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52
7월15일[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연중 제14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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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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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MXHVaB9zFH4 $$(지형규 사도 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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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우리 교회의 모습!>
돈이라는 것, 참 묘한 존재입니다. 어느 정도 지니고 있어야, 한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품위를 지킬 수 있고, 동료들과의 친교도 나눌 수 있고, 친척들이나 가족들에게 인간도리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모릅니다.
오늘날 복음 선포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청소년 사목을 활성화시키고자 한다면 재정적 안정성은 필수입니다. 아이들에게 가는데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가서,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만 한다면, 아무런 결실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좋아할 맛있는 간식도 챙겨가야 아이들 눈이 휘둥그레지며 관심을 표명할 것입니다. 신나게 찬양할 수 있는 찬양 사도단도 구성하려면 악기나 음향 시스템도 마련해야 할 것이고, 끝나면 식사라도 제공해야 힘이 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무나도 당연히 실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 활동을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수중에 땡전 한 푼 지니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 10,9-10)
예수님의 지나친 강조는 아마도 나약한 우리 인간의 실상을 잘 파악하고 계셨기 때문이리라 여겨집니다. 어영부영하다 보면 순식간에 가장 본질적인 사명인 복음 선포가 뒷전이 됩니다. 통장 잔고가 많다 보면 자연스레 어디 뭐 좋은 거 없나 두리번거리게 됩니다.
당시 여행 중에 강도나 산짐승들을 만날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방어용 지팡이 하나는 기본이었습니다. 그런데 최후의 생존 수단인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긴 여행길에 많은 돈은 아니어도 만일을 대비한 비상금은 필수입니다. 그런데 비상금 한 푼 조차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에게 럭셔리한 부자의 모습이 아니라 가장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떠날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이 자신의 힘이나 세상의 힘을 믿기 보다는 주님 섭리의 손길에 맡기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 유사한 말씀이 ‘열두 사도의 가르침’ 11장 6절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사도가 떠날 때는 다른 곳에 유숙할 때까지 필요한 빵 외에 다른 것은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사도가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교우들의 희사나 후원을 마다하고 스스로 천막 짜는 노동을 해서 생활비와 전도 여행 경비를 마련했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오늘날 우리 교회와 수도회를 돌아봅니다.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모습의 부유한 모습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 교회는 청빈의 삶, 무방비의 삶, 머리 둘 곳조차 없는 떠돌이로서의 삶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철저히 정착하고 안주했으며, 충분한 기득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복음적 청빈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몇몇 수녀회 수녀님들을 바라보며 실낱같은 희망을 지닙니다. 그분들은 가장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들보다 덜 일하고, 덜 고뇌하고, 더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사는 생활을 큰 죄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매년 연말이 되면 무조건 공동체 통장 잔고를 제로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게 웬 떡이냐, 하고 남은 돈을 흥청망청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본부로도 보내고, 더 어려운 곳으로도 보내는 것입니다. 저희 공동체도 그분들 따라 매년 6월 말, 12월 말이면 잔고를 제로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사목 활동 지역은 언제나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이 살아가는 거주 지역입니다. 그 지역이 개발되어 부촌으로 탈바꿈하면 아무 미련없이 또 다른 가난한 지역으로 떠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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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대는 존귀합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메시아로서 다양한 모습 가운데 가장 제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감동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절망가운데 앉아있는 한 인간을 일으켜 세우시는 모습입니다.
살기등등한 살인마들, 당장이라도 던지려고 움켜쥐고 있는 큰 돌, 그 한가운데 내동댕이쳐져 있는 한 가련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자칫 잘못 끼어들다가는 같이 돌팔매질당할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목숨까지 내거십니다. 당신 온 몸으로 그녀를 보호하시며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오도록 일으켜 세우십니다.
절대 해서는 안 될 나쁜 일인 줄 뻔히 알면서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따가운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세관에 앉아있던 한 측은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당시 세리들은 하류인생에 대표 인물이었습니다. 오늘날 조직폭력배와 다름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취미는 살상이요 특기는 공갈협박이었습니다. 잘못 건드리다가는 뼈도 못 추리는 상종하지 말아야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세리에게 다가가십니다. 새 인생을 제안하십니다. 그를 암흑의 세상에서 광명의 세상으로 건너오게 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짧은 공생활 기간 내내 틈만 나면 하셨던 일이 깊은 슬픔에 잠겨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이었습니다. 심연의 고독에 힘겨워하고 있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일이었습니다.
살아있지만 진정으로 살아있지 못하고 점점 죽어가고 있던 사람들에게 새 생명을 부여해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소중하고 아름다운 예수님 사도직의 첫 단계는 인간 각자가 지니고 있던 고유한 가치를 되찾아주는 일이었습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자존감을 회복시켜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대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수많은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새롭게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그대의 삶은 분명 가치가 있습니다. 그대의 인생은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대는 있는 그대로, 살아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 사랑을 듬뿍 받고 있습니다. 그대는 존귀합니다. 그대는 일어서야 합니다.”
