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 부지에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의 집이 들어선 사연입력 : 2014.11.14 14:49 (36회) 1967년 여름에 이미 KISA를 ‘어중이떠중이 장사치들의 집합’이라고 의심했던 박태준. 가난한 한국정부에 차관도입이나 공장설립을 주선해온 공로를 앞세우며 KISA의 거간꾼 노릇까지 하고 있는 아이젠버그. 1968년 여름에는 아이젠버그가 훨씬 유리한 국면이었다. 아직 한국정부(박정희)나 포철 사장(박태준)에게는 KISA를 대체할 어떤 카드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박태준은 KISA를 떨쳐내고 일본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희망처럼 품고 있었다. 그러나 파트너를 교체할 방법론이 없었다. 이에 대해 김철우 박사는 이렇게 증언했다. <유태인이 하는 그 컨설팅 회사는 같은 제철 설비를 터키에도 팔아먹었는데, 결국 터키가 당했다. KISA의 프로젝트는 한국에 낡은 기계를 팔아먹기 위한 계획이었다. 포스코가 내게 그 계획서를 검토해달라고 보내왔는데, 계획은 엉터리였다. 60만 톤 계획이라면 실제로는 30만 톤 정도밖에 나오지 않는 내용이었는데, 이를 후지제철에 검토해 달라고 부탁했는데도 같은 의견이었다. 박태준은 내심 KISA와의 계약이 파기되기를 원했다. 결국 KISA와의 계약이 파기된 것은 잘된 일이다. KISA가 포스코 계획을 포기했기 때문에 이것이 오히려 포스코를 살렸다. 세계은행의 일본인 이사도 KISA의 한국제철소 계획이 엉터리라고 주장했다. KISA와의 계약이 파기된 것이 참 잘된 일이었다.> 1968년 초여름, 한국은 정치적 불안에 휩싸였다. 야당의 저항은 덮어두고 여당 내부만 보아도 후계자 문제로 분열과 파벌의 양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통령 3선 불가’를 규정한 헌법 때문에 여당 내부에서 일어난 박정희 후계자 선정 문제, 이는 협상보다 헤게모니 선점을 위한 권력투쟁으로 접어들 공산이 높았다. 실제로 그런 파장이 일어났다. 1968년 5월 24일 국회의원 김용태가 김종필 의장을 박정희 후계자로 옹립하려다가 공화당에서 제명됐다. 5월 30일 김종필은 강력한 항의의 뜻으로 의장직을 사퇴하고 탈당함으로써 의원직을 상실했다. 여당 내부에서는 김성곤의 영향력이 그만큼 강화되었다.
공사 진척 상황을 둘러보려고 현장을 방문한 건설부장관 주원은 바닷바람이 휘몰아치는 영일만 모래사장의 눈코 뜰 수 없는 광경을 지켜보며 중국의 황진만장(黃塵萬丈)에 빗대어 ‘사진만장(沙塵萬丈)’이라 표현했다. 그러면서 직원들에게 보안경을 사줄 것을 당부했다. 포항사무소는 낮에는 건설지휘 사령탑이요 밤에는 여남은 직원들이 책상을 침대 삼아 모포 몇 장으로 새우잠을 자는 숙소였다. 철거와 정지 작업에 나선 건설요원들은 사막전에 투입된 병사처럼 고된 작업을 감당해 나갔다. 누가 먼저였는지 어느새 그들은 건설 사령탑인 포항사무소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막의 영웅 롬멜 장군의 야전군 지휘소와 흡사하다며 ‘롬멜하우스’라 부르고 있었다. 1969년 봄에는 주변에 중장비들이 늘어나 사하라사막에 진을 친 기계화 부대 같아서 그 애칭이 더욱 실감을 얻는다.
검토 결과에 따라 포스코는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문제점 20개를 망라하여 ‘메모A’로 정리하고, 연산 60만 톤 능력을 원활히 달성하는 데 필요한 설비사양의 추가, 변경된 레이아웃에 대한 대안 등 75개 문제점을 ‘메모B’로 정리했다. 그리고 총 95개 문제점들을 7월 31일에 KISA 측에 제시하고 차관 도입과는 별개 협상으로 진행해 나간다.
송정분교 학생의 절반은 고아였다. 교실에서 삼백여 미터 떨어진 예수성심시녀회 고아원에 사는 전쟁과 빈곤의 고아들. 프랑스에서 귀화한 신부가 6?25전쟁의 총반격 북진 직후에 설립한 수녀원은 어마어마한 대식구였다. 신부 2명과 수녀 160명이 500명 넘는 무의탁 인생을 돌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동양 최대, 아니 세계 최대 규모의 고아원이었는지 모른다. 뒷날에 성립되는 역설이겠으나, 박정희와 박태준은 하필이면 빈곤 한국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세계 최대 고아원 자리에다 세계 최고 제철소를 세운 것인데, 그 터에는 제강공장이 들어선다. 성모 마리아의 형제자매들이 수도하는 성전, 전쟁과 빈곤이 양산해놓은 소외된 자들의 요람―포항시 송정동(그때는 영일군 대송면 송정동)의 예수성심시녀회. 15년 넘게 온갖 정성과 노역을 바쳐 황무지 모래밭에 기적처럼 일궈놓은 그 성전, 그 요람을 어찌 함부로 덜컥 내놓을 수 있었으랴. 조국 근대화를 위해 거룩한 건물들과 터전이 희생되는 이야기는 그때 수녀님들의 목소리를 통해 직접 들어보는 것이 좋겠다.
구미 철강사들이 한국에 싸구려 시설을 떠넘기려 하자 박태준은 분노하고입력 : 2014.11.13 14:20 (35회) 박태준은 진작부터 대한중석 인재들을 종합제철로 데려갈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한국 최고의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불확실한 쪽을 택해야 하는 그들에게 그는 힘차게 말했다. “대한민국도 이제 밥 먹고 사는 것은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남자로 태어나서 밥만 먹다가 죽을 수는 없는 것 아니냐? 내가 세계 각국을 돌아보면서 수없이 한국을 일본과 비교하며 생각해봤다. 나는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는 우열의 차이가 없다고 본다. 그런데 일본은 패전국이면서 잘 살고 있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니 가자. 종합제철로 가서 우리가 함께 고생하면서 이런 상황을 극복하는 일에 앞장서 보자. 우리가 종합제철을 잘 하게 되면 일본을 따라잡을 길도 열리게 된다.” 1968년 4월 1일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POSCO)는 서울 유네스코회관 3층에서 창립했다. 박태준은 4가지 운영목표를 제시했다. 인화단결과 상호협조 기술자 훈련의 적극추진 건설관리의 합리화 경제적 투자체제의 확립 최초 조직은 간단했다. 고작 2실 8부였다. 비서실, 조사역실, 기획관리부, 총무부, 외국계약부, 업무부, 기술부, 생산·훈련부, 건설부, 포항건설본부.
대한중석 출신이 아닌 사람들로는 윤동석, 이홍종, 김창기, 배환식, 유석기, 최주선, 김명환, 이관희, 백덕현, 이건배, 육완식, 여상환, 권태협, 신광식, 박준민, 안덕주, 지영학 등이 창업요원에 이름을 올렸다. 비록 창립명단에는 빠졌으나 대한중석의 박종태는 포항건설본부의 초대 소장이 되고, 박태준의 고향 후배이자 회계전문가인 박득표가 창립요원과 진배없이 합류하며, 머잖아 포항 출신의 이대공도 박태준의 청을 받은 포항 국회의원(김장섭)의 천거에 의해 입사한다. 잉태와 유산을 거듭했던 종합제철이 ‘포항제철(POCSO)’이란 법인으로 탄생했을 때, 포항 현지에선 이미 경상북도가 주관하여 국유지 11만8800평을 포함한 총 232만6951평 공장부지 매수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포스코의 장래는 여전히 암울했다. 차관 도입을 실행하지 않는 KISA, 특히 미국과 서독이 부정적 태도를 견지했다. 만약 KISA를 통한 차관 도입에 실패하고 그 대안의 길을 찾지 못한다면, 고작 4억 원의 자본금으로 태어난 포스코는 ‘신생아’ 단계에서 굶어죽는 운명을 맞아야 했다. 4월 8일 경제기획원이 KISA에게 기본협정상 권리와 의무를 포스코가 승계했음을 통보했다. 종합제철사업건설추진위원회는 해체되고, 위원회가 일본 용역단, 미국 바텔연구소와 체결한 KISA의 기술계획에 대한 검토용역 계약도 포스코가 이어받았다. 이제 앞으로는 박태준과 그의 동료들이 ‘신생아 포스코’의 어버이로서 모든 책임을 떠맡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불투명하고 불안한 상황 속에서 박태준은 그해 2월 2일 체결한 계약에 따라(연재 34회) 4월 27일 일본철강연맹의 초청으로 일본에 가서 일반기술계획(GEP) 사전 검토, 기술자 훈련문제, 항만과 공장 건설의 공정관리 등을 의논했다. 그는 포스코 안에 구성할 GEP검토단을 매우 중요하게 보았다. 회사가 처음 경험하는 고급 제철기술이라는 차원에서 검토단을 구성했다. 한국정부가 KISA와 체결한 기본협정에는 ‘1968년 6월 20일 KISA가 GEP를 한국측에 제출하고 그것을 한국측이 30일 내에 검토해서 확정하기’로 돼 있었다. 이제 그 ‘한국측’은 포스코였다. 포스코는 5월 초에 GEP검토단 구성을 확정했다. 윤동석 부사장이 단장, 유석기 기술부장이 팀장, 부문별로는 박준민이 제선설비, 신광식이 제강설비, 이상수가 일반설비, 이건배가 동력설비, 안덕주가 원료처리설비와 제철소 레이아웃, 백덕현이 압연설비와 전체 종합을 각각 맡았다. 박태준은 검토단의 활동에 대해 신중하고 정교한 결정을 내렸다. ‘모든 제철설비가 생소하니 일본용역단과 함께 피츠버그로 떠나기에 앞서 충분한 여유를 갖고 먼저 일본으로 들어가서 제철소를 견학하고 어느 정도 사전 지식을 쌓은 다음에 일본 측의 설비별 담당자와 일 대 일로 짝을 이뤄서 미국으로 출발할 것.’
“고로 높이가 110m였고 고로용 송풍발전의 구동용량이 최소 2만kw에서 3만kw였는데, 그 구조물의 높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고, 당시 우리나라 발전능력의 총량이 80만kw였으니 압도를 당할 수밖에 없었어요. 제선, 제강, 압연이라는 주력공장 외에도 코크스, 소결, 원료처리, 산소공장, 보일러공장, 발전소, 대형 항만설비, 공작공장, 각종 부대설비 등 모두가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벗어나는 내용이었어요. 그때 일본에서 첨단으로 알려진 무로랑제철소에서는 견학뿐만 아니라 질의응답도 많이 했는데, 비로소 종합제철소에 대한 어떤 감 같은 것을 잡게 되었어요.” 5월 18일 포스코 검토단은 일본용역단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바텔연구소 요원들과 결합해 20일부터 피츠버그에서 KISA의 GEP 초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KISA가 협정상의 일정보다 한 달쯤 앞당겨 그것을 마련한 것이었다. 포스코 검토단이 아무리 눈에 불을 켜도 일본용역단의 수준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포스코 검토단보다 일본용역단이 월등히 많은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 대부분은 ‘계획한 설비사양으로는 소기의 생산량을 확보할 수 없다, 그런 설비와 생산방식으로는 제품의 품질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전문적인 철강용어를 빼고 누구나 한마디로 알아듣기 쉽게 표현하자면, KISA의 GEP는 싸구려 설비사양으로 구성돼 있었다. 이후락의 부탁을 받아 동경대학 김철우 박사의 조언을 들어가며 종합제철 건설을 추진했던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연재 27회 참조)은 일본에서 제철 기술자들과 자체적으로 검토했던 KISA의 GEP에 대해 그로부터 이십여 년 지나서 분노에 가까운 회고를 남겼다.
