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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drey Hepburn
- 전 세계적인 꿈의 공장, 헐리우드에서 “여배우의 황금시대”라고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 바로 세계 제 2차 대전
직후부터 1960년대까지의 시기를 말하는데 이 시기를 대표하는 헐리우드 여배우들만 보더라도 잉그리드 버그만(Ingrid
Bergman), 비비안 리(Vivien Leigh), 올리비아 디 해빌랜드(Olivia De Havilland), 수잔
헤이워드(Susan Hayward), 리타 헤이워드(Rita Hayworth), 캐서린 햅번(Katharine Hepburn),
그레이스 켈리(Grace Kelly), 데보라 커(Deborah Kerr), 엘리자베스 테일러(Elizabeth Taylor)
그리고 진 시몬즈(Jean Simmons),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와 브리짓트 바르도(Brigitte
Bardot) 등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스타들이 있었다(숱하게 빠졌지만...-_-;;)
여배우의 황금기..잉그리드 버그만..엘리자베스 테일러..크흐~~~
- 이런 수많은 여배우들 중에서도 단연 빛을 발하는 스타가 있었으니 바로 오드리 헵번 (Audrey Hepburn/본명 Audrey Kathleen Ruston 1929.5.4 - 1993.1.20) 누님 되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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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무명 시절을 거친 오드리 헵번이 데뷔작 “로마의 휴일”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녀가 선보인 자유분방하며
발발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기품 있는 캐릭터와 특유의 커다란 눈(아롬이?), 매력적인 미소는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고 이
영화에서 선보인 단발머리는 헵번스타일이란 이름으로 지금까지도 남아 전세계 여성들의 헤어스타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여자들이
차였을 때 주로..아닌가? 아님 말고...)
데뷰작 로마의 휴일과 헵번스타일..그리고 따라쟁이들..
- 그녀는 마릴린 먼로와 브리짓트 바르도로 대표되는 글래머 여배우(흔히 백치미..)들이 인기를 얻고 있던 그 시절, 호리호리하고 지적이며 고전적인 미인으로 등장하여 당대 최고의 미인 자리에 올랐으며
-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고 추정 IQ가 무려 168일 정도로 엄청난 지성의 소유자이기도 했다(하지만 불우한 어린 시절과 전쟁 통에 정규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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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당시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력이 얼마나 파급력이 있어나 하면, 이후 출연한 “사브리나”에서는 협찬 받은 디자이너 지방시의
옷들을 입고 등장, 패션계에서 삐리한 존재였던 지방시를 세계적인 패션 명가로 순식간에 탈바꿈시켰으며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선보인 헤어스타일과 검은색 긴 장갑, 검은 드레스도 헵번 드레스라고 불리며 세계적인 패션아이콘이 되기도 하였다.
- 오죽하면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뉴욕의 택시에서 우아하게 내린 헵번이 보석상 티파니의 진열장을 들여다보며 종이봉투에 담긴 아침을
먹는데 이 때 입었던 바로 그 드레스는 2006년 12월, 런던의 크리스티 경매에서 41만 파운드(약 8억원..)에 팔려서,
영화에서 배우가 입었던 드레스 중 가장 비싼, 그리고 가장 유명한 드레스가 되었다.
- 하지만 당대 최고의 미녀 여배우이던 오드리 헵번을 진정한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만든 건 영화계를 은퇴한 이후 펼쳤던 아름다운 선행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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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미녀이자 유행의 선두주자였고 당대의 유명 패션 디자이너들이 그녀에게 자신이 디자인 한 옷을 입히려고 줄을 서던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갑자기 은막에서 사라지고 잠잠한 시기를 지나 다시 나타난 곳은 바로 아프리카 오지였고 그녀는 수많은 기아 어린이들에
둘러싸여 특유의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제3세계 오지 마을에 가서 아이들을 도와주었으며, 그런 활동에서 미소 짓는 노년의 헵번이 보여준 모습은 젊었을 적 세기의 미녀 이미지 못지않게 유명하고 또한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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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 헵번은 6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유니세프가 원하는 곳이면 그곳이 오지든, 전장이든, 전염병 지역이든 어디든 갔고 일 년에
보수가 단지 1달러이며 출장지로 가는 경비와 숙박비 외에는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고 사무실조차 내주지 않는 유니세프 친선대사
활동에 그녀는 그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매달렸다.
- 유명인의 자원봉사 활동이 그렇게 빈번하지 않았던 당시
그녀의 이런 아름다운 활동은 이후 이젠 거의 보편화 되어버린 듯한 유명 연예인의 자선활동의 기폭제가 되었고 그녀는 헐리우드 유행의
선두주자에서 범세계적인 아름다운 선행의 개척자로 변모하였다.