주변을 돌아보니 많은 분들이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방이 높은 벽으로 가로막힌 막다른 골목에 주저앉아 울고 있습니다. 울며 애통해하는데 그 누구 하나 위로하는 사람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들, 그분의 사상, 가치관, 행동방식이 삶의 기준이 되어야할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2천 년전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손을 내밀어야겠습니다.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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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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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어둠 속에서 말씀하시는 주님>
김창옥 강사가 오랜 강의로 지쳐 우울증이 걸려있을 때였습니다. 소통과 치유 등을 주제로 강의했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은 병들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돈도 명예도 인기도 부질없이 느껴졌습니다. 길을 찾고 싶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노(老) 수사신부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신부님은 침묵을 배우라고 했습니다. 침묵을 어디서 배우냐고 묻자 수도원에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프랑스 마콩이라는 수도원에 들어가 잠시 피정을 하라는 권고였습니다. 하도 절박했기에 그는 생전 처음으로 2주의 휴가를 내서 프랑스 시골에 있는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는 어차피 말이 안 통하니 침묵을 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짧지만 진실 되게 자신과 대화해 보라고 했지만 자신에게 말을 걸기가 두려웠습니다. 며칠이 지나 그날도 과수원에 앉아 있는데 마음 깊숙한 곳에서 이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 너 여기까지 잘 왔다!” 별말이 아니었지만 그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는 그 위로를 그렇게 갈망하고 있었는데 아무도 그에게 그런 말을 해 준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말을 많이 해야 하는 강사가 자신이 믿지도 않는 종교가 운영하는 외국 피정 집에 귀중한 2주간의 휴가를 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절실하면 얻게 됩니다.
대부분 길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길을 찾을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방황을 끝내고 싶다고 말하다가도 길을 제시해주면 시큰둥합니다. 방황을 끝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혹은 자기 방식으로 끝내고 싶은 것입니다. 누군가와의 만남을 끊임없이 갈망하고 있지만 또한 끊임없이 그 만남을 두려워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누군가와의 만남은 나 자신과 헤어짐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하느님이 있다는 증거를 대 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대통령의 옷까지 벗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먼저 대통령의 옷을 벗지 못하면 하느님은 만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대통령의 옷을 벗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먼저 나를 벗어야 그분을 입을 수 있습니다. 먼저 내가 생각을 멈춰야 그분이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다.
성경이나 영성가들의 말에 의하면 하느님과의 만남은 늘 어두운 곳에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분은 빛이시기 때문에 어둠에서만 구별될 수 있습니다. 내 자신이 어둠임을 인정할 때 그 빛이 보입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말씀은 어둠을 비추는 빛이었습니다. 하느님은 항상 어둠속에서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둠이 되지 않는 이상 우리 안에서 그분의 목소리를 찾아낼 수 없습니다.
김창옥 강사는 자신을 어둠 속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에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전히 자신 스스로 빛을 찾아내겠다고 돌아다녔다면 자신의 우울증을 끊어버렸던 저 목소리는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힘들고 어렵고 방황할 때, 어디로 가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할 때,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싶을 때, 나를 어둠 속으로 밀어 넣어야 합니다. 어둠이란 십자가의 죽음을 말합니다.
이것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순하게 홀로 멈추어서면 됩니다. 광야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을 생각하면 됩니다. 이것이 어둠입니다. 세상 것에서 빛을 찾지 않는 것이고 내 스스로도 빛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앉아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왜 우리는 주님을 만나지 못할까요? 계속 빛을 찾아 돌아다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짙고 어두운 구름 속에서 십계명을 내려주셨습니다.(신명 5,22참조) 하느님께서 성막의 지성소에서 모세를 만나 이야기 하실 때도 지성소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 짙은 어둠의 공간이었습니다. 각자의 지성소가 있고 그 어둠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고 기다리기만 하면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이를 십자가의 성 요한은 ‘어둔 밤’이라고 합니다. 내가 어두워지지 않으면 그분은 빛으로 오실 수 없습니다. 배부를 때보다 배가 고플 때 그분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골똘히 생각할 때보다 생각의 끈을 놓았을 때 말씀하십니다. 영적으로 기쁠 때보다 어둠으로 짓눌릴 때 그분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고 하십니다. 분명 그분은 어두운 곳에서 말씀을 하시고 그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는 밝아집니다. 말씀으로 등불을 삼고 싶다면 어둠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은 어둠속에 머물 줄 아는 사람이고 그 사람을 주님은 예언자로 만드십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끊으면 어둠으로 들어갑니다. 어둠이 무엇인지 알아야 그분과 대화가 가능해집니다. 어둠 속에 있어야 말씀과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말씀과 함께 머무는 사람은 세상의 빛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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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전임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지사장 신부님이 잠시 뉴욕으로 왔습니다. 신부님은 4년 동안 열심히 일하였고, 제게 넉넉한 운영자금을 남겨 주었습니다. 저는 신부님이 남겨주신 운영자금으로 팬데믹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신문 홍보를 위해서 미국 51개 주를 모두 다녔다고 합니다. Mary Hopkin이 감미롭게 불렀던 ‘Those were days.'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말 번역은 ’지나간 시절‘입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옛날에 선술집이 하나 있었지/ 우린 거기서 한 잔, 두 잔 잔을 기울이곤 했어/ 우리가 얼마나 웃으면서 시간을 보냈는지 기억나?