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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륙 작전 72주년
풍전등화”의 기로에 선 대한민국”을 공산화 속에서 구출한
미국”을 비롯한 민주 열강”의 활약상..
72년 전 9월 15일에 있었던
민주 국제 연합군”의 인천 상륙 작전 실화 .
지금의 세계 경제 10위권으로 도약한 원동력 인데~~ 요즘 젊은층 들은 전연 그런 상황에 대해 모르고 고마운 마음도 없네요 !
** 한국 전쟁의 대 역전극은 인천 상륙 작전으로 비롯되었다.
상륙 목적지가 아주 불리한 仁川港 인지라
사전에 적을 속이기 위한 기만 작전 즉 陽動作戰 (양동 작전)이 필요했다
. 양동 작전 지역으로 서해안의 군산, 동해안의 포항 근해,
주문진 근해가 거론되기도 했다.
한국 전쟁을 지휘하기 전에 맥아더 장군은 태평양 전쟁을 치루면서
미 해군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갖게 되었다.
니밋츠 제독과 태평양을 半(반)으로 갈라
西南 태평양 사령관 임무를 수행하면서
수많은 상륙 작전을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천생 군인인 맥아더는
적의 背後(배후)를 찌르는 강점과 스릴을 즐겼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미 해군 상륙 전단의 잠재력과
무서운 힘을 믿어 확신하게 된 것이다.
인천 상륙 작전에 대한 최종 평가 회의가 열렸다.
1950년 8월 23일 오후 5시 일본 도쿄 맥아더 사령관 집무실에서 열린
각 군별 작전 설명회에서 상륙 전단을 직접 지휘하게 될
제임스 도일(James H. Doyle) 해군 소장은
상륙 작전에 "어려움은 있으나 불가능 하지는 않다"라고 보고를 마치었다.
이어 맥아더 장군의
百戰 老將(백전노장)다운 소신과 확신에 찬 웅변적 논리 전개가 있었다.
장장 45분 간의 열정이었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이 자리에는 미 합참의장 '오마 브래들리'가 직접 파견한
미 육군참모총장 '로턴 콜린스' 대장, 미 해군참총장 '포레스트 셔만'대장,
극동 해군사령관 '터너 조이' 중장,
제7함대사령관 '스트러블' 중장
그리고 호랑이 굴로 직접 뚸어들 제1상륙전단 사령관
'제임스 도일' 소장 外 기라성 같은 미 육,해,공군 장군들이 배석하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이 주장한 인천 상륙 작전의 핵심은
: (1) 전략적으로 수도 서울의 신속한 奪還(탈환)
(2) 미국의 위신 회복과 유엔군의 사기 전환
(3) 固着(고착)된 낙동강 전선 역전
(4) 북괴군 괴멸과 失地(실지) 회복 등의 이유였다.
(4) 항의 失地(실지) 회복은 38션 以南을 의미하였다.
[실지 회복에 관하여는 李承晩의 뚯과 배치되는 부분이었다.]
미국 최고 수뇌부에서도 맥아더 장군의 뜻을 꺽지 못하였다.
맥아더 다운 카리스마였다.
1950년 9월 9일 일명 "크로마이트(Cromite)" 인천 상륙 작전은 승인되었다.
본격적으로 세분화 계획이 진행되었다.
우선 仁川 수로 문턱에 있는 섬들을 확보하고
인천과 수도 서울 지역의 군사 첩보를 수집하는 일이었다.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미 해군 '마이클 제이 루시' 중령이
孫元一 총장의 보좌관 겸 첩보 수집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다.
7월 10일 루시 중령은 한국 해군으로 구성된
부대장(CTG 96.7)으로 임명되었다. /
한국 해군 참모 총장(CTE 96.70) 손원일은
즉시 부산 경무대로 가서
李承晩 대통령에게 인천 상륙 작전 계획에 대한 개략 보고를 하였다.
李承晩은 대단히 만족스러워 하면서 "에드머럴 손 잘해 주어..." 라고
격려해 주었다.
손원일 총장은 본부의 정보국장 함명수 소령을 불러 임무를 주었다.
우선 인천 水路(수로) 외곽의 목표는
靈興島(영흥도)와 德積島(덕적도)였다.
작전명령 93호로 시달된 작전명은" Lee Operation" (702 함장 이희정 중령의 이름)으로 명명되었고,
부대 편성은 한국 해군 PC-702함 외 7척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유엔군 영국 순양함 '케냐(Kenya)'함 과
카나다 구축함 '아다바스칸' 함이 함포지원 임무를 맡았다.
8월 16일 이희정 중령은 각 함정에서 차출된 110명으로
상륙군 중대를 편성하고
702함 항해사 장근섭 중위를 중대장으로 임명했다.
8월 18일 새벽 작전을 개시해 오후 2시경 덕적도를 완전 탈환하였다.
그리고 미처 피난가지 못한 청년들로 국군 의용대를 편성하였다.
戰果(전과)는 북괴군 26명 사살, 7명 생포
그리고 구금되었던 주민 9명을 구출하였다.
아군의 피해는 全無(전무) 하였다.
"Lee Operation" 島嶼(도서)확보 작전을 하드웨어라고 한다면,
인천+수원+ 서울 지역에 대한 북괴군 군사 첩보와
민심 동향을 파악하는 "Xray Operation"은 소프트웨어 확보 작전이었다.
이는 咸明洙(함명수) 소령이 담당하였다.
1950년 8월 어느 날 부산 해군 사령부의 함명수 소령은 마음에 두었던
정보국 소속 장교들을 광복동 중국집에 불러 식사를 나누면서
믿을만한 부대원들을 5-6명 씩 선발토록 지시하였다.
이유나 목적에 대해서는 일체 불문에 부쳤다.
