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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물리학자
그러려니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튿날 아침은 거짓말처럼 머리
가 개운했다. 코가 비뚤어질 정도로 마셨으면 십중팔구 머리가 멍
하고 속이 울렁거리게 마련인데, 순범은 새로운 사실에 대한 기대
감 때문인지 피곤한 줄을 몰랐다.
순범은 시경의 기자실에 전화만 걸어보고는 일찌감치 신문사로
직행했다, 복도에서 마주친 선배 기자가 걸음을 서두르는 순범에게
말을 걸어왔다.
요즘 뭐 하느라구 그렇게 쏘다녀?
글쎄, 늦바람이라도 났나 봅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릴세. 노총각이 늦바람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어?
번지수는 틀립니다만, 좌우지간 고마운 말씀입니다.
순범은 한달음에 조사실로 올라갔다. 윤신애가 부지런히 자료를
복사하다가 눈짓으로 인사를 보내왔다.
뭐 좀 있어요?
있는 대로 찾아봤지만 보도자료에는 없었어요. 온갖 자료들을
뒤지다 해외 과학자명단에서 겨우 찾아냈어요.
윤신애는 아주 고생해서 찾았는데도 불구하고 자료가 몇 줄 없는
것이 억울하기라도 한 듯 약간의 제스처를 보이며 순범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순범은 종이를 받아들고 내용은 확인하지 않은
채 일단 윤신애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윤신애 씨, 번번이 고맙습니다. 언제쯤 시간 내주시겠습니까?
그거야 뭐, 사는 사람 마음이죠.
그럼 좋습니다. 이번 금요일 저녁 7시쯤 어때요?
연락 기다리고 있을께요.
그럼 금요일에 만나기로 합시다.
네, 안녕히 가세요.
자리로 돌아와 책상 위에 펼쳐놓은 복사지에서 이용후의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순범은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이용후.
1935년생. 1955년 도미하여 피츠버그 대학에서 석사 학위, 펜실
바니아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연구활동을
하고 있음
윤신애의 말대로 자료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간단한 것이었지만
순범은 이 짧은 이용후의 기록에서 눈을 뗄 줄 몰랐다.
물리학자와 대통령?
과연 박정희 대통령과 이용후는 어떤 관계란 말인가? 그리고 당
시에는 절대권력자였던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라면, 이용후는 무슨
이유로 죽어야 했을까? 깡패들을 시켜 그를 죽인 배후인물은 도대
체 누구란 말인가?
순범은 꼬리를 물고 새롭게 떠오르는 의문과 함께 물리학자와 대
통령이 연관될 만한 꼬투리를 찾기 시작했다 이용후에 대한 기록
이 너무나 없는 것에 대한 보충이라도 하려는 듯 윤신애가 복사해
준 1978년 경의 청와대 동정에 대한 자료는 큰 각봉투 하나가 넘는
많은 양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 많은 자료를 한 줄도 빼지 않고 다 읽었음에도 불구하
고 박정희 대통령과 물리학자인 이용후를 연결할 수 있는 끈을 찾
아낼 수는 없었다.
큰 기대를 했던 만치 실망도 컸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범의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도저히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없는 기분이 되어 순범은 밖으로 나와 자동차를 몰고 북악 스카이
웨이로 향했다. 이용후 박사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지점을 지나
팔각정에 올라 머리를 좀 식히려 했지만, 순범은 머리 속에 깊이 뿌
리박힌 물리학자의 의문의 죽음으로부터 헤어날 수 없었다,
이용후.
박성길은 그를 두고 안경을 긴 샌님 같은 모습이었지만, 의지가
대단했던 사람이라고 했다. 폭력과 죽음 앞에서 그는 무엇을 위해
끝내 입을 다문 채로 죽어갔단 말인가?
