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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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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스크랩 광해군은 마땅히 폐위되어야 할 자였다 3편/ 누가 광해군을 부활시켰나?
이장희 추천 0 조회 23 15.07.17 13: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광해군 재위 15년은 폭정의 연속이었다.

광해군대의 시대적 과제는 전란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을 위한 민생회복과 북방의 새로운 위협에 대한 대처였다.

민생회복을 위해서는 전란중에 부과된 과도한 임시세 폐지, 공정한 세금징수를 위한 양안(토지소유자 조사)실시, 백성

들의 고혈을 짜던 공물납 문제의 해결, 과감한 예산 절약등이 필요했다.

북방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국방비의 효율적 마련및 사용, 국방력강화 및 유림의 초계파적 협력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서는  신료들과 유림의 지지가 필요했으며, 대통합정치가 요구되었다.

하지만 광해는 이 모든 기대를 저버렸다.

권력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대규모 옥사를 연이어 불렀고, 그때마다 조정에서는 서인과 남인,소북이 축출되고, 대북파

가 득세했다. 결국 조정은 대북일당체제가 되었고, 그중에서도 광해와 인척관계에 있는 척신들이 권력을 쥐고흔들었다.

그는 정사에 관심이 없었다. 오직 그가 챙기는 것은 잔인한 친국과 화려한 궁궐공사뿐이었다.

나라가 안정된 시기에도, 궁궐 하나를 짓는데 소모되는 물력이 만만치 않은데 광해는 재정이 극도로 악화된 상태임에

도 아랑곳 하지 않고  무려 여섯개의 궁궐공사를 연이어 지어댔다. 이는 조선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다. 재정이 바로

바닥을 드러내자 그는 세금을 100% 인상하고 파행적 납속책을 확대했다. 심지어 현직을 공공연히 매매하는 매관매직

도 서슴치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국방력을 좌우하는 것은 재정이다. 재정을 이렇게 불요불급한 곳에 사용하여 바닥을 냈는데 어떻게 국방

력을 증가시키겠는가?  궁궐공사로 재정이 고갈되자 외침에 대비한 비축물자까지 들어먹고 있는 와중에서, 북방에 급박

한 기운이 감돌았다. 

광해군 8년(1616년) 누루하치가 후금을 건국하더니, 2년뒤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무순을 함락시켰다.

크게 놀란 명은 광해군 11년(1619년) 조선과 연합해서 13만군을 편성하여 후금을 공격하다 사르후전투에서 대패하고

만다. 이후 광해군은 명과 후금 양자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며 실리외교를 펼쳤다. 

하지만 중립이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중립을 지킬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힘을 갖추기 위해서는 재정와 유림의

지지가 필요하다. 또 광해의 중립정책은 신료들과 유림의 동의를 받은 것이 아니다. 광해가 은밀히 후금에 밀지를 보내

그들의 묵인을 받은 것에 불과하다.

광해가 임시변통책이 아닌 항구적 중립을  원했다면, 광해는 궁궐공사를 중단하고 가용재원을 국방비에 투여해야 하며,

 조야를 끊임없이 설득하여 그들이 중립정책을  지지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물론 그 전제조건은 대통합정국이다.

 

광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가 몰락할 때까지 궁궐공사는 계속되었고 조야를 설득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없었다.

아니 할 의사조차도 없었다. 오히려 폐모론을 관철시켜 정국경색을 더욱 심화시켰다. 돌아올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광해의 임시변통책을 명과 후금이 언제까지 묵인할수 있었을까?. 후금은 세가 강성해지자 양자택일을 하라고 끊임없

압박했다. 그가 유림을 설득시키지 못한다면 전쟁은 불가피했다. 스스로를 궁지로 몰아넣었던 광해는 마침내 실각되

고 말았다.

광해군은 무능했으며 독단을 일삼았던 폭군이었다. 그는 폐위되어  마땅한 자였다.