- 하지만 그녀의 유년기와 성장기를 살펴보면 이런 선행들이 단지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시현이라는 것이 아니라 실제 그녀가
체험한 것들에 대한 사회적 환원임을 알 수 있으며 그녀가 얼마나 많은 역행과 고난들을 헤쳐 나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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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 헵번은 1929년 벨기에에서 영국인 은행가 조지프 앤서니 러스턴(Joseph Anthony Ruston)과 네덜란드의
귀족인 엘라 판 헤임스트라 남작 부인(Baroness Ella van Heemstra) 사이에서 태어나 벨기에와 영국, 네덜란드를
옮겨가며 자랐다.
- 하지만 가족 부양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며 열렬한 나치 추종자이던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들을 버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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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2차 대전 발발 직전인 1939년, 헵번의 어머니는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인 네덜란드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당시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자 네덜란드는 중립국이므로 독일의 침략을 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잘 알다시피
이런 생각은 정말 어리석은 생각이 된다..또라이 히틀러를 뭘로 보고..)
아른헴에 거주하던 9살 무렵의 오드리 헵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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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헵번의 가족이 이주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40년 5월 10일, 나치 독일은 선전포고도 없이 네덜란드에 대한 침공을
단행했고 며칠 후인 5월 14일 최대의 항구도시 로테르담이 독일 공군의 폭격을 당해서 초토화 되었으며 뒤이어 네덜란드는 곧바로
항복하고 빌헬미나(Wilhelmina) 여왕을 비롯한 왕실과 정부는 영국으로 넘어가 임시정부를 구성한다.
- 독일 점령 하의
네덜란드에서는 오드리라는 영국풍의 이름은 위험하다고 하여 오드리 헵번은 에다 팬 햄스트라(Edda van Heemstra)라는
가명으로 지냈으며 1942년, 독일의 점령은 그녀의 가족에게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쳐 이모부가 네덜란드 레지스탕스 운동에 관계되어
처형되었고 햅번의 이복 오빠 이안은 베를린의 강제 노동 수용소에 수감되었으며 다른 이복형제 알렉스도 이안과 마찬가지로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내질 뻔했지만, 그 전에 몸을 숨겨 화를 면했다.
네덜란드인의 친위대 입대를 권유하는 선전 포스터와 네덜란드 레지스탕스 대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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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중에 헵번은 영양실조와 심한 빈혈, 호흡기 장애, 부종 등으로 엄청나게 고생했다고 하며 이후 한 인터뷰에서 역에서 화차에
실려 네덜란드에서 유대인 수용소로 수송되는 유대인들을 여러 번 목격했으며 특히 지워지지 않는 기억은 창백한 안색과 신장에 맞지
않는 큰 코트를 입은 한 소년이 부모님과 함께 역 플랫폼에 내내 서 있다가 열차 속으로 쓸려 들어가던 모습이었고 그 때 자신은 그
소년을 지켜 볼 수밖에 없는 힘없는 아이였다 라고 회고하였다.
- 1944년경, 햅번은 발레리나가 되고 싶어 열심히 발레 수업을 받으러 다녔고 단원들과 네덜란드 레지스탕스를 위한 공연을 실시하고 공연수익을 그들에게 전달했다고도 한다.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거주구역과 수용소로 이송되는 네덜란드의 유대인들
- 이후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자 전쟁은 곧 끝이 보일 듯 했지만 그녀의 가족들이 있었던 아른헴은 마켓 가든 작전으로 오히려 초토화가 되었고 이때 헵번은 자원하여 영국군 부상자들을 도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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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부 국내 사이트에 소개된 테렌스 영 감독과의 만남이 이때 영국군 부상병과 어린 간호사의 만남으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며, 당시 테렌스 영 감독이 마켓가든 작전에 참가한 것은 사실이나 그는 공수부대 소속이 아니라 지상군인 영국 제
30군단 소속 아이리쉬 가드 연대의 전차병과 장교였고(이들이 제 때 못가서 아른헴과 영국 공수사단이 작살났다..)
- 이후
그의 영화 “어두워질 때까지(Wait Until Dark)”에서 주연 여배우와 감독으로 만났을 때 함께 한 인터뷰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배우가 그 도시(아른헴)에 살고 있는 것도 모르고 나는 그 도시에 포를 갈겨댔다 라며 오드리 헵번에게 농담을 건네기도
하였다.
치열한 시가전으로 파괴된 아른햄 시내와 기갑장교로 마켓가든 작전에 참가한 테렌스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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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네덜란드에 대해 지독한 수탈을 감행했고 군수품 생산을 위하여 모든 쇠붙이는 다 걷어갔으며 심지어
교회의 종과 기차 레일까지도 파내어 갔고 네덜란드 레지스탕스들은 일부러 낡은 배를 운하에 집어넣어 이들의 약?품 수송과 보급품
운송을 방해하기도 하였는데 종전 후 이것이 도리어 네덜란드 경제의 발목을 잡기도 하였다.
