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영화가 시간성을 모사할 수 있을까? 궁금하다면 최근 상영된 ‘자산어보’를 권한다. 총천연색 난장판인 세상에 시달린 영혼에게 ‘디톡스’가 될 만큼은 고즈넉하고 아름답다. 여태껏 글을 12년 쓰면서 단 한 번도 들먹이지 않은 단어 ‘힐링’까지 감히 꺼낼 수 있을 정도이다.
영화 '자산어보'에서 정약전(설경구)이 홍어를 맛보는 장면./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손암 정약전(1758~1816·설경구)은 순조 1년(1801년)의 신유박해에 연루돼 동생이자 ‘목민심서’의 저자인 다산 정약용과 유배에 처한다. 행선지는 각각 전남 흑산도와 강진. 유람이 아닌 유배이다 보니 편안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죄인은 죄인이고 손님은 손님이니께”라는 따뜻한 인심 덕에 자리를 잡는다.
섬이니만큼 풍성할 수밖에 없는 해산물의 세계를 발견하는 한편 물고기를 잘 아는 사인(士人) 장창대(변요한)와 가까워진다. 그의 해박한 산 지식에 매료돼 ‘자산어보’를 쓰기 시작했다.
극장에서 큰 화면으로 보지 않은 게 아쉬울 만큼의 영상미가 인상적인 가운데, 잔잔하게 밀려오는 파도처럼 고즈넉한 정약전의 먹방이 펼쳐진다. 삭히지 않은 생물 홍어로 눈뜨기 시작한 약전은 문어와 민어, 가오리를 차례로 섭렵하며 맛을 익히고 기력도 찾는다. 한편 돌봐주던 가거댁(이정은)과 아이를 낳고 언제까지 뻗어나갈지 알 수 없는 뿌리를 내리고, 양반의 서자인 창대에게 글공부를 시켜 출세의 기반을 마련해 준다.
힘들 수밖에 없는 유배 생활 속에서도 약전은 흑산도의 삶을 즐겼지만,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릴 수 없었다. 정약용은 17년 만인 1818년 유배에서 풀려나지만 정약전은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1816년, 책을 쓰다가 그대로 세상을 떠난다. 그리하여 두 형제는 서신을 부단히 주고받았지만 1801년 이후 다시는 마주하지 못했다.
한편 창대는 소과에 합격해 진사가 되지만 군포를 비롯한 비리와 갈취, 그로 인해 핍박받는 서민의 삶에 환멸을 느끼고 낙향한다. 돌아오는 길에 약전을 만나러 들르지만, 상중인 아내와 아이들만이 아쉬움 가득한 마음으로 반길 뿐이었다.
영화 '자산어보'에 등장한 홍어./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자산어보’에는 워낙 많은 해산물이 등장하는지라 하나를 꼭 집어 권하기가 주저된다. 고민 끝에 두 가지를 준비했다. 첫째는 곁들일 술인 막걸리다. 영화를 본 이라면 다산이 처음 흑산도에 발을 들인 뒤 생물 홍어를 즐기는 장면이 유난히 기억에 남을 것이다. 살짝 걸쭉하면서도 쌀 특유의 포근함이 특징인 막걸리는 해산물과 잘 어울리니, ‘홍탁삼합(洪濁三合·막걸리에 홍어·삶은 돼지고기·김치 세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개성이 넘치는 요즘 막걸리 가운데서도 국순당의 ‘1천억 유산균 막걸리’를 권한다. 알코올 도수가 일반 막걸리보다 1도 낮은 5도라 마시기에 덜 부담스럽고, 지나치게 걸쭉하지 않으면서도 신맛과 단맛의 균형도 좋다. 홍어뿐 아니라 좀 더 섬세한 흰살 생선도 윽박지르지 않고 잘 아우른다. 개인적으로는 집에서 맥주를 제치고 햄버거나 치킨에 곁들이는 술로 막걸리가 자리를 완전히 잡았을 정도다. 덤으로 상품명 덕분에 목구멍으로 1000억 개나 되는 유산균이 넘어가 건강해지는 듯한 기분도 느낄 수 있다. 750mL 1병에 3000원대.
둘째는 영화의 핵심 소재인 ‘자산어보’ 책 자체이다. 워낙 역사에 길이 남을 저서인지라 제목은 분명하게 기억하지만 막상 읽어보지는 않은 경우가 대부분 아닐까? 영화를 본다면 너무나도 자연스레 책이 궁금해지리라 믿는다.
‘서해문집’과 ‘더스토리’ 두 출판사에서 각각 2016년과 2021년 내놓았는데, 원문을 포함하고 초판본의 디자인을 양장에 살려 담은 후자에 조금 더 손이 간다. 옛것과 새것의 조화로운 만남인 데다가 종이책의 위기라는 시대에 시장 돌파의 좋은 본보기로도 삼을 수 있겠다.
오세영의 역사 소설 ‘자산어보’(문예춘추사)로도 읽을 수 있다. 해산물에 대한 살아 있는 지식이 궁금한 이들에게는 ‘이 시대의 자산어보’라 불리는 어류 칼럼니스트 김지민의 블로그 ‘입질의 추억(https://slds2.tistory.com/)’과 유튜브 채널 ‘입질의추억TV’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