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19:14]
내 친척은 나를 버리며 가까운 친구는 나를 잊었구나...."
나의 형제들로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외인이 되었구나 내 친척은 나를 버리며 가까운 친구는 나를 잊었구나. - 여기 이른바 "형제들"이란 말은 혈연에 의한 형제들을 의미하지 않고 가까운 친구들을 가리켰을 것이다.
전날 욥의 행복한 시대에는 이들이 모두 가까운 친구들이었으나 ...지금 그의 곤고한 시절에는 모두 다 그를 저버린 것이다. 이런 친구들은 신의가 없는 자들이니 손우 해로운 친구 들이다.
그러므로 잠 18:24에 이런 친구를 많이 두는 일에 대하여 말하기를,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라고 하였다. 욥은 이렇게 친구들이 그를 멀리하는 괴로움의 원인까지도 하나님께 돌린다. 그것은 "떠나게 하시니"란 말이 알려준다.
이것이 그의 신앙사상이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1)그는 그 배신하는 친구들을 원망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다윗이 시므이로부터 저주를 받았을 때에 그 저주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고 생각하고 시므이를 원망하지 않았다
(2)욥의 그런 사상은 하나님을 원망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어드림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마 10:29).
능히 대답지는 못하여도 욥을 정죄함이라 - 유대의 서기관 학파의 전통에 따르면 여기서의 '욥'을 '하나님'으로 읽어야 합당하다. 이렇게 볼 때 엘리후가 친구들에게 화를 낸 이유는 '그들이 욥의 말에 능히 반박하지 못함으로써 도리어 하나님께 죄가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상황이 된 데 대해서'인 것이다.
그러나 비록 이런 대체가 문맥의 상황을 쉽게 이해하도록 이끌기는 하지만, 40:8에 따르면 하나님을 정죄한 일에 대하여 책망을 받는 자가 '친구들'이 아니라 '욥'이므로 인정하기 힘든 독법이다
한편 어떤 학자들은 '와우'의 용법에 초점을 두고 다른 해석을 제시한다. 즉 이 구절에서 '정죄함이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와야레시야우'의 '와우'를 설명형 '와우'로 보고, 엘리후가 세 친구들에게 화를 낸 것은 '그들이 욥의 범과를 증명할 만한 아무런 답변도 마련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전후 문맥이나 엘리후의 변론 내용의 성격 등을 미루어 볼 때, 여기서 엘리후가 노를 발한 것은 세 친구들이 욥을 적절하게 반박하지 못한 사실 자체 때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욥의 문제나 잘못을 바로 지적하지도 못하면서 오히려 무리한 언설만 늘어놓은 친구들의 단견과 편견 때문이라고 봄이 무난 하겠다
[히 6:10]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킨다.
고대에는 '이름'이 그 이름을 소유한 자의 전인격을 대표하는 것이었다.본서의 수신자들은 선행을 행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 즉 그의 전인격을 나타내는 사랑으로 성도들을 계속적으로 섬겼다.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수신자들의 행위를 기억하신다.
저자는 하나님의 공의와 수신자들의 행위를 근거로 앞절에 언급된 확신을 소유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수신자들의 선행이 그들의 구원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선행은 자신들의 믿음이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 고백되어지는 진실한 것임을 나타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