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가 이젠 ‘자유시’로 불똥이 튑니다. ‘자유시 참변(1921)’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자유시는 러시아 아무르주의 소도시인 스보보드니를 말합니다. 이 도시는 러시아 제국 시절,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개척하던 중에 황태자 알렉세이의 이름을 따서 얄렉세옙스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습니다. 러시아 제국은 표트르 대제가 1721년 제정을 선포한 이후, 1917년 러시아 혁명에 의해서 군주제가 붕괴될 때까지 197년간 존속했던 전제군주제 국가입니다.
그러나 러시아 내전 당시 볼셰비키(적군, 붉은 군대, 러시아 제국에 대항하는 공산주의 세력)가 얄렉세엽스크를 점령하면서 구 체제의 상징인 황태자 이름 대신, 현재의 이름인 스보보드니로 바꿨는데, 러시아어로 ‘자유로운’이라는 뜻입니다. 조선 독립군들은 이곳을 ‘자유시’라고 불렀습니다. 이곳이 한국 독립운동사의 비극 중 하나인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 곳입니다. 망명 조선 독립군들이 러시아의 적군에게 진압된 사건입니다.
역사를 한번 돌아볼까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한 홍범도, 김좌진 장군은 일본의 보복을 피해 연해주로 이동했습니다. 당시 일본군은 민간인을 학살하며 자신들의 패전에 보복했습니다. 그런데 독립군이 피신해 간 러시아는 당시 내전 중이었습니다. 레닌의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한 적군과 군주제, 자본주의, 반공산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한 백군(白軍)이 대결하고 있었습니다(역사는 이 러시아 내전을 ‘적백내전’이라고도 부릅니다).
독립군이 있던 시베리아도 적군과 백군의 대립은 이어졌습니다. 당시 러시아 흑룡주 정부가 독립하여 극동공화국이 되었고, 이 공화국은 볼셰비키 세력의 조종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은 백군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공산주의와 전체주의의 대결입니다. 따라서 일본은 백군을 지원한다는 명목 아래, 시베리아로 출병했고 백군을 지원하면서 연해주에서 독립무장투쟁을 하는 공산주의 계열인 한인무장 부대를 소탕하고자 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독립군은 일본제국주의 등 제국주의 세력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습니다. 지금 소련, 북한 공산당의 독재와는 약간 결이 다릅니다.
여기서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독립운동 단체를 살펴볼까요? 먼저 ‘무력 항쟁을 했던 독립군’, 둘째 ‘나라의 정통성을 지켰던 (임시)정부’, 셋째 ‘교육을 통해 민족을 깨우쳤던 계몽 단체’ 등 크게 세 가지 형태로 존재했습니다. 대부분 유기적으로 연결돼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습니다. 이 가운데 뚜렷한 활동 자료를 남긴 단체가 있는 반면, 어디에도 기술되지 않은 채 사라져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한번 살펴볼까요?
안창호, 이승훈, 윤치호 등이 주도하여 조직된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1907), 샌프란시스코에 중앙총회를 두고 기관지를 발행했던 안창호, 이승만의 대한인국민회(1910), 고종의 밀지를 받아 조직한 비밀결사단체인 독립의군부(1912),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밀결사 조직인 송죽회(1913), 대한광복군정부(1914)와 대한광복회(1915)가 있습니다.
1919년 서울에 3·1 운동으로 투옥된 애국지사들을 옥바라지하던 대한민국 애국부인회(1919), 대한민국 임시정부(대한국민의회, 한성정부, 상해정부, 1919), 김원봉이 단장인 의열단(1919), 김좌진 장군이 총사령관인 북로군정서(1919), 홍범도 장군이 사령관인 대한독립군(1919), 방우룡 장군이 단장인 의민단(1919)이 있습니다.
또한 일본의 일어 사용 강요에도 굴하지 않고 한글을 연구해 기관지 「한글」을 발간해 우리 말의 우수성을 알리는 것은 물론,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해 오늘날 한글표기의 기준을 세웠던 조선어연구회(1921)는 조선어사전편찬회를 만들어 사전 편찬 작업을 진행했는데, 일본에 발각돼 도중 그만뒀지만, 광복 이후 1957년이 돼서야 『큰사전』을 발간하였습니다.
계속해서 통의부(1922),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좌우 진영으로 갈라져 있던 독립운동이 1927년 ‘민족 유일단 민족 협동전선’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창간한 신간회(1927) 등이 있습니다.