8월 16일 첩보 공작 요원들을 최종 선발하고 함명수는
손원일 총장에게 보고하였다.
함명수 소령은 특수 첩보대 요원들을 이끌고
8월 18일 새벽 1시 자갈치 시장 부두를 출발하였다.
보조선 1척이 뒤를 따랐다.
부산을 출항 6일째 되던 날 배는 영흥도 해안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咸(함) 소령이 출동 목적과 임무를 설명하였다.
이 작전에는 최규봉 켈로부대(3 명)도 합류 하였다.
그만큼 철저한 비밀이 요구되었다.
김순기 중위와 임병래 소위 組(조)는 인민군 복장으로 위장하고
무기와 화폐를 지참, 야음을 틈타 인천 시내로 잠입했다.
전쟁 발발 전에 정보국 소속이었던 민간인 2명이 합류해
주어진 임무를 동반 수행하였다.
서울과 수원을 자유롭게 왕래하며 군사 첩보를 세세하게 수집하였다.
수집된 병력 규모와 화력 그리고 병참 현황 등 상세 첩보는
영흥도에 잡입한 美극동 사령부 특수 요원들에 의해
맥아더 사령관에게 직접 보고 되었다.
가장 신속하고 최신의 살아 있는 첩보였다.
맥아더 사령부의 상륙 계획은 더욱 공고히 굳혀져 갔다.
孫元一 총장이 바라던 바 였다.
또다른 중요한 임무 중에 하나는
좁은 인천 수로를 꼭 통과해야하는 길목에 있는
팔미도 등대를 밝히는 임무였다.
이 특수 임무 수행을 위해 극동군 사령부
"클라크" 소령 외 5 명(미군 장교 3명, 한국군 장교 3명)으로 구성된
팀이 일본에서 등대의 구조와 고장 수리법까지 배워 특파된 것이다.
그만큼 팔미도 등대를 점화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였다.
팔미도 등대의 점화는 상륙군 부대의
모든 장병들에게 심리적 안정감과 상륙 부대 함정들의 안전을 擔保(담보)하는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1950년 9월 15일 00시 01분, 1분 늧게 점화 할 수 있었다.
9월 14일 극동 사령부로부터
영흥도에서 전원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새벽 2시 특수 첩보대 요원들이 한참 철수 준비를 마칠무렵
뒤늧게 알아챈 북괴군 1개 대대가 대부도로부터 영흥도에 상륙하였다.
특 수첩보 요원 전원이 무사히 빠져나가고
마지막 사투를 벌리던 임병래 소위 組(조)6명 만이 남았으나
이미 북괴군에 포위된 상태였다.
끝까지 버티던 임병조 소위와 홍시욱 3등 병조(하사)가
최후 저항을 하는 동안 나머지 4명도 무사히 탈출하였다.
인천 상륙 작전 24시간을 남겨놓고
두 사람은 가지고 있던 총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체포될 경우를 생각했을 것이다.
인천 상륙 작전을 준비하면서 한국군 참가 부대 선발이 시작되었다.
애초에 육군은 상륙 경험이 없다고하여 제외시켰다.
그러나 정일권 육군 총장은 甕津半島(옹진 반도)에 주둔하던
17연대가 LST편으로 철수한 경험이 있다고 주장하여
맥아더 사령부는 이를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한국 해병대 1개 연대가 참가토록 허락되었다.
신현준 해병대 사령관은 마침 제주도에서
3,000명의 학도병을 모집해 9월 8일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1948년 제주에서 "4. 3 폭동 사건"이 있었음에도
학도병을 3,000명 이나 모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주둔해 있었던 해병대가 많은 선무 활동과
대민관계 개선에 노력한 결과였다.
제주도에는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의 해병대가 해군과 함께 굳건히 지키고 있다.
孫元一 총장은 고문관 '루시' 중령을 통해
서울 탈환은 꼭 한국 해병 연대가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줄 것을
맥아더 사령부에 電通(전통)을 띠웠다.
본격적으로 기동편성도 이루어 졌다.
9월 12일 봉쇄 및 호위 부대(TG:Task Force 95)가 편성되었고,
한국 해군은 TG 95.7로 기동 편성되었다.
한국 해병대 3,000명은 美 해병대와 똑같은 전투복과 M1을 지급 받았고,
숙달 훈련을 위해 東萊(동래)에 있는 육군 사격장에서
M1실탄 사격을 하였다.
한국 해군은 PC 4척을 비롯해 총 15척이 편성되었다.
그리고 손원일 총장도 현장 부대에 직접참여토록 맥아더는 배려하였다.
9월 12일 상륙 작전 출동 하루 前 날 이었다.
손원일은 대구에 있는 아우 정일권 육군총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시 손원일 총장은 정일권 육군 총장 보다 학력이나 경력으로 보아도
훨씬 연장자 였고 선친 손정도 목사님은
상해 임시 정부 임정원장(국회의장)을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함께한
애국투사의 장자로 중국 상해에서 상선 대학을 수료하고
독일을 비롯한 유럽과 언어에 능통한 귀중한 인재였다.
후일 국방 장괸과 초대 ????????독일 대사를 역임하였다)
"내일 떠납니다. /형님 우리 17연대 잘 부탁합니다.
이쪽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죽음으로 버티겠습니다./
서울에서 다시 만납시다...침묵이 흘렀다. 사나이들의 비장함이 오고갔다.
오랫만에 동대신동 관사로 향하였다.
孫元一은 모친 박신일 여사에게 큰 절을 올렸다.