1970년에 포항종합제철을 지원할 일본기술단(JG) 단장으로 영일만에 부임하는 후지제철 기술부장 아리가는 이런 증언을 남겼다. <1968년 5월 포항제철과 KISA와의 사이에서 설비사양에 대한 사전협의를 위해 기술자 일단을 미국의 피츠버그에 보냈으며 여기에는 JG멤버들도 동행했다. 일행은 약 40일간 피츠버그에 체재하면서 KISA 계획을 검토했지만, 어느 설비도 우리 눈으로 보아서는 불충분했다. JG가 크고 작은 100여 개의 결함을 지적한 결과, 설비사양은 변경에 이은 변경으로 설비금액은 2,000만 달러 가까이 상승해 1억1200만 달러로 부풀어 있었다. 그래도 우리들의 표준으로 보아 만족하기엔 거리가 먼 것이었다. KISA가 제공하려는 기계설비는 엉성하기 짝이 없는 결함상품이었다. 코크스로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로에 필요한 코크스는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어떻게 구입해야할지 불분명했다. 따라서 일관제철소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코크스로의 가스에 의한 에너지 자급도 불가능하고, 자가발전 설비도 없었다. 철광석을 선처리하는 소결설비도 없었다. 제품은 후판과 핫코일이었지만, 압연기는 2기밖에 없었다. 이것을 가지고 분괴압연과 후판과 코일압연을 전부 처리한다는 것은 과거시대의 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간이 스트립 밀’에 불과했다. 자동차용 강판 등 고급제품의 제조를 기대하는 것은 난망한 일이었다. KISA의 간사 회사인 코퍼스는 수년 전 이것과 거의 같은 설비를 터키에 판매해 제철소를 건설했지만, 그것이 순조롭게 가동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세계 철강업계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KISA의 GEP에 대한 검토 결과를 보고 받은 박태준은 그의 얼굴에서 단연 타인의 시선을 끄는 그 ‘호랑이 눈썹’을 무섭게 치켜세웠다. 1967년 여름에 품었던 자신의 ‘미심쩍은 의문사항들’(연재 29회)에 대한 결정적 증거를 잡은 것 같았다. 그는 치가 떨렸다. 진작부터 KISA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아이젠버그(연재 15회)를 쫓아내고 싶었다. 그 무렵에 박태준과 만났던 박철언(연재 15회)은 이렇게 회고했다. <한국정부는 이미 미국 코퍼스사를 필두로 구미 5개국 8개사로 구성된 컨소시엄인 KISA와의 사이에 연산 60만 톤 규모의 제철소를 포항에 건설하기로 하고, 이에 필요한 엔지니어링 및 기기 대금으로 총액 1억 달러에 달하는 구매계약을 체결했다. 그 시점까지의 진척사항을 세밀하게 검토한 박태준은 망연자실했다. 계약 내용은 극도로 황당무계하며 몹시 불공정한 것이었다. 나는 당시 그의 사무실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보통은 과묵한 사람인데 그날은 점심을 하면서 꽤 많은 잡담을 했다. 나는 그의 말이 잡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국가 이익이 어디에 있고, 무엇이라고 하는 그의 절규가 나를 감동시켰다. 박태준은 제철과 같은 기간산업이 가져야 할 국가적인 좌표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어떠한 사업이라도 성실함과 도덕성이 없는 상인(商人)이 개입하면 실패합니다. 지금 KISA의 주변을 얼쩡거리고 있는 아이젠버그의 그림자가 교활하고 싫습니다. 무섭습니다. 사업이 국제경쟁력이 없고 이윤이 보장되지 않으면 결국 국익에 해를 끼칩니다. 이것을 도외시한 계획은 죄악입니다. 제철에는 선진기술의 도입과 이전이 실현되지 않으면 안 되고, 필요자금의 해외 조달이 가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박태준의 주장은 논리 정연했다. KISA는 그가 생각하는 필수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가 본인 입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나는 박태준이 KISA와의 교섭이 성립되기보다는 좌절되기를 마음속으로 기대하고 있지 않나 의심했다." 그러나 박태준은 당장에 뾰족한 수가 없었다. 부당성에 대해 정식으로 지적하고 문제를 제기해서 최대한 바로잡도록 해야 한다. 이것뿐이었다. 그러나 장사치들이 바보인가. 자기 이득을 해치려는 자에게 당하고만 있을, 그런 순진한 장사치가 있겠는가.
박정희도 꺽지 못한 박태준의 고집입력 : 2014.11.10 17:21 | 수정 : 2014.11.10 17:26 (34회)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 북한 특공대가 청와대 턱밑까지 잠입했다가 무고한 시민들을 희생시키는 이른바 1?21사태가 발발했으나, 박정희는 흔들림 없이 국정을 챙기는 가운데 1월 25일 대통령령에 의거해 ‘종합제철공장건설사업추진위원회 규정’을 공포하여 추진위에 법적 권한을 부여했다. 2월 14일 추진위는 사무실을 대한중석에서 서울 명동 유네스코회관으로 이전했다. 이날 종합제철 회사의 최초 자본금인 정부 출자금 3억 원과 대한중석 출자금 1억 원이 불입되었다. 이제 회사 탄생은 시간문제로 남아 있었다. 다만, KISA의 차관 도입만 불확실하고 불안한 미결상태 그대로였다.
박태준은 KISA의 기술계획에 대한 ‘검토 용역’ 발주를 서둘렀다. 위원장을 맡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독일, 영국, 호주, 일본 등 10개국에 제안서를 발송했다. 호주를 포함한 4개국이 긍정적 답변을 보내왔다. 추진위는 가장 유리한 용역 조건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과 제철공업의 여건이 유사한 일본을 골라잡았다. 그래서 후지제철, 야하타제철, 니혼강관 등 일본의 대표적 철강업체 3사로 구성된 용역단이 전체적인 검토 작업을 수행하게 된다. 그들의 검토 대상에는 KISA가 작성한 사업발전계획, 일반기술계획, 최종 외환비용, 재무계획 등이 두루 포함되었다. 박태준은 박정희가 인정한 완벽주의자다. 그는 경비 지출이 배가되어도 검토 용역을 일본에만 맡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일본의 검토 결과를 KISA가 기피할 염려도 있거니와 또 다른 객관적 자료를 갖춰야 했다. 그는 미국의 바텔연구소를 찍었다. KISA와 관련이 깊은 바텔연구소를 택한 것에는 그들의 인심을 얻으려는 계산도 담았다. 추진위가 일본 용역단과 ‘검토 용역’의 계약을 체결한 날짜는 1968년 2월 2일이었다. 바텔연구소와도 같은 날짜에 계약을 체결했다. 똑같이 시키는 일이니 공정하게 진행하여 정직한 결과물을 내놔라. 박태준의 메시지는 그것이었다. 그 즈음이었다. 종합제철을 어떤 형태의 회사로 설립할 것인가. 이것이 박정희와 박태준 앞에 놓였다. 박정희는 ‘특별법에 의한 국영기업체’로 하자. 박태준은 ‘상법상 주식회사’로 하자. 서로 의견이 달랐다. 이는 심각한 문제였다. 회사설립 형태에 따라 경영통제, 의사결정, 정부간섭, 자금조달, 세금혜택, 배당정책 등 관리운영의 모든 요소들이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국영기업 형태는 감시와 통제가 심해 관료적인 관리운영이 이루어지기 쉽다는 단점이 있지만, 재정지원과 조세감면의 혜택이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상법상 민간기업 형태는 경영효율성을 살리고 시장의 상황에 민첩하게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초기부터 소요되는 막대한 투자자금을 자립적이고 주체적으로 조달하기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대한중석 경영을 통해 관료주의와 정부의 간섭이 국영기업체에 끼치는 폐해를 체험한 박태준은, 종합제철은 정치적 영향과 관료의 간섭을 적절히 막아낼 수 있는 상법상 민간기업 형태로 해야 하며 미래의 언젠가는 민영화를 하게 될 것이라는 판단을 세우고 있었다. 박정희와 박태준은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국영기업인 ‘대한중공업공사’를 ‘인천중공업주식회사’로 바꾼 당시의 기억들도 들춰냈다. 서로가 선명히 기억하는 일이었는데, 박태준은 상공담당 최고위원이었으니 직접 관장한 업무이기도 했다. 국영기업을 주식회사로 전환한 그때는 경영의 자율성과 효율성을 고려했을 뿐만 아니라 법률을 제정?공포하여 민영화 전망도 제시했었다. ‘인천중공업주식회사법’에서 가장 주목할 점이 “정부가 소유한 주식을 매각할 수 있다”라는 것이었다. 멀리 내다보며 정부가 소유한 주식을 민간자본에 불하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둔, 다시 말해 장기적인 전망으로 민영화의 길을 열어둔 정책적 결정이었다. 하나의 중대 현안을 놓고 대통령과 추진위원장이 두 차례나 토의를 했다. 그러나 결말을 보지 못했다. 서로가 똑같이 그만큼 심각한 문제로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청와대에서 세 번째 토의가 벌어졌다. 이번에는 박정희가 결론을 내리듯 걱정스레 말했다. “명치 30년 이후 세워진 일본 제철소들을 보아도 50년 이내에 적자를 모면한 제철소가 없었어. 자네는 민간기업으로 가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종합제철 설립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고 거기에 근거해 회사를 만들고, 단서 조항에다 매년 회사를 경영한 결과를 정부 감사기관이 감사하기로 하고, 감사 결과 경영상 불가피하게 적자가 난 것은 정부 예산으로 보전할 수 있다고 달아놓으면 돼. 이러면 자네도 회사를 경영하기가 쉽지 않나?” 박태준은 박정희의 진심어린 염려와 애정을 느끼면서도 물러설 수가 없었다. “염려해주시는 마음은 잘 압니다. 바로 그러한 단서 조항 같은 것 때문에 여태껏 국영기업체들이 적자를 내고 있는 겁니다. 최고관리자의 책임의식이 희박해져서 그렇다고 봅니다. 모든 책임을 맡겨주십시오.” 책임감. 이 말은 박태준의 진심이었다. 종합제철에 인생을 건다는 각오를 세운 그가 내친걸음에 비전도 피력했다. “각하의 생각도 그러하시지만, 우리가 국내 수요만 생각하는 제철소를 만들 수야 없지 않습니까? 국제경쟁력을 확보해서 수출도 해야 하는데, 수출 대상 국가를 감안해보면 일차적으로는 일본과 미국입니다. 일본은 차치해도 미국에 수출한다고 했을 때, 미국은 무역규제가 까다롭지 않습니까? 한국정부가 경영하는 국영제철회사라고 하면 더 심한 규제조치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제철소 장래에 대한 이러한 고려도 중요하지 않습니까?” 박정희가 미소를 머금었다. “임자한테 졌어. 좋은 방법을 강구해봐.”
