 역시 흥하여, '요해'에 까지
흥하자, '화룡'에 남기어 지키게 하니, 여러 오랑캐들이 두려워 하여 각각 방물을 받쳤다. '고종' '현조
'때에 '고막해'가 새해에 이르러 명마와 문피를 받쳤다. '고조'초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고, 태화
사년 갑자기 변방내에 들어와서 '지두우'가 침범함을 두려워 함을 호소하니, 조서를 내어 이를 꾸짓
고, 바로 잡았다. 이십이년 '안주'에 도둑이 들자, '영''연''유'삼주의 병사 수천으로 이를 벌하였다.
후에 다시 돌아와 정성으로 의지하여, 변방에 들기를 매양 구하자 백성들이 함께 교역하였다.
'세종'이 조서를 내려 고하기를 ' '고막해'는 태화 이십일년전에 잃어 버려 '안''영'두주의 변방백성과
섞여 거하여 교역이 왕래하고 있으니, 함께 둘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십이년에 이르러 배반하니,
멀리 숨어 달아났다. 이제 비록 정성스레 따른다 하여, 변방에 나타남이 있어, 매양 백성들과 교역함
을 청하니, 만약 물러나 허락치 않으면 귀향할 마음이 사라진다. 받아들여, 근심치 말고, 혹 조금이라
도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어야 한다. 마음대로 교역하여 힘이 되게 하는 것은 아니니, 일에는 마땅히
한계와 절도가 있어야 한다. 교역하는 날은 주에서 감시관을 파견할 것이다.' 하였다. 스스로 옳다고
여겨 항시 조공을 받치고, '무정'말에 이르기까지 끊어지지 않았다.
契丹國 (거란국)
<契丹國>, 在<庫莫奚>東, 異種同類, 俱竄於<松漠>之間. <登國>中, 國軍大破之, 遂逃 , 與<庫莫奚>
分背. 經數十年, 稍滋蔓, 有部落, 於<和龍>之北數百里, 多爲寇盜. <眞君>以來, 求朝獻, 歲貢名馬. <顯
祖>時, 使莫弗<紇何辰>奉獻, 得班饗於諸國之末. 歸而相謂, 言國家之美, 心皆 慕, 於是東北 狄聞之,
莫不思服. <悉萬丹部>·<何大何部>·<伏弗郁部>·<羽陵部>·/$按:上《勿吉傳》見[具弗伏國]·[郁羽陵國], 卷
六《顯祖紀》<皇興>元年二月·二年四月 見[<具伏弗>·<郁羽陵>], 這裏[伏弗]上當脫[具]字, [郁][部]誤倒,
當作[具伏弗部·郁羽陵部].$/<日連部>·<匹 部>·<黎部>·/$按:上《勿吉傳》及卷六《顯祖紀》<皇興>元年·二
年 見[匹黎 部],《通典》卷二 <契丹>條作[匹黎部]. 疑這裏[匹 ]下衍[部]字, 本作[匹 黎部], 誤分二
部.$/<吐六于部等>,/$《北史》卷九四《契丹傳》[于]作[干], 卷六《顯祖紀》<皇興>二年四月作[叱六手],《通
典》卷二 作[比六干]. 疑[吐][比]皆[叱]字之訛. [手]顯訛, [于][干]不知孰是.$/ 各以其名馬文皮入獻天府,
遂求爲常. 皆得交市於<和龍>·<密雲>之間, 貢獻不絶. <太和>三年, <高句麗> 竊與< >謀, 欲取<地
豆于>以分之. <契丹>懼其侵 , 其莫弗<賀勿于>率其部落車三千乘·衆萬餘口, 驅徙雜畜, 求入內附, 止於
<白狼水>東. 自此歲常朝貢. 後告饑, <高祖>矜之, 聽其入關市 . 及<世宗>·<肅宗>時, 恒遣使貢方物.
<熙平>中, <契丹>使人<祖眞>等三十人還, <靈太后>以其俗嫁娶之際, 以靑 爲上服, 人給靑 兩匹, 賞其
誠款之心, 餘依舊式. 朝貢至<齊>受禪常不絶.
'거란국'은 '고막해'의 동쪽에 있다. 종은 다르지만, 류는 같다. 함께 '송막'의 사이에 숨어산다. '등국'
중에 나라의 군사가 이를 크게 깨뜨리자, 달아나 숨으니, '고막해'와 나누어져 무리가 된 것이다.
