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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8일 [연중 제29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동행과 선교는 동의어
오늘은 선교 주일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라고 말합니다.
기쁜 소식을 지니고 있으니 그 사람은 기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보좌로 있을 때 저는 본당 신자 할머니에게 선교를 받았었습니다.
본당 보좌 신부를 알아보지 못하고 무조건 만나는 사람마다 성당에 다니라고 선교하시던 그분의 발은 지금 생각해도 아름다워 보입니다.
예전 분들은 어떻게 그렇게 선교가 몸에 배어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해야 할 소명 하나만 말하라면 그것은 선교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며 복음 선포의 소명을 주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시며 앞에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라고 하십니다.
복음선포를 위해 파견하시는 제자들 앞에서 왜 당신의 권한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이는 복음선포를 인간의 힘으로 하려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선교의 힘은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하십니다.
복음선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하여서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사제에게까지 선교하려고 하셨던 그분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계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동행하기를 허락만 한다면 주님께서는 저절로 우리를 통해 복음이 전해지게 하십니다.
얼마 전에 카이스트에 766억 원을 기부한 ‘이수영 회장’(83)이 화재였습니다.
이 회장은 처음에 기자로 활동하였었습니다.
1976년도에 그녀는 이탈리아로 관민 합동 경제사절단 수행 기자로 간 적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카메라는 아사히 펜탁스였고, 그때 자기 옆으로 일본 관광객들이 줄지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옷을 여며 카메라를 감추었습니다.
한국인이 일본 카메라를 써야만 하는 상황이 창피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한이 되어 한국 최초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게 해 달라고 카이스트에 재산을 기부한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기부할 생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부하게 된 사연이 재미있습니다.
이 회장은 기부한다고 하고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돈을 가지고 있는 즐거움을 최대한 누리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늦은 나이에 결혼하게 됩니다.
같은 서울대 법대 출신 첫사랑과 81세에 한 가정을 꾸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며 이 회장은 암을 앓게 되었습니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때에 신랑이 말을 했습니다.
“아니 왜 유증을 한다고 그러고서는 안 해?”
이 말에 더는 머뭇거려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이 회장은 TV에서 카이스트 총장이 연설하는 것을 듣고 바로 기부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기부는 이 회장이 한 것이고 이 회장의 돈으로 한 것이지만 그 결정을 내리도록 도와준 것은 신랑이었습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신랑이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것을 반대했다면 그것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우리 옆에서 선교하도록 우리를 부추기십니다.
그래서 이것이 그저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 자체가 선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선교하고 있다면 분명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며 힘을 주시는 것이고, 선교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계신 사랑의 법입니다.
선교만큼 큰 사랑은 없습니다.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을 구해주는 것은 밥을 굶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보다 훨씬 큰일입니다.
그러나 먼저 밥을 주어야 영원한 생명도 관심을 두게 합니다.
예수님과의 동행, 이것이 곧 선교입니다.
‘유퀴즈온더블럭’에 현대 사장보다 연봉이 높은 판매 영업부장이 소개되었습니다.
그의 연봉은 10억 2천 7백만 원입니다.
게다가 판매 실적에 따라 성과보수도 받습니다.
그는 17년 연속 우리나라 자동차의 판매왕을 차지하였습니다.
미국의 자동차 판매왕 조 지라드가 평생 13,001대를 팔았는데, 이분은 12,705대를 팔았습니다.
아직 50대 중반이 안 되었으니 이 기록은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분에게 특별한 판매 전략이 있느냐고 물으니 특별한 게 없다고 대답합니다.
누구나 다 쓰는 노트 정도입니다.
그런데 제가 본 것은 이분이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이렇게 충실하게 약속을 지키니 그 얼굴에 신뢰심이 발산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사람들은 이 사람의 언변이나 상술보다 그 얼굴에서 풍기는 것 때문에 더 신뢰하게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일을 준비하지 않았다면 그 신뢰가 얼굴에 나타날 수 있었을까요?