 

1930년대 초까지, 광해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었다. 기존 평가에 대한 전복은 1933년 일본 식민사학자 이나바 이와키치

에 의해 일어났다. 이나바는 광해군을 실용주의 외교로 백성들에게 은택을 입힌 군주로 재평가했다. 그는 심하전투이후

조선과 후금의 관계를 부활하는 만주와 조선의 관계라고 반기고 광해군의 폐위를 비극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물론 이런 해석이 나온 이유가 있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만주국이란 괴뢰정부를 세우고 중국 침략을 가시화하기 시작

한 일본은 대중전선에 만주족과 조선인들을 참여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일제에 협력하는 이등국민으로 한족과의

쟁에 동원되었다. 따라서 일제의 입장에서, 두 민족은 우호적인 관계여야 했다.

 

그런데 일제가 패망한 이후에도, 지금까지, 광해군은 남한은 물론 북한에서조차 높이 찬양받는 위대한 성군이 되어있었

다. 실용주의,중립외교로 포장된 그의 위상은 그 누구의 도전도 용납하지 않은채, 수많은 인간들의 찬양을 받고 있다.

일제강점기때야 이유가 있었다지만  왜 해방후에도 광해군은 승승장구 했을까? 더욱이 시간이 갈수록 그에 대한 찬양은

더욱 화려해진다. 실용외교,중립외교를 지나 민족통일의 거울, 민족화해를 위한 대승적 아량의 거울 등등 교과서는 물론

대중서,전문 연구서까지 가리지 않고 고르게 재평가를 받으며 복권,부활하다 못해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학문은 다수결이 아니다. 이제 그에 대한 포장을 벗겨내고 광해가 이런 위치를 차지하게 된 구조적인 이유를 살펴보자.

20세기 무렵, 서구 근대 역사학을 대표하는 사관은 실증사관과 진보사관이었다. 그 시기 서구의 지식인들은 역사의 진보

를 굳게 믿고 있었다. 인류의 역사는 고대 노예제를 거쳐 중세 봉건제, 근대 자본주의제로 계속 발전하여 왔다는 것이다.

단지 우파는 자본주의하에서 역사의 발전이 완성되었디고 본반면 좌파는 자본주의를 넘어 사회주의가 도래해야만 역사

의 완성이 이루어진다고 본 것이 다를 뿐이다.

진보사관이 보편화됨에 따라 사실과 가치, 두 측면에서 근대는 목적론적으로 도달해야 할 시대로 설정되었다.

사실의 측면이란 어느 사회나 적절한 과정을 거쳐 근대로 갈수밖에 없다는 말이고, 가치의 측면이란 자유와 평화, 인권

실현을 위해 근대는 바람직한 시대란 말이다.

 

조선사 연구도 근대로의 이행과정의 한부분으로 맞추어져야 했다. 더구나 덤덤한 이행이 아닌 식민지로의 전락이라는 아

픈 이행을 설명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식민지배를 거쳐 이후 한국은 근대화에 성공했다. 이런 과정들을 매끄럽게 설

명해야  했다. 

 

변명은 둘중에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식민지가 될수 밖에 없는 필연성이 있었고, 일제에 의해 근대화의 토대가 마

련됐다(식민지 근대화론)고 주장하든지, 자생적 근대화로 가던 중 일제 침략에 지체되었지만 극복하고 근대화에 성공했다

고 주장하는 것(내재적 발전론)이다.

한국 사학계는 내재적 발전론에 많은 공을 들였다. 그결과 조선후기사에 자본주의 맹아론,실학,소중화론(민족주의론),붕당

론등이 등장했지만 실증적 근거가 희박하거나 심지어 담론자체에 오류가 존재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식민사관에 대한 비판은 미흡했다. 아니 애당초 저 논리로는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식민사관이나 내재적 발전

론 모두 진보사관의 틀속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사회를 무리하게 근대사회로의 이행과정속에 맞추려는 결과, 산

화,자본주의화가 특징인 근대화를 역사발전 목표이자 절대선으로 삼은 결과, 실증적 거나 담론에서 무리가 나오고 오

히려 식민사학의 계량적 근거가 휠씬 돋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이제 진보사관은 자체내 모순이 드러나 본산인 서유럽에서도 막을 내린지 오래고 일부 자본주의 이데올로그들만 부여잡

있는 퇴색한 이데올로기로 몰락했다.