/ 우리가 하려고 했던 거창한 계획들도/ 그때가 좋았지 친구야/ 우리는 그날들이 끝나지 않을 줄 알았지/ 우린 영원히 노래하고 춤추려고 했었지/ 우리가 선택한 인생을 살려고 했었지/ 우린 싸움에서 절대 지지 않으려고 했었지/ 우린 젊었고 우리의 길에 확신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바쁜 세월은 쏜살같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고/ 우리의 빛나던 신념들을 그 세월 속에서 잃어버렸지/ 우연히 그 술집에서 너를 마주친다면/ 우린 서로 웃으며 말하겠지/ 그때가 좋았지 친구야/ 우리는 그날들이 끝나지 않을 줄 알았지/ 그때가 좋았지 친구야, 그래 그때가 좋았지” 지나간 날들의 추억을 회상하며 환하게 웃는 신부님의 모습이 부럽기도 했습니다. 저도 이곳의 임기를 마치면 ‘지나간 시절’을 회상하며 ‘그때가 좋았지’라고 말하려 합니다. 그러게 하려면 지금의 시간을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창세기의 마지막을 읽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면서 한 가족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을 100세에 얻었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니 기꺼이 제물로 바치려고 했습니다. 이사악은 큰 아들 에사우에게 장자의 축복을 주려고 했으나 야곱과 아내 레베카의 속임수로 야곱에게 축복을 주었습니다. 야곱은 형의 분노가 두려워서 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가량 일하였습니다. 야곱은 라반의 딸들과 결혼하였고 12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12지파의 시작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동생 요셉을 미워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동생을 편애한 것도 있고, 동생 야곱이 꿈 이야기를 하면서 형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사서 이집트로 가는 상인들에게 팔려갔습니다. 요셉은 유혹을 뿌리쳤지만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꿈’ 풀이를 잘하였고, 파라오의 마음에 들어서 이집트에서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사는 땅에 큰 기근이 들었고, 형들은 이집트로 식량을 구하러 갔습니다. 그곳에서 형들은 성공한 동생 요셉을 만났습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알고 있던 형들은 크게 걱정했지만 동생 요셉은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섭리하신 것이라고 말하며 가족들은 이집트로 초청하였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자 형들은 걱정이 되어서 요셉에게 다시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자 요셉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이 죽으면서 창세기의 아브라함과 가족들의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요셉은 하느님 품에서 ‘지나간 시절’을 이야기할 것 같습니다.
요즘 복음에서 우리는 제자들을 파견하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들을 따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자세를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준비해 주시는 하느님을 믿고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대에 돈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모욕을 받기도 하고, 고통을 받기도 하겠지만 하느님께 받을 상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달릴 길을 다 달린 제자들도 하느님 품에서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그때가 좋았지 뭐” 두려움 없이 담대한 몸과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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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0,24-33: 육신만 죽이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25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스승으로 모시고 있기에 우리가 그분과 같이만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단계이다. 제자들은 자신을 스승이나 주님보다 더 높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종이라 하시지 않고 친구라고 하셨다(요한 15,15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박해자들의 위협이나 모략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이 헛된 일이라는 것이 심판 날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에서 나오는 “어두운 곳, 밝은 곳, 귓속말, 지붕 위(27절)라는 말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둠이고 밤이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게 높은 곳에서 선포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28절) 육체적으로는 죽일 수 있지만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28절)이시다. 이 멸망은 묵시록에서 “두 번째 죽음”(20,6)이라고 하며 이 죽음은 지옥에서 겪게 될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다. 참새는 창조물 가운데서도 아주 작은 것이다. 그러나 그 참새조차도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 이는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알고 계신다는 뜻이다. 미물까지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자녀인 우리는 얼마나 더 잘 알고 계시겠는가?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것을 섭리로 돌보신다. 하느님께서는 수많은 참새의 생명보다도 오히려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보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마음과 입으로 하느님을 안다고 증언해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32절)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지 않으면,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믿어도 아무 소용없다. 고백의 뿌리는 마음의 믿음이다. 고백은 믿음의 열매이다. 뿌리가 살아있는 한, 뿌리는 가지나 잎을 만들어 열매를 맺게 되어있다. 사도 바오로는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로마 10,10) 하였다. 마음의 믿음이 없다면 입으로 고백할 수 없으며, 마음의 믿음도 입으로 고백하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우리의 믿음을 건강하게 하여 입으로 늘 고백의 씨앗을 뿌리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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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마태 13,18-23)
1)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신앙인의 신앙생활 모습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는, 믿기를 거부하고 구원받는 일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2) 이 비유는 마지막 심판 때의 상황에 대한 비유입니다. 지금은 ‘좋은 땅’이더라도 중간에 변절하거나 타락하면 나쁜 땅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심판 때에 ‘나쁜 땅’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전에는 좋은 땅이었다고 변명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반대로, 지금은 ‘나쁜 땅’이더라도 회개해서 ‘좋은 땅’이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좋은 땅’으로 심판대에 선다면, 그 사람은 ‘좋은 땅’입니다.
