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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간 노래 小夜曲을 부르면 생각나는 追憶 !
남인수 - 애수의 소야곡
(Nam In Soo - Sorrowful Serenade, 1938)
https://www.youtube.com/watch?v=0dYjI4ph6w4
哀愁(애수)의小夜曲(소야곡)
小夜曲 소야곡= 저녁 무렵의 음악(音樂)이라는 뜻으로, 연연한 음악(音樂). 특(特)히 사랑하는 연인(戀人)의 창 밑에서 부르거나 가벼운 기타로 연주(演奏)하는, 사랑을 구(求)하는 노래.
1959년 봄 筆子(필자)는 巨濟島(거제도) 河淸(하청)高等學校(고등학교)를 다니다가 長承浦(장승포)에 있던 海星(해성)高等學校(고등학교) 3學年(학년)을 越班(월반)하여 다니다가 사라호 颱風(태풍)을 빌미로 海星(해성)高等學校(고등학교) 當時(당시) 校長(교장) 先生(선생)님으로 게시던 최창일 교장 선생님에게 찾아가서 관포에서 장승포 까지 통학하기가 너무 힘들어 진해 고모님이 게시는 진해 고등학교를 다닐수 있도록 전학증을 만들어 달라고 찾아 갔더니 최창일 교장 선생님의 도움으로 진해를 갔다가 진해 고모님의 거절로 할수 없이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여 간곳이 서라벌 연듣 영화과를 입학하여 열심히 다녔다.
연극영화과에서는 재주 많은 친구들이 많았다. 미 八(팔)軍(군)에서 키타 演奏(연주)로 이름을 날리던 학급반 親舊(친구)의 키타 솜씨에 魅了(매료)되어 나도 박시춘(朴是春) 樂團(악단)에서 키타를 演奏(연주) 하던 마이너씨가 삼각지(Samgakji, 三角地)에서 마이너 키타 講習所(강습소)에 찾아가서 열심히 키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學校(학교)에서도 듣지도 못하던 音樂(음악) 理論(이론)을 배우면서 왈쓰(Waltz) 노래와 트롯트(Trot)를 배웠다. 그 중에 타향살이, 비나리는 湖南線(호남선), 哀愁(애수)의 小夜曲(소야곡) 등등 배우고 겨울 放學(방학)을 이용해 고향 巨濟(거제) 長木(장목)을 갔더니 海星(해성) 高等學校(고등학교) 校長(교장)을 하시다가 國會議員(국회의원)에 出馬(출마) 하셨다가 落選(낙선)하시고 長木(장목) 中學校(중학교)에서 校長(교장) 先生(선생)님으로 在職(재직) 하신다기에 校長(교장)先生(선생)님을 찾아 人事(인사)드리러 갔더니 舍宅(사택)으로 불러 갔더니 키타를 치고 계셨다.
그러시면서 大學(대학) 時節(시절)에 長承浦(장승포)에서 콩쿠르 大會(대회)에 나가, 이부풍 作詞(작사), 박시춘(朴是春) 작곡, 남인수(南仁樹) 선생
님의 노래 “애수의 소야곡”으로 1등하셨다고 자랑하시어, 노래를 부르셨는데, 키타 반주는 내가 해 드리겠다고 하여 키타를 쳤다, 그랬더니 자네가 어떡해 키타를 그렇게 잘 치느냐고 물어 “校長(교장)先生(선생)님께서 轉學證(전학증)을 만들어 주셔서 서울 서라벌 演劇映畵科(연극영화과)를 다니면서 박시춘(朴是春) 樂團(악단)에서 運營(운영)하는 ‘ 서울 三角紙(삼각지) 마니너 키타 講習所(강습소)’에서 배웠다고 하였다고 하니, 비나리는 湖南線(호남선). 울어라 키타줄, 눈물젖은 豆滿江(두만강). 등등을 키타 치면서 함께 노래를 부르자 師母(사모)님께서 점심을 차려 주셔서 맛있게 먹고 나오면서
作別(작별) 인사로 師母(사모)님과 함께 記念(기념) 撮影(촬영)한 寫眞(사진)도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追憶(추억)이다.