박태준이 박정희에게 밝힌 ‘수출’은 그 의지가 분명한 것이었다. 그날로부터 2년쯤 지난 1970년 6월, 포항제철소 1기 착공식으로부터 불과 두 달밖에 지나지 않은 그때, 그는 임원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힘차게 독려한다. <최초 설비인 100만 톤급 제철소에서부터 일본과 경쟁해 나갈 것이다. 제철소가 최초 가동되는 순간부터 일본 제철업계와 같은 가격으로 수출할 수 있는 제품을 생산할 수 있도록 각 설비 부장들이 설비단위별로 조업에 대비한 경영계획을 지금부터 준비하라. 가장 효과적인 공장을 세우고 우수하고 싼 제품을 만들어 일본이 1만 불을 수출하면 우리는 9천 불을 수출할 수 있는 식으로 해내도록 조업 준비를 하라.> 1968년 3월 4일, 종합제철 추진위는 4차 회의를 열어 일정을 확정했다. 3월 6일 발기인 대회, 20일 창립총회. 회사설립에 따른 발행 주식의 모집 방법은 재무부 장관으로부터 주식청약서를 받도록 한다고 결정되었다. 사명(社名)도 중요했다. 아기가 태어나면 아버지가 작명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국문화에서 최대 국책사업을 짊어진 회사의 이름을 함부로 지을 수 있겠는가. 위원장이 곧 태어날 아기와 같은 종합제철주식회사 사명을 아버지 역할의 대통령에게 올렸다. 안은 셋이었다. 고려종합제철, 한국종합제철, 포항종합제철. 박정희는 주저 없이 찍었다. “포항종합제철이 좋아. 이름을 거창하게 짓는다고 해서 성공하는 게 아니야.” 박태준이 실질을 중시하는 박정희의 특장을 새삼 확인하는 순간, 마침내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POSCO)’란 이름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마침내 박태준에게 출전 명령을 내린 박정희입력 : 2014.11.07 13:38 | 수정 : 2014.11.07 17:54 (33번째) 박정희는 장기영의 후임으로 상공부장관 박충훈을 경제기획원 부총리에 발탁했다. 박충훈은 그동안 종합제철 건설 프로젝트에도 깊숙이 관여해온 관료였다. 1967년 10월 12일 박충훈의 경제팀(한국정부)이 KISA와 종합제철 건설 기본협정에 서명을 했다. 두 주일을 더 끌었으나 이번에도 ‘KISA가 차관 도입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들이 손사래를 쳐대니 억지로 명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차트로 설명만 하고 있을 게 아니라 당장 일을 벌여놔야 한다. 일본이 제철공장을 본궤도에 올려놓기까지 약 60년간 속았다는 사실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신중론도 좋지만 속는 게 곧 자산이요 코스트다. 각계의 비판을 받을 수 있지만 때로는 얻어맞을수록 쇠는 더 단단해진다.” 이 토로에는 종합제철 건설을 하루빨리 실현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장기영의 속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종합제철에 대한 대통령의 집념과 의지를 잘 읽을 수 있는 경제부총리로서 얼마나 애를 태우고 있었기에 기자들이 그를 가리켜 ‘종합제철병’에 걸렸다는 평을 했겠는가. 11월 8일, 마침내 박정희가 청와대에서 박태준을 종합제철건설사업추진위원회 위원장에 임명했다. 추진위는 정부관료, 학자, 대한중석 임원 등 12명으로 구성되었다. 학자는 두 명이었다. 포항제철 창립기에 부사장을 맡게 되는 윤동석 서울대학교 공대 교수, 그리고 최형섭 한국과학기술연구원장. 관료는 다섯 명이었다. 정부 부처 간 업무조정을 위해 정문도 경제기획원 차관보를 비롯해 상공부, 재무부, 건설부에서 각각 차관보급이 차출되었으며, 공장부지 매입 및 조성 업무를 주관할 양택식 경북 도지사도 포함되었다. 박정희가 박태준을 종합제철추진위원장에 공식 임명한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물론 기본적으로는 종합제철 건설의 대임에 대한 책임이 ‘박정희에 의해 공식적으로 관료들의 어깨에서 박태준의 어깨로 넘어갔다’는 뜻이었는데, 또한 그것은 이제부터 KISA가 ‘KISA의 야박한 장삿속을 의심하는 인물이자 철저한 완벽주의자로서 사심 없는 애국주의자인 박태준’과 본격적이고 전면적으로 상대하게 된다는 중요한 뜻을 담고 있었다. 1965년 5월 박정희가 미국 피츠버그를 방문한 때부터 시작된 일이었지만, 1966년 11월 KISA가 출범한 뒤로만 보아도 꼬박 일 년이 지난 1967년 11월 7일까지 KISA의 한국측 파트너는 박태준이 아니라 한국정부의 경제팀 관료들이었다. 그러니까 그 동안에 박정희가 강력한 의지로 추진해온 종합제철 건설은, 경제팀 관료들이 한국정부 대표로 전면에 나서서 KISA와 교섭하고 박태준은 KISA의 눈에 직접 드러나지 않는 자리에서 박정희를 보좌하는 모양새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11월 10일 박태준은 첫 실무회의를 소집했다. 주요 주제의 하나가 종합제철공장 건설에 필요한 인프라 건설 규모에 대한 논의였다. 첫 실무회의부터 설전이 벌어졌다. 첫 논쟁의 대상은 ‘항만시설 규모’였다. 관료는 항만 규모를 일차로 5만 톤급 선박이 접안할 수 있도록 건설하고 나중에 증설이 필요해지면 8만 톤 또는 10만 톤급 규모로 늘려가자고 하고, 위원장은 5만 톤급은 너무 협소하여 제철소 규모 확장에 장애가 되고 경제성도 크게 떨어지니 일차로 10만 톤급 이상으로 하고 앞으로 25만 톤급 규모까지 확장할 수 있도록 건설해야 한다고 했다. 예산 확보의 어려움을 우선시하는 관료는 제철소에 대한 공부가 부족하고 미래에 대한 포부가 작은 반면, 위원장은 그 둘을 겸비하고 있었다.
종합제철소 건설에 실수요자(‘대한중석’을 가리킴)의 부담을 최대한 억제할 것. 실수요자의 부담 한계를 초과한 부족액은 정부가 보전할 것. 국내 철강업의 합리적 육성을 위해 ‘철강공업 육성법’을 제정할 것. 박태준도 스스로 판단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추진위의 법적 근거가 미약한 탓으로 법률행위와 금융행위에 장애요소가 많아서 ‘상임위원회’를 구성하고 여기서 실질적으로 일을 관장하게 했다. 그의 앞에는 종합제철소 건설을 위해 당장 덤벼야 할 시급한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큼직한 일들이 적어도 셋이었다. 대한중석 주주들 설득. KISA의 종합제철 기본계획에 대한 전문적 객관적 상세 검토. 종합제철의 회사 설립 형태 결정.
대한중석에는 민간 주주들이 많았다. 그들은 대한중석의 이익잉여금과 보유자금을 종합제철소 건설 자금으로 사용한다는 정부의 결정에 강력히 반발했다. 대주주인 정부의 일방적 횡포라면서 먼저 주총을 열어 현재 사업항목에 종합제철사업을 추가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가부 의견부터 물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자신의 배당금을 날리고 경영 상태를 다시 악화시킬 수 있는 사안이니까 공공적 이익보다 개인적 이익을 훨씬 더 중시하는 자본주의적 시스템에서 결코 비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병철이 박태준에게 준 선물입력 : 2014.11.06 08:19 (32전째) 10월 3일 종합제철 기공식. 5·16 이후부터만 꼽아도 장장 6년 넘게 끌어온 종합제철소 건설 계획이 마침내 출발의 팡파르만 남겨둔 것 같았다. KISA 계획안을 검토하느라 시일을 끌어온 데다 KISA마저 느긋하게 끌어댄 탓에 기본협정 서명식을 당초 한국정부의 계획대로 열지 못해서 김이 좀 새긴 했으나, 기공식을 10월 3일로 잡았을 때의 명분은 ‘개천절’이었다. 단군 이래 단일 규모의 최대 역사(役事), 단군 이래 최초 종합제철소 건설, ‘산업의 쌀’을 생산하는 국가기간공장 건설. 이것만으로도 개천절에 기공식을 열어야 하는 이유는 충분했다.
