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비에 새잎 나거든
홍랑의 불원천리 지순고절 기려…
사후에 부부의 연 맺어주다
최경창 부부 묘와 홍랑 묘 아래에 있는 고죽 최경창 시비(파주시 교하읍 다율리). 홍랑의 한글 시를 최경창이 한문으로 번역한 ‘번방곡’과 그 시에 대한 사연이 한문으로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홍랑의 시가 새겨져 있다.
홍랑 받아들인 최씨 문중
최경창 부부 합장묘 밑에
무덤 만들고 묘비도 세워
후손들 해마다 제사 올려
홍랑은 태어난 시기가 분명하지 않은 것처럼 죽은 시기 또한 알려진 바가 없지만, 최경창의 유품을 전한 후 최경창 무덤 아래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보인다.
홍랑이 죽자 해주최씨 문중은 그녀를 가문의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로 하고, 그녀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지내주었다. 시신은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밑에 묻고 무덤을 만들었다. 홍랑과 최경창 사이에는 아들 하나가 있었다 한다.
1969년에는 해주최씨 문중이 그녀의 묘 앞에 묘비 ‘시인홍랑지묘(詩人洪娘之墓)’를 세웠다.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청석초등학교 북편 산자락에 있는 해주최씨의 문중 묘역에 최경창 부부의 묘소와 그녀의 무덤이 있다.
다음은 그녀의 묘비명에 새겨진 글 일부다.
‘홍랑(洪娘)은 선묘(宣廟) 관북인(關北人)으로 기적(妓籍)에 올라 행적(行蹟) 밝혀 전(傳)하는 바 없으나 출상(出象)한 재화(才華)로서 선조(先祖) 고죽최공(孤竹崔公) 휘(諱) 경창(慶昌)의 풍류반려(風流伴侶)로 기록되어 있고, 그의 절창(絶唱)인 시조 1수가 오직 청아(淸雅)와 정숙(貞淑)을 담아 주옥(珠玉)으로 전(傳)할 따름이라. 공이 북평사(北評事) 퇴임하실 제 낭(娘)이 석별(惜別)하여 바친 글월을 한역(漢譯)하여 번방곡(飜方曲)을 읊으시니 격조 높은 쌍벽(雙璧)으로 세전(世傳)하여 홍랑(洪娘)의 문명(文名) 시사(詩史)에 빛나니라. <중략>
고죽공(孤竹公) 관북(關北)에 유(留)하실 새 낭(娘)은 막하(幕下)에서 조석으로 모시었고, 환경(還京) 3년 후 요환(療患)하신다는 전언(傳言) 듣고 범계(犯界)하여 불원천리(不遠千里) 7일 만에 상경(上京) 시양(侍養)했다 하며, 후일(後日) 공이 종성부사(鍾城府使)로 재위(在位) 중 경성(鏡城) 객관(客館)에서 돌아가시매 영구(靈柩) 따라 상경(上京)하여 공근시묘(恭謹侍墓)하니 지순고절(至純孤節) 인품(人品)을 가(可)히 알리라.’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다율리 해주최씨 선산에는 매년 가을이면 조상들의 음덕을 기리는 가을 묘제가 진행된다. 이 최경창 부부 합장묘에 제사를 지낸 후 홍랑의 묘에서도 제사를 지낸다. 축문(祝文)이 없이 지내고 술은 단잔으로 끝낸다고 한다.
해주최씨 선산은 본래 다율리 근처의 월롱면 영태리에 있었으나, 1969년 영태리를 군용지로 수용하면서 지금 자리로 이장하게 된 것이다.
묘를 이장할 당시 홍랑의 무덤에서 옥으로 된 목걸이, 반지, 귀고리, 옷 등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전하나 최씨 집안에 그 유물은 없다고 한다.