서구의 근대화과정은 전지구적인 보편적 과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지역의 특수성에 기인해서 일어난 것일뿐이다.

한국 강단사학계는 서구와 상이한 삶의 양식과 구조가 작동되던 조선사회를 서유럽 근대모델로 억지로 맞추려 했다.

하지만 과거는 포맷되지 않는다. 사학계는 한 사회의 진행과정을 서구근대화 틀에 억지로 꿰려고 할것이 아니라 보다

본질적인 문제, 즉 어떤  두 사회가 어떻게, 왜 다른가, 왜 한 사회는 다른 사회로 이행하는데 어떤 사회는 이행하지 않는

지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제까지 강단사학계는 조선사회 또는 문명에서 근대적 요소를 발굴하는 데 주력했다. 거기에 조바심이 가세하면서 사

회구성체의 복합성과 역동성은 쉽게 경제주의로 환원되었고, 상부구조와 토대의 조합에 따른 다양한 사회형태에 대한

탐구는 토대결정론으로 좌초되었으며, 역사전개의 다양성은 역사적 합법칙성이라는 사이비 보편사에 휩쓸렸다.

근대로의 이행을 목표로 해야만 의미를 갖는 조선사 연구풍조 때문이다.

 

역사란 인간의 경험이다. 경험이란 반복할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부정적인 경험은 버리고 긍정적인 경험은 살려야

것이다.

그런데  근대지향주의는 조선문명에서 유용성 측면으로 경험을 바라볼 가능성을 봉쇄했다. 경험은 오직 근대로 귀결될

있는 것만 의미를 가질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근대지향주의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를 비판할 수 있는 경험으로서의 조선문명의 가치가 무시되었다. 현재 우

삶에 이런저런 문제나 불합리가 있는데, 그걸 다른 방식으로 해결한 사회의 경험이 있다면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그것이 역사공부의 본래 의미 아니던가? 그런데 근대지향주의는 조선문명의 모든 것을 낡은 것으로 간주하고 부정했다.

 

식민사학의 목적은 무엇인가? 조선인에게 열등감을 심어주는 것이다. 일제는 수탈이상으로 조선을 영구히 지배하는데

더 큰 공을 들였다. 그들은 조선인들에게 열등감을 부추겼고, 열등감에 물든 자들은 민족의 정체성을 부정하면서 기꺼이

일제의 주구 되었다. 해방후 이들은 한국사회의 지배층이 되었고 공동체의 이익 대신 자신의 이익과 그 이익을 지켜주

는 외세의 대변자가 되었다. 

일제가 물러간 후,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서울대 사학과에 뙤리를 틀면서, 식민사학의 정신은 지금까지 굳건히 강단사학

내부에서 뿌리를 내리며 한국인들의 정신을 좀먹고 있다.  작금 한국사회 지도층들중 공동체의 이익보다 자신의 이익

을 먼저 챙기는자들이 많은 것도 이런 교육의 영향이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식민사학의 틀도 기본적으로 진보사관이다. 근대를 목적으로 하면서 전통사회의 모든것을 근대로의 이행에 얼마나 기

여 했는가로 평가한다. 그러니 식민지근대화론이 나오고 내재적발전론도 실증적 근거의 빈약과 담론의 오류로 허우적

대는 것이다. 

 

기본적 배경에 대해 언급했으니, 이제 20세기에 광해군이 복권된 연유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빨리 중세를 해체하고 근대로 와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지체되었다. 지체요인이 무엇이냐? 즉 지체요인에 대한 부정

적 인식이 시간적,논리적으로 선행해서, 그와 대비되는 요소는 무조건 긍정적이 되는 것이다.