3) 이 비유는 신앙인들을 네 종류로 분류한 비유가 아닙니다.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는데, 그 가운데에서 몇 가지를 대표적인 예로 든 것뿐입니다. 신앙생활에는 네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다양한 모습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종류대로 분류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편견과 차별로 이어지고, 남을 함부로 심판하는 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4) ‘내 안에’ 좋은 땅과 길과 돌밭과 가시덤불이 모두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동시에 ‘내 안에’ 공존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좋은 땅이 드러나다가 다른 상황에서는 길, 돌밭, 가시덤불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5)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길이 될 때도 있고, 돌밭이나 가시덤불이 될 때도 있고, 좋은 땅이 될 때도 있습니다. 좋은 땅이었다가 길과 돌밭과 가시덤불이 되기도 하고, 정신을 차려서 다시 좋은 땅으로 되돌아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가’ 마지막에 어떻게 될지는 끝까지 가봐야 압니다. 자기 자신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아는 것이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상태로 끝나는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은 내 마음대로 살다가 마지막에 회개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교만한 일입니다. 마지막에 회개할 시간이 있을지 없을지는 전적으로 주님의 권한에 달린 일입니다. 나중에 회개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지금 태평스럽게 사는 사람들은, 바로 그 ‘나중에’ 후회만 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지금 잘하고 있으니 걱정할 것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자만심과 방심도 어리석은 교만입니다.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이라는 말씀에서 ‘깨닫지 못하면’이라는 말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 ‘깨달음’이 아니라, ‘실천하지 않으면’이라는 뜻입니다. <믿는다고 생각만 하고, 또는 믿는다고 말만 하고, 실천하지는 않는 경우입니다.> 바로 그런 경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야고보 사도는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라고 말합니다. <실천이 없는 믿음, 즉 ‘죽은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는, “마귀에게 말씀의 은총을 빼앗긴다.”인데, 믿는다고 생각만(말만) 하고 실천하지는 않는 것은 마귀가 바라는 대로 사는 것이고, 결국 예수님을 떠나서 마귀 편에 서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21절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다.”라는 말씀은, “신앙과 생활이 하나가 되어 있지 않다.”라는 뜻인데, 성당에서는 신앙인 같은데, 세속 생활을 할 때에는 전혀 신앙인 같지 않게 사는 것을 뜻하는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신앙과 생활이 하나가 되지 못하면 환난이나 박해 때에 금방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돌밭’이나 ‘길’이나 사실상 같은 경우입니다.> 22절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처음에는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또는 처음에는 믿는 대로 실천한다고 하다가, 세상 걱정과 재물에 대한 생각이 신앙생활을 잘하려는 생각보다 더 커서 그쪽으로 기울어지는 바람에 열매를 맺지 못한다.”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초심을 잃어버린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도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걱정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걱정할 일들이 생겨서 걱정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래도 숨이 막힐 정도로 걱정만 하고 있는 것은 믿음을 잃어버린 모습이고, 그것은 잘못입니다. 정말로 주님을 믿는다면, 걱정할 일이 생겼을 때 주님께 도움과 보호를 요청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 옳고, 믿음과 기도로써 걱정을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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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오늘 말씀은 제자들이 박해를 받을 것이라는 내용에 이어집니다. 제자와 스승, 종과 주인의 간단한 비유는 예수님과 사도들에 대하여 말합니다. 높고 낮음의 비유는 사도들이 활동하면서 예수님을 드러내고 그분께서 하신 것을 그대로 따르게 합니다. 이것은 제자의 자세로, 제자와 스승의 관계를 표현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앞서갈 수 없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비유는 사도들이 겪을 박해에도 적용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업적을 지속하는 것처럼 그분의 수난에도 동참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승이신 예수님보다 더 큰 고통이나 고난을 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박해에 대한 경고와 더불어 주어지는 오늘 말씀은 사도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길을 그대로 따르는 이들이고, 그 길은 기쁨과 영광만이 아닌 고통과 수난의 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이러한 이중적 의미를 모두 담고 있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예수님께서는 이제 몸소 사도들을 위로하십니다.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예수님의 위로는 이제 사도들을 넘어 넓은 의미의 제자들, 믿음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향합니다.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로 되풀이되는 “누구든지”는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것’은 다른 의미로 예수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고백은 다른 사람들에게 증언이 됩니다. 이것은 신앙인의 사명이자 선교의 기본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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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렛선교수도회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마태오 복음 10장 33절)
오래 전 한국에 있을 때의 이야기를 하나 꺼내보려 한다. 새벽 6시, 아침 9시와 11시 그리고 저녁 7시에 미사가 있었고, 그 네 대의 미사를 모두 집전한 주일이었다.
