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고대 시대 우리 나라에서 출토되고 있는 여러 가지 고대 유물 중 석부, 석창, 석검, 골검, 골부등은 일찍부터 어로 수렵 등 생활 수단으로서 뿐만 아니라 무기로 사용되었으며 이에 수반하여 이들을 전투에 이용하는 무예도 일찍부터 발달해 왔다. 청동기 시대의 유물로서 출토되고 있는 비파형 단검 등은 고대 시대에 이미 부족간의 전투등의 필요에 의해서 무예의 발달을 추측케 하고 있으며 기원전 109년 한의 침공을 1년간이나 끈질긴 저항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금속 문명의 발달에 따르는 무기 및 기예의 발달에 따른 것이다. |
2.삼국 시대, 통일 신라 시대 끊임없이 전개된 중국 및 3국간의 정복전쟁으로 무예의 진흥을 촉진하였다. 삼국의 무사들은 하오(下午)들의 생산 활동에 힘입어 오직 무예만 닦고 전투에 참가하여 주임무로 삼는 독립된 계급으로 존재하였으며 삼국 모두 고구려의 경당과 같은 교육기관을 두어 청소년들을 훈련하였다. 특히 중국과의 전쟁으로 무예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고구려에서는 고분 벽화의 기마 전투도, 사냥 그림, 수박도 등에서 보여지듯이 상당히 높은 수준의 무예를 갖추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고, 신라에서는 특수한 장창대를 개발하여 삼국통일을 달성 했으며 검무가 뛰어났다고 한다. 통일 신라 시대에 무오 병서가 편찬되었다고 전해지나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
3.고려 시대, 조선 초기 고려 초에는 장거리 병기인 석노등이 개발 배치되었지만 단병 접전용 무예 또한 중시한 것도 변방에 24반 병기를 배치한 사실로도 알 수 있다. 고려말 화약 병기가 출현하면서 결정적으로 장병기가 중시되면서 단병기 무예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특히 단병기의 무시 경향은 진영이 최우선으로 중요하고 기예는 중요성이 가볍다라는 이른바 선진후기(先陳後技)의 관념 때문에 더욱 심화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진법 훈련이 강화되면서 전투대형 훈련은 성행하였으나 각개 병사의 무예 훈련은 경시되거나 혹은 억압되었으며 때문에 무과의 시취에있어서 步射,騎射,騎槍 등의 무예와 주력등 기초 체력을 시험하였으나 전반적으로 단명의 기예는 발달하지 못하고 초기 임진왜란에서 패배하게 된다. |
4.개 발 조선 전기 이전의 우리 무예는 전해지는 문헌 자료가 없기 때문에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물이나 벽화 전설등을 통해서 볼 때 상당한 수준이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산악이 많은 조건에서 궁술이 발달한 것은 당연하며 동양의 어떤 민족보다 우수한 궁술을 자랑한 것은 동이(東夷)라는 -夷은 大弓을 의미- 말에서도 알 수 있지만 궁술 외에도 단병 또한 우수하였다. 고구려 무용총 벽화의 수박도, 기마 전투도는 과호세, 안시측시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이는 중국과 비슷한 시기 혹은 그 이전의 시기에 우수한 권법을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조선 전기에도 비록 각 개인의 기예를 경시하였지만 단병의 병장 기예가 끊어지지 않고 흘러 내려 왔다. 임진왜란때 사명 대사가 월도를 사용하여 왜병과 맞선 것이나 의병장 곽재우가 전투에서 조총을 방어하기 위해 솥뚜껑 -등패가 창, 검이나 궁시에는 강하나 조총에는 약하기 때문에 솥뚜껑으로 대용한 것으로 추측됨- 을 사용한 것을 볼 때 조선 전기에도 단병의 병장 기예는 전해 지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
[자작 첨성 캐릭터 & 십팔기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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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그린 것을 스캐너한 것으로 99년 00년 가두모집에 활용되었다.(98년) |
캐릭터을 무단 배포할 수 없고, 십팔기 홍보를 위해서만 사용될 수 있습니다.