“그때 가봐야 알겠지만 정식발령을 받지 않으면 서명할 입장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내정자로서 아직 기본계약서도 제대로 검토해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게 더 시급한 일 같습니다.” “박 사장, 기공식이 코앞입니다. 기공식 행사는 물릴 수 없습니다. 우선 기공식에 같이 내려갑시다. 기공식에는 당연히 건설추진위원장이 참석해야지요. 며칠 더 여유가 있으니 검토는 좀 천천히 해도 될 것 같은데.” “아닙니다. 그동안에는 우리 경제부처에서 종합제철의 모든 업무를 공식적으로 책임 있게 관장해왔습니다만, 이제 추진위원장에 임명되면 저는 제철소 건설에 대한 전부를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서 계약내용을 사전에 세밀히 검토하고 나서 그 다음의 일을 결정하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박태준은 주요사항 몇 군데의 손질만 기다리고 있는, 합의에 이른 것이나 다름없는 기본계약 사본을 들고 나와 곧장 미국변호사 자격증을 갖춘 김흥한을 찾아가 검토를 의뢰했다. 이튿날 그는 김흥한의 의견을 들었다. 그의 우려와 일치했다. 합의각서에는 5개국 8개사의 자금조달 책임소재 등에 대한 명시가 없다고 했다. 특히 차관도입에 대해 한국정부가 ‘공동책임’을 진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차관이 안 되는 경우에는 한국정부의 무능 탓으로 돌릴 수 있다는 함정이었다. 언제든 KISA가 마음대로 발뺌해도 법률적으로 아무런 제약을 걸 수 없는 약정이었다. 이런 문서에 등장하는 ‘최선을 다 한다’란 말과 똑같은 차원의 치명적 결함이었다. 박태준은 다시 부총리 집무실로 찾아갔다. 기본계약의 심각한 결함에 대해 단단히 확인할 작정이었다. 미리 약속이 안 된 내방객을 비서가 막아섰다. “지금은 만날 수 없습니다.” 박태준은 호랑이 눈썹을 무섭게 치켜세웠다. “이봐, 제철소는 국가적 중대사야! 그런데 도대체 진전은 없고 계약서도 엉터리란 말이야! 그래서 내가 직접 물어보려고 왔어!” 그의 목소리가 비서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다른 사무실의 귀들을 토끼처럼 쫑긋 일으키게 하는 고함이었다. “아무리 그러시더라도 갑자기 오셨기 때문에 기다리셔야 합니다.” “뭐? 안에 손님이 있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들어가신 분이 나가셔야 합니다.” “웃기지 마! 어제 기분 나쁘게 했다, 이거잖아. 저리 비켜!” 거듭된 그의 고함에 다급한 구둣발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옆방에 있던 김성곤이었다. 앞으로 몇 년 뒤에는 정치자금 문제로 박태준을 괴롭힐 이가 갑작스런 소란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부리나케 달려 나온 것이었다. “어디 한번 봐!” 박태준이 부총리실 문을 열었다. “야, 임마! 손님이 어딨어! 너희 같은 인간들을 그냥 두면 내가 역적이 되는 거야!” 그의 팔을 붙잡는 손이 있었다. “박 장군, 참아야 합니다.” 김성곤이었다. 장기영은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박태준에게 기공식에 참여하라는 종용을 접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귀를 닫았다. 이번엔 ‘정식으로 임명되지 않았다’는 명분을 아예 들먹이지 않았다. 종합제철소 건설의 실질적 책임자가 될 사람으로서 사전에 충분한 준비도 없이 무작정 기공식에 참여할 수 없다는 점을 딱 부러지게 밝혔다. 박태준의 기공식 불참 통보는 곧 박정희의 귀에 들어갔다. 10월 2일 오후에 그는 청와대로 불려갔다. 대통령이 화를 참는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왜 반기를 드나? 이것 봐, 너무 까다롭게 굴지 마. 그렇게 해서 적을 많이 만들면 일도 제대로 끌고 갈 수 없잖아.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일단 포항으로 내려가서 기공식부터 원만하게 끝마치고 와.” 박태준은 애써 언성을 낮추는 대통령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민망스러웠다. 그의 속엔 두 세력이 겨루고 있었다. 국가대사를 위해 이실직고하느냐, 상대가 없는 자리이니 비판을 자제하느냐. 그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 ‘소신껏’이라는 대통령의 말을 생각하고 소신을 위하여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남을 헐뜯을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공연한 트집을 잡고 싶은 생각은 더욱 없습니다. 그러나 합의각서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습니다. 첫걸음부터 허술하면 국가대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무슨 소리야?” 박태준은 찬찬히 기본계약의 허점을 지적했다. 주의 깊게 듣는 박정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내가 한번 볼 테니 놓고 가.”
1967년 10월 3일 개천절 오후 2시에 종합제철공장 기공식이 포항시 공설운동장에서 성대히 열렸다. 수천 명의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경제기획원 부총리, 건설부 장관, 상공부 장관, 재무부 장관 등 정부 각료들이 천막을 지키고 샌드빅 코퍼스사 부사장을 비롯한 KISA 대표단, 전력회사 건설회사 무역회사의 임원들 등 많은 내외 귀빈이 참석했다. 내빈 소개를 맡은 경북지사가 불참한 종합제철추진위원장을 호명하지 않았지만, 주민들과 내외 귀빈들은 아무도 그 점을 의아해하지 않았다. 한 사람만 확실히 알고 있었다. 장기영 부총리. 기공식장으로 이동하는 길에 라디오를 통해 자신의 해임소식을 들었던 그는 대범하게 감격적인 치사를 했다. “한반도에 하늘과 땅이 열린 지 4300년 만에 우리는 마침내 선진국들의 도움을 받아 종합제철소를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성패가 이 제철소 건설에 달려 있는 만큼 강철같이 굳센 책임감과 철석같은 단결로 우리의 과업을 성취해 나갑시다.”
2003년 어느 봄날, 박태준은 ‘장기영 부총리와 악연 아닌 악연’을 풀어준 선배가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이었다며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장기영 부총리와 세게 부딪쳤던 그 일화가 재계에도 두루 퍼졌던 모양이오. 그걸 이병철 회장도 다 들었던 거고. 이 회장은 누구보다 나를 아껴주고 알아주는 선배였는데,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십 년쯤 지났나. 그때가 포철에 초유의 대형 제강사고가 터지기 전이었나 그랬으니, 1977년 4월 초였을 거요. 이 회장이 아침에 안양CC로 나오라고 해서 갔더니 장기영 선배가 같이 계시더군. 그때는 한국일보 사장이셨지. 내가 정중히 인사를 드렸고, 장 선배께서는 ‘포철이 아주 잘 되고 있다니 너무 기분 좋다’며 진심으로 좋아하셨소. 사람의 마음이란 말과 얼굴에 다 묻어나는 거 아니오? 그래서 우리는 라운딩을 하면서 과거의 하찮고 부질없는 응어리를 산산이 쪼개서 웃음 속으로 다 날려버리고 점심에 낮술도 엔간히 마셨지.” 이러고 나서 노인(박태준)은 갑자기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불과 며칠이나 지난 뒤였나. 내가 호주 출장을 가는 길에 싱가포르에 들러서 우리 현지 특파원들과 만나는 자리로 나갔는데, 그 자리의 한국일보 기자가 무슨 연락을 받더니 장기영 사장께서 급서하셨다는 전언을 하더군. 나는 어안이 벙벙했소. 그분의 웃음소리와 덕담이 귓전에 쟁쟁하니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믿기지 않았던 건데…. 이렇게 늙어서 다시 돌이켜보아도 말이오, 인생이 길어봤자 얼마나 길다고, 그때 그분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부질없던 응어리를 다 풀었으니, 이병철 회장께서 인생의 귀한 선물을 주신 게 아니었나, 이 생각이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기 한몸 희생할 수 있는 인물만이 할 수 있어. 아무 소리 말고 맡아!"입력 : 2014.11.03 15:22 (31번째) KISA가 다시 약속한 ‘기본협정 체결과 착공의 7월’을 맞았다. 그러나 7월이 다 지나도 한국정부와 KISA는 기본협정조차 체결하지 못했다. 초조한 쪽은 한국정부, 특히 대통령 박정희였다. KISA와 기본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실무단을 미국으로 급파할 수밖에 없었다. 1967년 8월 초에 급조된 경제기획원 경제협력국장 황병태를 단장으로 한 ‘철강사절단’에는 이듬해 4월 포스코 창립요원(부사장)으로 잠시 몸담게 되는 윤동석 서울대학교 공대 교수도 포함되었다. 사절단이 20일 일정의 피츠버그시 KISA 방문을 앞두고 청와대로 들어섰다. 그 자리에서 박정희가 최초로 승부의 카드를 공개했다. 참석자들에겐 불쑥 내민 것으로 보였겠지만, 통치자가 오래 품어온 비장의 카드였다. “대한중석은 2년 반 동안 박태준 사장이 경영을 잘한 결과 재무상태가 매우 건실해졌고, 더구나 박 사장은 제철소 프로젝트에 필요한 리더십과 뛰어난 경영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드디어 대통령이 관료들에게 종합제철을 대한중석 사장에게 맡길 것이라고 밝힌 그때, 박태준은 해외출장 중이었다. 아시아, 미주, 유럽 순방. 이듬해의 중석판매 협상을 위한 긴 여정이었다. 철강사절단은 작은 성과를 올렸다. 주요 내용은 ‘연산 50만 톤을 60만 톤으로 늘리고 소요 외자(차관)를 1억2500만 달러에서 9000만 달러로 인하하여 기본계약을 체결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들이 귀국하여 대통령에게 보고를 마친 즈음, 1967년 9월 8일, 박태준은 런던 메탈마켓센터에서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가 한 통의 전문을 받는다. 장기영 부총리의 지시를 받아 고준식 대한중석 전무가 띄운 것이었다. <대한중석이 종합제철소 건설사업의 책임자로 선정되었음. 박태준 사장은 종합제철소건설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내정되었음. 즉시 귀국 바람.>
1. 대한중석은 외국차관 협상과 교섭문제를 관장한다. 2. 대한중석의 정부 보유 주식에 대한 배당은 제철소건설 프로젝트로 전용키로 한다. 3. 대한중석이 종합제철소 건설자금의 내자 충당분을 조달하지 못할 경우에는 나머지를 정부의 재정자금에서 충당키로 한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기어코 올 것이 왔다고 받아들인 박태준은 문득 자신의 나이를 생각했다. 마흔 살, 공자 말씀의 불혹(不惑)이었다. 흔들림 없이 무슨 일에든 도전할 나이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여유와 심사숙고로 이어졌다. 더구나 종합제철이 하루아침에 될 것도 아니고 진작부터 대통령에게 받아뒀던 특명이니 한국산 텅스텐 수요자들과 만날 나머지 일정들도 다 소화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는 행동이라고 판단했다. 그의 회신은 간단했다. <정부가 제시한 3대 조건대로 한다면 그 일을 맡겠음. 그러나 즉시 귀국하기는 불가능함.> 종합제철소건설추진위원장 내정자가 유럽을 돌아다니는 동안, 9월 11일, 대통령은 월간경제동향회의를 마친 후에 이어진 정부여당 연석회의를 통해 ‘대한중석을 종합제철공장의 실수요자로 결정했음’을 공표했다. 이제 박태준이 박정희의 공개적 특명을 받아 종합제철 건설의 지휘봉을 잡는 것은 단순히 시간의 문제로 남아 있었다.
1. 제한된 계약으로 할 것(즉, 공장을 두 단계로 건설할 것). 2. 국제적인 컨설턴트를 고용할 것. 3. 차관단이 건설한 터키, 브라질의 제철소를 견학할 것. 4. 초기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외부기관과 관리용역 계약을 할 것. 한국정부가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IBRD의 충고는 한마디로 ‘너희는 종합제철 외자도입을 할 수 없고 종합제철에 대한 경험도 능력도 없으니 전문기관에 용역을 맡겨야 하고 먼저 시작한 개도국 종합제철을 찾아가 착실히 견학부터 해두라’는 지시였다. 한국 상공부의 기술자들과 철강사절단이 순순히 거리상 훨씬 더 가까운 터키 에르데미르제철소를 견학했다. 9월 28일 경제기획원에서 경제관료 6명과 KISA 대표 3명 그리고 대한중석 대표 3명이 기본협정 체결을 위한 예비회담을 가졌다. 10월 3일 개천절, 단군이 처음 이 땅에 하늘을 열었다는 그 뜻 깊은 날, 종합제철 후보지로 결정된 포항에서 ‘종합제철공장 기공식’을 열기로 공표돼 있었다. 어떡하든 늦어도 10월 2일에는 한국정부 대표와 KISA 대표가 나란히 앉아 기본계약서에 서명을 해야 모양이 날 것이었다. 그러나 몇 가지 중요한 문제점들에 대해 양측 견해가 어긋났다. 특히 실수요자로 선정된 대한중석 대표들이 눈에 불을 켰다. 박태준의 ‘완벽주의’ 원칙과 성품을 익히 아는 그들로서는 야무지게 살피고 따져야 했다. 예비회담은 10월 12일에 다시 만난다는 회의록을 남기고 끝났다. 그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이미 공표한 대로 포항에서는 기공식을 열어야 했다. 딱히 무리는 아니었다. 어쨌든 불원간 KISA와 기본협정을 정식으로 체결할 것이니까.