아마 그렇지 못했을 것입니다.
신뢰가 가는 삶이 모습에서 신뢰가 배어 나오게 만들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그를 믿고 차를 사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30년 가까이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났다면 그렇게 일어나도록 옆에서 부추기던 누군가와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이든, 신이든, 사람은 누군가와 함께할 때만
자신을 이기는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선교도 이래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다면 죄의 삶을 살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런 삶을 살다 보면 외모에서 신뢰가 풍기게 될 것이고
그러면 굳이 큰 노력을 하지 않아도 그 사람을 보며 주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당신을 거룩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내가 하느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 그 모습에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선교는 이렇게 멀리 나가기보다는 자신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서 예수님을 만나고 동행하려는 노력이 더 필요합니다.
이에 ‘동행’과 ‘선교’는 결국 같은 의미일 수밖에 없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18일 [연중 제29주일]
마태오 28장 16-20절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한 명의 선교사가 파견되면
가끔씩 해외선교를 꿈꾸는 형제들을 만납니다.
그럴 때 마다 “너무나 좋은 생각이다. 꼭 꿈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같이 노력하자.” 며 용기를 불어넣어줍니다.
얼마 전 이 세상의 가장 오지로 파견된 한 형제가 기억납니다.
이제야 막 사제로 서품된 형제입니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풋풋한 젊은이입니다.
가족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선교지에서 겪게 될 갖은 고초가 손에 잡힐 듯이 떠오릅니다.
물 설고 낯 설은 이국땅, 풍토병, 지독한 더위, 입에 댈 수조차 없는 음식, 외로움, 무엇보다도 끝까지 괴롭히는 언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를 쓰고 선교사를 지망합니다.
저희 입장에서도 사실 아깝습니다.
오랜 기간의 수도자 양성 끝에 이제야 ‘써먹을 사람’ 한 사람 생겼는데, 한 번도 써먹지 못하고 고스란히 넘기자니 허탈합니다.
그러나 ‘한명의 해외 선교사가 파견되면 열 명의 성소자가 들어온다.’는 말을 굳게 믿으며 아깝지만 기꺼이 파견합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해외선교사들로부터 너무나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분들의 헌신과 노고는 오늘 우리 교회의 소중한 밑거름이 된 것입니다.
한 형제가 해외로, 그것도 가장 낙후된 오지로 파견된다는 것,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한 형제의 마음 안에 선교사로서의 꿈이 생겨난다는 것,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선교사들이 오직 복음 때문에 이역만리 머나먼 땅에서 ‘쌩고생’들을 하고 계십니다.
복음의 힘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새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안정된 기반을 기꺼이 포기하게 하며, 불확실한 미지의 생활로 투신하게 하며, 결국 목숨까지 바치게 하는 복음의 매력이 참으로 대단합니다.
예수님의 권고를 따라 보다 많은 젊은이들의 마음 안에 선교사로서의 열망이 활활 불타오르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 땅에 오셔서 청춘은 물론 평생을 헌신하신 선교사들을 바라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가뭄에 콩 나듯이 고국에 한 번씩 들르시지만 워낙 오래전에 떠나왔기에 아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그쪽에서도 이방인입니다.
이 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이쪽에서도 어쩔 수 없는 이방인입니다.
어쩌면 그분들은 영원한 이방인, 영원한 타향살이를 계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 그들의 노고를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들의 사무치는 외로움을 다 보고 계실 것입니다.