- 한편 네덜란드에서는
1944년에서 1945년 사이의 겨울을 악명 높은 ‘기근의 겨울(Hunger Winter)’로 불리는데 이 네덜란드에서 벌어진
굶주림과 그에 따른 고통으로 점철된 헬게이트도 바로 몽고메리의 대 뻘짓 마켓가든(Market Garden) 작전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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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전이 개시되자 연합군을 지원하기 위해 영국의 네덜란드 망명 정부는 나치 점령지의 철도 노동자에게 독일군의 물자수송을
지연시키기 위한 파업을 지시했고 이 지시에 따라 네덜란드의 철도 노동자 대부분이 잠적했고 레지스탕스들은 철도망을 파괴해 버렸다.
마켓가든 작전 당시 연합군에 적극협력했던 네덜란드 레지스탕스 대원들
- 하지만, 마켓가든 작전은 아시다시피 철저하게 실패로 끝났고 이런 네덜란드인들의 저항에 꼭지가 돌아버린 네덜란드 주둔 독일군 사령부는 그 보복으로 1944년 10월부터 네덜란드로 들어가는 모든 식료품 공급을 차단해 버렸다.
- 이렇게 네덜란드 대도시로 공급되는 음식과 연료를 비롯한 물자가 끊어지면서 대도시 주민 450만 명이 굶주림과 추위에 떨어야 했고 문제가 심각해지자 독일군 사령관은 6주 만에 공급중단 조치를 철회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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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인 스스로가 파괴한 운송 시스템의 복구가 지연됨은 물론, 잠적한 철도 노동자마저 돌아오지 않으면서 물류 시스템이 전혀
정상화되지 못하며 네덜란드의 대기근은 시작되었다(몽고메리가 한번 삽질할 때마다 그 피해는 대재앙 수준...하여튼 말도 하기
싫다는..)
- 이때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에서는 성인 한 명에게 일주일에 제공되는 열량이 1000kcal(일주일에 라면
2개)로 제한됐다가 1945년 2월에는 580kcal(일주일에 라면 1개)로 줄었고 치즈는 2주일에 100g, 빵은 1944년
10월, 일주일에 1000g에서 1945년 4월에는 400g으로 줄었다.
- 아사 직전의 도시 주민들은 개와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은 벌써 잡아먹었고 이후에는 값나가는 물건을 들고 하루 수십㎞를 걸어 시골 농장을 찾아가 음식과 교환해 겨우겨우 끼니를
해결했으며 이 시기 약 18,000여 명의 네덜란드 시민들이 굶주림과 그에 따른 질병들로 사망했다.
네덜란드 기근의 겨울당시 어린이들의 비참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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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네의 일기”로 유명한 안네 프랑크와 동갑내기였던 오드리 헵번도 바로 이 시기 네덜란드에 있었으며 그녀는 이해 겨울, 수많은
네덜란드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고 그녀 또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튤립 구근과 밀가루를 섞어 만든 것으로
겨우겨우 목숨을 부지했다고 한다.
- 원래 건강한 체질이 아니었던 오드리 헵번은 전쟁 중에 갖은 고생을 다하며 영양실조로
인한 합병증에 시달리기도 했는데 너무 몸이 마른 나머지 종전 직후 전쟁난민 지원모금을 위한 홍보 포스터의 모델이 될 정도로 그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 한편, 전쟁이 끝나가는 막판에 450만 명의 무고한 시민을 이렇게 굶어 죽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고 네덜란드 망명정부의 거듭되는 요청으로 연합군은 항공기를 이용한 대규모 식량투하 작전을 수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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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45년 4월 29일부터 5월 7일, 나치 독일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기 전날까지 연합군은 당시까지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네덜란드 지역에 대규모 폭격기 편대를 동원해 폭탄 대신 빵을 비롯한 갖가지 식료품을 투하했다(만나 작전(Operation
Manna))
- 이때 하늘에서 쏟아지는 구호물자와 이후 독일이 항복하면서 연합국 구제 기관에서 물자를 가득 실은 트럭이 네덜란드에
도착하는 것을 직접 겪은 오드리 헵번은 이후 한 인터뷰에서 이 때 거리에서 배급 트럭에서 받은 설탕을 넣은 오트밀과 연유는 평생
먹어본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고 이 때의 기억을 결코 잊지 못한다고 회고하였다.
- 이때 아사에서 그녀를 구해 준 것이 바로 유니세프의 전신인 국제 구호 기금(UNRRA)이었고 이때의 기억이 훗날 그녀가 유니세프 활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된 이유가 되었다.