그런데 그 이유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 여고생이 네 대의 미사에 모두 참례했다. 그런데 이상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매 미사마다 헌금을 하러 줄을 섰고 헌금을 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래서 저녁 미사가 끝나고 소녀를 불러, 왜 네 번이나 헌금을 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소녀는 작은 소리로 “남들 다 헌금하러 나가는데, 저만 가만히 혼자 앉아 있으면 창피하잖아요.”라고 대답을 한다.
부끄럽다는 말을 생각해 본다. 부끄러워할 수 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커다란 선물이다.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신 안에서 발견되는 옳지 못한 행동이나 마음에 대해, 혹은 최선을 다하지 못한 부족함에 대해 느끼는 것과 같은 부끄러움이다. 또 하나는 순수성에서 나오는 수줍음과 같은 부끄러움이다.
이 두 가지의 부끄러움은 사람을 긍정적으로 발전시키고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게 하며, 무엇보다도 제대로 된 신앙의 길로 인도한다. 그런데, 이러한 정상적인 부끄러움과는 달리 일그러진 부끄러움이 존재한다. 그것은 건강하지 못한 마음이 만들어내는 부끄러움이다.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우리가 과연 혀를 차며, 앞에서 소개한 소녀를 걱정할 처지는 되는 것일까?
때로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성호조차 긋지 못하거나, 허벅지에 슬그머니 그은 적은 없었던가? 엄지 손가락 하나로 전광석화처럼 명치 부위에 십자가를 그은 적은 없었던가?
그리스도는 분명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자랑거리다. 우리가 자신의 신앙을 숨기려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부끄러워한다는 이야기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것이 제대로 된 사람이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 아닌 것, 아니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조차 부끄러워하는 우리가 아닌지 뒤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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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권일 도나도 신부님]
<두려워하지 마라>
아주 오래전에 천호성지에서 피정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는 순교자 묘지가 있다.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의 묘지가 거기에 있다.
한때 고을의 원員으로 있었던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성인은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오늘은 천국으로 과거 보러 가는 날이다. 오늘은 정말 기뻐해야 할 날이다.”
그가 사형장에 끌려가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기뻐하며 당당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하느님과 함께 있다는 체험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로마 8,31)라고 말한 바오로 사도와 같은 강한 믿음을 지녔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복음을 전하러 나가는 제자들에게 거듭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시며 용기를 준다. 복음 전파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체험에 대한 증언이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하느님과 복음에 대한 증언을 하다 보면 많은 어려움과 박해에 직면할 수 있다.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도전이다.
비복음적 가치들과 맞서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아야 하는 도전이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때문에 겪게 될 세상의 비난이나 박해나 어려움에 대해선 두려워 말고 오직 하느님을 두려워하라고 말한다.
논어에서는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정작 두려워해야 할 분은 우리를 속속들이 알고 계시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불러주시는 하느님 한 분뿐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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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용진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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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두려워하지 마라>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경외심은 다른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합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사울은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계 유다인들은 사울을 없애 버리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효가 늘어갔습니다. 진정한 두려움은 주님을 차지하게 합니다. 경외해야 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은 다른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게 합니다.(사도 9,31. 히브 12,28)
잠언에는 “주님을 경외함은 지식의 근본이다.”(잠언 1,7)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너는 매우 큰 상을 받을 것이다”(창세 15,1)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도 “두려워 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준다.”(이사 41,10) “내 가르침을 마음속에 간직한 백성아, 사람들의 모욕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악담에 낙심하지 마라.”(이사 51,7)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도 더 귀하다.”(마태 10,31)라고 하셨고,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고 하시며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셔서 힘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전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 예기치 않은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천상의 것은 서로를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기를 원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분명 ‘아니오’하고 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적인 힘도 천상 생명에 대한 우리의 희망을 파괴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수많은 참새보다 더 나를 귀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드러나게도 부르시고, 때로는 침묵하시고, 때로는 어떤 일을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제때 그분의 뜻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응답은 좋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이 뒤틀릴 때, 그때야말로 결단의 순간이고 신앙이 증거되어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사랑이시고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 8,38)
주님께서는 우리의 힘이시니 주님을 경외하고 세상 것에 두려워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은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설 때 ‘잘 왔다. 그간 내 뜻대로 살았으니 이제 편히 쉬어라.’는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까? 아니면, ‘너는 아무래도 잘못 온 것 같다. 좀 더 단련을 받아야 하겠는걸?’ 하는 말씀을 들어야 하겠습니까? 주변 사람에게 원성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랑과 봉사의 삶으로 칭송을 받으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세례명을 받은 하느님의 자녀다운 품위를 지켜 주님과 하느님 아버지 앞에 떳떳하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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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군 생활이 힘들다고 합니다. 단체 생활, 훈련 등 사회에서 체험하기 힘든 것을 하면서 그 안에서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하기 싫은 것을 견디어 이겨낸 뒤에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게 되지요. 저 역시 군 생활을 30개월 했고, 이 기간을 통해 크게 성장했음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다시 가라고 하면 못 갈 것 같습니다.