그들의 복음을 향한 열정을 다 파악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수백 배, 수천 배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0월18일 [전교주일]
오늘은 전교주일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복음선포이다. 복음선포를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음화되어 하느님 안에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의 변화를 이룩하기로 하는 날이다. 더욱이 우리는 분단의 현실을 갖고 있다. 오늘, 이 미사를 통해 온 민족의 염원인 평화적 통일을 기원하는 민족 복음화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하겠다.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선교 2항). 선교야말로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확실한 이유임을 분명하게 천명한 선언이다. 이 선언으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선교 역사에서 길이 기억될 공의회로 남을 것이다. ‘본성상 선교해야 하는 교회’라는 말 안에는, 교회는 “믿지 않는 만백성의 빛이 되고 구원이 되기 위해 파견된 자”임을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 내포된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교회는 예수님과 열두 사도들의 복음선교 활동에서 생겨났고, 그 활동의 당연한 결과요, 그 활동이 원한 것이며, 그 활동에 가장 가까울 뿐만 아니라 그 활동에서 볼 수 있는 결과가 교회인 것”이다(현대의 복음선교 15항). 이처럼 교회는 예수님과 같은 사명 완수를 위해 예수께로부터 파견되는 것이며, 「떠나셨지만 머물러 계신」 예수님의 새로운 현존에 대한 명백한 표징으로 계속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같은 곳). 다시 말해서 교회는 성령의 인도 아래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 세상에서 계속 수행하기 위해 불린 것이다. 그리스도 파견의 연장(延長)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니 이것은 성부의 계획을 따라 교회가 성자의 파견과 성신의 파견에서 그 기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회는 성부의 구원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의해 파견되며, 궁극적으로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신 성부의 「원천적 사랑」을 파견의 최종 근거로서 인식하며, 마르지 않고 끊이지 않는 샘인 이 「원천적 사랑」에서 끊이지 않고 활력과 열성을 길어내는 것이다.
“선(善)은 자기 확산성(自己擴散性)을 지닌다.”(Bonum est diffusivum sui). “샘 같은(원천적)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이 끊임없이 자신(사랑)을 확산시켜 나가기를 바랄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왜 성부의 “원천적(샘 같은) 사랑”이 선교의 최종 근거가 될 수 있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지 않은가? 조금 더 들어보자. “선은 자기를 확산시킨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선하면 선할수록 자신을 더욱 확산시켜 나가야 마땅하다.
따라서 하느님은 선의 최상의 결과를 위해서 자신을 최대한으로 확산시켜야 했다. 그런데 하느님이 할 수 있는 선의 최상의 결과는 무엇일까? 인류의 구원사업이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최대한으로 쏟아 부으며 최상의 결과를 기대할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하느님의 자기확산>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자기확산인 선교는 <선=사랑=하느님>에 너무 잘 어울리고, “기원을 갖지 않으시는 기원”이신 성부의 사랑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귀속되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선교의 최종 근거는 결국 성부의 자기 확산적인 “분출적 사랑”에 귀착된다.
하느님은 만선의 근원이요 사랑 자체이시다. 지선(至善)하신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그 본성상 선과 사랑을 확산시키지 않을 수 없는 분이시다. 선과 사랑은 합일시키고 합성시키는 힘일 뿐 아니라 동시에 자신을 확산시키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최고선이요 최고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자기확산의 일환으로 하신 최상의 사업이 바로 “만민 구원”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만민 구원”은 하느님의 “샘 같은(원천적) 사랑”에서 나오고, 하느님은 당신 사업의 성취를 위하여 최고의 방법으로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시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의 파견이 이루어지고, 이로써 하느님은 ‘선교하는 하느님’이 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라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확산시키는 일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하느님을 우리와 같이 아버지로 부를 수 있도록 확산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한 형제요, 자매로서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복음: 마태 28,16-20: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라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갈릴래아에 나타나셔서 만민에게 세례를 베풀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도록 가르침으로써 만민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하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세상 끝까지 교회 공동체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구약에서 야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셨듯이, 이제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느님의 새 백성인 교회 공동체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임마누엘”(1,23)이시다. 그러기에 교회는 모든 민족들을 주님의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 우리가 처한 위치에서 자기 자신의 본분과 책임, 의무를 다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이 시기는 그것이 더 필요한 때이다. 특히 오늘 우리의 삶과 신앙의 현주소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며 복음화의 소명을 새롭게 하도록 하자. 이러한 모든 은총을 주님께 구하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