한국 전통 무예 전국대학생 연합회(한·무·련)
정조 명찬(正 祖 命撰)
김광석 실연(金 光 錫 實演)
심우성 해제(沈 雨 晟 解題)
도서출판 동문선 펴냄
「무예도보통지」는 조선시대 정조正祖 임금의 명命에 따라 박제가, 이덕무, 백동수가 만든 무예서武藝書로서 한국무예의 족보라 하겠다. 이책 「무예도보통지」에는 조선시대 선조들의 나라사랑 정신과 겨레사랑의 진정한 혼이 넘쳐난다.
「무예도보통지」에서는 동양고금의 무예기원에서 유래, 병장기의 제조와 재료 및 재료의 산지, 그리고 조선, 일본, 중국의 것들과 비교하는 등 무예 전반에 관해 소상히 다루고 있다. 특히 각 종목의 총도는 일찌기 어디에서도 없었던 선조들의 독창성이 넘친다. 내용 중 글자 하나까지도 의미를 분명히 밝히고 역대병서들의 오점을 지적하고 고쳐 쓰고있어 조선 선비들의 높은 학문과 무예에 대한 지식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이 책은 풍부한 도해와 사진으로 한국 무예 십팔기를 실기 해제하고 있어 누구가 쉽게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한국 전통 무예의 근간이 되는 「무예도보통지」 는 오늘날에 새로이 정립해야할 한국무예의 모태母胎로서 더 없이 귀중하다. 세계 무예사에 보물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을 통하여 오늘날의 한국인에게 진정한 무예정신을 일깨우고 또한 현대인의 건강 증진 및 강화에 이바지 할 수 있도록 이를 연구하고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 책의 구성
정조 正祖 서문
범례 凡例
병기총서 兵器總書
척소보 戚少保 와 모총병 茅總兵 의 사실 事實
기예질의 技藝質疑
실기해제 實技解題
[전통무예의 개념정립과 현대적 의의 ]
최복규 지음 교육학석사학위논문(서울대학교 대학원 - 역사체육학 전공)
논문은 현재의 전통무예계의 현황과 과련하여 전통무예의 의미를 파악하고 혼동된 개념에 대해서 명확한 의미 규정을 시도함으로써 전통무예의 개념정립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전통무예의 체육적 가치와 현대적 의의에 대하여서도 소상히 살피고 있다.
목차
1. 서론
2. 전통무예의 발전과정과 문제점
3. 전통의 현대적 해석
4. 전통무예의 개념정립
5. 전통무예의 현대적 의의
6. 요약 및 결론
* 이 글을 쓴 이는 현재 서울대학교 박사과정에 연구중이무예十八技 사범자격과 사회체육지도자 자격을 가지고 있다. |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
선생의 본관은 현풍이며 자를 계수(季綏)라 한다. 소년시절 학문을 배웠는데 일찌기 성리학을 통달한 대선비 남명(南冥)조식(曺植)선생을 스승으로 모셨다. 스승은 뛰어난 학문과 엄한 가르침으로 소년 재우를 어엿한 청년으로 성장케하고 출중한 인품을 쌓게 하여 선비의 풍모를 갖추게 하였다. 또 외손녀 딸을 그와 만나게 하고 부부로 맺어주었다. 청년 재우는 부친께서 압록강지방의 감사로 부임하게 되자 부친을 따라 그곳 관아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변방의 환경은 여진등 압록강 건너에 있는 무리들의 잦은 침략과 노략질에 대한 경계가 삼엄한 지역이다. 이곳에서 청년 곽재우는 부친의 업무를 도우며 각종병서를 읽고 연구하며 무예를 연마하는등 청년 무사로서 기상을 맘껏 불태울 수 있었다. 부친의 임지가 바뀌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과거장에서 공공연히 일어나는 부정을 보게되면서 과거를 포기 하였다. 20세가 되도록 그는 고향의 창강에서 거친 베옷차림으로 가난하게 살면서 삿갓에 짚신을 신은채 고기나 낚으면서 스스로 즐겼다. 임진년 즉 1592년 봄 왜적이 대선단을 이용해 부산일대를 침략하였다. 바로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다 . 