군대 훈련 중에서 기억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화생방 훈련입니다. 밀폐된 공간에 방독면을 쓰고 들어가서 잠시 뒤에 방독면을 벗으라고 조교들이 명령합니다. 벗는 순간, 숨쉬기 힘든 고통을 체험하게 됩니다. CS탄을 이 밀폐된 공간에서 터뜨려서 눈물 콧물을 다 쏟게 합니다. 겨우 5~10분 정도의 시간일 뿐인데, 최악의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 못 견디겠다면서 밖으로 나가려는 사병을 조교들이 막으면서 일렬로 줄을 서서 ‘어머니 은혜’를 부르게 합니다. 다 부른 뒤에 밖으로 나왔을 때, ‘여기가 천국이구나’ 싶었습니다.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것, 숨을 제대로 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천국 체험을 하게 됩니다.
숨을 쉬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영혼도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숨을 제대로 쉬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는 영혼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습니다. 하느님과의 대화라는 기도를 통해 영혼을 깨끗하게 정화할 수 있으며, 이 세상을 힘차게 사는 힘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두고 어느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현세를 살면서도 마음은 천상에 두고 있어야 한다.”
천상에 마음을 두는 방법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기도를 뒤로 미룹니다. 세상의 악함에 물들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헐떡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로 마음을 천상에 두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육신을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대신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고 하시지요. 바로 현세를 살면서도 마음은 천상에 두는 삶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이 세상 안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더 긴 시간을 하느님 나라에서 보내야 하는데, 그 나라에 들어갈 구원의 삶이 아닌 순간의 만족만을 위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기도와 묵상을 통해 영적으로 숨을 제대로 쉴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우리, 그래야 기쁘게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순간적인 쾌락과 즐거움을 탐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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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마태오 10,24-33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홀로 있어도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도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 앞에서도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도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보다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더욱 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보다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더욱 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사람들보다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더욱 더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홀로 있어도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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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하지 말라는 말은 신약성서에서 총 21번 나오고, 복음에서 17번 나오는데 오늘 복음에서만 세 번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비교적 여러 번 두려움에 대해 말씀하신 편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세 번이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우리가 두려워하게 되는 세 가지 상황과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1,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는 첫 번째 상황은 모함을 받는 상황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악평을 좋아할 사람 없고 없는 죄 뒤집어쓰는 모함을 좋아할 사람은 더더욱 없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당연히 싫어하고 심지어 두려워할 겁니다.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은 보통 사람 이상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보통 사람 이상의 사람입니까? 정치가들을 보면 보통 사람이 아닌 경우를 종종 봅니다. 분명히 엄청난 잘못을 하고도 그에 대해 지적을 하면 정치적인 공세이고 모함이라고 딱 버팁니다. 공세요 모함이라면 강하게 버텨야지 물러서거나 두려워해서는 어떻게 정치를 할 수 있겠느냐는 그런 결기가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정치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이런 공세와 모함을 당할 거라는 각오를 한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이런 결기가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전하면서 세상의 저항과 모함이 없을 수 없습니다. 만일 없기를 바라고 기대했다면 너무 순진하고 낭만적인 도전 자세입니다.
그것은 마치 엄마가 되면서 아줌마가 되지 않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아줌마는 자식과 가정을 위해 처녀 때의 그 아름다움과 고귀함이 망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의 존재지요.
그러므로 제자들도 모함을 두려워해 움츠러들어서는 아니 됨은 물론 감춰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고 귓속말로 들은 것을 옥상에서 외치겠다는 그런 자세로 더욱 당당하게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2, 둘째로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말고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지만 그리 설득력이 있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더 흉포한 깡패이지 덜 흉포한 깡패가 아니라는 말과 같이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음은 주님의 다음 말씀,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는 말씀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육신과 영혼 모두를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이지만 결코 우리가 멸망케 되기를 바라시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를 너무도 소중히 여기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상을 종합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우리도 보통 사람 이상의 존재가 되어야 하고 하느님도 두려운 존재보다 더 큰 사랑의 하느님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두려움을 넘어서는 믿음을 가져야 하고, 하느님의 사랑은 두려움을 무릅쓰게 할 믿음을 우리에게 주셔야 합니다.