小夜曲(소야곡)은
저녁 무렵의 음악(音樂)이라는 뜻으로, 연연한 음악(音樂). 특(特)히 사랑하는 연인(戀人)의 창 밑에서 부르거나 가벼운 기타로 연주(演奏)하는, 사랑을 구(求)하는 노래로 .......
〈애수의 소야곡(哀愁의 小夜曲)〉은 1937년 말에 발표된 日帝(일제) 强占期(강점기)의 트로트 曲(곡)이다. 후에 '가요 황제'로 불리게 되는 남인수(南仁樹)의 출세작이자 대표곡으로 유명하다.
박시춘(朴是春) 작곡, 이부풍 작사의 노래다. 박시춘(朴是春)은 남인수(南仁樹)가 1936년 불렀던 〈눈물의 해협〉을 이부풍의 노랫말로 개사한 후 재취입하도록 하여 국민적 히트를 기록했다. 이후 大韓民國(대한민국) 光復(광복) 이후까지 다수의 히트곡을 낸 박시춘(朴是春)-남인수(南仁樹) 콤비가 처음 만나 큰 成功(성공)을 거둔 노래이며, 日帝(일제) 强占期(강점기) 最高(최고) 人氣(인기)의 음반 회사 중 하나인 오케레코드는 이 곡을 계기로 전성기를 謳歌(구가)했다.
"운다고 옛 사랑이 오리오마는"으로 시작되는 이 노래의 가사는 떠나간 戀人(연인)을 그리면서 憂愁(우수)에 젖어 있는 체념적인 내용이다. 서정적인 가사와 고요하고도 애절한 가락이 남인수(南仁樹) 특유의 미성과 잘 어우러져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다. 1962년 40대 중반의 나이로 사망한 남인수(南仁樹)의 葬禮式(장례식)에서도 〈애수의 소야곡〉 연주곡이 葬送曲(장송곡)으로 쓰였다.
같은 멜로디로 현해탄의 이별을 다룬 〈눈물의 해협〉은 남인수(南仁樹)가 姜文秀(강문수)라는 이름으로 부른 데뷔곡이었는데, 시에론레코드를 통해 發賣(발매)되었으나 히트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사만 바꾼 노래가 성공한 이례적인 예로 남아 있다.
在日僑胞(재일교포) 박찬호가 지은 《한국가요사》에서 〈목포의 눈물〉등과 함께 1930년대를 대표하는 노래 10곡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이 시기에 사랑받은 노래로는 드물게 식민지의 설움과 시대적 아픔보다는 남녀간의 사랑에 초점을 맞춘 노래로 꼽힌다.
參考(참고)자료
이동순 (2007년 7월 12일).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10] 가요 황제'로 불린 가수 남인수”. 영남일보. 2008년 2월 9일에 확인함.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이근태. “가요 황제 남인수”. 가요114. 2007년 1월 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2월 9일에 확인함.
脚注(각주)
1.↑ 김규원 기자 (1997년 12월 18일). “'사랑'을 빼고 무엇을 말하랴”. 한겨레21. 2008년 2월 9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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分流(분류): 트로트 노래
남인수(南仁樹)의 노래
日帝(일제) 强占期(강점기)의 노래
韓國語(한국어) 노래
1937년 노래
세레나데(영어: serenade, 이탈리아어: serenata; 소야곡; 小夜曲)
세레나데(영어: serenade, 이탈리아어: serenata; 소야곡; 小夜曲)는 17-18 세기에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연흥을 위한 가벼운 연주곡을 일컫는다. '저녁의 음악'이라는 뜻으로, 본래는 옥외 음악이었던 것이 뒤에는 연주회용 악곡으로 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세레나데라는 이름 이외에 디베르띠멘또 (Divertimento 여흥, 기분전환) 노뚜르노 (Notturno 야상곡), 카사티온 (Kassation 휴식) 등으로 불렸으며, 이 다양한 명칭에 관련한 작은 일화로서 하이든은 자신의 현악 4중주 (1 - 12번)을 원래 Kassation라 부르다가 후에 Divertimento로 바꾸어 불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보통의 Divertimento는 2악장에 미뉴엣을, 3악장에 느린 악장을 넣는 반면에 세레나데는 보통 그 순서가 바뀌어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성악의 세레나데에서는 해거름에 사랑하는 여성이 기대고 있는 창가에서 남성이 부르는 사랑의 노래이며, 기악에서도 해거름의 휴식 때에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위하여 만든 음악을 세레나데라고 한다. 그 뒤로 관현악 모음곡과 고전모음곡의 중간적 성격을 갖는, 악장의 개수가 많은 세레나데도 쓰였다. 모차르트의 7곡의 세레나데와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1781)는 이 종류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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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성악곡
악곡의 형식
탄생 100주년을 맞는 작곡가 박시춘, 삶과 음악의 시대별 재조명 & 재평가.