"어머님 한동안 못 뵈올 것 같습니다. 몸 건강히 챙기십시오"
그리고 아내 홍은혜 여사에게
"중요한 회의가 있어 얼마동안 못 들어오니 아이들 잘 챙기고 건강하게
지내요" 후일담으로 홍은혜 여사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막바로 돌아서 부대로 복귀하였다.
한국 해병대는 美 수송함 피카웨이(APA)함에 승선했고,
孫元一과 신현준도 함께 하였다.
미 제1해병 사단은 일본 고베에서,
미 제7사단은 요코하마에서 각각 9월 11일 이미 출발하였다.
9월 12일에는 부산에서 미 제5해병 연대가 출항하였다.
이무렵 태풍 키지어(Kezia)가 북상 중이어서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더 심각한 것은 인천 북부 해상을 경계하던 이성호 중령(PC-703/삼각산 함)으로부터 機雷(기뢰)가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접수되었다.
작전에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기뢰는 절대로 가볍게 볼 수 없는 문제였다.
後日 우려했던 상황이 일어나게 된다.
[ 10군단 元山灣 상륙작전이 기뢰로 인해 행정상륙을 하게 된다.]
극동 해군 사령관 조이 제독은 미 해군 총장 셔먼 제독과 태평양 함대 사령관 래드퍼드 제독에게 掃海艦(소해함)의 증파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태평양을 건너야 했다. 전 함정에 注意報(주의보)가 발령됐다.
견시를 강화하고 눈으로 직접 발견토록 할 수 밖에 없었다.
9월 14일 맥아더 사령관이 승선한 旗艦(기함)
'마운트 맥킨리' 함(구축함)을 비롯한 함대 세력이
격렬비열도를 비롯 덕적도 외해에 벌때 같이 집결하였다.
세계 역사이래 가장 불리한 협수로 항구에
가장 많은 다국적 함대 규모였다.
한국 해군 15척, 미국 225척, 영국 12척, 카나다 3척, 호주 2척, 뉴질랜드 2척, 프랑스 1척, 네델란드 1척 등 모두 261척으로 구성되었다.
상륙 부대는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 휘하의 미 해병1사단, 미 7보병사단, 미 제1해병항 공단 등으로 구성되었다.(한국 해병대 2,786 명)
1950년 9월 15일 새벽 6시 33분
미 해병 5연대 3대대가 녹색 해안(Green Beach) 월미도에
상륙함으로 시작되었다.
인천 상륙 작전은 조석 간만의 差(차)로 오전, 오후로 나뉘어,
오전에는 감재고지 月尾島(월미도)를 확보하고
오후 밀물 때에는 적색+청색(Red Beach + Blue Beach) 해안에
공격 주력 부대가 상륙하였다.
녹색 해안(월미도)과 황색 해안(인천 내항)은
군수 물자를 하역하는 해안이었다.
筆者(필자)는 초등학교 어린나이로 모친과 仁川문학산 산넘어(청색해안 바로 넘어 시골마을) 작으마한 부락 헛간에 피난 중에 있었다.
전날 밤새도록 엄청난 굉음과 폭팔음이(함포 사격) 계속된
기억이 생생하다.
아침에 보리 꽁대기 밥술을 막 뜨려는 찰나 지축을 뒤 흔드는
요란함 속에 山體(산체)만한 괴물(탱크)이 길가에 버티고 있었다.
처음보는 흑인 병사의 웃음과 탱크 헷지 너머로 던져준
바둑 껌과 生前 처음 먹어보는 쵸코릿의 그 달콤함을 아직도 잃을 수 없다.
한국 해병대는 인천항 북서쪽 적색 해안(Red Beach)에 상륙하였다.
9월 15일 1800시 미 해병 1연대와 제5연대
그리고 한국 해병 1연대가 함께 행동했다.
해안에서 저항하던 북괴군 2 천여 명을 소탕하였다.
손원일 총장은 해병대와 함께 적색해안에 상륙하고
첫날 밤을 병사들과 함께 참호 속에서 보냈다.
사실 최고 지휘관이 최전선에 병사들과 함께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 이었다.
孫 총장은 수도 서울 탈환시까지 해병대와 내내 함께 했다.
그 옆에는 통역관 겸 미국에서 태평양을 건너 한국을 조국으로 여기고
참전한 미국 청년 쇼어 ”대위도 함께 였다.
쇼어 대위는 서울 탈환 연희 고지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를 기리는 동상이 얼마전 한국 해군에 의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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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가 6월29일 한강전선 시찰에서 결심한 인천상륙계획이
군부의 강한 반발에 부딪쳐 두달이나 시간을 끌었기 때문이다.
도쿄의 미극동군 해군사령관 찰스 터너 조이(Chales Turner Joy)제독은
"성공 확률이 5000분의 1도 안될 것“이라 주장했고,
일부 참모들은
전라북도 군산이나 경기도 평택군 포승면 앞바다(아산만 입구 서해대교 위치)로 변경하자고 건의하였다.
왜 그런가? 인천 앞바다는 상륙작전이 피해야 할 악조건의 특징을 모조리 갖추고 있다.
▶ 세계최대급 조수간만의 차=최고 9m, 최소 7m에 이르는 조수간만의 차는
‘밀물’에서만 상륙이 가능하므로 ‘썰물’때는 좌초상태에 빠지며 다음 밀물까지
적의 공격에 속수무책이다.
▶ 길고 넓은 갯벌=간조시 2~5㎞나 생기는 갯벌은 9시간동안 도보와 차량통행 불가능.
▶ 높은 해벽=배타고 다가가 방파제에 사닥다리를 놓고 올라 원시적 육박전을 벌어야한다.
▶ 항구와 시가지 밀접=상륙 즉시 적군과 치열한 시가전이 불가피하다.
