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벌신문 조선일보 사주 가문의 숨겨진 내막. 방재선씨의 주장은 왜 지금까지 언론에 보도되지 못했나.
2.조선일보 전 사주 방응모의 장남 방재선의 주장
“나는 조카 방일영 형제에게 조선일보를 빼앗겼다”
족벌신문 조선일보 사주 가문의 숨겨진 내막. 방재선씨의 주장은 왜 지금까지 언론에 보도되지 못했나.
“나의문제제기를 재산권 분쟁으로만 보지 말라. 단순히 재산만 되찾겠다는 생각은 이미 버렸다. 나의 목표는 조선일보 바로세우기다.”
지난 5월 6일 서울시 낙원동 수운회관 1307호에서 만난 방재선씨(54)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전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의 장남인 방재선씨는 지난 96년부터 현 조선일보 사주측과 재산권 분쟁을 벌이고 있다. 50여년 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그가 전면에 나서 조선일보와 일전을 불사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방응모―`방일영―`방재선 관계
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방응모 일가의 가계사를 보아야 한다. 다음은 방재선씨가 털어놓은 방씨 일가의 가족사를 재구성한 것이다.(‘방씨 일가 가계도’ 참조)
1884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방응모는 첫 번째 부인과 두 번째 부인 사이에서 자식이 없자 40세가 되던 해인 1924년 친형인 방응곤의 차남 방재윤을 양자로 입적시켰다. 이 방재윤이 바로 현 조선일보 사주 방일영 고문과 방우영 회장의 친 아버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방재윤은 1940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친자를 보지 못한 방응모는 이후 세 번째 부인을 맞아 딸 하나를 낳았다. 기어코 아들을 낳기 위해 방응모는 60세에 화신백화점 점원 출신의 노호용과 네 번째 결혼을 한다. 마침내 방응모는 이듬해인 1944년 고대하던 첫 아들을 얻었다. 그 아들이 바로 방재선이다. 방응모는 노호용과의 사이에서 아들 둘을 내리 더 낳았다.
“부친은 양자가 사망하면서 친자에 대한 집착이 더욱 강해졌다고 한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부친의 뜻에 따라 둘째 어머니 이인숙 밑에서 성장했다. 둘째 어머니는 부친이 광산업을 하면서 어려움을 겪을 때 결정적인 도움을 준 창업동지였다.”
그러던 와중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방응모는 1950년 7월 7일 넷째 부인이 있는 신당동 자택에 머물던 중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 의해 연행되었다. 그리고 그의 소식은 지금까지 끊긴 상태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가족들은 그의 실종신고를 미루었다. 혹시 포로교환이 이뤄지면 돌아올 수도 있다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응모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 기간만료로 결국 실종처리되었다. (그러나 실종선고가 내려진 1979년까지 조선일보 제호 밑의 발행인에는 방응모의 이름이 실렸다.)
“아버지가 납북되던 1950년 양손인 방일영의 나이는 27세였다. 그러나 장남인 나는 당시 6세에 불과했다. 자연스럽게 조카 방일영이 조선일보의 관리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나중에 어른이 되면 사주의 장남인 내가 조선일보를 당연히 넘겨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어느 정도 세상 물정을 알만큼 성장했을 땐 이미 조선일보 내에 방일영 체제가 확고해진 상태였다.”
방재선씨는 가족사를 털어놓은 뒤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나는 조카 방일영 형제에게 조선일보를 빼앗겼다. 그들은 조선일보를 차지하기 위해 조선일보 원래의 사주이자 자신의 양할아버지인 방응모의 호적을 제적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친아버지인 방재윤을 호적에서 빼 버렸다.”
그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방일영 고문이 방응모의 호적을 조작했다는 것이다. 그가 강조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의 두 가지다.
(1)방응모의 호적을 제적시켰다.
(2)방응모의 호적에서 방재윤을 지워 버렸다.
그는 “국가기관에서 발부한 서류로 모든 것을 말하겠다”면서 기자에게 두 개의 호적을 제시했다.
왜 양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호적에서 지웠나
두 개의 호적은 모두 방응모가 호주로 되어 있었다. 호적의 맨 뒷면을 보니 하나는 1961년 양주군 의정부읍장이, 또 하나는 1998년 의정부시장이 발부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선 두 호적에 나온 내용을 종합해 방응모 호적의 궤적을 정리해 보았다.