‘KISA 놈들의 농간도 개입된 거지. 애초에 자기들은 IBRD 같은 국제금융기관과 직접 교섭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게 차관 도입에 대한 책임 회피의 수단이고, 우리가 대들어서 옳게 하자, 정직하게 하자, 이렇게 맞서면 오히려 자기편들에게 프로젝트를 무산시켜 버리자고 로비할 수도 있는 놈들인 거지.’ 박태준은 잠이 오지 않았다. 종합제철이란 대업의 의미와 KISA의 태도가 서로 등을 돌리고 앉은 남녀처럼 보였다. 어금니를 물고 김포공항에 내린 그가 청와대로 들어갔다. 박정희는 따뜻하게 맞았다. 대한중석 합리화 공로에 대한 덕담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종합제철 사명에 대해서는 단호했다. 마치 5·16 직후에 비서실장을 맡으라고 했을 때처럼, 아니, 그때보다 더 셌다. “우리가 오래 기다리고 준비했는데, 이제 때가 왔어. 나는 임자를 잘 알아.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어떤 고통을 당해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기 한몸 희생할 수 있는 인물만이 할 수 있어. 아무 소리 말고 맡아! 임자 뒤에는 내가 있어! 소신껏 밀어붙여 봐!” 박태준은 가슴이 짜안했다. 순간적으로 내면의 저 밑바닥에서 불덩이 같은 무엇이 울컥 솟아올랐다.
제철소 부지로 포항을 염두에 둔 박정희, 반대파를 꺾기 위해...입력 : 2014.10.31 13:49 (30번째) 1967년 상반기 한국에는 ‘선거 바람’이 드세게 불었다. 5월 11일 대통령선거, 6월 8일 국회의원선거. 아직은 한국의 경제관료들과 KISA가 공식적 파트너로서 함께 끌어나가는 종합제철소 건설은 드세게 불어대는 ‘선거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박정희의 의지를 튼튼한 다리로 삼아 가야 할 길을 지키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KISA가 다시 약속한 대로 7월에 종합제철소를 착공하려면 입지 선정을 더 늦출 수 없는 일이었다. 한국정부는 벌써부터 기본 자료들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당초에는 동해안의 삼척, 묵호, 속초, 포항과 포항의 북방 20km에 위치한 월포, 울산과, 남해안의 부산, 진해, 마산, 삼천포, 여수, 보성, 목포, 서해안의 군산, 장항, 비인, 아산, 인천 등 18개 지역이 거론됐으나, 1967년 2월 미국 코퍼스사 기술진은 삼천포와 울산을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천거했다. 울산은 곧 제외되었다. 제철소까지 유치하기에 울산공단은 협소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후보지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바다를 끼고 있는 ‘임해(臨海)’ 지역이었다. 1965년 6월 일본 가와사키제철 니시야마 사장이 박태준과 둘이서 한국의 제철소 입지 후보지를 방문한 당시에 충고해준 핵심의 하나였던 바로 그 ‘임해’였다(연재 25회 참조). 5월 11일, 제6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된 바로 그날, 건설부가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와 1개월 기간으로 삼천포, 포항, 월포, 군산, 보성 등 5개 후보 지역에 대한 ‘현지조사 및 비교검토’를 위한 용역계약을 체결했다. 부지조성, 항만, 공업용수, 전력 인입, 해안 길이 등이 주요 대상이었다. 이제 후보지 선정에 남은 가장 중요한 과제는 선거 바람이 몰아치는 한복판에서 어떡하든 정치적 외풍과 무관하게 ‘과학적’인 결정을 내리면서 정치적 잡음을 최소화하는 일이었다. 박정희 후보와 윤보선 후보의 재대결. 1967년의 대선 결과는 1963년에 비해 판이해졌다. 4년 전에는 박 후보가 윤 후보를 아슬아슬하게 역전승했지만, 이번엔 박 후보가 유효투표의 51.4%를 획득하여 41%를 얻는 데 그친 윤 후보를 압도했다. 도시지역 득표율에서도 박 후보가 윤 후보를 앞질렀다. 무엇보다 ‘경제개발’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반영한 결과였다.
그 영일만 모래대지에는 일찍이 종합제철소 건설을 예언한 것 같은 시(詩) 한 편도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정확한 연대는 미상이지만, 조선 후기 풍수지리가로 알려진 이성지(李聖智)가 영일만 백사장을 둘러보고 남긴 시(詩) 한 수라고 한다. 竹生魚龍沙 어링불에 대나무가 나면 可活萬人地 수만 사람이 살 만한 땅이 된다 西器東天來 서양문물이 동쪽나라로 올 때 回望無沙場 돌아보니 모래밭이 없어졌구나 ‘어룡사’란 그 백사장의 이름이다. 포항 사람들은 바다와 붙은 백사장을 ‘불’이라 했다. 그래서 어룡사는 ‘어룡불’로 불렸고, 그것이 간이화 발음으로 ‘어링불’이 되었다. ‘죽’은 제철공장의 숱한 ‘굴뚝’을 비유하고, ‘서기’라는 서양문명은 물론 ‘종합제철소’를 뜻한다. 몇 년 뒤에 일어나는 상전벽해지만, 시의 예언대로 과연 ‘어링불’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높다란 굴뚝들이 솟아오른다. 종합제철소 부지 선정에는 정치권력의 치열한 유치경쟁이 개입했으나 비정치적이고 과학적인 결정이 이뤄졌다. 박태준은 어떻게 했을까? 여전히 종합제철에 대한 아무런 공식적 직함이 없고 그래서 관료들의 회의에 직접 참석한 적도 없었던 박태준은 어떻게 했을까? 벌써 2년 전에 박정희의 특명을 받아둔 박태준은 박정희의 뜻과 더불어 정치논리가 객관성?공정성?합리성을 깔아뭉개는 것을 막아내는 데 앞장섰다. 제철소는 입지 선정이 곧 성패와 직결된다는 특성을 확실히 공부해둔 사람으로서 확실한 목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대목은 해군 제독을 지낸 이맹기의 증언을 인용하자. 안상기가 엮은 책 『우리 친구 박태준』에서 이맹기는 이렇게 회고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은 포항이 아닌 곳을 지목했다. 경제기획원은 삼천포를 지목했다. 박태준은 박 대통령에게 포항이 제철소가 들어서야 할 적지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당연히 다른 지역을 천거한 각료나 의원들로부터 미움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주장은 후에 입증되었다시피 정말 타당했다. 최종 선정지가 포항으로 결정된 이유 가운데 하나로서, 무엇보다 박태준에 대한 박 대통령의 깊은 신뢰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영일만 제철소 부지의 지형, 수리(水利), 해상(海象), 기상조건 등 상세한 데이터를 조사하면서 나는 진심으로 여기에다 제철소를 건설하고 싶다는 의욕이 솟구쳐 올랐다. 일본의 제철소들이나 세계의 많은 제철소들을 보아왔지만, 임해(臨海) 제철소의 입지조건을, 특히 자연조건을 이토록 완전하게 갖춘 곳은 본 적이 없었다. 누가 어떻게 조사해서 이 지역을 선택한 것인가? KISA가 구성되기 전부터 박태준과 접촉이 있었던 가와사키제철의 상무이사 우에노 나가미쓰의 조언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한다.> 종합제철 부지 선정은 다음과 같은 일화도 남겼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뛰어넘은 박태준도 가장 적합하다고 강하게 건의하는 ‘포항’을 택하기 위한 박정희의 기지(機智)가 돋보이는데, 조갑제의 『박정희』에는 다음과 같이 재미난 장면도 등장한다. <당시 정계 실력자들 사이에서는 종합제철소 유치경쟁이 치열했다. 충남 비인은 김종필 의장의 연고지, 울산은 이후락 실장의 고향, 삼천포는 박 대통령의 대구사범 동창생이자 재계의 막후인물인 서정귀의 연고지 하는 식이었다. 포항만은 아무도 미는 사람이 없었다. 정부가 후보지 18개소를 대상으로 조사해보니 포항이 가장 적합한 곳으로 나타났다. 어느 날 박 대통령은 황병태 국장을 부르더니 김포로 가는 자신의 차에 동승하게 했다. 차중에서 대통령은 황병태의 무릎을 잡으면서 말했다. “황 국장, 소신대로 이야기해 주어야겠어. 종합제철 입지를 놓고 말이 많은데 어디가 제일 좋아?” “다른 데는 미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상 포항이 제일 바람직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미국 용역회사 보고서도 수심이 깊은 포항이 제일 좋다고 합니다.” “알았네. 포항은 미는 사람이 없으니 자네가 미는 걸로 하지. 나중에 경제동향보고회의 때 자네를 부를 테니, 그때 소신대로 이야기하게.” 며칠 뒤 월례 경제동향보고가 청와대에서 열렸다. 황병태는 맨 뒷자리에 있었다. 보고를 경청하고 지시를 내리던 박 대통령이 갑자기 “뒤에 황국장 있나. 이리 나오게”라고 말했다. “요새 종합제철소 입지를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한 것 같은데 어떤가.” “실무적 입장에서는 포항이 적지라고 판단됩니다.” “왜?” “바다 수심이 깊어 배가 드나들기 용이하고….” 황 국장은 미리 준비한 대로 자세하게 설명해갔다. 다 듣고 나서 박 대통령이 말했다. “좋아. 그러면 포항으로 하지.” 아무도 이견을 말하지 못했다.>
미국 주도의 한국 제철사업을 못마땅해 했던 일본입력 : 2014.10.29 13:39 (29전째) 1966년 1월 한국 대통령 박정희는 미국을 공식 방문한 기회에 다시 코퍼스사 회장 포이와 만났다. 국제차관단 구성에 속도를 내달라고 부탁하는 자리였다. 포이가 적극성을 보였다. 그래서 그해 2월 2일 한국 대통령과 경제기획원 장관의 명의로 코퍼스사에게 국제차관단 구성에 주도적 역할을 해달라고 당부하는 ‘위임 서한’을 보내게 된다. 그것은 포이가 주도하여 KISA(對韓製鐵國際借款團) 구성에 시동을 걸게 하는 키(key)와 같았다. 한일국교정상화와 베트남 파병은 1966년부터 한국의 ‘차관 조달’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해에 청구권자금을 지불하기 시작한 일본은 1967년까지 2년 동안 총 1억850만 달러의 민간차관을 제공한다. 한국의 대규모 베트남 파병에 답례하듯 미국이 확고한 대한(對韓) 방위 의사를 밝히자 서방국가들도 은행 금고를 열어줘서 같은 기간에 미국, 서독 등이 총 2억5610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제공한다. 그러한 분위기는 한국정부의 ‘종합제철 차관’에 대한 희망을 부풀릴 만한 것이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종료를 여섯 달쯤 앞둔 1966년 6월부터 정부는 종합제철소 건설계획에 속도를 올린다. 그것이 국제차관단 구성을 더 늦출 수 없다는 판단으로 이끌어간다. 1966년 5월 13일 IBRD(세계은행)의 ‘한국 50만 톤 규모 제철공장 건설에 대한 타당성을 인정한다’라는 보고서를 접수한 경제기획원이 6월 22일에는 드디어 미국의 코퍼스?블로녹스?웨스팅하우스, 독일의 데마그?지멘스, 일본의 야하타제철?히다치조선소?미쓰비시전기공업 등 8개사 앞으로 국제차관단 구성에 관한 동의서를 발송하며, 한 달 뒤에는 불원간 구성될 국제차관단에게 종합제철소 건설 사업을 위임하겠다고 확정한다.