▶ 좁은 단일 통로=항만에 하나뿐인 수로는 만조시에도 맥주병 병목처럼 좁아서
상륙 함정들이 밀집되므로 적의 좋은 표적이 되어 단시간 내 전멸될 위험이 크다.
과연 ‘5000분의 1 확률‘이란 말이 어울리는 최악의 조건 종합세트 같다.
상식적인 군사전력가라면 누가 이곳에 상륙할 엄두를 내겠는가. 그러나 맥아더는 달랐다. 한강변 한국군 용사와의 대화 이래 ’인천상륙‘ 결심이 흔들린 적이 없다.
”최악의 조건이 최선의 기회이다. 적이 ’설마‘하는 인천이 최상의 상류지다“
역전의 명장 맥아더다운 결단이다
. 적의 허(虛)를 찌르는 병법의 기본 아닌가. 한번 결심하면 반드시 ’승리‘로 끝장내야 하는 맥아더는 인천상륙 준비작전 명령을 이미 7월부터 내려놓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전쟁에서 맥아더는 세계 전사(戰史)에 유례없는 50여차례 상륙작전을 모두 성공시켜 ’상륙작전의 달인‘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바로 '아일랜드 호핑'(Islands Hopping:섬에서 섬으로 깡충 뛰어 점령)작전이 그것,
넓은 태평양 여러 섬들에 박힌 일본군 진지를 직접공격하지 않고, ‘후방 상륙—병참선 차단—일본군 고립 격파’했던 전술이다. 인천상륙을 주장하는 까닭은 충분했다.
하지만 군 수뇌의 ‘인천 반대’ 목소리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급기야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 해군참모총장 셔먼 대장, 해병대 대표가
도쿄로 날아와 맥아더의 고집을 꺾으려 했다.
맥아더가 입을 열었다.
"적은 지금 후방을 무시하고 있다. 병참선이 너무 길어졌으니
서울에서 신속히 차단해야 한다.
적의 전투부대는 사실상 모두 낙동강전선에 집중되어있으며
예비 병력마저 없어 전세를 회복할 만한 능력이 거의 없다."
맥아더는 전략적, 정치적, 심리적 이유를 들어 인천 상륙의 다목적 이익을 강조하였다.
상륙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수도 서울,
그 탈환의 상징적 승리 효과는 다른 도시에 비할 바 아니다.
게다가 경부선, 호남선 등 철도의 요충지, 적의 보급망을 단번에 끊어버린다며
맥아더는 지도를 가리킨다. ”인천은 제8군이란 '망치'가 적군을 분쇄할때 제10군단이 '모루' 역을 할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설명하였다.
(맥아더 회고록 [위대한 생애 Great Lives] 일신서적출판사, 1993)
귀국한 군 수뇌들은 존슨 국방장관과 트루먼 대통령에게 결과를 보고하였다.
마침내 대통령이 ‘인천’을 지지하고 미 합참이 8월28일 공식 승인한다.
★ 미 해군-해병대 격감...맥아더의 고군분투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인천상륙작전은 사실상 7월초부터 추진에 들어갔다.
맥아더는 서울서 6월29일 ‘상륙결심’이후 7월22일에는 인천상륙을 감행할 목표로
‘블루 하트’(Blue Heart)작전계획을 세웠으나,
본국 병력지원이 형편없이 지연됨으로써
낙동강 전투에 투입할 병력도 부족한 형편인지라 일단 연기,
그러나 ‘준비작전’은 계속 추진해나갔다.
이때 ”미군은 축구경기를 간신히 이기고 해산해 술 마시는 축구팀과 같은 형편“이었다.(웨드마이어 보고서).
2차대전 후의 미군은 ‘퇴역’과 ‘감군’바람에 갈팡질팡이다.
맥아더의 태평양전쟁 주력이었던 해병대는 35만명을 헤아렸으나 절반으로 격감하고,
하필 6.25나던 1950년초 전면개편을 단행하여 ‘명맥’만 남았다.
610척의 상륙함정도 510척을 폐품처리, 신형함정 건조는 상상도 못할 지경이다.
전쟁초기 한국에 급파했던 스미스 대대가 첫 판에 참패한 것은
미육군이 얼마나 약화되었는지를 말해준다.
‘원폭 승리’ 이후 군부는 ”공군이 다 해줄 것“이라는 공군의존 인식만 팽배해져 있었다.
존슨 국방장관은 해군대학 졸업식에서 말했다.
“해군의 전성기는 끝나간다.
더 이상 해군과 해병대를 많이 보유할 필요가 없어졌다.
합참의장의 보고에 따르면 상륙작전은 구식이 되었으며 더 하지 않을 것이다.
해군이 하는 일을 공군이 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선호 [9월의 기적, 인천상륙작전] NEWS WIN KOREA, 2020.9)
도쿄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휘하에는 소규모의 상륙작전 부대 밖에 없었다.
그는 태평양함대로부터 LST등 상륙함 몇 척씩을 배속 받아 훈련단을 만들고,
57명의 해군 및 ·해병 요원들을 차출하여 충당하였다.
그 중에 제1수륙양용단 사령관 도일 제독은 태평양 전쟁시 맥아더의 지휘아래 많은 전투에 성공한 상륙전문가였다.
그는 다시 맥아더의 요청에 따라 핵심 대장으로 임명되었고
병력을 재조직하여 7월부터 인천상륙작전계획에 달라붙게 된다.
▲ 기함 맥킨리호에서 맥아더 장군이 쌍안경을 가지고 상륙작전을 지휘하는 모습(사진)
7월27일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이 대구로 날아왔다.
북한군과 싸우는 한미 군사지휘관들과 인천상륙작전을 현장 점검하기 위해서다.