“1951년 전쟁으로 호적 소실―`1953년 호적 재제작―`1955년 생사불명 기간만료―`1966년 호적 재제작―`1979년 실종선고심판확정. 방일영 신고로 제적.”
결국 두 개의 호적은 각각 1953년과 1966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방재선씨는 어떻게 두 개의 호적을 보관하고 있었을까. 상식적으로 본다면 호적이 재제작되면서 이전의 호적은 당연히 폐기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가 1966년 이전에 직접 호적을 떼어놓은 것일까. 방씨의 설명을 들어보자.
“당시만 해도 나는 호적이 그리 중요한줄 몰랐다. 첫 번째 호적은 부친의 둘째 부인이자 어린 시절 나를 길러 준 이인숙에게서 받았다. 그분은 1989년에 돌아가셨는데 세상을 뜨기 전에 나에게 이 호적을 건네주었다. 나중에 상속문제가 발생하면 꼭 쓸모가 있을 것 같아 61년에 떼어놓았다고 했다.”
아무튼 방응모의 호적은 1979년 방일영에 의해 제적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실제로 1998년 4월 24일 뗀 호적의 첫장에는 ‘제적’이라는 낙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 옆에는 “서기 1979년 6월 13일 방일영의 호주 상속 신고에 의하여 본 호적을 말소”라고 씌어 있었다. 방일영이 방응모의 호적을 제적했다는 방재선씨의 첫 번째 주장은 일단 사실로 드러난 셈이다. 기자는 조선일보측에 이와 관련된 질문을 보내고 사실여부를 물었으나 답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곧바로 방일영이 조선일보를 차지하려 했다는 주장으로 귀결되는 것은 무리가 따르지 않을까. 왜냐하면 법원에서 방응모의 실종선고심판이 확정됐고 방일영이 호주상속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재선씨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방일영이 자신을 방응모의 대를 잇는 장손이라고 생각했다면 전 호주를 제적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방응모의 호적을 제적시키고 자신의 호적으로 독립시킨 것은 무언가 떳떳치 못한 것이 있어 숨겨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는 방재선씨의 두 번째 의혹제기에 대해 살펴보자. 그는 방일영이 방재윤을 방응모의 호적에서 지워 버렸다고 주장했다. 이를 확인하려면 호적 하단에 방재윤의 이름이 있는지 없는지 찾아봐야 한다. 그러나 두 개의 호적을 모두 뒤져보았지만 방재윤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이성춘의 이름 옆에 새로 칸을 만들어 작은 글씨로 씌여있는 ‘가족과의 관계―`방재윤의 처’가 전부다. 방재윤이 방응모의 양자로 입적한 것이 사실이라면 호적 하단에는 방응모(호주)―`승계도(처)―`방재윤(자)―`이성춘(자부)의 순으로 이름이 나왔어야 한다. (승계도는 방응모의 첫째 부인이다.) 그러나 기자가 직접 호적을 확인한 바로는 방재윤이 빠진 채 방응모―`승계도―`이성춘 순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방재선씨는 다음과 같은 의혹을 제기했다.
“사망, 법정분가, 혼인으로 인한 출가 등으로 제적되어도 흔적은 영원히 남게 마련이다. 그런데 방재윤은 호적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방재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그리고 뿌리없는 나무가 없는 법인데 방일영과 방우영의 호적 뿌리는 누구란 말인가.”
방재선씨 “재산상속 원인무효소송 낼 터”
방재선씨는 방일영씨가 최근에도 호적을 바꾼 사례가 있다고 증언했다.
“내가 1996년 4월 12일 방일영 고문의 호적등본을 떼어 보니 방응모의 이름이 틀리게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모(謨)를 모(模)로 오기―`방응모의 실종연도도 애초 1955년에서 해방전인 1945년으로 바꾸어 놓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방재선씨는 1996년 4월 24일부터 조선일보사 앞에서 피켓시위를 하며 이 문제를 거론했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방일영은 2주 후인 5월 7일 잘못된 부분을 직권정정으로 바로잡았다.
기자는 몇가지 의문이 생겼다.
