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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7. 묵상글 (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 모순의 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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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7.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모순의 나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모순 1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모순적이고 합리화하는 저를 발견합니다.
조금 봉헌하는 저도 주님께서는 칭찬하실 거라고 하면서
저는 장학금에 성금을 조금 내는 것보다 많이 내는 것을 반깁니다.
그러다가 오늘 복음을 생각하며 그런 저를 부끄러워하고 반성하며,
즉시 적은 성금에도 그것을 크게 감사하기로 마음을 바꿉니다.
모순 2
그런데 이것보다 더 부끄러운 모순이 제게 있습니다.
주님께서 많은 돈을 봉헌하는 부자들보다
적은 돈을 봉헌하는 과부를 칭찬하시는데
그것을 보고 저는 위안을 받고 안심도 합니다.
적게 봉헌하는 저도 나무라지 않고 칭찬하실 거라는 생각 때문이지요.
그런데 저는 적게 낼 뿐 과부처럼 전부를 봉헌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전부를 봉헌하지 않는 저에 대해서는 살짝 눈을 감고,
조금 봉헌하는 저만 합리화하는 데 과부를 끌어들이는 셈입니다.
이런 저에게 성 프란치스코는 형제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께서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에게 남겨 두지 마십시오.”
전부를 주시는 분에게 과부처럼 전부를 봉헌하는가?
전부를 바치는 분에게 프란치스코의 권고처럼 전부를 바치는가?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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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7.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궁핍한 가운데에서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4)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신심 깊은 가난한 과부를 만납니다. 그는 비록 렙톤 두 닢을 예물로 바쳤지만, 그것은 자신이 가진 전부였습니다. 그것은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작정으로 마지막 빵을 만들면서도 엘리야에게 바쳤던 사렙다의 과부(1열왕 17,12)처럼.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일이었습니다.
이토록, 전부를 예물로 바침은 주님께 대한 전적인 내맡김이요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진정한 마음을 바치는 표현이요, 자신보다 주님을 앞세우는 표시였습니다. 마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여관으로 데려가서 여관 주인에게 그 사람을 돌봐달라고 내놓은 그 값진 두 데나리온과 같을 것입니다(루카 10,35).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많은 양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중히 여기고, 무엇을 앞세워야하는 지를 말해줍니다. 곧 봉헌은 자신의 계산에 따라 다 쓰고 남은 조각을 ‘나중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먼저’ 바치는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과부의 딱한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곧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진 전부를 ‘맨 먼저’ 앞세워 바쳤던 것입니다.
대체 무엇이 이토록, 그녀로 하여금 그의 전부를 바치게 하였을까?
그것은 소중하고 귀한 분을 만난 까닭이 아닐까요? 전부를 건네주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주군이신 분을 만난 까닭이 아닐까요? 바로 그러한 분을 만나면, 자신의 전부를 바치지 않고는 못 배겨나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그 소중하고 귀한 분을 이미 만났습니다. 그러니 여기 이 자리에 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을 향한 사랑이 더 깊어 가는지, 혹은 퇴색되거나 변하지는 않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전부를 바쳐 그분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가난하면서도 전 재산을 봉헌한 이 “과부”에 대해서, “교회를 나타내는 신비로운 표상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전부를 산 제물로 바쳐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오늘, 저는 이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통하여, 나의 삶이 무엇을 우선하고 무엇을 앞세우는 삶인지를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진정, 무엇을 바치고 있는지, 혹은 전부를 바치고 있는지를 봅니다. 나는 오늘 무엇을 봉헌할 수 있을까요? 대체 무엇을 봉헌해야 할까요?
주님!
저는 온 마음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섬기지 않았고,
온 시간과 열정을 다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보다 제 자신을 앞세우며 살아왔습니다.
기도하면서도 마음을 다하지 않았고, 먼저 바치기보다 나중에 바쳤습니다.
당신이 저의 전부이오니, 이제는 저의 전부를 바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궁핍한 가운데에서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4)
주님!
