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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겉으로는 주님과 가장 가까이 있지만, 실제로는...
오늘 예수님께서는 두번째 수난 예고를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마르 9,31)
당신 입으로 직접 수난과 죽음을 예고를 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묵상해봅니다. 예견되는 끔찍한 상황이 눈앞에 떠올라 마음이 엄청 산란하셨을 것입니다.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다고까지 말씀하실 정도로 두려우셨습니다.
이런 스승님의 마음과는 달리 제자단의 반응은 한심할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스승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해 질문하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그간 자신들이 꿈꿔왔고 상상해왔던 길이 아니었기에 때문에 일부러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추구하고 있는 왕국과 제자들이 기대하고 있는 왕국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하나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보이고있는 극단적 미성숙과 스승님의 정체와 사명에 대한 몰이해는 점점 커져만 갑니다. 카파르나움에 위치한 베드로와 안드레아의 집에 도착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을 하였느냐?” 앞서 걸으시던 예수님께서 뒤따라오던 제자단의 분위기를 눈치채셨던 것입니다. 계속 티격태격하며 뒤따라오던 제자들의 대화를 가만히 들어보니, 예수님 당신 얼굴이 다 화끈거릴 정도였습니다.
제자들은 부끄럽게도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 하는 문제로 길에서 한바탕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노상에서 서열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주님과 동고동락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 대목은 교회 깊숙한 곳으로 들어와 봉사하는 성직자 수도자들이 깊이 성찰해야 할 부분입니다.
매일 교회 안에 머물면서, 매일 거룩한 성찬례를 거행하면서, 겉으로는 주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정작 마음과 정성이 없기에, 그저 타성과 매너리즘에 빠져있기에 가장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은가 진지하게 돌아봐야하겠습니다.
제자들은 부지런히 스승님을 따라가고 있었지만, 허깨비같은 몸만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정신과 영혼을 전혀 따라가고 있지 않았습니다. 말로만 제자, 무늬만 제자였던 것입니다.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마음이 심란해진 예수님이신데, 그래서 이미 두 번씩이나 제자들에게 수난 예고를 하셨는데, 그렇다면 스승님이 걸어가실 그 길이 어떤 길인지에 대해 함께 진지하고 숙고하고 고민할 법도 한데, 제자들은 스승님의 수난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일말의 양심이 있는 제자라면 스승님이 겪고 계신 고뇌에 조금이라도 참여하기 위해 노력할텐데, 그래서 스승님을 따뜻한 말로라도 위로해드리고자 노력할텐데, 제자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누가 큰 사람인가? 스승님의 나라가 서면 누가 오른쪽 왼쪽에 앉을 것인가에만 관심이 가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갈길이 까마득한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절대로 굽힐 수 없으며, 어쩔 수 없는 당신의 운명과 사명, 핵심 사상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코, 9,35)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진정한 부자는 가난한 자를 멸시하지 않는다
히틀러는 채식주의자이자 동물보호법의 창시자이며, 동시에 세계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600만 유태인을 학살한 사람입니다. 이 두 개의 아이러니한 심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히틀러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을까요, 아니면 악한 사람이었을까요? 악한 사람이 어떻게 동물을 보호하는 법까지 만들었을까요?
그렇지만 사람을 판단할 때 짐승이나 물건을 사랑하는 것을 보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그것들에 자신의 처지를 투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꼈던 사람은 커서 물건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구 쌓아놓습니다.
금쪽 상담소에 ‘김창훈’ 씨가 나왔습니다. 저장 강박증이 있고 아이를 지나치게 보호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5남매를 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김창훈 씨를 바빠서 보호해 줄 수가 없어서 4년을 맞으며 학교에 다녀야 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보호를 못 해줄 거라면 낳지를 말지!”
결국 물건이나 동물은 사랑받지 못한 자신의 처지와 같아서, 자기연민으로 사랑하는 것이지 동물이 진정으로 좋아서 사랑하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사랑의 정도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같은 인간 중에 보잘것없는 사람을 대하는 것을 보면 됩니다.
영화 ‘베테랑’에서 보면 재벌 2세가 가난한 사람을 핍박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러나 진정한 부자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 가난한 사람이 자신과 경쟁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런다면 아직 그는 부자가 아닙니다. 자신이 부자라고 느끼는 사람은 그럴 수 없습니다.
재벌 2세 조태오는 밀린 임금 420만 원 때문에 1인 시위를 하는 아버지를 자기 사무실로 불러올린 다음 아버지가 구타당하는 모습을 자식이 보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는 회사 이미지를 위해서는 환자들에게 잘 대해주는 모습도 보여줍니다.
수천억 자산가인 김승호 씨는 우리나라 사업가 중 어떤 사람들은 식당에 갔을 때 종업원들을 막 대하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상대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선을 긋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직 부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에겐 아직도 식당 종업원이 자신의 지위를 올리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돈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도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서로 높아지려는 제자들을 나무라십니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만약 내가 진정한 어른이 되었다면 모든 어린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아기가 자신이 받은 은혜를 힘입는다면 자신처럼 될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동시에 아이들을 낳은 부모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모든 인간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길입니다.