명나라 학사도 감탄한 詩才…글씨·활쏘기·악기에도 능해
■ 文武樂 겸비했던 최경창
최경창 초상화
최경창(1539∼1583)은 문헌공(文憲公) 최충의 후손이다. 영암 출생이다. 타고난 자질이 호방하고 뛰어난 데다가 풍채가 좋아서 보는 사람들이 마치 신선같다고 하기도 했다. 그는 옥봉(玉峯) 백광훈(1537~1582)과 더불어 송천(松川) 양응정(1519∼1581) 등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약관의 나이도 안 되어 율곡 이이, 귀봉 송익필, 동고 최립 등과 같이 서울 무이동(武夷洞)에서 시를 주고받았는데 사람들이 ‘팔문장계’라고 불렀다.
23세에 태학에 들어가고 1568년에 대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북평사(北評事), 예조좌랑(禮曹佐郞), 병조좌랑(兵曹佐郞),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역임했다.
최경창은 기개가 호방하여 공명을 탐탁하지 않게 여겼다. 청렴과 고귀로 자신을 가다듬어 세상과 영합하지 않았으므로, 아부하며 벼슬에 급급한 사람들과 가까이하면 자신을 더럽힐 것처럼 여겼다. 평소 당시의 재상 이산해와 서로 사이가 좋았는데, 나중에 그의 마음가짐이 공평하지 않은 것을 보고 왕래를 끊어버렸다.
1582년 봄에 선조 임금이 특별히 종성부사에 임명하였을 때 대간(臺諫)이 ‘너무나 빨리 승진했다’고 논하였으나 선조가 따르지 않았으므로 부임했다. 그때 마침 북방을 맡은 장수가 참소를 듣고 장계를 올려 ‘공이 군정(軍政)을 닦지 않는다’고 보고해 대간의 논의가 다시 제기되고 직강(直講)에 임명했다. 부임 도중에 경성의 객관에서 세상을 떠났다. 1583년 3월이다.
최경창은 시에 대해 타고난 재주가 매우 뛰어났는데, 문장가들은 ‘조선조 이래로 그러한 사람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글씨와 활쏘기도 잘했다. 필체는 청고하고 강경하여 옥봉(玉峯)과 막상막하였다.
또 거문고와 피리에도 아주 뛰어났다. 젊었을 때 영암에서 살고 있을 때, 왜구가 갑자기 들이닥쳐 배를 타고 피하려고 하니 왜구가 급하게 포위했다. 그때 달빛은 대낮처럼 밝고 파도도 일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최경창이 옥퉁소를 꺼내 낭랑하게 한 곡을 불었는데 소리가 매우 맑았다. 왜구의 무리가 그 소리를 듣고 모두 고향 생각이 나 서로 돌아보며 “여기 포위 속에 반드시 신인(神人)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한쪽의 포위를 풀어주었으므로 최경창이 탈출하여 돌아올 수 있었다.
명나라 학사 주난우가 조서를 받들고 우리나라에 와서 최경창의 시를 보고는 극구 감탄하며 “돌아가면 마땅히 강남(江南)에 퍼뜨려 귀국의 문물이 융성함을 드러내야 하겠다”고 말했다.
그의 시를 몇 수 소개한다.
<감흥(感興)>
약초 캐 먹으면 오래 산다는데
(採藥求長生)
나는 어찌해야 하나(何如孤竹子)
서산의 고사리 캐어먹고(一食西山薇)
맑은 바람 속에 사는 게 불사약이네
(淸風猶不死)
<고묘(古墓)>
옛 무덤에 제사 지내는 사람 없고
(古墓無人祭)
소와 양이 밟아 길이 났네(牛羊踏成道)
해마다 들판에 불을 지르니(年年野火燒)
무덤 위에는 풀도 없구나(墓上無餘草)
<스님에게(寄僧)>
가을 산에 사람은 병들어 누워 있고
(秋山人臥病)
산길에는 낙엽만 수북이 덮였네
(落葉覆行逕)
문득 서쪽 암자의 스님을 생각하니
(忽憶西菴僧)
멀리서 풍경 소리 들려오네(遙聞日暮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