온 마음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섬기지 않았고
온 시간과 열정을 다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보다 제 자신을 앞세우며 살아왔습니다.
기도하면서도 마음을 다하지 않았고, 먼저 바치기보다 나중에 바쳤습니다.
당신은 저의 전부이오니, 저의 전부를 바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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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7.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을 헤아리시는 예수님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자!’고 말하면서도 자주 비교하게 됩니다. 본당 사목을 하면서도 전임 본당과 견주게 됩니다. 추수 감사미사를 봉헌하면서 본당 규모가 큰 것에 비하면 감사예물과 곡식이 적게 봉헌되었다고 생각하며 서운해한 적이 있습니다.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준비하지 못하고, 믿음을 성장 시켜드리지 못했으면서 말입니다. 예물에 매이지 않고 믿음에 마음의 중심을 둘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어린 시절을 생각해 봅니다. 명절이 되면 기대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삼촌이나 누나로부터 용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기쁨 중의 하나였습니다. 처음에는 그 액수가 많고 적음에 관계하지 않고 그저 받는 것이 좋았습니다. 때로는 돌아서서 액수를 헤아리며 ‘에게, 요것밖에 안돼!’하며 실망하기도 했습니다. 받을 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인데 속마음은 욕심이 가득했습니다. 받는 것도 익숙해지면 결국 감사함도 잊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빈곤한 과부를 칭찬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생활비 전체를 예물로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부자들은 풍족한 데에서 일부만을 바쳤습니다. 부자가 바친 예물은 가난한 이의 것에, 비하면 훨씬 많은 금액이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시고 가난한 과부의 마음을 헤아리셨습니다. 먼 훗날 잘 되면 크게 돕겠다는 마음은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 할 수 있는 만큼 한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돈의 액수보다 마음을 헤아리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정성보다 돈의 액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의 잣대로 판단합니다. 제 모습이 꼭 그랬습니다.
오래전 일입니다. 수녀원과 교육관 건축 기금을 모으면서 나름대로 모금 액수를 정하고 아무개는 얼마, 아무개는 이 정도는 해 주겠지! 하며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 그들을 바라보는 제 마음이 힘이 들었습니다. 정성을 보고, 마음을 보아야 하는데 돈의 액수로 사람을 보았습니다. 저도 별수 없었습니다. 물질에 약한 저를 보며 다짐했습니다. 돈 이야기를 많이 하지 말자! 물질의 봉헌을 억지로 한다면 아무리 많은 액수를 낸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믿음이 성장하면 모두가 주님 것이니 믿음을 키우는 것에 마음을 두자. 믿음의 성장에…그러고는 비로소 자유로워졌습니다. 속마음을 헤아리시는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물질보다 주님을 선택하는 지혜로 모두를 차지하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도둑의 뉘우침
한 성직자가 물건을 훔쳐 나가는 도둑을 붙잡았습니다. 그에게 “도둑질하는 것은 인생에 오점을 남기는 것입니다. 순간의 잘못으로 큰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도둑은 깊이 반성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네 맞아요, 물건을 훔쳐 나오면서 발자국을 닦지 않았어요. 바로 가서 닦아야 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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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7.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선배들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나이를 먹으면 입은 적게 열고, 지갑은 자주 열어야 한다.” 어찌하다 보니 제가 선배들이 말한 나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적당히 지갑은 열수 있을 만큼 채워주심에 감사할 뿐입니다. 신문사의 구독신청서를 보내주는 봉사자들과 식사가 있었습니다. 칠레와 호주에서 온 신부님들과의 식사도 있었습니다. 멕시코에서 온 신부님과의 모임도 있었습니다. 기분 좋게 지갑을 열었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청지기의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지금은 고인이 되신 아버지 신부님께서는 제가 첫 본당의 본당신부가 되었을 때 찾아오셨습니다. 임진강에는 매운탕이 맛있다고 하시면서 찾아오셨습니다. 아들 사제가 잘 지낼 수 있도록 먼 길을 오셨고 좋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가시는 길에 제게 ‘용돈’을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온 가난한 과부처럼 저도 과하지는 않지만 가능하면 기쁜 마음으로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다니엘, 아나니야, 미사엘, 아자르야’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맛있는 음식과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야채와 물만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살도 찌고, 건강하게 보였습니다.