정일권 육군참모총장, 알몬드 장군, 워커 사령관, 스트레트 마이어 공군사령관 등과
작전회의를 열고 인천상륙과 낙동강 전투의 입체작전을 세밀히 논의하며
한국군의 용전을 당부하였다.
“내가 바라는 승리란 오직 공산국 섬멸 한 마디뿐이다.
지난 번 한강 시찰에서 이 결의를 굳히고,
도쿄로 돌아가는 즉시 알몬드에게 계획을 지시한 바 있다.
바로 인천상륙이다.
전국(戰局)이 뜻같지 않아
D-Day 7월22일 ‘블루 하트’(Blue heart, 파란 심장)작전을 늦추기로 했다.
제2안 ‘크로마이트 작전’도 미본토의 2사단과 1해병여단을 동원해 결행하려 했지만,
낙동강 전선의 급박해진 방어에 또다시 기다릴 수 밖에 없다.
인천상륙의 두 번째 연기다.
2사단과 해병여단, 하와이의 5연대 전투단 및 5개 전차대대가 8월 중순까지
이곳으로 올 것이다.
인천상륙은 기필코 결행한다.
공산군을 깡그리 섬멸해 버릴 수 있는 유일한 작전이기 때문이다.
그 때까지 낙동강 방어전에 특히 정일권 장군의 한국군 분투를 당부한다.
한국군은 장비나 보급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있으나
미군 GI(병사)들에겐 바랄 수 없는 반공 필승의 투지를 가지고 있다.
나 역시, 이 신념을 갖고 있다.
나는 여기 낙동강 라인에 역사적 이미지를 남기고자 한다.
즉 공산군을 막아낸 방어전이 아니라, 데모크라시(민주주의)의 결집력으로써
공산 침략군을 섬멸해 나가는 반공의 스타트 라인으로 역사에 장식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스탈린은 지금 세계 적화를 노리고 있다.
그 첫 시도가 이 한국침략이며, 북한 괴뢰군은 스탈린의 용병(傭兵)일 뿐이다.”
([정일권 회고록] 고려서적,1996).
맥아더는 이 참에 세계공산세력을 격멸하자는 ‘반공전쟁’을 성언한 것이었다.
맥아더는 미군 수뇌들을 이끌고 오후 2시반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만났다.
이승만은 맥아더로부터 다시 한번 ‘멸공작전’에 관한 설명을 듣고,
‘본토로부터 무기공급’이 8월부터 시작될 것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역정부터 냈다.
“지금 당장 무기가 필요하오.
적군은 피난민들을 앞세워 방패삼이 쳐들어오고 있기 때문에
미군도 속수무책 아니오.
우리 국군에게 무기를 진작 지급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오” (프란체스카, 앞의 책)
▲ 인천항에서 남쪽 15.7㎞ 떨어진 작은 섬 2개 팔미도.
불켜진 등대는 2003년 신설된 등대,
그 앞에 작은 등대가 1903년 구한말 설치된 한국 최초의 등대로서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을 안내한 등대이다.
★ 양동작전...X-Ray 작전 & 잭슨 작전...”팔미도 등대 불을 켜라“
드디어 인천상륙 D-Day는 9월15일로 정해졌다.
참모장 알몬드(Edward M Almond)소장이 낸 작전계획 크로마이트(Chromite)는
인천상륙(100-B), 군산상륙(100-C), 주문진상륙(100-D) 등 3개안인데
처음부터 100-B(인천)을 결심한 맥아더는 D-Day까지
두 가지 준비작전을 빈틈없이 재촉하고 있었다.
하나는 ‘인천’을 숨기기 위해 타지역을 공격하는 양동작전,
곧 연막-교란작전이고,
동시에 상륙지 인천 항만수로 조사와 주변 적군태세를 탐색하는 첩보작전이다.
크롬 철광석을 지칭하는 ‘크로마이트’를 암호명으로 정한 것 자체가 은폐전술이다.
◉ 양동작전=북한군을 교란할 양동작전이 펼쳐진 지역은 동해안 주문진 삼척,
서해안 군산 등이며, 북한의 함경남도 신포 마량도, 평양남쪽 남포 등이다.
평양의 인천 같은 남포에는 9월4일부터 14일까지 맹폭격을 가하였다.
이튿날 5일에는 전북 군산 주변 50km 반경을 13일까지 폭격,
상륙작전 공습패턴을 흉내냈다.
12일 미-영 혼성기습부대가 군산에 상륙을 시도하는 체
가벼운 교전까지 감행하며 북한군에 ‘상륙 시그널’을 보여준 뒤 철수하였다.
인천은 9월 10일부터 미 해군과 공군이 월미도를 비롯, 인천시와 주변 전역에 대대적인
폭격을 퍼부어 초토화시킨다.
인천에서 군산 사이 해안선 폭격도 멈추지 않았다.
9월 13일에는 동해안 삼척시 일대에
아이오와급 전함 USS 미주리 함을 동원한 함포 사격을 가하였다.
같은 날, 낙동강 전선의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유엔군과 한국군은 10월 중순 총반격을 감행할 것"이라고 선언, 대대적인 보도로 나갔다. 이를 본 북한군은 후방의 예비부대들을 낙동강 전선에 집중투입, 대구 장악에 총동원한다. ‘교란작전’ 대성공이다.
◉ X-Ray작전 및 잭슨 작전=양동작전과 동시에 맥아더는
인천 상륙에 필요한 해로와 항만정보 수집을
한국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에게 주문했다.
이에 따라 8월 17일부터 함명수 소령(뒷날 해군참모총장 역임)이 지휘하는 첩보부대 17명을 구성, 영흥도와 덕적도를 근거지로 X-ray 작전에 돌입한다.