다시 시베리아 지역으로 돌아가 볼까요? 아무튼 이때 독립군은 자연스럽게 적군에 협조했습니다.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이 손을 잡고 독일, 일본과 맞선 것과 같습니다.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면, 미국이 만든 원자폭탄은 처음에 히틀러의 독일에 떨어뜨리려고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히틀러가 자살하고 독일이 항복한 후, 원자폭탄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졌습니다. 일제는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전쟁을 계속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홍범도를 공산주의자라고 한다면, 그래서 오늘 그를 다시 평가해야 한다면, 당시 소련과 손잡고 일본을 물리친 미국도 재평가하고, 그 결과 공산주의와 손잡은 미국과는 외교를 단절해야 할 것입니다. 역사에 대한 무지가 얼마나 무서운지 놀라운 세상입니다. 물론 2차 대전 승리 후, 미국과 소련은 갈라지며 미-소 냉전 시대가 열립니다. 따라서 이때의 소련과 홍범도 장군 시대의 러시아와 소련은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레닌과 스탈린이 다른 것 처럼!
아무튼 독립군과 적군이 연합하여 일본군과 백군을 격퇴시켰습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의 모든 볼셰비키 기관과 한인 밀집지대를 습격했습니다. 결국 연해주의 독립군도 근거지를 옮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이 옮긴 곳이 바로 볼셰비키 세력이 강성한 극동공화국의 자유시입니다. 그곳에 극동공화국 소속 오하묵의 자유대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군들은 모두 연합하여 서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합니다. 이들이 모여든 곳이 바로 자유시입니다. 이때 집결한 무장 세력의 수가 4,000여명 이상을 헤아렸다고 합니다.
드디어 이 자유시에서 사건이 벌어집니다. 고등학교 국사교과서는 “적색군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유시로 이동하였고, 적색군을 도와 내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적색군은 내전에 승리한 후 독립군의 무장을 강제로 해제하려 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공격함으로써 무수한 사상자를 낸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야기하였다”, 자유시 참변은 적색군의 독립군 공격이었습니다. 약소국의 서글픈 운명입니다.
또 다른 교과서는 “소련 영내의 자유시로 이동한 독립군은 붉은 군대(적색군, 혁명군)와 하얀 군대(백색군, 반혁명군)의 내전에서 적색군(赤色軍)을 도왔는데, 이것은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이 백색군(白色軍, 백군)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유시 참변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첫째, ‘고려공산당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갈등’ 둘째, ‘병참 지원이 끊어진 독립군과 주변 민간인들(러시아 주민) 사이의 마찰’이 주요 원인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독립군의 주도권 다툼과 군대가 주둔하며 겪은 그곳 러시아 주민들과의 마찰입니다.
자유시에 총집결한 한인 무장 군대는 크게 민족주의 계열인 대한독립군단과 공산주의 계열(고려 공산당)의 연해주 및 시베리아 한인 무장 세력이었습니다. 그러나 홍범도 장군 등의 대한독립군단은 공산주의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는 입장이다 보니, 주도권은 자연스럽게 공산주의 계열의 한인 무장 부대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공산주의 계열의 무장 세력은 2개로 나누어져 있었고 한인 연합부대인 대한독립군단의 통수권을 서로 차지하려고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여기서 고려공산당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1921년 상해와 이르쿠츠크에서 각각 결성된 한인 공산주의 정당입니다. 한인사회당의 이동휘(李東輝), 김립(金立) 등은 1920년 5월경 상하이에서 ‘한국 공산당’이라는 임시 조직을 결성합니다. 그리고 이르쿠츠크에서도 1920년 7월 전로한인공산당중앙총회가 결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재상해한국공산당(이하 상해파)과 전로한인공산당중앙총회(이하 이르쿠츠파)는 모두 통일된 공산당 조직 건설을 목표로 삼고 있었지만, 공산당 창립의 주도권을 놓고 서로 대립하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해파 고려 공산당은 먼저 일제에 의한 식민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민족 혁명이 필요하며, 그 이후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전환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를 ‘2단계 혁명론’이라고 합니다(현재 NL노선, 곧 ‘민족해방론자’의 뿌리인 듯 합니다).