(1)방일영은 왜 방응모를 제적시켰는가.
(2)방일영의 친부인 방재윤은 왜 방응모의 호적에서 사라졌는가.
(3)방응모의 실종연도는 왜 55년에서 해방전인 45년으로 바뀌었는가.
(4)방일영은 왜 2주만에 그 내용을 다시 바꾸었는가.
“양자를 두려는 목적은 제사와 상속이다. 불행하게도 양자인 방재윤은 양부인 방응모보다 먼저 사망하였다. 따라서 양자 권리가 상실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호주인 방응모가 납북된 후 재산관리를 맡은 그가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이 기재된 호적을 보고 바꾸거나 삭제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도 있었다고 본다.”
방재선씨의 설명이다. 물론 조선일보측에서도 할 말이 있을 것이다. 방재윤이 양자였다면 양손인 방일영ㆍ방우영 형제가 그 상속권을 갖게 된다는 주장을 할 만하다.
그러나 풀리지 않는 의문은 또 있다. 방재선씨는 왜 지금까지 침묵을 지켰는가.
“아버지 방응모가 납북되던 당시 나는 너무 어렸다. 조카 방일영ㆍ방우영 형제가 역대 정권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는 상황에서 감히 상속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었다. 60~70년대에 이후락을 매개로 한 박정희와 방일영의 친분관계는 천하가 다 아는 사실 아닌가. 82년 정의사회구현이라는 구호만 믿고 전두환에게 탄원서를 냈다가 도리어 모 기관에 끌려가 곤욕만 치렀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
“부당이득권 반환청구소송, 호주상속 원인무효소송, 재산상속 원인무효소송, 호주 및 재산 가처분 원인무효소송을 제기할 방침이다. 조선일보 제호 사용 중지 가처분신청도 고려중이다.”
―`신문사를 이끌어온 방일영 형제의 기여도를 무조건 무시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방씨 형제의 경영능력을 인정하나 역사와 국가 앞에 너무나 오만했다. 조선일보는 권언유착과 색깔논쟁을 통해 자기 취향대로 대통령을 만들어 왔다. 현 경영진은 계초 방응모 선생의 유훈인 소유와 경영의 분리와 편집권 독립을 지키지도 않았다. 내가 싸우는 목적은 고대광실을 원해서가 아니다. 계초의 정신을 계승해 조선일보를 참된 언론으로 새롭게 탄생시키겠다는 마음뿐이다. 만약 조선일보를 되찾는다면 모든 재산을 3등분해서 3분의 1을 직원들에게 돌리고 3분의 1은 사회에 환원하겠다. 그리고 나에게 돌아오는 3분의 1은 계초기념사업회에 투자하여 언론인연수, 장학사업, 출판사업에 쓸 것이다.”
방재선씨의 책상 위 유리판에는 종이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그곳에는 『잡보장경』에서 인용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었다.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 무엇을 들었다고 쉽게 행동하지 말고 그것이 사실인지 깊이 생각하여 이치가 명확할 때 과감히 행동하라.”
방재선씨가 조선일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자 항상 자신을 자계하는 말이라고 한다. 쭖
박스
인터뷰 「조선일보를 해부한다」 담당 구수환 PD
“조선일보는 일개 신문사가 아니다”
―`방영 여부를 놓고 논란이 많았는데 조선일보편은 정말 방영되는가.
“전문가들의 법률적 검토와 공정방송위원회의 검토를 거쳐야 하지만 반드시 방영되리라 확신한다.”
―`박권상 사장이 이 프로그램에 부정적이었다고 하는데.
“박 사장이 공식석상에서 방영을 안 한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는 것으로 안다.”
―`개혁실천 프로그램 「이제는 말한다」의 기획의도는.
“과거 카메라에 담지 못했던 성역과 눈에 보이지 않는 세력을 찾아내어 시청자 눈앞에 보여주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시작했다. 법조계, 안기부, 행정부, 국회, 재계, 언론 등에 대한 감시와 견제가 많을수록 우리 사회는 맑고 깨끗해진다. 다른 시사프로그램도 살리면서 우리만의 독특한 방향과 색깔을 찾아 나갈 것이다.”
―`기획단계에서 조선일보편을 만들자는 의견에 반대한 사람은 없었나.