그 지체요인이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반정이라는 것이다.

실용적 시각을 지닌 영명한 군주인 광해군을 내쫓고, 당파성이 강한 서인이 집권해서 양반기득권체제유지에만 전력한

결과 300년간 조선은 근대화의 기반을 마련하지 못하고 침체을 면치 못하다가 결국 일본에게 망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근대주의적 역사관에 의해 인조반정이 부정적으로 인식된 결과, 광해군은 재평가 받으면서 부활할 수 있었다.

일제 식민사관과 그 아류들이 조선후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출발시점에 광해군을 띄운 것은 이런 논리적 장치를 가지

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식민사학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 있는 강단사학계가 광해군을 떠받드는 이유다.

그 결과 인조반정이후의 시대는 오직 근대적 요소를 발견하는 연구 이외에는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못하는 기형적 현상

이 생겨났다. 인조반정이후 민초들의 삶을 편안히 해주기 위해 취해진 각종 개혁조치들은 개량적 조치로 폄하되었고, 실

체도 흐릿한 탈주자학, 반주자학의 논리가 풍미하였다. 결국 근대주의자들의 사이비 보편사관과 조급증 탓에 300년 동안

조선인들은 상황 타개능력도,시스템 혁신능력도 없는 열등한 존재들이 되고 말았다.

 

오래전부터 식견있는 학자들 사이에서 근대가 사실과 가치, 두 측면에서 목적론적으로 설정될수 없다는 견해가 제시되기

시작했다. 지구상의 극히 일부만이 근대로의 길을 갔고, 대부분의 지역에서 근대는 식민지 또는 노예라는  폭력적 상황 속

에서 다가왔다.

근대는 서구인들에게는 영광과 번영의 시대였지만, 제3세계인들에게는 억압과 수탈의 시간이었다.

그래서 서구인들은 근대와 현대를 구분하지 않는다. 현대는 근대의 연속일뿐이다. 하지만 제3세계인들은 근대와 현대를

엄격히 구분한다. 근대는 그들에게 폭력과 수탈의 역사였고 현대는 그 후유증을 극복하면서 나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가치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신분은 계급으로 대체되었고, 자유는 토지와 생산수단으로부터의 자유, 즉 박탈이 본질임

드러났다. 그리하여 노동력만 팔수 있는 자유를 가진 인간, 노예나 농노가 누렸던 최소한의 안전망조차 확보할수 없는

'다른 인간이나 사회의 보호로부터 ' 자유로운 인간들이 나타났다.

진보된 근대는 인류문명사상 처음으로 곡식재배와 물품생산이 인간을 위해서가 아닌 돈을 벌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세상

임을 드러냈다.

 

보수,진보에 관계없이 이 땅의 지식인들에게 조선은 빨리 사라졌으면 좋았을 시대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인생에 그냥 지나가는 시기가 없듯이 역사에도 그런 시대는 없다. 어떤 시대이든 그들은 그들 자신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가 어떠하든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

 

 이땅에서 길고 모진 세월을 살아오면서, 그들은 고유한 정체성을 만들어 우리에게 물려주었고, 그 정체성이 있었기에

한민족은 지금까지 유지될수 있었다.

우리가 정체성을 상실했다면 만주족처럼 역사에서 사라졌을 것이고 이런 논쟁을 벌일 상황도, 이유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땅에 태어난 것은 우리가 선택할수 없었던 숙명이었다. 그 숙명을 담담히 받아들이면서, 다른 편으로는 더 나은 삶을 

 위해 그 운명에 도전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다.

 

참고)

1.광해군일기

2.광해군/ 오항녕 지음/  너머북스

3.대동법/ 이정철 지음/  역사비평사

4.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김기협 지음/ 돌베개

5.식민사학과 한국고대사/ 이희진 지음/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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