그런데 경제기획원이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국제차관단 구성’은 그해 10월 들어서도 불투명한 상태였다. 특히, 일본이 소극적으로 나왔다. 일본은 주도권을 코퍼스사가 거머쥔 것이 불만이었다. 그때 일본 경제관료들의 분위기는 미국과 유럽의 철강업체들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불과 3년 뒤에 ‘포항종합제철 건설 타당성’을 살피기 위해 영일만 허허벌판으로 찾아오게 되는, 당시 일본 경제기획청 아카지와 쇼이치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허남정 지음, 『박태준이 답이다』참조) “나는 당시 종합제철소의 건설에 어느 정도 돈이 들어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코퍼스사 주도의 한국 종합제철 건설 계획안에 대해) 이 정도의 차관 규모로, 이 정도의 이자를 지불하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종합제철소이기 때문에 고로는 이탈리아, 전로(轉爐)는 독일, 압연은 오스트리아, 미국 등 제 각각의 기술이었는데, 설비가 개별적으로는 우수할지 모르지만, 컨소시엄 형태로는 일관적인 기술 체계를 필요로 하는 종합제철소가 잘될까 하는 의문도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 일본 정부로서는 참여하기 어렵다는 뜻을 한국정부에 통보했으며 참가를 검토하던 일본의 후지제철과 야와타제철의 수뇌부에게도 정부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한국 경제기획원은 일본의 태도 변화를 기다리느라 더 꾸물댈 여유도 이유도 없다고 판단했다. 일본이 껄끄럽게 나오면 일본을 제외하고 서방 선진국들과 손을 잡아도 얼마든지 종합제철을 건설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딱히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아니, 틀리지 않은 판단이었다. ‘베서머 제강법’이 증명하듯 영국은 산업혁명의 본거지답게 철강기술의 발전을 이끌어온 나라이고, 1966년에는 제철기술이나 조강능력에서 미국이 가장 앞서는 나라였다. 그러니 일본이 자존심을 내세우며 엉덩이를 뺀다고 해서 한국이 매달려야 하겠는가. 그때 국민 정서나 감정으로는 더욱 그랬다. 11월 16일 장기영 부총리가 코퍼스사 포이 회장에게 공한을 발송한다. 일본 업계의 참여를 기다리지 말고 국제적으로 공신력 있는 회사들을 망라한 국제차관단을 조기에 구성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에 따라 포이가 미국 피츠버그에서 한국 종합제철소 건설 지원을 위한 국제차관단 구성회의를 주최하게 되었다. 코퍼스?블로녹스?웨스팅하우스 등 미국의 3개사, 독일의 데마크?지멘스, 영국의 엘만, 이탈리아의 임피안티 등 4개국 7개사가 나흘간 협의 끝에 12월 20일 마침내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 : 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을 정식으로 발족했다. 연산 조강 30만 톤짜리 울산종합제철을 무산시킨 박정희가 1965년 5월 미국 피츠버그를 방문한 날로부터 거의 19개월이 지난 때였다. KISA 발족. 머나먼 피츠버그에서 날아온 그 소식을 한국 언론들은 ‘종합제철소 건설의 찬란한 무지개’처럼 보도했다. 그럴 만했다. 제1차 KISA회의 합의사항에는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을 위해 차관단이 1억 달러’를 출자하고 ‘차관단과 한국정부가 합의한 장소에 1967년 4월까지 공장 건설이 시작되게 한다’는 것이 포함되었다. 차관 1억 달러에다 1967년 4월까지 착공! 이것은 종합제철을 갈망하는 박정희와 한국 정부에게 산타의 경이로운 크리스마스 선물보다 더 기쁜 소식이었다. 단지 누구도 예리하게 주목하진 않았으나 KISA의 그 합의에는 뒷맛이 묘한 사항도 포함돼 있었다. ‘세계은행 및 IECOK(대한국제경제협의체)와는 가급적 협조하되 직접적 관련을 맺지 않는다’라는 것. 이는 KISA가 IBRD나 IECOK를 직접 설득하러 다니는 일은 없다는 뜻이었다. 1967년 1월 16일 독일 뒤스부르크에서 제2차 KISA회의가 열렸다. 프랑스의 엥시드가 추가로 참여해 KISA는 5개국 8개사가 되었다. 제철소 건설에 필요한 제반 설비의 국가별 공급내역을 할당했고, 영국은 2000만 달러 차관 제공에 대한 정부 승인을 통보했다. 이어서 코퍼스 대표단이 한국으로 들어와서 소요내자 조달 방안과 입지 후보지에 대한 타당성 조사를 실시했다. 제3차 KISA회의는 3월 13일부터 사흘간 미국 피츠버그에서 열렸다. 이 회의는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에 필요한 외자 규모 1억 달러를 미국 30%, 독일 30%, 이탈리아 20%, 영국 20% 등으로 분담하기로 결정했다. 이제는 뭔가 ‘확실히’ 돼가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모호했다. 무엇보다도 ‘책임 소재’가 빠져 있었다. 제때 조달하지 못하면 누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이것이 없었다. 그리고 제1차 회의 때 ‘1967년 4월까지 착공한다’고 했던 합의는 마치 자연스런 현상처럼 연기되고 말았다. 그보다 일주일 앞선 3월 7일, 한국은 관세 및 무역에 관한 협정(GATT)에 가입했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로 대체될 때까지 세계무역 질서를 관장한 GATT. 자주와 주체를 외치는 평양 정권은 가입할 생각도 없고 가입할 방법도 없는 GATT. 여기에 세계 70번째 나라로 가입한 대한민국. 이 가난하고 조그만 신생독립의 분단국가가 세계로 진출할 그 장사의 길을 통해 민족중흥을 이룩하겠다며 주먹을 쥐고 술잔을 올렸다. 4월 6일 경제기획원에서 장기영 부총리와 KISA 대표 포이가 ‘종합제철소 건설 가협정’을 체결했다. 포이가 내놓은 예비제안서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였다. 먼저, 1차 50만 톤 규모 건설비에서 외자 소요를 2500만 달러 더 늘린 1억2500만 달러로 추정했다(그 차액 때문에 ‘기본계약’이 ‘가협정’으로 바뀌었으며, 가협정에는 ‘KISA가 제출한 사업계획에 대해 한국정부가 국제적으로 제철공장에 경험?지식?시설?가격?건설?운영에 관하여 권위가 있고 차관공여기관이 수락할 수 있는 기술용역단을 구성하여 이를 검토한 후에 확정한다’라는 문항도 포함되었으니 2500만 달러 증액에 대해 한국정부가 얼마나 미심쩍어하고 부담스러워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둘째, 차관단이 소요 외자에 대한 차관을 주선하며 조건은 연리 6%에 3년 거치 12년 상환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KISA는 이미 착공 시기를 7월로 연기했는데, 어차피 종합제철 건설은 대장정이기 때문에 수개월 지연이야 아무런 문젯거리도 아니었다.
한국 언론들이 일제히 KISA의 터무니없이 높게 책정된 건설비 측정치와 차관 금리에 대해 강한 비판을 제기했다. 그러나 그때는 박정희도 한국정부도 박태준도 KISA를 내쫓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마땅한 대안이 없었다. 서방 선진국 철강사들만 골라서 어렵사리 구성한 KISA를 대신할 파트너를 어느 나라에 가서 구한단 말인가? 벙어리 냉가슴이나 앓아야 했다. KISA를 미심쩍은 시각으로 보아온 박태준은 그때부터 그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1967년 7월에도 종합제철 건설에 대한 공식 직위가 없었다. KISA와 공식적으로 교섭하고 협상하는 업무들을 죄다 한국 경제관료들이 맡고 있었다. 박태준은 관료들이 KISA와 손잡고 추진하는 종합제철을 지켜보느라 속을 끓이면서 믿을 만한 동지들에게는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우리는 임해(臨海) 제철소로 가야 하는데, 미국에는 임해 제철소가 없어. 피츠버그 제철소들은 주로 펜실베이니아 탄전의 석탄을 쓰고, 슈피리어호 서쪽 호안에서 나오는 철광석을 쓰고 있어. 호주 같은 외국에서 배로 싣고 와야 하는 우리 조건과는 천양지차야. 그러니 포이가 주도해서야 기술적으로 기대할 것이 뭐가 있겠어? KISA 놈들은 장사꾼들이야. 생각이 다른 나라들, 생각이 다른 회사들이 설비나 팔아먹을 꿍꿍이속으로 국제컨소시엄이다 뭐다 해서 뭉친 거지. 그것들은 한마디로 어중이떠중이야. 까딱하면 국가의 대들보가 무너지는 수가 생겨. 그러나 지금은 어떡해? 잘 살피면서 앞으로 나가는 거지.” 1967년 늦여름에도 박태준은 ‘KISA에 대한 불만, KISA의 미심쩍은 행동에 대해 당차게 지적하고 개선하지 못하는 관료들에 대한 불만’을 가슴속에 가둬놓고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태준이 기다리는 그 ‘때’란, 2년 전 초여름에 박정희가 그에게 밀지처럼 내린 특명에 어울리는 공식 직위를 부여하는 그날이었다.
박정희가 박태준에게 내린 특명 "김기수의 주먹으로 세계를 제패하라"입력 : 2014.10.22 08:35 (28번째 이야기) 미국 코퍼스사(社) 대표 포이를 비롯한 서방 몇 개국의 철강업계 백인 기업가들과 한국정부의 경제부처 관료들이 한국에 종합제철소를 건설하기 위한 문제를 놓고 기본적인 교감을 나누는 수준의 교섭을 벌이고 있던 1965년 가을 어느 날이었다. 박정희가 박태준을 청와대로 불렀다. 대한중석은 이미 정상 궤도에 올라서 있었다. “우리나라에 동양챔피언 있는 거 알아?” 박정희가 뜬금없이 물었다. “무슨 챔피언 말씀입니까?” “김기수란 친구가 있어. 물건이야. 이게 굉장히 세다는데.” 훅 먹이는 시늉을 해보인 박정희가 멋쩍게 웃었다. “그쪽 방면에는 별 소질이 없습니다. 축구단을 집중적으로 키울 생각입니다.” 박태준도 미소를 머금었다. “대한중석이 축구단도 키워봐.” “저는 청소년시절을 일본에서 보낸 영향인지 개인적으로 축구보다 야구를 더 좋아했습니다만, 우리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가 축구고 우리가 일본을 이기는 스포츠가 축구이기 때문에 우선순위를 바꿔버렸습니다.” 두 사람은 가벼운 웃음을 나눴다. 대한중석 사장 박태준의 ‘축구 키우기’에는 그 시절의 국가대표급 선수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던 일화가 있다. 상동광산을 찾아간 박태준이 우연히 낯익은 광부들을 보았다. 축구 국가대표 선수 함흥철, 김정석, 조윤옥 등이었다. 국가대표팀 감독인 한흥기도 보였다. 그는 사정을 알아봤다. 축구단 운영에 연간 1억원쯤 쓰기 때문에 선수들을 평소엔 광부로 부려먹다가 시합 일정에 맞춰서 합숙훈련을 시킨다는 것. 대우도 형편없었다. 그는 부아가 치밀어서 불호령을 내렸다. “이건 절약이 아니다. 낭비 중의 낭비다. 당장 선수들을 서울로 올려 보내고, 축구단 육성방안을 마련해서 보고해!” 이래서 대한중석 축구단은 ‘번듯한 실업축구단’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석효길, 황종현 등 당대의 최고 기량 선수들이 대한중석에 모여들었다. 대한중석 축구단은 뒷날에 포항제철 축구단 창단으로 계승되고, 포항제철 축구단은 포스코의 프로축구단인 포항스틸러스와 전남드레곤즈(광양)로 발전한다. 한국 축구의 스트라이커 계보를 형성한 이회택, 최순호, 황선홍, 이동국 등이 포스코 축구단에서 활약하며 성장했다. 홍명보도 그러했다. 현역으로 뛰고 있는 이동국은 요즘도 서울 동작동 현충원의 ‘박태준 묘소’ 앞에 꽃을 놓는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유치할 때 우리 측은 한국에 온 실사단을 포항으로 데려가야 했다. 그때만 해도 국내 유일의 국제규격 축구전용구장이 포항제철이 소유한, 박태준이 직접 만든 포항스틸러스 구장 밖에 없었던 것이다.