“이견이 없었다. 대통령 만들기에 나서고 국가 주요정책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조선일보는 단순한 일개 신문사가 아니다. 신문도 감시 받아야 더욱 건강해진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제작현장에서 피부로 느끼는 국민들의 반응은 어떤가.
“컴퓨터통신의 열광적인 호응을 비롯해 개혁프로그램을 지지하는 여론이 많다. 공무원, 기자 등 만나는 사람들마다 강한 지지를 표현해 주었고 조선일보편을 반드시 다뤄야 한다고 은근히 바라는 것을 보고 놀랐다. 생각한 것보다 큰 반응이어서 사실 부담스러울 정도다. 과거 KBS 시청료 납부 거부운동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힘든 점은 무엇인가.
“누구도 다루지 않던 것을 하다 보니 도리어 쉽다. 다만 증언해 주리라 생각했던 분들이 몸을 사리는 경우가 간혹 있어 실망스럽기도 했다.”
--------------------------------------------------------------------------------
조선일보
2000-6-11 정지환
내 재산 가로채고, 5백여만 달러 해외로 빼돌렸다”
마감 인터뷰 조선일보 사주 4명을 고발한 방재선씨
현 조선일보 사주와 재산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전 조선일보 사주의 장남이자 적자인 방재선씨. 그가 11월 16일 오후 서울지방검찰청에 조선일보 사주 일가에 대한 고발장을 접수했다. 그를 직접 만나 고발 내용과 이유를 들어 보았다.
불법해외재산도피, 외환관리법 위반, 사기ㆍ배임, 조세포탈, 명예훼손…. 방재선씨(54)가 고발장에 적시한 ‘무시무시한’ 죄명들이다. 고발장에 적힌 피고발인들의 이름은 조선일보 소유권자인 4명의 사주들. 방재선씨가 검찰에 철저한 수사와 의법처리를 촉구하며 제기한 그들의 범죄 혐의는 각각 다음과 같다.
방일영 조선일보 고문(사기ㆍ배임, 조세포탈 혐의), 방우영 조선일보 회장(불법해외재산도피, 외환관리법 위반, 명예훼손 혐의),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불법해외재산도피,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 방용훈 조선일보 이사 겸 코리아나호텔 사장(불법해외재산도피, 외환관리법 위반, 배임 혐의).
검찰에 고발한 방재선씨 수소문 끝에 만나
재산권 분쟁을 둘러싸고 방씨 혈족이 ‘형사고발’이라는 막다른 골목까지 오게 된 데는 ‘구원(舊怨)’의 전사가 있다.
방재선씨는 일제시대인 33년 조선일보를 인수한 계초 방응모씨가 환갑이 되어서야 얻은 첫아들. 그는 아버지 방응모씨가 한국전쟁 중 납북되어 행방불명된 당시, 6살에 불과했다. 조선일보 경영과 재산의 관리는 자연스럽게 당시 20대 중반의 방일영ㆍ방우영 형제가 맡게 되었다. 그들은 방응모씨가 양자로 데려온 방재윤씨(40년 사망)의 장남과 차남. 그러니까 방재선씨와는 삼촌ㆍ조카 사이다. 방재선씨와 이들 형제 사이에서 본격적인 재산권 분쟁이 벌어진 것은 지난 94년부터였다.(자세한 내용은 『말』 6월호 「방재선 인터뷰─` “나는 조카 방일영 형제에게 조선일보를 빼앗겼다”」 참고.)
11월 16일 밤 서울 시내 한 다방에서 수소문 끝에 찾아낸 방재선씨와 마주앉을 수 있었다.
─`방일영 고문을 사기ㆍ배임과 조세포탈 혐의로 고발했는데.
“방 고문은 자신의 장남 방상훈을 통해 상속권을 포기하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나에게 약속했다. 그러나 내가 77년에 포기각서를 쓴 이후, 최근까지 받은 것은 약 7억원이 전부다. 그것은 장남으로서 상속을 포기한 정당한 대가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상속권 포기각서를 쓴 이유는 무엇인가.