십년경쯤에 점점 번성하더니, 부락이 생기니, '화룡'북쪽 수백리 이다. 도둑이 많다. '진군'때에 이르러
알현알 것을 청하고, 새해에 명마를 받쳤다. '현조' 때에 막불 '흘하진'이 받들어 나오니, 나라의 끝을
나누어 얻었다. 돌아가 서로 일컷기를 나라라는 말은 참 좋다. 마음으로써 모두 기뻐하자, 동북의
오랑캐 무리들이 이를 듣고 복종할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실만단부', '하대하부', '복불욱부',
'우릉부',[물길전을 보면, '구불복국' '욱우릉국'이 나오고, 권6-현조기 '황흥'원년 이월 이년 사월에
'구복불', '욱우릉'이 함께 보인다.] '일련부', '필혈부', '여부',[물길전 권6-현조기 '황흥' 원년 이년
'필려이부'가 함께 보이고, 통전 권200 거란편에는 '필려부'로 적혀 있으니, '필혈' 아래에 바로 '부'라
적는 것은 의심스럽다. 본래 '필혈려부'가 적혀 있는데, 이를 두 개의 부로 나누는 것은 의심스럽다.
] '토육우부' 등 [북사 권94-거란전에는 '우'가 '간'으로 적혀 잇다. 권6-현조기 '황흥'이년 사월에는
'질육수'라 적혀 있다. 통전 권200 에는 '비육간'이라 적혀 있다. '토'와'비'자가 모두 의심스럽고,
'질'자도 의심스럽다. '수'자도 잘못된 것이고, '우''간'자도 어느것이 옳은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각각이 명마와 문피등을 받치며 이르기를 항상 구하였다. '화룡'과 '밀운'사에에 모두 교시를 얻고,
공물이 끊이질 않았다. '태화'삼년 '고구려'와 '유유'가 함께 꾀로써 '지두우'를 얻고하 하여 이를
나누어 취하였다. '거란'이 침략당할까봐 두려워 하여 막불 '하물우'가 부락의 수레 삼천과 무리 만여
호를 이끌고 경계를 넘어 들어와 섞이어, 안에 들어와 의지하길 구하자, '백랑수' 동쪽에서 멈추었다.
스스로 이래부터 항시 조공하였다. 후에 흉년으로 굶주림을 고하니, '고조'가 이를 불쌍히 여기어,
관시에 들어와 쌀을 살수 있음을 들어 주었다. '세종'에서 '숙종'에 때까지 사신이 방물을 받침이
끊이질 않았다. '희평'중에 거란이 사신 '조진'등 삼십인이 왔다. '영태후'가 그 풍속에 남녀가 결혼할
때 푸른 옷감(??)으로 옷을 해입는 것이 오랜 의식이어서, 사람들에게 푸른옷감(??) 두필을 나누어
주고, 그 정성스런 마음에 상을 주었다. 조공이 '제'에 이르기까지 항시 끊이질 않았다.
烏洛侯國 (오락후국)
<烏洛侯國>, 在<地豆于>之北, 去<代都>四千五百餘里. 其土下濕, 多霧氣而寒, 民冬則穿地爲室, 夏則
隨原阜畜牧. 多豕, 有穀麥. 無大君長, 部落莫弗皆世爲之. 其俗繩髮, 皮服, 以珠爲飾. 民尙勇, 不爲姦竊,
故慢藏野積而無寇盜. 好獵射. 樂有 , 木槽革面而施九弦. 其國西北有<完水>, 東北流合于<難水>, 其
地小水皆注於<難>, 東入于海. 又西北二十日行有<于巳尼大水>, 所謂北海也. <世祖><眞君>四年來朝,
稱其國西北有國家先帝舊墟, 石室南北九十步, 東西四十步, 高七十尺, 室有神靈, 民多祈請. <世祖>遣中
書侍郞<李敞>告祭焉, 刊祝文於室之壁而還.
'오락후국'은 '지두우'의 북쪽에 있다. '대도'에서 사천오백리를 간다. 그 땅은 습하고, 안개가 많고,
춥다. 백성들은 겨울에 땅에 구멍을 뚫어 집을 짓고, 여름에는 큰 벌판을 옮겨 다니며 방목한다.
돼지가 많고, 곡식은 보리가 있다. 대 군장은 없어, 부락에서 막불(?)이 대를 이어 이를 하였다.