1965년 가을에 박정희가 박태준을 청와대로 불러 ‘챔피언’을 언급한 것은 통치적 차원의 판단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세계챔피언이 나와야지. 지금 우리 국민에게는 우리 민족이 뭐든 우수하다는 자신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야. 국민사기진작을 위해서도 세계챔피언이 나와야 해.” “대한중석에 그만한 여유는 충분합니다. 한 번 해보겠습니다.” 동양챔피언인 프로복서 김기수를 세계챔피언으로 만들기 위한 통치적 프로젝트, 박정희와 박태준이 합작하여 한국 최초로 세계 최고를 탄생시키기 위한 프로젝트는 그렇게 첫발을 내디디게 되었다. ‘헝그리 복서’란 말이 회자되는 시절, 말 그대로 배고픈 권투선수. 오늘의 상처와 내일의 골병을 감내하겠다는 각오로 나서야 하는 프로복서의 길. 열 명 태어나면 여덟 명은 출생기념으로 빈곤의 굴레를 짊어졌던 1960년대 한국에는 주먹께나 쓰는 배고픈 소년들이 더러 챔피언을 꿈꾸었다. 김기수도 마찬가지였다. 박태준은 곧장 김기수를 찾았다. 주니어미들급이라는데, 과연 체구 좋은 사내가 대한중석 사장실에 나타났다. 악수를 나누었다. 아주 크고 빳빳한 손이었다. “어디 출신인가?” “함흥에서 내려왔습니다.” “함경도 아바이구나. 1?4후퇴 때?” “예, 흥남에서 배를 탔습니다.” 김기수는 1?4후퇴 때 배를 타고 내려오다가 강릉, 포항에서 못 내리고 여수까지 가게 되었다고 했다. “복싱은 언제 배웠나?” “여수 여항중학교에서 시작했습니다.” 박태준의 가슴으로 묘한 기운이 번지고 있었다. 1?4후퇴, 함흥, 흥남……. 이런 단어들이 김기수에 대한 관심을 더 자극했다. 1950년 겨울의 박태준은 원산, 함흥, 성진을 거쳐 청진까지 북진했다가 1?4후퇴를 앞두고 맹장수술을 받은 환자 상태로 들 것에 실려 흥남에서 통한의 철수 길에 올라야 했던 청년장교였으니…….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라는 놈입니다.” “그런 놈이 있어? 자신 있나?” “한 6개월 연습에 전념한다면, 얼마든지 붙어볼 자신 있습니다.” 박태준은 김기수에게 필요한 것을 다 말하라고 했다. 김기수는 무엇보다 도장이 급하다고 했다. “집이 어디냐?” “경희대 근처입니다.” 박태준은 총무이사를 불렀다. “이 친구의 집과 가까운 곳에다 가장 빠른 시일 안에 좋은 권투도장을 지어주시오.” 일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며칠 뒤 신설동에 터를 잡고 바로 공사에 돌입했다. 근사한 권투체육관이 생겼다. 개관식을 앞두고 박태준에게 ‘작명 의뢰’가 들어왔다. 그는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박정희가 바라고 자신이 추구하는 세계 일류. 그래서 ‘권일(拳一)’을 선물했다. ‘주먹으로 세계 일등이 되라’는 기원이었다. 챔피언 니노 벤베누티와 도전자 김기수의 타이틀매치 일정이 잡혔다. 박태준은 일부러 짬을 내서 ‘권일 체육관’으로 찾아가 김기수의 훈련 모습을 지켜보고 금일봉을 건네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결말이 좋아야 했다. 무슨 내기를 하듯 국가 장래에 대한 운을 걸어둔 것은 전혀 아니지만 그래도 성공을 해야 국민과 함께 한바탕 즐기면서 아침에 까치 소리를 듣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볼 것이었다. 아니, 거창한 차원은 다 접어둔다 하더라도 월남한 몸으로 곤궁하게 살아온 김기수 개인에게 얼마나 큰 영광이고 보람이겠는가. 주니어미들급 WBA세계타이틀매치는 1966년 6월 25일, 전쟁 16주년 저녁에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다. 국민적 관심이 집중되었다. 박정희도, 박태준도 관전했다. 엇비슷하게 맞고 때리는 예측불허의 승부. 대통령 앞의 큰 재떨이에 꽁초가 수북해졌다. 밤 10시가 넘어 15회전이 끝났다. 한국 심판은 ‘김기수 승’, 이탈리아 심판은 ‘벤베누티 승’을 알렸다. 라디오에 귀를 대고 있는 모든 국민이 초조했다. 코쟁이 주심이 ‘김기수 승’을 내놨다. 까짓, 텃세가 좀 붙었으면 어떤가. 박태준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한국 최초의 세계챔피언 탄생. 온 국민이 마치 오랜 가뭄 끝에 한바탕 소나기가 내리는 것처럼 신명을 올렸다.
“사장님 덕분에 운동에만 전념한 결과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야. 우리 챔피언이 고맙고 장해. 지금 우리 국민들에게 누가 그만큼 큰 기쁨을 줄 수 있겠나. 권일체육관은 선물이야. 대통령 각하와 내가 주는 거라고 생각해.” 김기수 내외가 다소곳이 고개를 수그렸다.
이후락의 부탁으로 종합제철사업을 준비했던 신격호입력 : 2014.10.20 10:18 | 수정 : 2014.10.20 15:25 (27번째 이야기) 1965년 가을부터 1966년 봄까지, 박태준이 박정희에게서 종합제철에 관한 특명을 받아 초보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그 언저리에는, 박태준 아닌 또 다른 한국인이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 프로젝트와 관련해 도쿄의 김철우와 접촉하고 있었다. 롯데 신격호 사장으로, 그의 배후는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다. 1966년 봄날을 기준으로 잡는 경우, 박정희가 중심에 서서 추진하고 있는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 프로젝트’는 정부 관료들이 나서서 국제금융기관이나 선진국 철강기업 경영자와 교섭하는 가운데 박태준은 대한중석 사장으로서 그 프로젝트에 대한 공식적 직위가 없는 상태에서 치밀한 준비 작업을 해나가고, 그러한 움직임들과는 별개로 이후락에 의해 신격호도 그 프로젝트에 사업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형국이었다. 실제가 그랬다. 한일국교정상화의 길을 간신히 열어놓은 1965년 9월부터 한국정부는 종합제철소 건설을 위해 IBRD(세계은행), 코퍼스사 포이 회장과 만나는 등 다각적인 철강외교를 전개하고 있었다. 성과가 나왔다. 코퍼스가 한국 종합제철소 건설을 지원할 국제차관단을 구성하려는 행동에 나서고, IBRD는 한국의 100만톤 규모 종합제철소 건설사업의 타당성 조사를 실시하기로 했다. 피츠버그의 한 귀퉁이를 한국의 어느 해안에 옮겨놓는 일과 진배없는 대역사의 엔진에 막 시동이 걸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해 9월 중순에는 니혼강관의 도야마가 단장을 맡은, 일본 6개 철강기업들이 추천한 조사단 10명이 서울로 왔다. 일본조사단의 역할은 백인들이 내놓을 타당성 조사에 대한 ‘정확성’을 검증할 최적의 비교자료를 작성하는 것으로, 이는 박태준이 박정희의 승인을 얻어 취한 조치였는데, 그렇게 그는 “종합제철소 건설 계획단계부터 참여하라”는 박정희의 특명을 수행하고 있었다. 때마침 대한중석은 적자를 완전히 벗어나 흑자의 덩치를 불리는 중이었다.