“방일영 방상훈 부자는 자신들이 양조부이자 양증조부인 방응모의 유업과 유산을 적법하게 상속하려면 상속세를 세 차례나 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세금 내다 집안이 다 망하겠다며 나에게 양보하라고 했다. 더욱이 그들은 족보와 호적까지 조작하여 나에게 돌아올 유산을 가로챘다. 방일영은 자신의 호적에서 전 호주인 방응모의 실종시기를 ‘50년’에서 ‘45년’으로, 응모의 ‘모(謨)’ 자를 ‘모(模)’ 자로 바꿨다가 내가 문제를 제기하자 황급히 고쳤다”.(이 부분은 『말』 7월호 「조선일보 사주의 호족조작 사례 확인」 참고.)
─`방우영 회장을 고발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나의 명예를 훼손했다. 나는 아버지 방응모의 호적에 분명히 장남으로 기록되어 있는 적자다. 그러나 그는 『조선일보사보』에 기고한 글에서 ‘방응모의 대가 끊겼다’, ‘방일영이 장손이다’라고 적었다. 이는 나의 사회생활과 대인관계에서 치명적인 모욕과 고통을 안겨 주었다. 더욱이 수 차례에 걸쳐 정정을 요청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방우영 회장의 해외재산 도피와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도 제기했는데.
“박정희 정권 당시 조선일보가 코리아나호텔을 건축한 적이 있는데, 그 때 일본으로부터 수백만 달러의 차관을 도입했다. 방우영은 그 과정에서 받은 커미션으로 미국 LA 북쪽에 위치한 팜데일 일대에 수십 에이커의 땅을 매입했다가 80년대에 팔았다. 만약 그 땅을 살 정도의 돈이 국내에서 유출됐다면 외환관리법을 위반한 것이 된다.”
─`방상훈 방용훈 사장 형제까지 해외재산 도피와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 등으로 고발한 이유는 무엇인가.
“방상훈은 미국에 유학중이던 73년 9월경, 미국 LA 번사이드 지역에 30가구 규모의 아파트를 약 30만 달러에 구입하여 아명(兒名)인 방갑중 명의로 소유한 적이 있다. 방용훈은 92년 1월 15일 LA에서 가장 유명한 부촌인 센트리 시티 소재 2131 센트리 파크 레인 3동 202호에 초호화 콘도미니엄을 가지고 있다. 물론 소유주는 그가 사장으로 있는 현지법인 ‘래디슨 윌샤 플라자 호텔’로 되어 있지만, 현지에서 알아본 결과 그가 미국 출장시 사용하는 개인 숙소임을 확인했다. 이는 결국 공금유용과 배임행위에도 해당된다는 말이다.”
─`당신은 어디서 이런 정보를 입수했나.
“내부 사정에 아주 밝은 사람들이다.”
─`누구인지 말해 줄 수 없나.
“그럴 수는 없다. 나는 그들을 보호해 줄 의무가 있다.”
─`앞에서 미국 현지에 가서 직접 조사했다고 했는데.
“지난 10월 13일부터 20일까지 미국에 가서 방일영 일가의 부동산 소유와 예금예치 현황에 대해 추적했다.”
─`조선일보 사주들이 미국 은행에 돈을 넣어 두었다는 말인가.
“그렇다.”
─`어느 은행인가.
“유니온 뱅크 오브 캘리포니아의 비버리힐스 지점이다.”
─`누구의 명의로 되어 있나.
“방용훈이다.”
─`언제부터 개설됐고, 예치된 액수는 얼마나 되나.
“71년 7월부터 개설됐고 현재 5백37만 달러(약 70억원)가 예치되어 있다.”
“비버리힐스의 한 은행에 방씨들 70억 예금”
─`그것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하게 알고 있나.
“내가 은행에 직접 가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유니온 뱅크 오브 캘리포니아에는 언제 갔나.
“귀국하기 전날인 지난 10월 19일이었다. 오전 10시 30분부터 12시까지 은행에 머물렀다.”
─`은행측에 당신을 어떻게 소개했나.
“예금구좌를 개설하려고 온 돈많은 한국 관광객으로 가장했다. 은행측에서도 VIP인줄 알고 전담 직원을 나에게 소개해 주었다.”
─`한국인이 미국 은행과 거래하려면 필요한 서류가 있을 텐데.