- 우리나라 가요에 있어 고유명사가 아닌 대명사 격인 이름, 박시춘
‘박시춘’이란 이름은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에 있어서 고유명사가 아니라 대명사 격인 이름이다.
작곡가 박시춘, 그리고 가요1세대 작곡가들인 전수린, 손목인, 김해송 등
의 등장은 마침내 우리나라에서 민요의 자리에 대중가요가 대신 자리하게 되는 신문화의 새 장(章)이 열렸음을 의미한다.작곡가 박시춘 선생이 남긴 3천 여곡에 달하는 노래와 악상은 근대 한국 대중가요의 초석이자 근간을 이루고 있고 실제로 옛가요 전문 프로그램인 KBS-1TV '가요무대‘에서 8백회 기
▲민족의 격동기와 함께 시대의 아픔을 어루만져준 작곡가 박시춘 선생▲
념으로 펴낸 ‘가요무대 100선집’에는 박시춘 선생의 곡이 무려 15곡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80년대에 mbc가 조사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 20선’에 무려 6곡이 포함되었을 정도였다.
시대의 격동기를 관통하며 국민들로부터 여전히 애창되어온 그의 노래는 이렇듯 여전히 한국인의 가슴 속에 살아 있다.
올해로 탄생 1백주년을 맞는 작곡가 박시춘 선생을 기리는 크고 작은 사업이 현재 진행 중이다. 작곡가 박시춘 선생의 시대별 삶과 음악을 재조명해본다.
우리나라 가요에 있어 고유명사가 아닌 대명사 격인 이름, 박시춘
‘한 나라의 문화를 가장 빠르게 이해하려면 먼저 그 나라 국민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를 배우라’는 말이 있다. 그러한 점에서 박시춘 선생, 그리고 그가 남긴 노래는 바로 우리나라를 알리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이기도 한 셈이다.
박시춘 선생의 첫 작곡 데뷔곡은 1935년 8월에 발표한 '희망의 노래(홍개명 사/김창배 노래)'다.
시춘(是春), 이 이름의 의미가 '늘 봄'이라는 뜻. 작곡 데뷔작 ‘희망의 노래’ 제목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기도 하다.
이어 일제시대, 그 암울한 시대에 민족의 애환을 달래준 ‘애수의 소야곡’, 광복의 기쁨을 노래한 ‘럭키 서울’, 남북 분단의 아픔을 그린 ‘가거라 삼팔선’, 그리고 6.25 한국전쟁 당시에 발표된 ‘전우야 잘 자라’를 비롯해 당시 피난민들에게 삶에 대한 용기와 희망을 북돋워준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 일제 강점기로부터 8.15 광복, 6.25 한국전쟁을 거쳐 전쟁이 휩쓸고 간 잿더미 위에서 그 상흔을 복구하려는 50, 60년대 우리네 궁핍했던 삶의 현장에 이르는 격동기에 이 노래들은 격동기를 관통, 시대의 아픔을 함께 했다.
특히 어려울 때일수록 힘이 되어준 이 노래들은 지친 국민들에게 전해주는 일종의 응원가였다. 박시춘 선생은 대중가요의 힘이 얼마나 큰 지를 잘 알려주신 인물이기도 하다.
2. 유년시절, 풍류 속에서 자라며 예인 기질 눈떠
박시춘 선생은 1913년 10월 28일, 경남 밀양에서 출생했다. 본명 순동(順東).
선친 ‘남포’는 밀양에서 5백 섬지기 지주이자 가무(歌舞)를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권번(券番)'을 운영했던 분으로 특히 당대의 명창 송만갑, 이화중선, 이동백 등과 어울릴 만큼 국악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었다. 특히 구전으로 불리던 '밀양아리랑'의 가락을 채보, 지금의 형태로 정리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이렇듯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았음직한 음악적 유전 인자, 그리고 철나기 전부터 풍류 속에 자랐던 성장 배경이 그의 예인 기질을 일찌감치 눈 뜨게 했을 것임이 충분히 짐작된다.