유니세프의 전신 UNRRA 뱃지와 네덜란드에 도착한 구호트럭에 앉아있는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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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전쟁 당시의 처참한 경험 때문에 평생 전쟁 영화 출연은 사양했다고 하며 특히 자신과 동갑이며 같이 네덜란드에서 전쟁을
겪은 유대인 소녀의 이야기인 “안네의 일기” 영화판에 출연제의를 받았을 땐 당시의 기억으로 거의 신경쇠약에 걸릴 뻔 했다고도 하며
“전쟁과 평화” 헐리우드 영화판에 출연하긴 하지만 전투장면에는 출연하지 않았다.
오드리 헵번과 동갑내기 안네 프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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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생활도 엄청 검소해서 은퇴한 이후에는 아이들에게 밤새 동화책을 읽어주며 직접 밥을 해주고 빨래하는 것이 일상의 전부였고
사치도 하지 않았다고 하며 이사를 갈 때는 허름한 옷을 입고 직접 짐을 날랐고, 협찬받은 의상은 모조리 반납했으며 예쁜 재규어
승용차를 그렇게 가지고 싶어 하면서도 가족이 다 탈 수 없고 장 보러 갈 때 쓰지 못한다고 끝내 안 샀다고 한다.
- 그녀는
당대 최고의 미인이자 또한 현재까지도 영원한 미의 상징으로 불리우고 있지만 그녀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이러한 외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라고 감히 얘기하고 싶으며 세기의 미녀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 이런 그녀에게 걸맞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 굳이 딴지를 딱 하나만 걸자면 그녀는 골초로 유명해서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보여 준 긴 담배
파이프가 유명하며(아직까지도 이렇게 생긴 걸 헵번 파이프라고 한다고..)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2001년, 담배 피우는 헵번의
모습이 우표에 담겨 발행된 적이 있는데, 헵번의 아들이 어머니가 담배 피는 모습은 좋지 않다고 하여 발행 중단을 요청, 중단되었고
판매된 것들은 전량 회수되어 소각 했는데
- 이때 발행된 1,400만장 가운데 당시 폐기를 담당한 직원이 수 십장 가량 빼돌렸다는데 실제로 몇 장이 남아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며 잊을 만 하면 경매에 나와 그 때마다 최고가를 갱신하고 있으며 가장 최근 낙찰가가 한화로 6억 7천만 원 정도라고 한다.
- 마지막으로 생전의 그녀가 좋아했다는 샘 레벤슨(Sam Levenson)의 시로 그녀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표하고자 한다.
Time Tested Beauty Tips
시간이 일러주는 아름다움의 비결
For attractive lips,
speak words of kindness.
아름다운 입술을 가지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여라.
For lovely eyes,
seek out the good in people.
사랑스런 눈길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보아라.
For a slim figure,
share your food with the hungry.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라.
For beautiful hair,
let a child run his fingers through it once a day.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다면,
하루에 한 번, 어린이가 그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게 하여라.
For poise,
walk with the knowledge you'll never walk alone...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다면,
결코,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해라.
People, even more than things,
have to be restored, renewed, revived,
reclaimed and redeemed and redeemed ...
사람들은 회복되어야 하고, 새로워져야 하며, 치유 받아야 하고, 복구되어야 한다.
그리고 계속 만회해야 한다.
Never throw out anybody. Remember, if you ever need a
helping hand, you'll find one at the end of your arm.
누구도 내쫓지 말아라.
네가 도움의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손끝에서 찾을 수 있음을 기억해라.
As you grow older you will discover that you have two hands.
One for helping yourself, the other for helping others.
또한 나이가 들면 네가 두 개의 손을 가졌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손은 너 자신을 위한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라는 사실을...
오드리 헵번의 친손녀라는데...
<사진출처>
http://www.gentside.com/audrey-hepburn/wallpaper
http://classiccinemaimages.com/ingrid-bergman/faces-ingrid-bergman/
http://gemesis.com/blog/liz-taylor-knew-her-diamonds/
http://www.thepeakoftreschic.com/2011/09/celebrating-fifty-fabulous-years.html
http://www.hist-chron.com/eu/holland/EncJud_juden-in-NL05-holocaust-ENGL.html
http://www.ushmm.org/wlc/en/media_ph.php?ModuleId=10005436&MediaId=748
http://isurvived.org/InTheNews/AnneFrank-twitter_campaign.html
http://en.wikipedia.org/wiki/File:Ssnederland.jpg
http://en.wikipedia.org/wiki/Netherlands_in_World_War_II
http://www.pbdoetmee.nl/nostalgischnederland/2013/10/27/arnhem-sintjanskerkstraat-1945/
http://www.bombercommandmuseum.ca/manna.html
http://www.635squadron.com/page8.htm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