“본인의 사진이 붙어 있는 두 개의 신분증명서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여권과 국제면허증을 내 보였더니 국제면허증은 안된다고 했다. 주 정부에서 발행하는 신분증을 하나 받아 오라고 해서 다음날 가져오겠다고 했다.”
─`방용훈씨 명의로 예금구좌에 거액이 예치되어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아냈나.
“직원에게 내가 이 은행 VIP클럽 고객인 한국인 방용훈과 친척이라고 말했다. VIP클럽에는 1백만 달러 이상을 거래하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 사진과 이름이 인쇄된 내 여권을 보여 주면서 방용훈의 소개로 나도 이 은행과 거래하기 위해 왔다고 했다. 그 때부터 직원의 표정이 달라졌다. 경계심을 풀기 위해 ‘방용훈이 VIP클럽 전담창구는 2층에 있다고 하던데 맞느냐?’고 사전에 알고 있던 것들을 묻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다른 고객의 예금 내역을 쉽게 알려 주지는 않을 것 아닌가.
“직원은 내가 방용훈이라는 한국인 VIP와 친척이라는 것을 믿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내가 다음날이면 거액을 예치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매우 친절했다. 자연스럽게 ‘방용훈이 4백만 달러를 예치했다고 나에게 자랑까지 했다’고 넘겨짚어 보았다. 그녀는 깜짝 놀라면서도 여전히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방용훈의 영문 이니셜을 정확히 써 주면서 ‘한번 조회해 보면 알 것 아니냐’고 했다. 창구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있던 그 직원이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려 보더니 두 눈이 동그래졌다. ‘얼마나 되는데 놀라느냐’고 묻자 직원이 무심코 ‘5백37만 달러’라고 말했다. ‘3백만 달러는 정기예금으로, 나머지는 투자신탁으로 예치되어 있다’면서 ‘지난해 정기예금의 이자는 6.5%였고, 투자신탁 이익은 13%였다’고 했다. 그녀는 나에게 ‘그러니 당신도 가능하면 투자신탁을 많이 하라’고 충고까지 해 주었다.”
─`조선일보 사주들이 왜 미국 은행에 거액의 돈을 예금했다고 보는가.
“한국의 상류층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유사시 언제든지 외국으로 나갈 수 있도록 비자금을 마련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가 찾은 부동산과 예금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이다.”
“모든 것은 검찰의 의지에 달려 있다”
방재선씨는 직원이 자신에게 주었다는 책자(그는 프레스티지 클럽 회원에게만 주는 책자라고 했다.)와 명함을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Financial Service Officer’라는 직책이 쓰여 있었다. 그는 직원의 신원을 보호해야 한다며 손으로 이름을 가렸다.
─`은행 예금도 내부 제보자로부터 들은 정보인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나 이번 미국 현지 조사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낸 것은 아니지 않은가.
“민간인의 신분으로는 한계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검찰에 고발한 것이다. 국가 공권력의 힘이라면 모든 진실을 밝혀 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것이 정말 사실인가.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는가. 그리고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저들이 나를 그냥 놓아 두겠는가. 대통령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닌가. 검찰이 조선일보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의지를 가지고 조사한다면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다.”
─`당신은 지금 조선일보라는 거대한 언론권력과 맞서고 있는 것이다. 두렵지 않나.
“나는 떳떳하다. 두렵지 않다.”
한편 조선일보 회장실과 사장실에 전화를 걸어 고발 내용의 사실 여부에 대한 확인을 요청했으나 답변하지 않았다. 특히 사장실의 독자부장이라고 신분을 밝힌 한 간부는 “대답할 의무가 없다”고 말했다.
첫댓글 아무래도 한글을 잘 모르시는 분이신것 같네.. 옛끼 여보슈 '안티조선' 카페에 가서 '안티 MBC' 얘기하면 무슨 소리 나오겠소? 이거 광고성 찌라시 멜이랑 다를게 없구만~ 삭제요청!!
3대 족벌 영구 지도자 김정일이나 욕하세요
그럼 당신이 방재선 후원회나 만들지 그래? 방재선이가 조선일보 경영하면 쭈그리한테 굽신거리겠다고 약속이라도 했다디? 재산 탐나서 그런거지. 내가 조선일보 사장이 누구라서 그 신문 보는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