그러니 모든 인간을 사랑하려면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면 시각이 바뀝니다. 애벌레일 때는 나보다 못한 이들을 괄시하고 무시합니다. 자신보다 나은 애벌레가 있다면 그와 결탁합니다. 그래야 자기가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나비가 되면 자비의 눈으로 애벌레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애벌레들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눈이 사라집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 사이에 여러 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욕정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욕정이 욕심이 되고 그 욕심이 경쟁하게 하고 다투게 합니다. 따라서 아직 애벌레의 욕정이 남아있다면 그 사람은 나비가 되게 창조하신 하느님의 적이 됩니다.
“절개 없는 자들이여, 세상과 우애를 쌓는 것이 하느님과 적의를 쌓는 것임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자는 하느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삶은 이렇게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매우 교만한 부잣집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거지를 만나 자비심을 느끼며 그 삶이 그들을 무시하며 살 때보다 더 행복함을 알고 그들을 더 사랑하는 방향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구걸하는 거지를 무시한 게 마음에 걸려 그에게 가진 돈을 다 주었는데 참 평화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다시 태어난 성 프란치스코는 이제 작은 이들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사랑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람으로서 가장 작은 사람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9,30-37: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리라 말씀하신다(31절).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두 번째 들었으나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스승님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분의 죽음으로부터 크나큰 은총이 오리라는 것도 알지를 못했다. 그들은 부활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러니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수난을 앞둔 스승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알지도 못하고 길에서 그들 가운데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 하고 서로 다투었다(34절). 예수께서는 당신의 삶이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이었고 당신의 죽음이 인류의 죄를 대신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신 분으로 아직도 당신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제자들에게 참된 봉사의 자세를 가르치신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35절) 예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름을 받아 신앙인이 된 이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많은 사람 가운데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초대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기 위해 초대되었다. 이 길이 십자가의 길이며, 이 길을 위해 우리가 초대받았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바로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는 사람들이며,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들이어야 하는데, 제자들처럼 부르심의 의미를 망각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섬기기 위한 봉사직무에 초대받은 사람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교회에서는 지위가 올라갈수록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봉사자와 지도자들은 사랑의 봉사를 통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여야 한다는 것을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지금 내가 하는 일들 모두가 바로 더욱 많은 사람을 위하여 섬기고 봉사하도록 초대하는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많은 사람 가운데 선택된 것은 많은 사람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십자가의 길에로의 초대이며 부활의 영광에로의 초대이다. 우리가 갖는 지위는 우위 다툼이나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봉사하기 위한 것이며, 이웃을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다. 이런 봉사의 삶을 통하여 우리는 많은 사람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사랑해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모두 서로를 그리스 안에서 만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하나가 된 모습 일치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신부님, 신부님 본당 아이가 그린 그림을 주보에서 보셨어요?”
제게 많은 분이 이러한 SNS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무슨 말인가 싶어서 주보를 보니까 교구 주보에 어린이들의 그림이 올라와 있는 것입니다. 그중 두 개의 그림이 우리 본당 아이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의 그림에 저로 보이는 얼굴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서 많은 분이 제게 연락하셨던 것입니다. 기분이 좋았을까요? 아니면 나빴을까요?
솔직히 부담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그림의 주제 때문입니다. 그림 주제가 ‘내가 만난 예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이 그림 속의 인물과 제가 똑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저를 그리면서 예수님을 생각했던 것일까요? 이 점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저 스스로 너무나도 부족하고 나약한 죄 많은 인간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닮겠다고 신학교에 들어가면서 다짐했지만, 지금도 이 사실에 대해서는 부끄러운 마음입니다. 그런데 한 아이의 눈에 저를 이렇게 봐주더니 어떻게 부담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이들 눈에서는 신부를 모두 예수님처럼, 수녀를 모두 성모님처럼 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큰 책임감을 느끼게 됩니다. 함부로 사는 삶이 아닌, 예수님 닮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닮는 삶은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삶이 아닙니다. 고통과 시련을 두려워하면서 하느님의 일을 피하는 삶도 아닙니다. 그런데 고통과 시련은 내게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부활이란 커다란 영광입니다. 이 부활을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그 전에 겪어야 할 수난과 죽음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 더 자세히 물어보지도 못하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또한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 논쟁까지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가장 낮은 위치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가장 높은 자리만을 탐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닮는 삶은 어떤 순간에서도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처럼 낮은 사람 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즉,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 닮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자기를 통해 다른 이에게 예수님을 보여줄 수 있는 겸손한 삶,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걱정이랑 모두 낡은 가방에 넣어 버리고 이제 웃어라, 웃어라!(조지 에세프)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9,17)
주님의 이름으로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낮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주님으로 여기며
받아들인다는 뜻이라네.
그것은
늘
다른 사람들의 뒤에 설 줄 아는
겸손과 용기이며
사랑이라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를 놓고 논쟁하는 모습은
오늘날 자신의 기득권을 놓고 싸우거나
권력과 명예를 위해 살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다가옵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누가 더 높은 사람인지는
세상에서는 중요하게 생각하겠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그닥 중요하지 않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보이지 않습니다.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잘 보입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은 그래서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전체를 봤으면 구석구석 봐야지요...
신학생 때 처음으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22살 청년은
창밖을 보면서 그런 깨달음이 왔습니다.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이 더 잘 보입니다.
낮은 곳에서만 깨달을 수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높은 곳에 계신 분이 아니라
바로 세상 한가운데
민초들과 함게 저 세상 아래에 계신다는 것을...
복음 말씀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30-37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30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31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35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36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37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