망우당은 평소 태평성대라는 조정의 안일한 태도와 흐트러진 관료들의 부패에 걱정이 사라지지 않던차 왜적의 침입은 곧 백성의 참혹함이다라는 판단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군비는 가족들을 설득하여 친인척 및 가족의 재산으로 충당하였고, 또한 매형등 모든 이들이 큰 마음으로 동참하였다. 선생은 왜적을 토벌할때는 늘 붉은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앞장을 섰다. 그래서 왜적들은 그를 홍의천강장군(紅依天降將軍)이라 불렀다. 수차례 왜적을 격차하고 또 적의 온갖 작전을 차단하는등 장군의 군사적 능력과 공은 참으로 높았다. 전쟁은 왜구의 패주로 사실상 조선의 승리로 끝났다.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크게 표창하고 좌윤(左尹)이라는 관직을 재수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관직을 사양하고 한양에서 살았다. 선생은 익힌 음식을 먹지않고 간단한 생식과 솔잎을 먹고 지냈다. 또 언젠가 비파산에 가서 생활하면서 곡식으로 만든 음식을 끊고 솔잎으로만 생활하였다. 나이가 들어 고향으로 돌아와 창암에 정자를 짓고 망우당이라 하고 불에 익힌 음식을 전혀 먹지 않았다. 공이 시를 지었는데, 朋友憐吾絶火烟 내가 화식을 끊었다고 친구들이 불쌍해 여기지만 共成衡宇洛江邊 낙동강가에 집을 함께 지어보세. 無飢只在擔松葉 배주림이 없으니 다만 솔잎을 먹기 때문이요. 不渴猶憑飮玉泉 목 마르지 않으니 같은 샘물을 마시기 때문이네. 守靜彈琴心澹澹 고요함을 지켜 거문고를 타니 마음이 담담하고, 杜窓調息意淵淵 창을 닫고 심호흡을 하니 뜻이 그윽하네. 白年盡過亡羊後 한 백 년이 다 지나 망양지탄할 적에, 笑我還應稱我仙 나를 비웃던 이들 또한 나를 신선이라 부르리. 라고 하였다.
경북 선산사람 승지 박수홍이라는 분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자주 선생을 찾았다. 선생께서 "장차 무엇을 하고자 하오?"하고 물으니 박수홍은 대답하기를 "과거를 보러 갈 따름입니다."하였다. 선생이 거듭 묻기를 "이런 시절에 과거를 보아 무엇에 쓴단 말인가?" 하고는 술상을 차려 너댓잔을 마시다가 불쑥하는 말씀이 "술 때문에 괴로와 기분이 매우 평안치 못하군" 하고서는 그릇을 가져오게 하여 귀를 그릇에 대고 머리를 기울이니 아까 마신 술이 귓구멍으로부터 모두 쏟아져나왔다. -명신록에서 -
<지봉유설>이라는 책에 선생은 기개와 절조가 있고 뜻이 커서 사사로운 물정에 구애받지 않았다. 임진왜란때 자기집 종과 동네청년과 이웃동리의 주민을 모아 향병을 조직하고 낙동강 일대를 가로막아 적병을 수없이 베고 물리치자 왜적들은 장군을 두려워하여 [홍의장군]이라 부르고 피하였다. 이때 장군이 사용한 전법을 유격전적인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방패를 응용한 쇠방패(솥뚜껑)를 이용해 왜구의 조총판을 막는 방법도 썼는데 이 사실을 명나라 모원의 병서<무비지>에 기록하고 좋은 방법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장군께서 패용한 검을 운검이라하는데 자루가 짧고 칼몸이 많이 굽은 형태의 예리한 칼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왜구의 패주로 전란이 끝나자 "고양이를 기르는 까닭은 쥐새끼를 잡기 위함이다. 지금 왜적이 평정되어 나는 할 일이 없으니 떠나도 되겠구나"하고는 수도의 술(方術)을 배우러 입산하였다. 이로 인해서 몸은 가벼워지고 건강해졌다. 오직 하루에 송화(松花) 한조각만 먹을뿐이었으니 이것은 대체로 연기법(嚥氣法) - 도가의 양생법(養生法)으로 기(氣)의 흡수연마로 건강을 공부법-을 배워 실천한 것이다. 선생께서는 문무의 학문을 크게 닦았으나 벼슬에 연연하지 않다가 왜적침입의 대란에서 분연히 먼저 일어나 국난극복에 이바지 하고 평화가 얻어지자 초연하게 고향에 살면서 입산하여 양생,수도하며 물과 바람을 벗하셨으니 어찌 신선이 아니겠는가, 기이한 바 셀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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