도시의 밤
순범은 갑자기 공허한 심정이 되어 누구라도 만나고 싶었다. 개
코를 불러 술이나 한잔 마실까? 순범은 종로경찰서에 전화를 하였
으나 개코 형사는 출타중이었다, 이럴 때 순범은 더욱 외로워지곤
했다, 그러나 만만하게 불러내 부담없이 어올리기에 딱이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일반인과 기자와는 시간의 구조가 같지 않은 터라,
한창 일하고 있을 친구나 동창을 불러낸다는 게 그리 마음이 내키
는 일은 아니었다.
신윤미, 이 여자에게 전화를 해볼까?
그러나 다음 순간 마음속에 망설임이 강하게 생겨났다, 재벌이든
검찰총장이든 영업시간 외에는 국물도 없는 여자라고 최 부장이 말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날 신윤미가 자신을 대하던 태도는 결코 손님과 마담과
의 단순한 관계만은 아니었다고 순범은 믿고 싶었다. 만약 전화를
했다가 거절을 당한다면 ? 허구한날 사건이나 쫓아다니고 범죄자들
이나 만나고 폭주하는 사건에 찌들대로 찌들어버린 수사관들과 아
귀다툼을 벌이는 순범이었지만, 여자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숙맥이
었다. 순범은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고 패 오랫동안 망설였다, 그러
다 문득 전화통 앞으로 이끌려 가는 자신을 느꼈다,
신윤미 씨 있습니까?
네, 전데요, 어머 권 기자님 아니세요?
아, 기 억하시는군요.
순범은 가슴이 뭉클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일른지 모르지만, 긴
망설임 끝에 건 전화의 첫마디에, 상대가 목소리만으로 자신을 알
아주니, 순범의 우려는 來은 듯이 없어지고 더욱 반가운 마음이 들
었다.
권 기자님 목소리는 특이하고 인상적이라서 한 번 듣고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이른 시간에 웬일이세요?
왜 걸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지금 약간 적적한 듯해서요.
호호, 미혼이시라 가까이 지낼 사람들이 많이 있으실 텐데 제가 생각났어요?
아니, 아닙니다. 저는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혹시 시간이 괜찮
으시 다면 ,,, ,,,.
조금 시간이 흐른 뒤 수화기에서 다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계시는 데가 어디신가요?
여긴 북악 스카이웨이 팔각정입니다.
어머, 왜 낮에 혼자 거기 계세요? 이제보니 권 기자님 로맨티시
스트인가 봐요.
뭐 좀 생각할 것도 있고요.
프라자 호텔 로비 라운지 괜찮으세요?
좋습니다.
한 시간 후에 거기로 나갈께요.
전화를 내려놓는 순범은 날아오를 것 같았다. 업신여김이나 당하
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가 아닌가? 순범은
신윤미 같은 여자가 어떤 이유로 요정에 나가게 췄을까 하는 생각
을 해보았다. 순범은 그렇게 약간의 사념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시
간에 맞춰 팔각정을 내려갔다,
햇빛 아래서 보는 윤미의 모습은 지난날 삼원각에서 보았을 때와
는 전혀 달랐다. 그날은 조명도 조명이려니와 머리를 뒤로 말아을
린 성숙한 여인의 분위기였었지만, 오늘은 화장기가 전혀 없어서
그런지, 소녀처럼 앳되고 청초하고 생기가 넘쳐보였다. 부드럽게
풀어져서 일렁거리는 머리결에서는 샴푸냄새 같기도 하고 향수냄
새 같기도 한 은은한 여자의 체취가 풍겼다. 미인은 나이를 먹지 않
는다는 말이 있었던가? 순범은 가끔 영화나 잡지 같은 데서 나이가
만만치 않은 외국의 주연급 여배우들이, 오히려 훨씬 나이가 적은
단역배우들보다 젊게 보이던 것을 보고는 그 속담이 맞구나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이 속담은 바로 이 여자를 두고 만들어진 것
같았다.
나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은 아예 어려 보이시는군요.
호호, 미혼의 미남을 만나서 그런 모양이에요.