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난한 과부는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습니다. 비록 삶이 힘들고 어려웠지만 주님의 제단에 정성껏 봉헌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적인 사랑입니다.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도 하는 사랑입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의 것을 나누는 사랑입니다. 재물과 시간과 능력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내어 놓는 사랑입니다. 신앙인은 바로 두 번째의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려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그 길이 힘들어도 우리는 아낌없이 주는 사랑을 하셨던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지난 10월에 꾸르실료 체험 봉사를 다녀왔습니다. 체험자들과 함께 기도를 하면서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체험을 하시는 분들이 가난하지만 정성껏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저는 말로는 봉사를 한다고 하지만 위선과 가식에 가득찬 생활을 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난한 과부는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습니다. 비록 삶이 힘들고 어려웠지만 주님의 제단에 정성껏 봉헌을 했기 때문입니다. 나눔과 봉헌은 많이 가져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로 향한 마음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 재물, 학식, 직업이 아닙니다. 능력, 재물, 학식, 직업은 우리의 인격을 감싸주는 옷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겉모습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 마음을 이웃과 세상을 향해 나누는 우리들의 정성을 보십니다.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는 월요일입니다. 일주일은 168시간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간, 이웃을 사랑하는 시간,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16시간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사용한다면 그것이 바로 신앙의 십일조입니다. 예전에 선배신부님께서 ‘인생은 흑자’라는 강론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순간을 살아도 우리 인생은 흑자라는 신부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합니다. 걱정과 근심, 두려움과 절망은 모두 날려버리고, 희망의 날개를 펴고 주님께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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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7.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가끔 봉헌 성가로 부르는 성가가 있습니다. 그 성가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 없이 바치네…. 주께 드리네, 주께 드리네, 사랑하는 내주 앞에 모두 드리네….
그러고는 지갑을 열어 갈등하기 시작합니다. 노래는 그렇게 했는데 어찌해야 할지 고민에 빠집니다.
이 이야기는 저의 이야기입니다. 다른 누구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것을 바친다고 말해놓고, 기도는 그렇게 해 놓고 정작 그 앞에 서면 주저했던 저의 옛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렙톤 두 닢을 넣는 과부를 보시고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맞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넣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모두 봉헌했기 때문입니다.
이 자체로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돈은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의 삶을 생각지 않고 모든 것을 봉헌하기는 쉬운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도 가진 것을 모두 봉헌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렙톤 두 닢을 모두 넣었던 과부의 믿음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든 것을 봉헌한 그 여인의 믿음에 하느님께서는 화답하셨을까요? 아니면 모른 척하셨을까요? 그녀에게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을까요? 나쁜 것을 주셨을까요?
우리가 생각한 대로일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그대로일 것입니다. 그 후의 일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녀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충만히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배우고 묵상해야 하는 부분은 이것입니다. 모든 것을 내어 맡길 수 있는 믿음 말입니다.
주께 드리네, 주께 드리네, 사랑하는 내 주 앞에 모두 드리네….
배추전
달달한 배추가 나오는 시기입니다.
겉은 푸른 철갑을 두른 듯 보이지만
그것은 부드럽고 달달한 노랑 속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배추전이 생각납니다.
노랑 속에 얇은 부침 옷을 입힙니다.
그리고 살짝살짝 부쳐줍니다.
그리고 조선간장을 만들어 보세요.
여러 가지 양념에 청양고추 송송송
준비는 끝났습니다.
쌀쌀한 날을 달고 따뜻하게 감싸줄 배추전….