북한군의 배치와 무기 조사, 해로에 부설된 기뢰들의 위치 등을 파악하는 한편,
인천 시가지와 그 주변의 적군 상황을 염탐하는 위장밀행작업도 병행한다.
그러다가 막판에 북한군에게 발각되자
임병래 중위는 대원들을 탈출시키고 홍시욱 하사와 둘이 남아 벌기 위해 북한군과 싸운다. 첩보대가 무사히 섬을 빠져나가자 임 중위와 홍 하사는 생포시 정보 누설을 걱정하다가
권총으로 자결하고 말았다. (뒷날 한국정부와 미국정부는 이들에게 1계급 특진과 훈장을 수여하였고, 고속함정에 이들의 이름을 붙인다).
당시 또 하나의 첩보작전이 있었다. ‘트루디 잭슨 작전’(Operation Trudy Jackson)이다.
한국해군첩보대와 별도로 미해군 정보장교 유진 클라크(Eugene F. Clarke)대령이 지휘하고 한국군 계인주(桂仁珠) 대령, 연정(延禎) 대위 등과 KLO부대원으로 구성된 첩보부대가 그것이다.
이들은 9월1일 영흥도에 잠입하여
역시 인천 앞바다에 관한 정보를 수집,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로 타전하는 임무를 맡았다.
KLO(Korea Liaison Office)는 미군 극동사령부에서 북한내 활동을 위해 만든 첩보부대로서 구성원은 한국 병사들이다.
즉, 미극동사령부는 해방후 북한에 침투 암약하던 민간특공조직 정의사(正義社)와
백의사(白衣社) 등을 1948년 8월 대한민국 건국 후에 하나로 통합,
반도호텔 202호실에 비밀본부를 설치한 바 있는데
6.25전해 1949년 6월엔 정식 부대가 되었다.
이들이 북한의 남침후 10여개의 유격부대에 참여하여 ‘켈로부대’로 통칭, 큰 공을 세운다.
인천상륙 준비 ‘잭슨작전’에 참여한 이들은 ”9월15일 0시 팔미도 등대 불을 켜라“는
맥아더 장군의 지령을 받아 천신만고 끝에 등대 점등에 성공하게 된다.
「D-1일 14일 오후 7시30분, 최 대장은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등대 탈환에 나섰다.
6명의 대원들은 대검, 수류탄 두 발, 권총 등 경무장만 한 채 목선(木船)을 이용해
팔미도 해안가에 잠입했다.
섬은 어찌된 일인지 북한인민군의 저항이 없었다.
등대가 있는 정상까지 60m쯤 기어올랐다.
등대지기 숙소에서 인민군으로 보이는 시커먼 그림자가 나와 벼랑 쪽으로 휙 사라졌다
. 곧이어 첨벙첨벙 소리가 났다. 두 명이 도망가는 것 같았다.
이때가 9월14일 23시30분, 등대를 점령하였으나 등대 불을 킬 수 없었다.
점등장치의 나사못이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나사는 어디로 갔을까?
알다시피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했다. 등대의 불은 누가 켰을까?
맥아더는 약속을 지켰다.
이승만과의 약속을!“대한민국이 공격을 받는다면
미국 캘리포니아가 공격받은 것처럼 달려와 지켜주겠다“
맥아더는 이 약속을 두 번이나 했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선포식에 참석하여 ’안보‘를 걱정하는
73세 노대통령 이승만을 포옹했을 때,
그리고 두 달 뒤 도쿄로 날아와 ’공산침략‘ 대책을 협의하는 이승만의 손을 굳게 잡고 또 한
[출처] 특공대 자결 '팔미도 등대' 드라마 ··· 맥아더 '멸공전쟁’ 다짐|작성자 gumsa1106
맥아더가 6월29일 한강전선 시찰에서 결심한 인천상륙계획이 군부의 강한 반발에 부딪쳐 두달이나 시간을 끌었기 때문이다. 도쿄의 미극동군 해군사령관 찰스 터너 조이(Chales Turner Joy)제독은 "성공 확률이 5000분의 1도 안될 것“이라 주장했고, 일부 참모들은 전라북도 군산이나 경기도 평택군 포승면 앞바다(아산만 입구 서해대교 위치)로 변경하자고 건의하였다.
왜 그런가? 인천 앞바다는 상륙작전이 피해야 할 악조건의 특징을 모조리 갖추고 있다.
▶ 세계최대급 조수간만의 차=최고 9m, 최소 7m에 이르는 조수간만의 차는 ‘밀물’에서만 상륙이 가능하므로 ‘썰물’때는 좌초상태에 빠지며 다음 밀물까지 적의 공격에 속수무책이다.
▶ 길고 넓은 갯벌=간조시 2~5㎞나 생기는 갯벌은 9시간동안 도보와 차량통행 불가능.
▶ 높은 해벽=배타고 다가가 방파제에 사닥다리를 놓고 올라 원시적 육박전을 벌어야한다.
▶ 항구와 시가지 밀접=상륙 즉시 적군과 치열한 시가전이 불가피하다.
▶ 좁은 단일 통로=항만에 하나뿐인 수로는 만조시에도 맥주병 병목처럼 좁아서 상륙 함정들이 밀집되므로 적의 좋은 표적이 되어 단시간 내 전멸될 위험이 크다.
과연 ‘5000분의 1 확률‘이란 말이 어울리는 최악의 조건 종합세트 같다. 상식적인 군사전력가라면 누가 이곳에 상륙할 엄두를 내겠는가. 그러나 맥아더는 달랐다. 한강변 한국군 용사와의 대화 이래 ’인천상륙‘ 결심이 흔들린 적이 없다.