이것이 그의 멜로디 속에 우리의 민요가락이 지속적으로 발견되는 이유이고 또 우리 전래의 전통가락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해 ‘한국적 트로트’라는 박시춘만의 멜로디를 완성한 단초이기도 하다.
어린 순동, 즉 박시춘 선생이 보통학교 1학년 때 부친이 타계, 한순간 가세가 기운다.
그러나 이후 우리 가요계에 대명사로 우뚝 선 선생의 위치가 그러하듯 이 소년은 유년시절부터 남달랐다.
어느 날 어린 순동은 한 카페에서 들려오는 유성기 소리에 발을 멈춘다. 처음 듣는 이 신기한 소리에 매료된 소년은 결국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매일 듣기 위해 카페에서 잔심부름을 거들기 시작했고 또 공짜로 영화구경을 하기위해 영화전단지를 뿌리고 다니는 등 음악광, 영화광이었다.
훗날 박선생은 이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통해서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가난의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결국 이 소년은 불과 열두 살 때 카페 주인을 따라 어머니 몰래 고향을 떠나면서 험하고 긴 음악여정을 시작한다.
열네 살 되던 해부터는 전국을 돌며 영화를 상영하는 순업대를 따라 다니며 낮에는 북을 치고 밤에는 영사기를 돌렸고 또 쉬는 동안을 이용해 나팔, 바이얼린 등 악기를 익히며 유랑극단에 적응해나갔다.
떠돌이 순업대 생활 중 많은 가요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당시 시에론레코드사에서 문예부장을 맡고 있던 이서구, 강사랑, 이봉룡 선생 그리고 박영호 선생 등을 알게 되면서 결국 작곡가로 입문, 당시 조선 최대 음반사인 오케레코드 전속작곡가로 발탁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대표곡 ‘애수의 소야곡’을 비롯해 ‘꼬집힌 풋사랑’, ‘눈 오는 네온가’, ‘항구마다 괄세더라’, ‘울며 헤진 부산항’, ‘서귀포 칠십리’ 등의 서정적인 멜로디부터 ‘왕서방 연서’, ‘총각진정서’, ‘세상은 요지경’ 같은 만요, 그리고 ‘신민요 풋난봉’, ‘산호빛 하소연’ 등 신민요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노래들을 발표, 손목인, 김해송과 함께 오케레코드 3대 작곡가로 자리매김, 달러박스로 부상하며 전성기를 구가한다.
이 무렵 오케레코드를 통해 음반으로 발표한 곡은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도 현재 280 여 곡이 넘는다.
당시 열악한 환경을 감안한다면 대단히 왕성한 활동을 펼친 것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또한 당시 무대에서만 불리어지던 노래들까지 합친다면 곡수는 그보다 훨씬 많아질 것이다. 이러한 우리 가요 초창기의 소중한 자료들도 더 늦기 전에 발굴, 채보해서 우리 가요사를 제대로 복원해야 함도 중요한 연구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점에서 결국 우리 가요사 연구의 끝은 ‘박시춘 작곡 총 목록집’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특히 박시춘 선생의 대표곡으로 사랑받고 있는 노래, 나라 잃은 슬픔을 탄한 명곡 ‘애수의 소야곡’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참고로 이 노래의 원곡은 ‘눈물의 해협’으로 처음 발표된 노래다. 이 노래 역시 당시 나라 잃은 슬픔을 극명하게 노래하고 있다. 참고로 ‘눈물의 해협’의 가사는 이렇다.
현해탄 초록물에 밤이 나리면
임 잃고 고향 잃고 헤매는 배야
서글픈 파도 소리 꿈을 깨우는
외로운 수평선에 깊어 가는 밤
임 찾어 고향 찾어 흐른 지 십년
몸이야 시들어도 꿈은 새롭다
아득한 그 옛날이 차마 그리워
물 우에 아롱아롱 님 생각이다
꿈길을 울며 도는 파랑새 하나
님 그려 헤매이는 짝사랑인가
내일을 묻지 말고 흘러만 가랴
님 없는 이 세상에 기약 풀어라
(김상화 작사, 박시춘 작곡, 1936년, 시에론레코드사)
선생은 작곡 활동 뿐 아니라 '조선악극단(朝鮮樂劇團-Okeh레코드사의 직영 단체)'에서 ‘아리랑보이스’를 결성, 현경섭, 송희선, 김해송 (玄警燮 宋熙善 金海松), 이복본 등과 함께 중창과 판토마임, 그리고 악기 연주를 겸한 여흥을 무대에서 펼쳐 보일 정도로 만능엔터테이너였다.