두려움을 몰아내는 하느님의 사랑과 그 사랑을 믿는 우리의 믿음은 환상의 궁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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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된 삶, 영원한 삶>
- 하느님 중심의 삶 -
12년전 돌아가신 셋째 형님의 혜안慧眼에 감탄하게 됩니다. 아들들에게 주었다는 정직, 효도, 우애 가훈의 세 말마디중 첫째의 덕목 정직입니다. 정말 까맣게 잊고 지내는 그러나 참으로 첫째로 놓아야 할 덕목이 정직입니다. 참된 삶, 영원한 삶의 우선적 조건이 바르고 참된, 거짓이 없는 정직한 삶입니다. 정직한 삶 자체가 구원입니다. 참으로 한결같은 하느님 중심의 삶이 정직한 삶입니다. 셋째 형님은 세례자 요한 예언자처럼 의롭고 정직하게 사셨습니다. 아주 예전 18년전인 2005년에 써놨던 ‘사랑하는 내 형님은’ 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올 팔월에 정년퇴직을 앞둔 세례자 요한 내 형님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시다.
옛날 시골에서 그 어렵다는 사범학교를 나오셨다.
술 담배 일체 안 하시고오로지 가정과 학교 일에만 전념하셨다.아들 셋에 손자가 둘인 할아버지다.
그러나 마음은 언제나 젊어 평생을 열정의 청년교사로 사셨다.세월도 형님을 비켜갔다.법없어도 사실 참 선량하고 순수한 분이시다.이 점에서는 내 요셉 큰 형님도, 베네딕도 둘째 형님도 똑같다. 생각만 해도 자랑스럽고 든든한 형님들이다. 구십 노모를 모시고 계시며 때때로 목욕도 시켜드리고 손톱 발톱도 깎아 드리는 보기 드문 효자이시다.
요즘은 신앙에 맛들여 내 강론과 시도 빼놓지 않고 읽으신다. 인터넷에서 강론을 읽으신 후 꼭꼭 틀린 글자들은 정정하여 이메일로 보내 주신다. 천생 타고난 자상스런 선생님이시다.
요즘도 가르치는 일에 마지막 열정을 쏟으시는 형님은 동생인 내가 방문할 때마다 꼭 마중나오시고 떠날 때는 버스 터미널까지 나와 차표를 사주시고 또 몇만원 주머니 속에 슬며시 넣어주신다.
그리고 차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손흔들어 주고 돌아가신다. 어렸을 때는 가장 많이 싸운 그러나 싸운 후엔 곧장 까맣게 잊어버렸던 다정하면서도 열정 가득한 사랑하는 내 바로 위에 세례자 요한 세째 형님이시다”
2011년 7월 5일 장례미사때도 나눈 시입니다.
세상을 떠났지만 하느님 중심의 참된 삶, 영원한 삶을 사셨기에 지금도 제 마음엔 물론 세 아들들 마음에도 좋은 추억들로 가득히 살아계신 형님입니다.
엊그제는 셋째 형님 대신에 큰 아들인 조카 프란치스코가 거금을 제게 주었고 마침 생각난 18년전 시였습니다.
살아있다하여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때 비로소 참으로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맨먼저 가르칠 자녀교육의 우선순위는 하느님을 알게 해주는 신앙교육인 것입니다.
참사람되는 공부의 첫째가 바로 하느님을 아는 공부입니다. 우선적인 결정적 요소가 부모의 신앙입니다. 부모의 신앙과 삶을 보고 배우면서 비로소 참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공부가, 신앙이 있어 영혼 건강, 정신 건강에 성인다운 참삶입니다. 광야인생, 이런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고 막 함부로 살면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괴물도 될 수 있고, 폐인도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잃어버린 재앙이, 불행이 괴물이요 폐인입니다. 그래서 제가 누누이 강조하는바, 선택-훈련-습관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사랑을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값싼 은총이나 구원은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은총과 더불어 부단히 사랑도 이렇게 노력하고 훈련할 때 비로소 참나의 성인입니다. 성서의 위인들이나 교회의 성인들이 바로 참된 삶, 영원한 삶의 모범입니다.
오늘은 프란치스코회의 제2창립자로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성 보나벤투라 주교기념일입니다. 13세기 당시 도미니코회의 아리스토텔레스 계열의 지적인 천사적 박사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 계열의 프란치스코회의 영적인 세라핌 박사 성 보나벤투라가 좋은 보완관계를 이룹니다.
성인의 보나벤투라 이름도 프란치스코 성인과의 각별한 관계를 짐작하게 하는 전설적 일화가 있습니다. 보나벤투라는 “잘 왔노라”, “좋은 소식이로다”라는 의미로 보나벤투라를 봤을 때 프란치스코 입에서 저절로 타져나온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기도 성인의 작품입니다. 성 보나벤투라가 추기경 서임시 일화도 그의 겸손함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추기경 서임 칙서를 전하러 교황사절이 도착했을 때 성인은 설거지를 하고 있었고 설거지가 다 끝날 때까지 추기경 모자를 나무에 걸어두고 기다리라 하였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성인은 참 소박하고 겸손했습니다. 또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보나벤투라의 지혜가 놀라웠던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를 찾아가 “그 높은 지성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묻자,
십자가를 보여주며 “이것이 나의 지혜의 삶입니다.” 대답했다 합니다.