”최악의 조건이 최선의 기회이다. 적이 ’설마‘하는 인천이 최상의 상류지다“
역전의 명장 맥아더다운 결단이다. 적의 허(虛)를 찌르는 병법의 기본 아닌가. 한번 결심하면 반드시 ’승리‘로 끝장내야 하는 맥아더는 인천상륙 준비작전 명령을 이미 7월부터 내려놓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전쟁에서 맥아더는 세계 전사(戰史)에 유례없는 50여차례 상륙작전을 모두 성공시켜 ’상륙작전의 달인‘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바로 '아일랜드 호핑'(Islands Hopping:섬에서 섬으로 깡충 뛰어 점령)작전이 그것, 넓은 태평양 여러 섬들에 박힌 일본군 진지를 직접공격하지 않고, ‘후방 상륙—병참선 차단—일본군 고립 격파’했던 전술이다. 인천상륙을 주장하는 까닭은 충분했다.
하지만 군 수뇌의 ‘인천 반대’ 목소리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급기야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 해군참모총장 셔먼 대장, 해병대 대표가 도쿄로 날아와 맥아더의 고집을 꺾으려 했다. 맥아더가 입을 열었다.
"적은 지금 후방을 무시하고 있다. 병참선이 너무 길어졌으니 서울에서 신속히 차단해야 한다. 적의 전투부대는 사실상 모두 낙동강전선에 집중되어있으며 예비 병력마저 없어 전세를 회복할 만한 능력이 거의 없다." 맥아더는 전략적, 정치적, 심리적 이유를 들어 인천 상륙의 다목적 이익을 강조하였다. 상륙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수도 서울, 그 탈환의 상징적 승리 효과는 다른 도시에 비할 바 아니다. 게다가 경부선, 호남선 등 철도의 요충지, 적의 보급망을 단번에 끊어버린다며 맥아더는 지도를 가리킨다. ”인천은 제8군이란 '망치'가 적군을 분쇄할때 제10군단이 '모루' 역을 할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설명하였다. (맥아더 회고록 [위대한 생애 Great Lives] 일신서적출판사, 1993)
귀국한 군 수뇌들은 존슨 국방장관과 트루먼 대통령에게 결과를 보고하였다. 마침내 대통령이 ‘인천’을 지지하고 미 합참이 8월28일 공식 승인한다.
★ 미 해군-해병대 격감...맥아더의 고군분투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인천상륙작전은 사실상 7월초부터 추진에 들어갔다.
맥아더는 서울서 6월29일 ‘상륙결심’이후 7월22일에는 인천상륙을 감행할 목표로 ‘블루 하트’(Blue Heart)작전계획을 세웠으나, 본국 병력지원이 형편없이 지연됨으로써 낙동강 전투에 투입할 병력도 부족한 형편인지라 일단 연기, 그러나 ‘준비작전’은 계속 추진해나갔다.
이때 ”미군은 축구경기를 간신히 이기고 해산해 술 마시는 축구팀과 같은 형편“이었다.(웨드마이어 보고서). 2차대전 후의 미군은 ‘퇴역’과 ‘감군’바람에 갈팡질팡이다. 맥아더의 태평양전쟁 주력이었던 해병대는 35만명을 헤아렸으나 절반으로 격감하고, 하필 6.25나던 1950년초 전면개편을 단행하여 ‘명맥’만 남았다. 610척의 상륙함정도 510척을 폐품처리, 신형함정 건조는 상상도 못할 지경이다. 전쟁초기 한국에 급파했던 스미스 대대가 첫 판에 참패한 것은 미육군이 얼마나 약화되었는지를 말해준다. ‘원폭 승리’ 이후 군부는 ”공군이 다 해줄 것“이라는 공군의존 인식만 팽배해져 있었다.
존슨 국방장관은 해군대학 졸업식에서 말했다. “해군의 전성기는 끝나간다. 더 이상 해군과 해병대를 많이 보유할 필요가 없어졌다. 합참의장의 보고에 따르면 상륙작전은 구식이 되었으며 더 하지 않을 것이다. 해군이 하는 일을 공군이 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선호 [9월의 기적, 인천상륙작전] NEWS WIN KOREA, 2020.9)
도쿄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휘하에는 소규모의 상륙작전 부대 밖에 없었다. 그는 태평양함대로부터 LST등 상륙함 몇 척씩을 배속 받아 훈련단을 만들고, 57명의 해군 및 ·해병 요원들을 차출하여 충당하였다. 그 중에 제1수륙양용단 사령관 도일 제독은 태평양 전쟁시 맥아더의 지휘아래 많은 전투에 성공한 상륙전문가였다. 그는 다시 맥아더의 요청에 따라 핵심 대장으로 임명되었고 병력을 재조직하여 7월부터 인천상륙작전계획에 달라붙게 된다.
▲ 기함 맥킨리호에서 맥아더 장군이 쌍안경을 가지고 상륙작전을 지휘하는 모습.
7월27일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이 대구로 날아왔다. 북한군과 싸우는 한미 군사지휘관들과 인천상륙작전을 현장 점검하기 위해서다. 정일권 육군참모총장, 알몬드 장군, 워커 사령관, 스트레트 마이어 공군사령관 등과 작전회의를 열고 인천상륙과 낙동강 전투의 입체작전을 세밀히 논의하며 한국군의 용전을 당부하였다.
“내가 바라는 승리란 오직 공산국 섬멸 한 마디뿐이다. 지난 번 한강 시찰에서 이 결의를 굳히고, 도쿄로 돌아가는 즉시 알몬드에게 계획을 지시한 바 있다. 바로 인천상륙이다. 하지만 전국(戰局)이 뜻같지 않아 D-Day 7월22일 ‘블루 하트’(Blue heart, 파란 심장)작전을 늦추기로 했다.