윤미는 방금 목욕이라도 하고 나왔는지 매우 상재한 표정이었다.
거기에는 몇 시까지 가게 되어 있습니까?
거기라노? 아, 가게 말이군요? 저는 꼭 정해져 있는 편은 아니
라서 ,,, ,,,.
그럼 잘 되었군요. 오늘은 윤미 씨도 어린 여학생이 되고 했으
니 거기에 맞게 영화도 좀 보고 생맥주도 한잔 마시고 좌우간 늦
게까지 좀 재미있게 놀았으면 좋겠네요.
호호, 우리 가난뱅이 아저씨가 극장표 살 돈하고 저녁 먹을 돈
까지 다 있으세요?
윤미는 생각 외로 소탈한 편이었다. 도저히 한국 최고의 고급요
정에서 거물들하고만 상대하는, 구미호 마담이라고는 생각되지 않
았다.
그럼 이제 일어날까요?
저는 오랜만에 나왔거든요, 그래서 권 기자님만 괜찮으시다면
어디 교외로 나갔으면 해요.
좋습니다. 어디로 모실까요?
시간에 부담가지시는 거 아니에요?
전혀 아닙니다.
피곤하시지도 않고요?
괜찮습니다. 오히려 힘이 솟는걸요?
그럼 용인 자연농원 가는 건 어때요?
고소원이나 불감청이로소이다.
순범은 이 말을 해놓고 문득 후회가 되었다. 윤미가 알아듣지 못할
어려운 말을 쓴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윤미는 개의치 않고
쾌활하게 웃으며 일어섰다. 아마 분위기로 보아 좋다는 말 정도로
알아들은 거라고 순범은 생각했다.
어머, 권 기자님도 차 있으세요?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자신을 보고 윤미가 의외라는 듯 말하자 순범은
빙그레 웃었다. 곧이어 순범이 차를 끌고 오자 윤미가 깔깔대고 웃었다.
순범도 윤미를 따라 함께 웃었다. 순범이 먼저 멋쩍은 웃음을 참으려고
헛기침을 하자, 윤미도 애써, 웃음을 참으려는 듯 고개를 숙이며
손을 입가에 가져 갔다.
이런 차 요즘 보기 힘들어요. 오래 됐지만 고장도 없고 무엇보다 정이 들었어요.
변명 섞인 말을 늘어놓는 순범이나 고개를 끄덕이는 윤미나 여전히
입가에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이 차 이름이 뭐예요?
'K303이요. 한 15년쯤 된 모델이죠. 옛날에 기아산업에서 만든
찬데 차체는 아주 튼튼해요.
윤미는 자신의 백색 그랜저 승용차는 주차장에 맡겨두고 순범의
차에 같이 탔다, 자동차는 남산 터널을 지나 한남동을 거쳐 경부고
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차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은 두 사람의 마음만큼이나 시원하
고 상쾌했다. 얼마 만에 이런 기분을 느껴보는 것일까? 여자와의
교제가 거의 없다시피 한 순범으로서는, 이와 같은 기분이 대학시
절 미팅에서 만난 여학생하고 송추로 놀러갔던 때 이후로 처음이었
다.
늦여름의 잔광이 아직도 따갑게 느껴지는 가운데, 하늘엔 때 이
르게 비늘구름이 끼어 있었다. 푸르게 물들어가는 하늘에 모든 것
을 묻고 이대로 목적지 없이 달려만 가고 싶은 기분에 젖은 순범은
옆자리의 윤미를 힐끗 돌아보았다. 순범의 눈에 어린 아이처럼 좋
아하는 윤미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디선지 모르게 풍겨오는 꽃내음
에 순범은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곁을 지나치는 트럭의 운전사가
이들에게 손키스의 시능을 해보이더니 휑하니 앞질러 갔다.
낮엔 주로 뭘 하세요?
뭐 특별히 하는 것은 없는 편이에요. 책을 좀 읽기도 하고 가끔
지방에 갔다오기도 해요.