오늘은 배추전처럼 달달하게
그리고 마음 따뜻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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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7.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어머니가 어린이집 선생님께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이가 좀 이상하다면서 걱정스러운 마음에 전화하신 것입니다. 아이가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말을 듣습니다. 덜컹 겁이 났습니다. 눈을 마주치지 않는 모습은 자폐 아동의 특징 중 하나라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이후 아이를 유심히 관찰하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그러했습니다. 말할 때도,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도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의사소통에 전혀 어려움이 없는 모습을 보면 자폐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며칠 뒤, 그 이유를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편으로부터 아이와 대화할 때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는 말을 듣게 된 것입니다. 솔직히 양육에 너무 힘들었습니다. 아이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정리하느라 잠시도 쉴 수 없었고, 여기에 두 살 터울의 둘째까지 생기면서 아이와 눈을 마주치며 소통할 여유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남편의 말처럼 눈을 마주치지 않는 자기 모습을 깨닫고 아무리 바빠도 아이와 시선을 맞추고 대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눈 맞춤이 자연스러워진 아이를 볼 수 있었습니다.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눈맞춤이 불가능해집니다. 이것도 봐야 하고, 저것도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 상대도 내 눈과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진정한 소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스마트폰을 보느라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러면서 상대에게 자기를 몰라 준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항상 유심히 바라보시고, 우리의 눈을 마주치십니다. 그 점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사람을 보고 계신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유심히 바라보시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런 시선이 이 한 번일까요? 아닙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유심히 그리고 눈을 마주치시면서 보십니다. 그래서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의 모습이 되길 원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당시의 부자들처럼 보여주기 위한 모습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주님과 눈을 제대로 맞출 수 있을까요? 주님께 받은 것을 주님께 모두 드린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주님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서로 마주 볼 수 있게 됩니다.
과연 주님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서로 눈맞춤 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그대에게 죄를 지은 사람이 있거든, 그가 누구이든 그것을 잊어버리고 용서하라. 그때 그대는 용서한다는 행복을 알 것이다(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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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7.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나는 누구인가?
-자기인식의 겸손과 지혜, 자유와 행복-
참 기쁨과 참 행복은 참 나의 발견에, 자기인식의 겸손과 지혜, 자유와 행복에 있습니다. 참 중요한 것이 참 나를 아는 것이요 참으로 자기를 아는 겸손한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좋은 시는 늘 읽어도 새롭습니다. 어제 온종일 저를 기쁘고 행복하게 한 자작시를 다시 나누고 싶습니다. 참나를 발견케 한 “詩가 찾아왔네!”라는 시입니다.
-“詩가 찾아 왔네!
나를
은총처럼 사랑하는 詩가
가슴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詩가
나 외로울 때, 그리울 때, 기다릴 때 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참 반가운 손님, 참 기쁜 선물, 참 좋은 연인, 참 좋은 친구인 詩
늘 詩를 생각하며 詩와 함께 살아왔고 살고있고 살것이라네
詩덕분에 하루하루 날마다 늘 평생 한결같이 살아왔네
詩없이 이 삭막한 광야여정 무슨 맛, 무슨 기쁨, 무슨 재미로 살 것인가
눈이 열리니 온통 詩인 천국이라네
세상에 나보다 자유롭고 평화롭고 부요하고 행복한 이 없을 것이네
나 언제나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가는
행복한 하늘 나라의 삶이라네”
2023.11.26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주님께 바치는 獻詩-