<고향(경남 울산) 친구이자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근무하던 이후락 씨가 나를 만나자고 했다. 이후락 씨는 나를 만나자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현재 박 대통령께서 국가의 기초 산업이 될 제철소 건설을 계획하고 계시다네. 그러나 알다시피 우리나라에 뭐가 있는가? 기술이 있나, 자본이 있나. 그러니 계획만 거창할 뿐 이 일을 실행에 옮길 수가 없네. 그러니 자네가 좀 발벗고 나서서 도와 주게. 자네는 일본 정계에도 영향력이 있지 않은가?” 이후락씨의 제안을 받은 나는 얼떨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과업으로 성공을 거두어 유통업에까지 진출한 나였지만, 그리고 박 대통령의 산업입국에 대한 의지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 제의가 금방 내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우선 나는 철(鐵)이란 것에 관해서는 문외한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머뭇거리자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이 “철에 관해서라면 재일동포로서 일본에서도 유명한 K모 박사가 있으니 함께 의논해 보십시오”라면서 말을 거들었다. 나는 일본으로 돌아오자마자 도쿄(東京) 근교의 지바(千葉)에 있는 ‘동경대학 산업기술연구소’에 비서를 시켜서 전화를 걸게 했다. 그곳에는 일본 문부성의 기술연구관 겸 동경대학 교수인 K박사(본인의 요청에 따라 이름은 밝히지 않기로 한다)가 근무하고 있었다. K박사는 나와 같은 재일동포였으나 이전까지 우리는 서로 아무런 면식도 없었다. 내 비서의 전화를 받은 K박사는 처음에 매우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그도 나의 회사인 ‘롯데’는 알고 있었지만, 그 회사의 사장인 나를 일본인인 줄로만 알고 있었으며, 더군다나 철(鐵) 전문가인 자신과 롯데와의 관계로 보아서는 도무지 만날 일이 없었기에 만나자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짐작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 이튿날, 그와 나는 동경 시내의 한 중화요리집에서 만나게 되었다. 음식점에서 만나 K박사에게 나의 소개를 한 다음 이후락씨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그 말을 들은 K박사는 기뻐하면서 조국을 위해 기꺼이 그 사업에 동참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겠노라고 했다. 동병상련이라고나 할까? 사실 나는 일본에서 어느 정도 사업적 성공을 거두고 있었으나, 한국인을 경시하는 일본의 사회 풍토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고로(高爐) 전문가인 K박사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긍지를 가지게 되었고 그 후로도 그와 매우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그와 나는 대번에 의기투합되어 연간 100만 톤 규모의 종합제철소의 기본기술계획(Master Plan)과 타당성조사(Feasibility Study)에 착수했다. 나는 당시로서는 거금이었던 3천만 엔 이상을 투입하였고, K박사는 모든 일을 제쳐두고 이 작업에 몰두하였다. 현재는 후지제철과 야하다제철이 합병되어 ‘신일본제철’로 되어 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두 회사는 서로 다른 별개의 회사였다. 나는 K박사로부터 두 회사 중 K박사의 동경대학원 동료교수가 기술개발본부장으로 근무하던 후지제철의 나가노 시게오(永野重雄) 사장을 소개받았다. 나가노 사장도 이 일에 적극 찬성하였다. 나가노씨의 협조를 얻은 우리는 후지제철 기술자 22명과 동경대학의 전문인력 및 기술자 12명을 합쳐 이 작업에 착수한 것이었다. 일을 착수한 지 8개월 만에 우리는 종합제철소에 대한 기본 기술계획과 타당성 조사를 마칠 수 있었다.>
<롯데 신격호 사장이 비서를 시켜서 만나자는 연락을 넣고 차를 보냈다. 울산이 고향인 그는 나에게 동향의 이후락 씨로부터 “한국에서 제철소를 해봐라. 박정희 대통령이 어떡하든 하라는 엄명이다”라는 부탁을 들었다며 도움을 청했다. 나는 조국을 위해 좋은 일이니 도와 드리겠다고 답했다. 내 주변의 제철 전문가는 20명쯤 되었다. 특히 후지제철소 기술본부장으로 있는 은사가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 은사의 소개로 신 사장과 함께 후지제철 나가노 사장을 만나러 갔다. 이때 나가노 사장한테서 ‘터키’에서 온 제철소 관계자 얘기를 들었다. 터키에 50만 톤짜리 제철소를 짓기로 했는데, 중간에서 다 뜯어 먹히고는 20만 톤도 하기 어렵게 됐으니 도와 달라는 부탁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나는 ‘제철소 건설’과 ‘못난 권력’의 위험한 관계를 알아챘다. 초콜릿과 껌과 과자로 일본에 널리 알려진 신 사장은 나가노 사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얇은 것은 잘 만들지만 두꺼운 것은 못 만드는데 한국 청와대에서 김철우 박사를 만나면 잘 풀릴 거라고 하여 오늘 여기 같이 왔습니다.” 이 자리에서 나가노 사장이 소개한 사람이 뒷날 포항제철의 JG(일본기술단) 단장으로 가는 아리가 부장이었다. 그도 돕겠다고 했다. 물론 롯데와 제철소는 멀어졌다.>
<K박사가 나를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나는 순간 의아해했다. 이때까지 내 쪽에서 K박사를 청했으면 청했지 K박사가 나를 청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뭔가 중대한 일이 있음에 틀림없다.’ 그런 생각을 하고 약속 장소인 동경대학으로 가면서도 나는 은근히 ‘무슨 일일까?’ 궁금해 했다. 동경대학에 도착하여 K박사의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나는 직감적으로 ‘아! 저 사람 때문에 나를 이곳으로 불렀구나’ 하고 느꼈다. 그곳에는 짙은 눈썹에 형형한 눈빛을 하고 있는 호랑이 같은 인상의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마치 거대한 산이 버티고 앉아 있는 듯한 강렬한 느낌을 주었다. 그가 바로 박태준이었다. 그날 밤, 우리 세 사람은 밤을 새우며 얘기를 나눴다. 그러는 동안 나도 모르게 점차 그에게 이끌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은 내가 그의 신념에 찬 어조와 장부다운 기백에 이끌린 것만이 아니라, 마치 계곡을 흐르는 물처럼 맑은 서로의 교감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박태준은 나에게 담백하고 솔직한 사람이라는 첫인상을 남겼다. 그 느낌은 20년이 훨씬 지난 오늘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는 산중의 물처럼 맑고 깨끗한 사람이다. 그러나 노자(老子)가 얘기하는 물처럼 그는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다. 노자는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고 했거니와 만물을 이롭게 해줄 뿐 결코 다투지 않는 물처럼, 그는 오늘날까지 자기를 고집하지 않으면서도 결코 자신을 잃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어떤 일본인은 그를 ‘고대 무사풍(武士風)의 인물’이라고 평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그를 잘 모르는 데에서 나온 말이다. 그렇게 박태준과 나와의 첫 대면은 퍽 인상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그때 자신이 종합제철소의 기획 및 건설 책임자로 ‘내정’되어 있다면서 자신을 소개했다. 그의 설명을 들은 나는 그동안 조사해 두었던 자료를 그에게 넘겼다. 박태준을 만나기 이전에 종합체철소 건설 프로젝트에 매진하고 있었던 나는 아주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것은 미국에서 제철소 건설을 맡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일은 내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박태준과 나의 인연을 맺게 해주려는 하늘의 배려로 생겨났던 사건인지도 몰랐다. 하여튼 나는 미국측의 프로젝트를 면밀히 검토해 보기로 했다.>
가족 만나러 북한 갔다가 6년간 감옥생활했던 포스코 공신 김철우입력 : 2014.10.16 07:39 (26번째 이야기) 1965년 여름, 뜨거운 서울거리를 한국사회의 격렬한 갈등이 더욱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6월 22일에 조인된 ‘한일조약’이 기폭제였다. 사정없고 거침없는 흑백논리가 세워졌다. 한국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를 핵심으로 하는 한일조약의 비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정의와 자주’의 민족세력, 한일조약의 비준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불의와 매판’의 친일세력. 이렇게 사회가 극단적으로 갈라진 가운데 국회는 8월 14일 공화당 단독으로 비준안을 통과시켰다. 이때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인민혁명당 사건’을 터뜨렸다.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가 인권과 민주주의를 억압해나갈 신호탄을 쏘아올린 격이었다. 대학가의 시위는 격렬해졌다. 8월 26일 서울 전역에 위수령이 내려져 또다시 군대가 캠퍼스를 장악했다. 그런데 한일조약 국회비준과 위수령 선포 사이, 8월 18일, 한국 현대사의 중대 결정이 내려졌다. 2만 병력 월남(베트남) 파병에 대한 국회 비준이 바로 그것이었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혼란한 계절에 박태준은 정치와 담을 쌓은 채 대한중석 경영 정상화에 몰두하는 한편으로 박정희에게 밀지처럼 받은 특명인 ‘종합제철’에 깊은 주의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박태준이 도쿄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서 뛰어난 제철엔지니어인 김철우 박사와 처음 만난 것도 그해 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동경대학교 생산기술연구소에 근무하는 김철우 박사를 모셔 오라.’ 박태준의 그 지시를 받은 이는 대한중석 도쿄 주재원 주영석이었다. 김철우. 1926년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조선인 2세. 아버지는 경남 의령, 어머니는 합천이 고향이다.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부모 슬하에서 김철우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금속학도의 길을 택해 도쿄공업대학, 도쿄대 대학원에서 공부한 뒤 도쿄대 생산기술연구소에 둥지를 틀었다. 그는 첫 봉급이 1만2000엔이었다는 것을 늘 잊지 못한다.
김철우 박사가 『박태준 평전』을 쓴 작가 이대환과 만나서 ‘박태준과 김철우, 김철우와 한국 종합제철’에 관한 일들을 들려준 때는 2005년으로, 그때 그는 대전에 거처하는 일흔아홉 살의 노인이었는데, 막힘없는 모국어로 육십여 년 전의 일들을 초롱초롱하게 불러냈다.(이대환 엮음, 『쇳물에 흐르는 푸른 청춘』 참조) “이미 박 사장(박태준 대한중석 사장)이 제철소에 관심이 많았어요. 아마도 박정희 대통령의 언질을 받았던 것일 텐데, 그 자리에서 박 사장이 그런 말을 안 했지만 나는 그렇게 직감을 했고, 나중에는 내가 적중한 거였다는 것을 알게 됐지요. 첫 만남에서 박 사장이 나에게 제철소 건설에 대해 기술적으로나 여러 가지로 도와 달라고 부탁했어요. 당시 낙후된 조국의 경제나 산업의 실상을 잘 아는 자이니치(재일조선인 2세) 지식인으로서, 제철이나 금속을 잘 아는 자이니치 학자로서, 두 손 들어 환영할 부탁이었지 주저할 부탁이 아니지 않습니까?”
“첫 식사 자리에 후식으로 내가 먹어보지 못한 과일이 나왔는데, 아주 맛이 좋아서 내가 이름을 물었더니, 박 사장이 ‘망고’라고 알려 줬어요. 이렇게 우리의 첫 만남에는 망고가 남게 되었습니다. 가난하게 살아온 나는 그것을 ‘대단한 사람’이나 먹는 거라고 알게 됐지요. 그 뒤로는 ‘대단한 망고’를 맛보게 해준 박 사장과 자주 만나게 되었지만요. 허허허…” 2013년 12월 김철우 박사는 도쿄에서 별세했다. 향년 87세(1926년 생). 그의 부음을 알리는 한국 언론은 ‘포항제철 1기 건설의 숨은 공로자’라는 감사의 말을 바쳤다. 그것은 정직한 헌사였다. KISA가 작성한 한국 종합제철소 건설의 일반기술계획(GEP)에 대한 검토작업에도 참여하여 그것이 얼마나 엉터리이며 설비들이 어떤 중고품인가를 알아내게 되는 김철우는 박태준의 초빙을 받아 1971년 포항종합제철 기술담당 이사로 부임해왔다. 특히 제1고로 건설에서 중요한 기술자문을 했고, 포철 2기(연산 270만 톤 체제) 건설의 계획위원장도 맡았던 김철우.
1979년 늦가을에 스파이 혐의를 벗고 감옥을 나온 김철우는 그의 공로를 잊지 않은 박태준의 배려로 정부의 승인을 받아 1982년부터 포항제철에 복직하여 1989년까지 부사장, 포항산업과학연구원(RIST) 초대 원장 등을 역임한다. 자신의 처지야말로 분단 조국의 비극적 전형이란 인식을 뼈에 사무치게 하면서 원망도 절망도 없이 감옥살이 6년 6개월을 감당해낸 뒤로 어언 26년쯤 더 흘러간 2005년 여름,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집권의 절반을 지나가는 그 즈음, 김철우는 ‘한국 종합제철의 추억’을 물으러 찾아온 초면의 작가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한국 산업화의 기간이 되었던 포항제철에 기여했다는 점이 자이니치로서 큰 보람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당시의 극단적인 냉전체제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그토록 가혹한 고통을 안겼는데, 오늘날의 번영 앞에서 나는 박정희 대통령의 공적을 높이 평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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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퐝동재(東宰) 원문보기 글쓴이: 별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