그러나 이르쿠츠크파 고려 공산당은 사회주의 혁명을 통한 소비에트 건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현재 PD노선, 곧 ‘민중해방론자’의 뿌리 같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상해파와 마찬가지로 2단계 혁명론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러한 혁명론의 차이는 민족통일전선에 대한 정책에서도 두드러졌습니다. 상해파는 민족 혁명을 우선시하였기 때문에 광범위한 민족주의 세력과 민족통일전선을 추구하는 데 적극적이었습니다. 반면에 이르쿠츠크파는 민족 통일 전선에 소극적이었고, 민족주의 세력과의 제휴에 부정적이었습니다.
이 대립이 자유시에서 주도권 다툼의 불씨가 된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좋은 일을 하는데(조선의 독립) 주도권 다툼 때문에 갈라집니다. 기가 막힙니다. 아무튼 자유시로 이동한 한인 독립군 부대의 상당수는 상해파와 제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재러시아 한인 군대의 관할권이 극동공화국에서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로 이관되면서 상황은 이르쿠츠크파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두 파의 대립을 조정하기 위하여 고려혁명군정의회를 설치하고 총사령관에 칼란다리쉬빌리를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고려혁명군정의회가 두 세력의 대립을 조정하는 데 실패하면서 칼란다리쉬빌리는 상해파에게 무장 해제를 명령했습니다. 상해파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고려혁명군정의회는 상해파에 대한 무장 해제에 착수하였습니다.
1921년 6월 28일 오전 1시 고려혁명군정의회는 극동공화국 자유시 수비대와 교섭하여 러시아 적군 4개 중대를 차출하였고, 여기에 이르쿠츠크파가 가세하여 상해파의 주둔지인 수라제프카로 진격하였습니다. 6월 28일 이르쿠츠크파는 수라제프카를 포위하고 상해파를 공격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고려혁명군정의회에 부대 지휘권 양도를 거부한 홍범도 등의 한인 독립군 부대들도 같이 무장 해제를 당하였습니다. 그 결과, 상해파와 한국 독립군 부대들은 심각한 피해를 당했습니다.
어쩌면 홍범도 장군도 피해자인 것입니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고려혁명군정의회 총사령관 칼란다리쉬빌리의 지휘를 따른 적군의 잔혹함과 이르쿠츠크파 소수의 무지때문입니다. 역사를 왜곡하는 이들은 홍범도 장군이 이르쿠츠크파에 가담하면서 한인 독립군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다고 하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물론 포로로 잡힌 한인독립군에 대한 소련 코민테른 측 군사재판이 이루어졌을 때 소련은 독립군 유혈진압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홍범도 장군을 이용하여 소련측 3인의 재판위원 중 1인으로 참여시킵니다. 기가 막힙니다.
자료에 의하면, 자유시 참변의 피해 규모는 사망 36명, 포로 864명, 실종 59명이라는 자료도 있고, 사망 272명, 익사 31명, 실종 250명, 포로 917명이라고 기록된 자료도 있습니다. 이후 무장 해제된 독립군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자유시를 탈출하고 만주로 돌아오게 됩니다. 결국 자유시 참변은 사회주의 운동의 파벌 갈등이 빚어낸 사건으로 그 과정에서 만주 지역 한인 독립군의 무장 역량을 크게 손실시킨 일대 비극이었습니다.
당시 김좌진 장군은 만주로 다시 돌아왔기 때문에 참변을 겪지 않았고, 나중에는 무정부주의자와 연합했습니다. 그리고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은 자유시 참변 이후, 적군에 소속되었습니다. 홍범도는 참변의 비극을 보고 실의에 빠졌으나, 결국은 소련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으로 현재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 끌려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1943년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합니다.
오늘 역사 논쟁을 보며, 조선 시대 당쟁을 다시 돌아봅니다. 물론 현재의 여야 분쟁도 생각합니다. 홍범도 장군 당시, 교활한 적인 일제와 오만한 적 소련은 밖에 있었건만, 우리 선조들은 안에서 서로 물고 뜯고 하다 결국 민족주의, 공산주의 세력 둘 다 자멸했습니다. 그 이후 일어난 한국전쟁이 바로 그 예시입니다.
그것을 알았을까요? 홍범도 장군은 자신의 일대기를 상영하는 카자흐스탄의 고려극장 문지기로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리고 지금 다시 이 땅에 돌아와 반복되는 역사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요? 지금의 이 놀라운 세상이 놀랍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