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名士의 신용한도는 도대체 얼마나 될까?
요즘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받는 문자메시지는 무엇일까? 나도 그렇지만 대다수 사람들에게 은행권에서 돈 빌려가라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은행마다 대출한도가 다 틀리다. 어떤 곳은 신용한도로 빌릴 수 있는 돈이 9백만 원, 천만 원, 어떤 곳은 2천만 원, 어떤 곳은 3, 4천만 원까지 다 틀리다.
어떻게 그들은 나의 신용한도를 예측하는 것일까? 신기한 것은 둘째로 치고 여러 기관들로부터 돈을 빌려가라는 문자나 전화를 받을 때마다 예전 기억이 떠올라 빙긋이 미소 지을 때가 있다.
1999년 12월 28일쯤이었다. 밀레니엄이니 뭐니 해서 국내외가 다 떠들썩할 무렵이었다. 전주의 모 방송국에서 세기가 바뀌는 2000년 12월 31일과 2011년 밤 0시에 ‘명사名士의 한 마디’ 시간을 마련했다고 나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나는 정중히 명사가 아니지 않느냐고 사양했다. 그런데도 선생님이 가장 적임자라며 인터뷰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그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다음 날 녹화를 하기로 했다.
그날 저녁 학교에서 돌아온 아내가 친정에 가야겠다는 것이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이곳, 저곳 보증을 서주었더니, 천만 원을 갚으라는 통보가 와서 아무래도 친정에서 빌려야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호기 있게, 내가 오랫동안 황토현문화연구소와 개인으로 거래를 했던 은행에서 빌려보겠다고 했다.
그 다음날 방송국 녹화를 마치고 은행에 갔다, 여차여차 해서 대출을 받으러 왔다고 말하자, 통장을 달라는 것이었다. 통장 두개를 주자, 확인절차를 거친 뒤에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보증인을 세워서 ‘카드론‘으로 이백만 원을 대출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럴 리가 있는가? ’내가 이 은행에 거래 한 햇수가 십오륙 년이 되고 내 딴에는 많은 돈을 거래 해왔는데, 아무래도 기계가 잘못되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한 번 부탁했더니, 같은 대답이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제야 내가 얼마나 허술한 삶을 살았는가 하는 자괴감이 물밀듯 밀려왔다.
팔십년 대 초에 제주도에서 전주에 나와 그때까지 이십여 년에 걸쳐 문화운동을 한다고 했다. 그 결과 명색이 이 지역에서는 명사名士라고 소문이 나서 세기 말에 모방송국에서 인터뷰도 했다, 그래서 천만 원 대출을 받고자 했는데, 천만 원은커녕 보증인을 세워서 기껏 이백만 원, 그것도 카드론으로 대출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신정일이라는 사람의 본 모습이었던가?
의대만 졸업하면 1~2억을 대출해주고 공무원만 되면 몇 천만 원은 대출을 해주는 시대에 명사의 신용범위가 고작 2백만 원이란 말인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은행을 나와 여기저기를 배화하다가 보니 내가 어찌나 초라해지던지, 그날 저녁에 집에 돌아가자 아내가 내게 물었다.
“대출은 어떻게 잘 되었어요,” 나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무보증으로 이천만원까지 대출을 받을 수 있는 자네가 참 위대한 사람이네,”
“돈에는 돈 이외에는 친구가 없다.”는 러시아 속담은 얼마나 지당한 말인가? 돈 앞에 알량한 지식이나 지혜는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일인가?
돈의 비밀을 갈파한 도스토예프스키는 “돈은 모든 불평등을 평등하게 만든다.”고 말했고 <달과 6펜스>의 작가 서머세트 모음은 "돈은 인간의 육감과 같아서 그것이 없으면 오감도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돈만 많이 있으면 세상에 되지 않는 일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난리가 아니다.
“돈은 누군가를 묻지 않고 그 소유자에게 권리를 준다.” 는 러스킨의 말은 대체로 맞다.
그러나 나는 가난하긴 했지만 한 번도 돈을 우위優位에 둔 삶을 살지는 않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지는 않을 것이다.
“돈이 생기면 우선 책을 사고 그 다음에는 옷을 사 입는다.“는 에라스무스의 말을 경구처럼 여기고 살고 있다, 그런데도 돈에서 자유롭지 않을 때가 더러 있어서 그것이 가끔씩 나를 슬프게 한다.
‘언제쯤 지금보다 더 돈에 대해서 초연하게 살 수 있을 것인가?’ 그 때를 기다리고 또 기다릴 뿐이다.
임진년(2012) 이월 초이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