한 할머니가 “수사님의 지혜를 하느님께서 아시니, 천당에서 분명히 하느님의 앞자리에 앉을 거요.” 칭찬하자 “저보다 할머니가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실 수도 있죠”하고 대답했다는 일화입니다.
참으로 치열히 살다가 추기경이 된 보나벤투라는 공의회 참석중 1274년 7월15일 새벽녘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물론 다수의 동서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이 임석한 가운데 57세 나이에 병환으로 선종합니다..
오늘 창세기의 요셉의 형님들에 대한 관대한 처사가 감동적입니다. 아버지 야곱의 신앙을 보고 배워 평생 끊임없이 하느님을 사랑하며 기도하면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했기에 하느님을 닮은 멋진 삶입니다.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도 있다는 말입니까?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아이들을 부양하겠습니다.”
하느님의 꿈이 꿈쟁이 요셉을 통해 실현되는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하느님은 굽은 선들로도 똑바로 쓰실 수 있는 분입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입니다. 이어지는 말이 또 감동입니다.
“나는 이제 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여러분을 이땅에서 이끌어 내시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실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요셉은 죽습니다. 앞서 야곱의 죽음 장면에 대한 묘사도 거룩한 선종의 죽음임을 깨닫게 합니다. ‘야곱은 자기 아들들에게 분부하고 나서, 다리를 다시 침상위로 올린 뒤, 숨을 거두고 선조들 곁으로 갔다.’ 이렇게 한생을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하다 거룩한 유언을 남기고 편안히 아버지의 집으로 귀향할자가 몇이나 될는지요.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잃어버린 영혼의 죽음입니다.
영혼없이, 생각없이 자기를 잊고, 잃고 사는 이들은 살아있다 하나 실상은 죽어있는 유령같은 좀비같은, 괴물이나 폐인같은 삶입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회개로 하느님 중심의 삶의 회복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다음 말씀이 그대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육성처럼 들립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참새보다 더 귀하다.”
정말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경외하는 사람은 세상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육신 생명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서 초연하여 영원한 삶을 삽니다. 그는 육신의 죽음보다 영혼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순교성인들이 영혼 승리의 참 좋은 본보기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할 때, 경외할 때 영혼 건강, 정신 건강에 세상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참으로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면서 주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삶이 참된 삶, 영원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우리의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예닮의 여정과 함께 가는 귀향의 여정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참되고 영원한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주님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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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 복음(마태10,24-33)은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박해를 각오하라고 하시면서,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하느님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 모두의 구원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
요즘 우리가 듣고 있는 창세기의 말씀은 '요셉을 통한 이스라엘의 구원에 관한 말씀'입니다. 요셉은 자기를 버린 박해자들인 형들 앞에서 이렇게 말하면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큰 믿음을 드러냅니다.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내지도 마십시오. 우리의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창세45,4-5)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사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창세50,19-20)
'두려워하지 마라!'
백십 년을 견뎌낸 요셉의 모습과 그의 큰 믿음을 통해서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용기와 힘을 갖게 됩니다.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하느님의 참된 자녀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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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pxrx6FjgW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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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 10, 31)
소중하고
귀한 존재로
주님을 만나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잊고 산
우리 존재의
정체성 다시
찾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가장 소중한
사랑을 만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부족한 우리를
밀어내지 않고
끌어안으십니다.
소중함은
밀어내지 않고
끌어안는
사랑입니다.
소중함이
소중함을
만들어 갑니다.
소중함으로
모두가
하나 되기를
바라시는
주님이십니다.
사람의 인격은
소중함으로
자라납니다.
초라한 생물체가
아닌 한사람
한사람이 소중한
인격체들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가장 존귀하고
존엄한 존재가
우리들입니다.
진리의 길은
다름아닌
소중한
인격체를
소중함으로
끌어안는
길입니다.
소중함을 잃으면
진리는 남용됩니다.
참된 진리는
참된 소중함으로
드러나는
참된 사랑입니다.
소중함을 깨닫는
소중한 여정의
끝에는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귀하고
소중함으로
오늘의 우리를
정성들여
빚어 만드십니다.
소중한 것이
사랑하는 것임을
가르쳐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끌어안는 사랑이
소중한 사랑입니다.
소중하고 귀함으로
서로를 끌어안는
소중한
오늘이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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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 10, 31)
우리의 소중함을
뜨겁게
일깨워주십니다.
두려움을
치유하는
소중함입니다.
복음은
귀하디 귀한
우리 존재의
기쁜소식입니다.
부족해도
모두가 소중한
사람입니다.
서로를
귀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소중함의 가치는
믿음의 가치입니다.
귀한 존재이기에
다시 시작하는
용기를 냅니다.
하느님을
만납니다.
소중함으로
우리 삶을
되찾아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귀한 오늘이며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더 귀한
소중함으로
우리의 두려움을
치유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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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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