지방에는 무슨 일로요?
글쎄.., ,.., 친구들이 있어요.
친구들이오?
그래요, 아주 어린 친구들이오.
대화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워낙 여자들과 대화를 별로 나눠
보지 않았던 순범은 재치있게 이말저말 갖다붙이지 못하는 스타일
이었다. 윤미도 고급요정의 마담 같지 않게 별로 말이 없는 편이었
다, 그렇다고 대학시절에 미팅하던 것처럼 이것 저것 신상에 대한
것을 캐묻기에는 다소 궁상맞은 감이 들었다. 침묵이 오래 지속되
어 거북했는지 윤미가 한마디했다.
우리 끝말 이어가기 해요?
끝말 이어가기요? 그거 좋죠.
근데 그냥 단어만 이어가는 것은 지루하니 우리 한자숙어로만
끝말 이어가기 해요.
순범은 깜짝 놀랐다. 인문계 대학을 졸업하고 신문사 기자로 십
수 년을 근무하고 있는 자신에게, 술집의 마담으로 있는 여자가 한
자숙어로 끝말 이어가기를 하파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
인가?
해본 적은 없지만 재미는 있을 것 같군요. 그럼 먼저 시작하세요
윤미는 상쾌하게 웃으며 조그만 입을 움직였다.
역지사지 (易之思之)
지피지기 知披知己
기인이사 奇人異士
사소취대 捨小取大
대동소이 大同小異
이심전심 以心전심
심사숙고 深思熟考
고장난명 孤理難鳴
명경지수 明競지수
수수방관 術手傍觀
관포지교 管理之交
교우이신 交友以信
신신당부 申申當付
부전자전 父情子傳
전후좌우 前後左右
우후죽순 雨後竹筍
순진무구 純與無境
구우일모 九牛一毛
모수자천 毛遂定理
천려일실 千廬一失
실사구시 實事求長
시종여일 理終如
일월성신 日 月星原
신상명세 身上明細
세고취화 勢孤取和
호호, 이제는 안 봐 드릴래요. 그건 한자숙어가 아니잖아요? 아
까 사소취대는 봐드렸지만요.
하하,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아셨어요?
저도 바둑을 좀 두거든요?
바둑을요? 아니 얼마나 두시는데요?
일급이요.
아니, 그게 정말입니까? 어떻게 바둑을 일급이나 둘 수 있습니
小心
권 기자님은 얼마나 두시는데요?
저는 삼급입니다.
다음에 한번 두기로 해요.
옛날의 황진이 같은 여자가 이랬을까? 순범은 속으로 놀라고 있
었다, 이 여자는 이제보니 인물만 빼어난 것이 아니라, 머리나 재주
또한 범상하게 볼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최 부장이 옛날에 워낙
세게 놀았던 여자라고 말한 것을 순범이 통속적으로 받아들인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자연농원은 재미있었다. 두 사람은 그들의 말대로 이십대 초반의
연인처럼 어둠이 내릴 때까지 정겹게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모처럼
이런 데 나와서 그런지, 윤미의 거리낌없어 하는 태도가 편해서 그
런지, 아무 생각 없이 순수하게 어울릴 수 있었다. 총각인 순범은
그렇다치더라도 십여 년을 요정에 몸을 담아온 윤미가 이렇게 순수
하게 어울릴 수 있는 것은 참으로 놀라을 정도였다. 윤미는 이제 경
이로움을 넘어 신비스럽기까지 하였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
장미정원을 산책하며 살며시 손을 맞잡았을 때 심장이 거세게 고동
치는 것을 들으며 순범은 나직히 물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째서 나같이 보잘것없는 남자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거지요?
윤미는 아무렇게나 손을 내맡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조심스레 손
을 빼어 가볍게 손끝만 맡기고 있었다. 그러한 윤미의 모습은 순범
에게 마치 가녀린 첫사랑의 여인과 같은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이 여자는 다른 여자와는 달리 순범에게 두려움을 주지 않았다.
