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게 공히 '해상 관문'인 흑해 쟁패전(爭霸戰)이 치열하다. 우크라이나 곡물의 흑해 수출을 보장해준 소위 '흑해 곡물 협정'이 러시아 측에 의해 파기된 뒤 나타난 현상이다. 우크라이나 전선이 흑해로 확대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시작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흑해 항구 공습이다. 우크라이나산 곡물의 흑해 수출로를 막기 위해 러시아는 흑해 항만 기반시설을 공습하고, 흑해항 봉쇄를 선언했다. 지난 1년간 우크라이나산 곡물 선적에 나섰던 민간 상선들이 어쩔 수 없이 흑해로의 발길을 끊었다.
러시아의 흑해 봉쇄후 우크라이나 항구로 향하는 선박을 찾아볼 수 없다. 오른쪽은 크림반도, 선박 흐름이 몰린 왼쪽은 루마니아 항구다/사진출처:스트라나.ua
우크라이나로서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상황. 비록 파괴 효과가 미사일보다는 떨어지지만, 나름 강력한 폭발물을 적재한 수상 드론을 흑해에 띄워, 흑해 항로를 오가는 러시아 전함과 유조선에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상호 보복전의 체인'이 풀린 것이다(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 6일자).
우크라이나가 수상 드론 공격으로 노리는 것은 크게 2가지다. '우리도 살아 있다'는 군사적 심리전 측면과 러시아의 흑해 물동량을 줄이려는 경제적 측면이다.
우크라이나는 지난 3일 흑해의 러시아 원유 수출항인 노보로시스크 인근 해역에서 러시아 상선 '스파르타 IV'를 호위하는 순찰선 ‘올레네고르스키 고르냐크’를 향해, 4일에는 크림반도와 러시아 본토를 잇는 크림대교 인근에서 러시아 유조선 SIG을 향해 수상 드론 공격을 가했다. 두 선박 모두 적지 않는 타격을 입은 것으로 전해졌다.
뒤이어 러시아 항구 6곳을 '위험 지역'으로 선포하는 한편, 6일에는 우크라이나 남부 헤르손주(州)와 크림반도를 잇는 '촌가르 다리'를 영국산 장거리 미사일 '스톰 섀도'로 또다시 공격했다.
우크라이나 수상 드론에 피격된 러시아 전함이 견인되는 모습(위)와 피격 순간 영상/텔레그램 영상 캡처
미 CNN은 우크라이나의 이같은 공격을 '군사적 심리전'의 일환으로 분석했다. 모스크바 도심과 흑해를 겨냥한 드론공격은 러시아인들에게 '전쟁이 딴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코앞에 닥친 현실'이라는 불안감을 심어주고, 나아가 '반푸틴', '전쟁 반대'의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그 효과에 대해서는 자신할 수 없다고 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러시아의 흑해 보급로를 차단하는 효과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영국 정보국은 9일 트위트를 통해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 흑해 보급로의 가장 약한 고리를 겨냥하고 있다"며 "적 선박에 대한 드론 공격은 현대 해전에서 점점 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스트라나.ua는 9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선박을 공격한 후, 유가와 곡물 가격이 상승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며 "흑해에서는 '경제 게임'이 펼쳐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러시아 석유 수출의 20%, 곡물 수출의 70%가 흑해를 통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흑해 게임'에 대한 전망은 엇갈린다. 러시아의 흑해 화물 운송량이 줄어들고, 이미 화물 운송 가격이 상승했다는 분석이 있는가 하면, 우크라이나 항구에 대한 러시아의 공습과 같은, 세계 곡물및 원유가 상승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다른 점은 흑해 항구가 막히더라도 '대안 루트'가 확실하게 있다는 사실이다. 러시아의 수출 물량에는 치명적인 타격이 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공격을 받은 노보로시스크 항을 통해 원유를 수출하는 카자흐스탄이 직접적인 피해국가가 될 전망이다.
그러나 카자흐스탄 측도 수출 물량 감소에 따른 국제 유가 상승으로 원유 수입 목표는 어느 정도 맞출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차 피해자는 바이든 미 대통령이다. 러시아 항구와 유조선에 대한 우크라이나 드론 공격이 내년 대선을 앞두고 기름 값 급등을 막으려는 그의 노력을 무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유동치는 물결:흑해는 어떻게 전쟁의 핫한 지역이 됐나?는 제목의 NYT 기사/캡처
국제 유가 상승은 불가피한 흐름으로 분석되고 있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미 뉴욕 타임스(NYT)는 8일 우크라이나의 '흑해 게임'으로 국제 유가가 크게 상승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의 감산으로 원유 공급량이 이미 어느 정도 줄어든 상태에서, 흑해를 통한 카자흐스탄 원유 수출까지 막히면, 유가가 배럴당 10~15달러 오를 수 있다고 데이비드 골드윈 전 국무부 에너지 담당이 NYT에게 말했다.
앞으로의 문제는 우크라이나가 계속 러시아 유조선을 공격할 것이냐 여부다. 그럴 경우, 가뜩이나 긴축되고 있는 에너지 시장을 더욱 고갈시킬 것이라고 NYT 측은 전망했다.
러시아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흑해 항구를 통한 식량 수출이다. 하지만, 이 역시 다른 항구로 수출 물량을 이전하고, 그에 따른 운송 비용의 상승은 국제 곡물가격의 상승으로 부분적으로 상쇄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우크라이나산 곡물 운송 선박/현지매체 영상 캡처
'흑해 게임'에서 주목할 것은 튀르키예(터키) 변수다.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평화를 위한 국제회의(제다 평화 회의) 이후 흑해 곡물 거래 재개를 위한 '플랜 B'를 내놨다. 이미 폐기된 '흑해 곡물 협정'과는 확연히 차이가 있다. 서방측에 러시아의 요구사항, 즉 러시아 농업은행의 국제결제시스템(스위프트, SWIFT 연결과 우크라이나 관통 암모니아 가스관 재개, 러시아 선박에 대한 서방 보험회사의 제재 완화 등을 요구했다. 우크라-서방측에도 상당한 양보를 촉구한 것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8월 중에 푸틴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고 거듭 제안했다. 그가 푸틴 대통령과 만나 '흑해 곡물 거래'의 재개를 이끌어낼 지 여부는 향후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에 대한 타협점을 찾는 선도적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스트라나.ua는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