아울러 전국 각지는 물론 멀리 만주로까지 이어지는 공연활동을 통해 고향을 잃고 떠도는 민족의 설움을 보다듬어 주었다. 이러한 박선생의 활동은 이후 더욱 빛을 발한다.
▲ 열악한 시대에 펼쳐보였던 음반 취입광경. 지휘자는 박시춘 선생 ▲
3. 광복, 그리고 이념의 혼란기
우리의 말과 노래도 함께 해방된 1945년 광복.
광복 이후 최초의 히트가요라 불리는 ‘신라의 달밤’, 그리고 남북 분단의 아픔을 그린 ‘가거라 삼팔선’, ‘고향초’ 등이 이때 만들어진다.
‘신라의 달밤’은 본래 일제 강점기 당시에 처음 만들어진 노래로 원곡의 제목은 ‘인도의 달밤’이었다. 무대에서만 불리어지던 이 노래는 박시춘 선생으로부터 ‘이제 광복도 되었으니까 우리 것을 되찾겠다.’는 의지로 작사가 유호 선생을 통해 가사와 노랫말을 바꾼 뒤 신라를 배경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바로 일제에 의해 잃었던 우리의 역사와 말을 되찾기 위한 의지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 열악한 시대에 펼쳐보였던 음반 취입광경. 지휘자는 박시춘 선생 ▲ |
이 ‘신라의 달밤’의 빅히트를 계기로 박선생은 직접 럭키레코드사를 설립한다.
럭키 1호 음반인 '신라의 달밤'을 시작으로 '유호-박시춘-현인' 콤비가 탄생하고 '고향 만 리'-'비 나리는 고모령'-'럭키 서울' 등을 잇달아 히트시킨다. ‘고향초(송민도)’, '낭랑18세(백난아)' 등도 모두 이 시기에 발표된 명곡들이다.
이 ‘신라의 달밤’의 빅히트를 계기로 박선생은 직접 럭키레코드사를 설립한다.
럭키 1호 음반인 '신라의 달밤'을 시작으로 '유호-박시춘-현인' 콤비가 탄생하고 '고향 만 리'-'비 나리는 고모령'-'럭키 서울' 등을 잇달아 히트시킨다. ‘고향초(송민도)’, '낭랑18세(백난아)' 등도 모두 이 시기에 발표된 명곡들이다.
당시 우리나라 음반 산업은 일본 레코드사들이 모두 철수한 뒤라서 이 땅은 말 그대로 불모지였다. 물자 부족으로 인한 열악한 환경 또한 매우 어려웠지요. 당시 함께 럭키레코드사 문예부장으로 계시던 작사가 유호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박선생은 심지어 참기름 짜던 압축기에 일본인이 버리고 간 음반을 고물상에서 수집해 판을 찍었다고 한다. 일본SP음반 위에 압축기를 눌러 판을 찍어냈기 때문에 바늘이 몇 바퀴 돌다보면 그루브, 즉 홈이 닳아 노래 도중에 갑자기 일본노래가 튀어나오기도 했다는 우스갯소리도 생생히 전한다.
보통 사람들이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이러한 땀과 열정은 지금의 한류로 성장하게 된 우리 가요의 원동력이 되어준 것이리라.
광복 이후 47년 5월, JODK (이후 중앙방송국, 현 KBS)의 전속악단의 상임 지휘자를 맡기도 했고 가수 남인수와 함께 만든
'칠천국(七天國)', 그리고 ‘은방울쇼' 단체를 구성해 전국 순회공연을 다닌 것도 이 무렵으로 박선생은 광복과 더불어 비로소 자신의 의지를 한껏 펼
쳤다.
보통 박시춘 선생은 한 시대에 걸쳐 1인 몇 역, 그 이상의 활발한 활동을 펼친 것이다.