제가 오히려 묻고 싶은 말인걸요?
이 여자의 답변은 순범에게는 신기할 정도였다.
순범은 언제인가 텔레비전에서 젊은 여자들을 인터뷰할 때, 어떤
남자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좋아
할 것이라고 대답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순범은 그들의
저차훤절 대답에 경악했었던 것이 생각났다.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
람을 좋아하겠다는 것은 얼마나 철저하게 타산적인가? 나를 좋아하
면 나도 너를 좋아하겠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당신이 주는 만치 나
도 주겠다는 것이고, 또 달리 말하면 당신이 나를 싫어하면 나도 같
이 싫어하겠다는 뜻도 되고, 또 한번 달리 말한다면 다른 사람이라
도 나를 좋아해주면, 그 사람을 좋아해 주겠다는 것도 되지 않는
가? 물론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고 감정을 언어로 표시하는 데 따른
응답자들의 미숙한 표현력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남녀가 만나는
것을 결코 가볍게 생각하는 스타일이 아닌 순범에게 여자들의 그런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윤미는 순범의 이러한 까다로운 잣대의 어느 것에도 걸리
지 않는 겸손이 있었고 현명함이 있었다. 윤미의 대답은 짧으나마
순범이 잃어가는 자신감을 되찾게 해주는 것이었다.
밤은 너무나 빨리 찾아왔다. 어둠이 깔린 고속도로를 달리며 순
범은 윤미를 만나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궤적을 찬찬히 더듬
고 있는 중이었다, 후렌치 레볼루션의 공포 속에서 눈을 감은 채 자
신의 팔을 꼭 잡고 있는 윤미의 체온을 느꼈을 때의 기분이란, 그대
로라면 나뭇잎에 몸을 띄우고 태평양도 건널 수 있을 것 같지 않았
던가? 비록 일개 유락용 탈 것이지만 이대로 멈추지 말고 영원히
달렸으면 하는 마음에 얼마나 아쉬운 기분이 들었던가? 이제 서을
에 도착하면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순범의 마음이 어두워졌다.
늘 판에 박힌 노총각의 단조로운 생활을 해오던 순범에게, 윤미
는 잠시였지만 새로운 세계에게로의 문을 열어주었다. 순범은 자신
이 사랑에 빠지고 있다고 느꼈다.
오늘은 이대로 헤어져야 하는 건가요?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맥주라도 한 잔.
호호, 아까 생맥주 사주시기로 하셨잖아요.
어딘지 모르게 순범의 목소리가 무거운 분위기를 띠자 윤미는 경
쾌한 목소리로 순범을 다시 (가난뱅이 아저씨)로 만들었다. 한남대
교를 건너자 순범은 차를 남산으로 몰았다 하얏트 호텔 스카이 펍
으로 올라가 창가 쪽으로 자리를 잡은 순범은 위스키를 주문했다,
한강교 위에 꼬리를 물고 있는 자동차들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불야
성의 야광벽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가운데, 멀리 관악산 위의
안테나 신호등이 도시의 밤을 지키는 파수꾼마냥 쉴새없이 명멸하
고 있었다, 순범은 윤미에게 잔을 권하고는 스스로 잔을 채워 스트
레이트로 들이켰다. 요즘의 총각답지 않게 이런 분위기에서 여자와
같이 술을 마신다는 것이 순범에게는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
운 기분과 경험이었다.
(이런 밤은 취하고 싶다. 내 마음의 깊은 한 곳에서 나의 행동을
지시하고 제어하는 모든 윤리, 도덕, 가치관, 철학들을 알코올의
약효로 잠재워놓고 오직 본능이 명하는 대로 끝없이 한번 가보고
싶다, 그 너머의 세계에 누구라도 한 사람 같이 가주기만 한다면
돌아오지 않은들 어떨 것인가? 인생은 어차피 외로운 것. 한 번
간 인생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순범은 다시 한 잔을 더 들이켰다.