주님을 사랑하듯 시를, 삶을 사랑해 왔기에 시는 주님으로 바꿔 읽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주님께 선물 받은 시이자 동시에 주님께 바친 헌시가 한동안 저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그러니 참으로 중요한 근본적 질문이 “나는 누구인가?”이며, 끊임없이 물으며 정체성을 또렷이 하는 자기인식이 참겸손이자 참지혜요 참기쁨이자 참행복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자기를 알아갈수록 자유롭고 평화롭고 부요하고 행복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가장 중요한 근본적 질문입니다. 이렇게 날마다 묻는 자가 수도자라 합니다. 어찌 수도자뿐이겠습니까?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고자 하는 구도자들에게는 공통적 물음입니다. 이래야 무지와 허무에서 벗어나 참나의 행복을 살 수 있습니다. 평생을 살아도 자기를 모른 채 무지와 허무속에서의 삶이라면 너무나 허망하고 억울한, 헛된 삶일 수 있습니다. 참 자기를 발견했을 때의 참기쁨, 참행복이지, 연목구어(緣木求魚) 다른 어디서도 이런 참기쁨, 참행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하느님 없이는 아무리 물어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내가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 탐구와 나의 탐구는 함께 갑니다. 이래서 회개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이 중요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알아갈수록 “하느님의 자녀”로서 참나를 알아가게 되며 이때 저절로 따라오는 겸손과 지혜입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의 말씀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오늘 복음의 가난한 과부와 제1독서 다니엘서의 네 청년이 그 모범입니다. 가난한 과부인 듯 하나 역설적으로 진짜 부자입니다. 참으로 자유롭고 부요하고 겸손하고 지혜로운 네 청년입니다. 가진 소유가 많아 부자가 아니라 필요한 것이 적을수록 부자입니다. 하느님만으로 행복한 자가 진정 부자이니 가난한 과부가 그러했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감동하신 주님이십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하는 모습에서 분명 모든 것을 바친 자기를 발견했을 주님이십니다. 하느님만으로 충분하기에, 만족하기에, 행복하기에 이렇게 온전히 소유를 비울 수 있었던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요즘 초겨울로 접어들어 나뭇잎들을 다 떠난 겨울나무가지들을 통해 투명히 드러나는 불암산이, 푸른 하늘이 참 좋습니다.
가난한 겨울나무가 역설적으로 부요한 겨울나무임을 깨닫게 되며 그대로 이런 겨울나무를 닮은 가난한 과부입니다. 얼마전 나눴던 25년전 “누가 겨울 나무들 가난하다 하는가”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누가
겨울 나무들 가난하다 하는가
나무마다
푸른 하늘 가득하고
가지마다
빛나는 별 열매들 가득 달린 나무들인데
누가
겨울 나무들 가난하다 하는가”-1998.11.21.
그대로 가난하나 역설적으로 하늘로 가득한 부요한 겨울나무를 닮은, 하느님만으로 충만한 가난한 과부가 진짜 부자임을 깨닫습니다. 겨울 나무처럼 텅빈 하무가 아닌 텅빈 충만의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가진 것이 많아서 부자가 아니라 필요한 것이 적은 자가 부자이며 참보물 하느님 하나만으로 행복한 가난한 과부가 진정 자유로운 부자입니다. 배는 밥으로 채울수 있어도 무한한 가슴은 하느님 사랑만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아무리 소유로 채워도 영혼의 허기(虛飢)는 여전하니 하느님 사랑이 결핍됐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바빌론 유배중인 이스라엘의 네 청년 역시 행복의 비결은 하느님이요,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 유지가 참 지혜, 참 자유, 참 행복의 비결임을 봅니다. 정체성의 훼손이야 말로 불행의 첩경입니다. 정체성 상실은 그대로 참나의 상실로 직결됩니다. 정체성은 생명이기에 하느님 향한 사랑의 정체성을 죽음으로 지켜낸 분들이 순교성인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신뢰하여 목숨을 걸고 정체성을 지켜낸 다니엘, 하난야, 미사엘, 아자르야 네 젊은이들을 축복으로 가득 채워 주십니다.
‘이 네 젊은이에게 하느님께서는 이해력을 주시고 모든 문학과 지혜에 능통하게 해 주셨다. 다니엘은 모든 환시와 꿈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다.’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할수록 하느님을 닮아 지혜롭고 겸손하고 부요하고 행복한 참나의 발견이요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하느님만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겸손하고 지혜로운 참부자이자 참나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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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7.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를 드립니다>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4)
사랑하는
나의 님께
무얼 드리나
곰곰이 헤아리다
아무리 보아도
볼품없고
아무리 생각해도
보잘것없어
부끄럽기
그지없어도
달리
가진 것이 없고
딱히
그만한 것이 없으니
살며시 고이
나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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