▲ 민요, 재즈, 트로트 등 다양한 장르를 선보였던 30년대 활동기록들▲
4. 진중가요로 전환, 전, 후방에 함께 울려 퍼진 노래들
‘좋은 군가는 대포소리에도 지지 않는 예술적 무기’
1950년, 한국전쟁 와중에도 그의 창작열은 불꽃처럼 빛을 발한다. 전 국토의 4분의 3이 전쟁터로 변하고 전 국민이 전쟁터로, 또 피난민으로 내몰리던 이때 연예인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모두들 군예대에 들어가 ‘군번 없는 용사’로 병사들과 함께 전쟁터를 누볐다.
박시춘 선생은 이때 국방부 정훈국 직속의 문예중대 2소대장과 제주도 모슬포에 위치한 육군 제1훈련소 군예대장을 맡아 활동했다.
전쟁 중에도 그의 창작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육군 제1훈련소가'를 비롯해 ‘전우야 잘자라', ’승리의 노래‘, ’님 계신 전선' '전선야곡' 등을 발표, 군의 사기를 높였고 아울러 전쟁터에 가족을 떠나보내야 했던 가족들이 심정을 노래에 담았다. 이러한 노래들은 일선과 후방의 연대감을 고취시키면서 포성소리와 함께 한반도에 넘쳐흘렀다.
‘좋은 군가는 대포소리에도 지지 않는 예술적 무기’임을 증명해보인 이 진중가요들은 전쟁에 상처 입은 국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이전 박시춘 선생의 가락은 매우 서정적이고 또 만요적인 요소가 가득했다면 이 무렵은 진중가요를 통해 힘차고 남성적인 변화한다. 불과 몇 년 차이로 박시춘 음악은 시대상황에 따라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당시 음반광고 전단지
박시춘 선생은 노래를 만드는 데 늘 의미를 부여했다. 광복을 기념해 복고풍으로 만든 노래 '신라의 달밤', 해방의 기쁨을 노래한 '럭키 서울', 그리고 한국전쟁 중에 만들어진 ‘전우야 잘자라’ 등이 그렇듯 제주 모슬포의 육군제1훈련소 시절에는 '제주도 온 김에 이곳에 노래하나 떨어뜨리고 가자'고 작사가 유호선생과 의기투합해 만든 노래가 ‘삼다도 소식’, 그리고 잿더미 위에서 삶에 대한 위지를 심어준 ‘굳세어라 금순아’, 피난 수도 부산을 떠나며 만든 노래가 '이별의 부산 정거장'이다. 이 노래들은 모두 역사의 현장에서 생생히 기록된 문화유산들이다. 한국사의 비극을 노래로 증언한 우리 근대사의 소중한 유산이기도 합니다. 이 노래들은 당시 어느 신문해설이나 삐라 문구보다도 현장이 살아 숨 쉬는 빛나는 대중문화의 산물인 것이다.
군 위문을 위해 155마일 전선을 스물일곱번이나 누비는 등 '군번 없는 지휘관'으로써 군사기 고취에 큰 공헌을 세웠던 박시춘 선생은 이후 종군연예인공로패, 문화공보부장관 공로상(1967년), 제6회 대한민국 연예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5. 영화에는 반드시 주제가가 있어야 한다는 등식 만들어
전쟁의 상흔이 채 가라앉지 않았던 50년대 후반.
1958년에는 오향영화사를 설립한다. 특히 '오향'은 제작하는 영화마다 영화주제가를 삽입, 영화음악의 또 다른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남성 넘버원', '오부자의 노래', '가는 봄 오는 봄' 등이 그 것으로 이를 계기로 영화에는 반드시 주제가가 있어야 한다는 등식을 제시하기도 했다.
전 가족이 영화에 출연하는 기록을 남긴 '딸 칠형제’를 비롯해, '가는 봄 오는 봄', '청춘쌍곡선' '오부자' ‘육체의 길’ 등으로 승승장구하던 영화사는 '장미의 곡(曲)' 개봉 날 터진 4.19로 인해 관객동원에 실패하면서 촬영소가 부도가 나는 등 악재가 겹치면서 몰락, 장충동 집을 팔아 빚을 갚아야 했고 급기야 연탄불을 피워 유서를 쓰는 소동까지 벌어지는 가슴 아픈 일화도 있었다.