괍히 드시는 거 아녜요乙
윤미는 술을 마썬서 그런지 조명 탓인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채로 순범을 염려했다,
여자, 신비로운 존재였다. 본래 여자에게 말을 잘 못 하는 데다
술을 마시면 더더군다나 말이 적어지는 순범은 그녀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고는
다시 잠자코 술만 마셨다.
홀의 가운데에서 생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동남아 계통으로 보이는 여가수는
은은하고 애절한 목소리로 멜라니 샤프카의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을
부르고 있었다. 어두운 조명 사이로 보이는 윤미의 얼굴은, 마치 멀리
다른 별에서라도 온 듯 순범의 시야 속에서 잘게 부숴졌다가 뭉치고
뭉쳤다간 다시 잘게 부숴지곤 했다. 순범의 목구멍에는 윤미에게 하고 싶은 말로
확 차여 있는 듯했다. 그런데도 단 한 마디의 말도 밖으로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가빠져오는 느낌, 순범은 내뱉듯이 말을 던졌다.
오늘밤, 윤미 씨와 함께 있고 싶습니다.
취중에도 순범은 윤미의 얼굴이 당혹감과 망설임과 형언할 수 없
는 수많은 표정으로 잘게 나누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취한 것일까? 윤미의 얼굴이 순범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순범은
어색한 표정으로 윤미에게 무엇인가 말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지금은
자리에서 일어날 때라고 생각했다.
순범은 일어나서 계산을 치르고 프런트 데스크로 내려갔다. 프런
트 맨으로부터 열쇠를 건네받은 순범을 윤미는 말없이 따랐다,
룸에서 보는 도시의 야경은 색다른 감홍을 느끼게 했다. 줄을 잇
던 자동차의 미등행렬도 뜸해 있었다. 텅 빈 공허감 속에서 시간만
이 쉬지 않고 흐르는 듯했다. 세상 속에 오직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순범은 윤미의 가느다란 허리를 부등키며 침대에 눕혔다. 눈을
감고 있던 윤미의 몸이 가볍게 떨리는 듯했다. 순범의 입술이 윤미
의 발간 볼에 살짝 부딪치자, 윤미의 손이 순범의 목을 살며시 끌어
안았다. 순범은 천천히 윤미의 옷가지를 하나씩하나씩 벗겨나갔다.
윤미의 하얀 피부가 순범의 눈깔에 완전히 드러나자, 순범은 자
신도 모르게 숨을 내뱉었다 부끄러운 듯 눈을 감은 윤미의 몸내음
이 순범의 신경을 어지럽게 자극했다, 순범은 윤미의 몸을 조심스
레 쓰다듬기 시작했다. 순범의 손이 윤미의 가슴을 가만히 감싸쥐
며 힘을 주자 윤미의 입에서 가벼운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 순
간, 순범의 입술이 윤미의 입술을 틀어막았다. 키스는 길고 달콤했
다.
또다시 순범의 입술이 부드럽게 윤미의 몸을 핥아나갔다. 귀에서
목으로 가슴에서 허리로, 때론 천천히 때론 빨리,,,,,,. 순범의 입술
이 윤미의 몸 구석구석을 파헤칠수록 윤미의 입에서는 끈끈한 입내
음이 번져나오는 것 같았다. 윤미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순
범을 힘껏 끌어안았다. 순범이 기다렸다는 듯 윤미의 몸 위로 자신
의 몸을 밀착시켰다.
당신은 특별한 사람,,,"'
윤미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윤미의 얼굴 표정이 잠간
이었지만 겅그러졌다가 다시 펴졌다. 윤미의 몸 안으로 불쑥 순범
이 들어간 거였다. 윤미는 순범의 연주에 맞춰 춤을 추는 무희처럼
자신의 몸을 움직여주었다.
도심의 깊은 곳 어딘가에서 밤새가 몸트림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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