그 풍속은 머리를 꼬고, 가죽옷을 입고, 구슬로 치장한다. 백성들은 용감함을 숭상하고 간통이나,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 고로 감추는 것을 업신여기고, 들에다 그냥 쌓아 놓아도, 도둑이 없다.
궁술로 사냥하길 좋아하고, 악기는 공후가 있는데, 나무통에 가죽으로 앞을 마고, 아홉 개의 현이
있다. 그 나라 서북쪽에 '완수'가 있는데, 동북에 있는 '난수'와 합해져 흐른다.
땅에 물이 적어 모두 '난수'에서 물을 댄다. 동쪽으로 흘러 바다에 이른다. 또 서북으로 이십일을
가면 '우사니대수'가 있는데, 이를 북해라 한다. '세조''진군'4년에 조공하며, 일컷기를 그 나라 서북쪽
에 국가가 있는데 옛날 '오제'보다 오래 되었다. 석실은 남북이 구십보이고, 동서는 사십보이며, 높이
는 칠십척이다. 그 집에는 신령이 있어, 백성이 많이 빌고 기원한다. 세조가 중서시랑 '이창'을 파견
하여 제사를 지내고, 그 집의 벽에 축문을 세기고 돌아왔다.
後論 (후론)
史臣曰: 夷狄之於中國, 羈 而已. <高麗>歲修貢職, 東藩之冠, 榮哀之禮, 致自天朝, 亦爲優矣. 其地碌碌,
咸知款貢, 豈牛馬內向, 東風入律者也.
사신이 말하길 '이적은 이미 중국에 내속을 받았다. '고려'는 해마다 공물을 받치고, 동쪽을 지키는
관직과 영광과 슬픔의 예의로 스스로 본국에 이르르니, 돈돈함이 아닌가. 그 땅이 피해하지만
정성으로 공물을 받침을 아는데, 어찌 우마를 구하겠는가. 동풍에는 법도가 들어있다.' 했다.
[출처] [펌] 중국25사(위서 열전)|작성자 남자는 직진
<결론>
대한민국의 근원은 어디에서 출발해야 할까?
대한민국=>미군정=>재팬36년=>대한제국=>이조선=>고려=>반쪽신라=>후백제,태봉,발해=>고구려,백제,신라,가야=>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단군조선(기자/위만은 제외)=>환웅/배달시대=>환인시대
맥, 예맥, 숙신, 물길, 실위 등 대한민국 역사에는 없는 동이족 관련 역사가 차이나 역사에 있다.
문서보다는 말로 일하기 좋아하는 민족답게 역사가 없으니 차이나 역사를 참조해야 한다.
역사서나 종교서는 ISO 심사 서류와 비슷하다.
인증서를 무조건 주어야 하는 까닭에 ISO 인증 소설을 써야만 하듯이
사관들은 자기 나라를 미화시키기 위하여 역사서를 작성해야만 하는데
자기들이 직접 말 타고 가서 보고 들은 것도 아니고 누가 해 준 이야기를 각색하여 적은 것인데
바보같은 이들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서류를 연구하면서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웃길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가짜 서류라고 하여도 완전하게 상상을 동원한 가짜 서류가 있고
조금의 현실을 기반으로 만든 가짜 서류도 있기에 후자를 역사서라고 할 뿐이다.
수입산 불교를 믿는 고려시대 일연이 진짜로 곰과 호랑이가 마늘과 쑥을 먹고 사람이 되는 것을
천년 시공을 건너가 본인이 직접 확인하고 삼국유사를 지었을까?
서울대공원에 가서 곰에서 마늘과 쑥을 먹여보면 어떨까? 진짜 사람이 될까?
주몽과 혁거세는 진짜 알에서 나왔을까?
계란, 독수리알, 타조 알을 가져와 햇빛을 쪼이면 사람이 나올까?
해모수는 말을 타고 하늘을 날라다니는데 왜 요즘 말은 하늘을 날라다니지 못할까?
빙혼도 진흙으로 사람을 만들어 놓고 숨을 불어 넣어도 진흙인형은 그대로였다.
혀, 식도, 간, 췌장, 심장, 허파, 십이지장, 소장, 대장을 만들지 못해서 그대로였을까?
뱀하고 이브하고 대화를 나누었다면 왜 요즘은 말하는 뱀은 없을까?
자기가 상상하는 것을 믿고 싶은 마음이 역사서이고 종교서일 뿐!
진실과 진리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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