제2안 ‘크로마이트 작전’도 미본토의 2사단과 1해병여단을 동원해 결행하려 했지만, 낙동강 전선의 급박해진 방어에 또다시 기다릴 수 밖에 없다. 인천상륙의 두 번째 연기다. 2사단과 해병여단, 하와이의 5연대 전투단 및 5개 전차대대가 8월 중순까지 이곳으로 올 것이다.
인천상륙은 기필코 결행한다. 공산군을 깡그리 섬멸해 버릴 수 있는 유일한 작전이기 때문이다. 그 때까지 낙동강 방어전에 특히 정일권 장군의 한국군 분투를 당부한다. 한국군은 장비나 보급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있으나 미군 GI(병사)들에겐 바랄 수 없는 반공 필승의 투지를 가지고 있다. 나 역시, 이 신념을 갖고 있다.
나는 여기 낙동강 라인에 역사적 이미지를 남기고자 한다. 즉 공산군을 막아낸 방어전이 아니라, 데모크라시(민주주의)의 결집력으로써 공산 침략군을 섬멸해 나가는 반공의 스타트 라인으로 역사에 장식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스탈린은 지금 세계 적화를 노리고 있다. 그 첫 시도가 이 한국침략이며, 북한 괴뢰군은 스탈린의 용병(傭兵)일 뿐이다.” ([정일권 회고록] 고려서적,1996). 맥아더는 이 참에 세계공산세력을 격멸하자는 ‘반공전쟁’을 성언한 것이었다.
맥아더는 미군 수뇌들을 이끌고 오후 2시반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만났다.
이승만은 맥아더로부터 다시 한번 ‘멸공작전’에 관한 설명을 듣고, ‘본토로부터 무기공급’이 8월부터 시작될 것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역정부터 냈다.
“지금 당장 무기가 필요하오. 적군은 피난민들을 앞세워 방패삼이 쳐들어오고 있기 때문에 미군도 속수무책 아니오. 우리 국군에게 무기를 진작 지급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오” (프란체스카, 앞의 책)
▲ 인천항에서 남쪽 15.7㎞ 떨어진 작은 섬 2개 팔미도. 불켜진 등대는 2003년 신설된 등대, 그 앞에 작은 등대가 1903년 구한말 설치된 한국 최초의 등대로서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을 안내한 등대이다.
★ 양동작전...X-Ray 작전 & 잭슨 작전...”팔미도 등대 불을 켜라“
드디어 인천상륙 D-Day는 9월15일로 정해졌다. 참모장 알몬드(Edward M Almond)소장이 낸 작전계획 크로마이트(Chromite)는 인천상륙(100-B), 군산상륙(100-C), 주문진상륙(100-D) 등 3개안인데 처음부터 100-B(인천)을 결심한 맥아더는 D-Day까지 두 가지 준비작전을 빈틈없이 재촉하고 있었다.
하나는 ‘인천’을 숨기기 위해 타지역을 공격하는 양동작전, 곧 연막-교란작전이고, 동시에 상륙지 인천 항만수로 조사와 주변 적군태세를 탐색하는 첩보작전이다. 크롬 철광석을 지칭하는 ‘크로마이트’를 암호명으로 정한 것 자체가 은폐전술이다.
◉ 양동작전=북한군을 교란할 양동작전이 펼쳐진 지역은 동해안 주문진 삼척, 서해안 군산 등이며, 북한의 함경남도 신포 마량도, 평양남쪽 남포 등이다.
평양의 인천 같은 남포에는 9월4일부터 14일까지 맹폭격을 가하였다.
이튿날 5일에는 전북 군산 주변 50km 반경을 13일까지 폭격, 상륙작전 공습패턴을 흉내냈다. 12일 미-영 혼성기습부대가 군산에 상륙을 시도하는 체 가벼운 교전까지 감행하며 북한군에 ‘상륙 시그널’을 보여준 뒤 철수하였다.
인천은 9월 10일부터 미 해군과 공군이 월미도를 비롯, 인천시와 주변 전역에 대대적인 폭격을 퍼부어 초토화시킨다. 인천에서 군산 사이 해안선 폭격도 멈추지 않았다.
9월 13일에는 동해안 삼척시 일대에 아이오와급 전함 USS 미주리 함을 동원한 함포 사격을 가하였다. 같은 날, 낙동강 전선의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유엔군과 한국군은 10월 중순 총반격을 감행할 것"이라고 선언, 대대적인 보도로 나갔다. 이를 본 북한군은 후방의 예비부대들을 낙동강 전선에 집중투입, 대구 장악에 총동원한다. ‘교란작전’ 대성공이다.
◉ X-Ray작전 및 잭슨 작전=양동작전과 동시에 맥아더는 인천 상륙에 필요한 해로와 항만정보 수집을 한국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에게 주문했다. 이에 따라 8월 17일부터 함명수 소령(뒷날 해군참모총장 역임)이 지휘하는 첩보부대 17명을 구성, 영흥도와 덕적도를 근거지로 X-ray 작전에 돌입한다. 북한군의 배치와 무기 조사, 해로에 부설된 기뢰들의 위치 등을 파악하는 한편, 인천 시가지와 그 주변의 적군 상황을 염탐하는 위장밀행작업도 병행한다.
그러다가 막판에 북한군에게 발각되자 임병래 중위는 대원들을 탈출시키고 홍시욱 하사와 둘이 남아 벌기 위해 북한군과 싸운다. 첩보대가 무사히 섬을 빠져나가자 임 중위와 홍 하사는 생포시 정보 누설을 걱정하다가 권총으로 자결하고 말았다. (뒷날 한국정부와 미국정부는 이들에게 1계급 특진과 훈장을 수여하였고, 고속함정에 이들의 이름을 붙인다).
▲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부산항에서 함정에 오르는 미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