70년대 들어 이후 산업화와 세태 변화를 잘 묘사한 대중문화의 기록자로 남을 업적은 영화주제가 '돌지 않는 풍차' 그리고 '일자상서' '너 하나만을' 등의 히트곡을 마지막으로 그는 이후 본격적으로 창작인들을 위한 권익보호 활동에 앞장 선다.
▲ 70년대 월남위문공연 중 한 컷. 우측은 음악과 함께 평생 반려자가 되어주었던 부인 김예비(영화배우 당시 예명 김현숙) 여사▲
6. 음악적 선구자, 가요인들의 권익을 위해 앞장
광복 후 방송국 경음악 단장, 63년 10월에 창립된 연예협회 초대 이사장, 한국가요작가동지회장 등 그는 음악활동 외에도 연예계의 권익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또한 1982년에는 대한민국 대중가요계 인물로는 처음으로 문화훈장 보관장을 수여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만큼 음악 실력이 탁월했고 사회적 영향력과 공헌도가 높았으며 동시에 수많은 대중가요인들의 추앙을 받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만년에는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고 4년의 세월을 보냈는데 자연히 바깥출입이 부자유스러웠지만 원로작사가, 작곡가들의 모임인 '한국가요작가동지회'에 참석하면 특유의 해박한 '풍류 적 객담'으로 모든 이들을 즐겁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대중들, 특히 작가들과 얼마나 따뜻한 교류를 갖고 지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는 아무리 간단한 가락이라도 되씹어보고 다시 다듬고 하는 진지한 태도로 작품에 임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특징 중 하나는 노래의 멜로디, 물론 노래의 전주나 간주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쓴다는 것. 노래가 주는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 전주곡이라고 늘 강조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전해진다. 아버지에 길을 따라 버클리음대에서 작곡을 전공한 막내아들 박재정씨는 ‘아버지 노래의 특징은 완벽하고 짜임새 있는 곡 구성’이라며 ‘전주나 간주에까지 완벽하게 형식을 갖췄기 때문에 편곡이 특히 어렵다’는 점을 토로하기도 했다.
실제로 박시춘 선생은 편곡을 제3자에게 맡기더라도 반드시 세심한 부분까지 본인이 마지막 손질하고 다듬는 작곡가였던 그는 96년 6월30일 저녁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영결식은 '사단법인 한국연예인장'으로 치러졌다.
7. 우리 민족의 가슴에 영원히 울려 퍼질 박시춘 가락
온 국민에게 사랑받는 그의 노래들은 비교적 최근에 와서도 '낭랑 18세', '세상은 요지경', '봄날은 간다', '신라의 달밤’, ‘굳세어라 금순아’ 등이 꾸준히 리메이크, 또다시 히트될 정도로 박시춘 선생의 멜로디와 화성, 리듬감에서 보여준 탁월한 재능은 세대와 시대를 초월한다.
사회적 관심에서 멀어진 적이 없을 정도로 시대의 아픔과 함께 해온 그의 노래, 한국인들만의 정서를 묶은 가락을 찾기 위해 평생을 바친 인물, 그가 남긴 주옥같은 노래들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대중예술의 소중한 유산이기도 하다. 그가 없는 한국 대중예술, 그리고 그의 노래가 없는 우리 가요사를 말할 수 없다.
이렇듯 시대의 흐름을 국민들과 함께해온 선생의 업적이 결코 헛되지 않게 평가되어지길 바란다.
아니 평가, 그 이전에 그가 남긴 노래들은 곧 우리 국민들과 함께 해온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 한국작가동지회 회원들과의 한 때 ▲ |
선생은 73년10월 17일부터 나흘간 대한극장에서 가진 ‘회갑기념, 작곡생활 42주년 공연-박시춘 Show 대연예제전’ 무대에서 이러한 말을 남겼다.
“나의 이 노래를 기꺼이, 그리고 영원히 사랑했던 이 땅의 국민들께 드립니다.”라고.
박시춘 선생은 우리 가슴에 영원히 남을, 국민작곡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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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승철 ~ 월 2020-12-14 오후 9:14 ~ 옛날 노래는 추억이 담긴 노래입니다. 그때 그 시절이 그리워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